1. 생애 초반과 교육
아베 간은 1894년 4월 29일 야마구치현 오쓰군 헤키촌(현 나가토시)에서 아베 효스케와 그의 아내 타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베 가문은 헤키 지역에서 유명한 사케와 간장 양조업을 하는 지주 가문이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나누시 (촌장) 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효스케는 오쓰 지역의 명문인 무쿠노키 가문 출신으로, 결혼을 통해 아베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왔다. 어머니 타메는 아베 가문의 중흥조로 불리는 아베 신타로의 여동생이었다. 간은 4세가 되기 전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고, 이후 그의 고모인 요시에게 양육되었다.
그는 야마구치현립 하기 중학교와 가나자와의 옛 구제고등학교인 제4고등학교를 거쳐, 1921년(다이쇼 10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며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젊은 시절 그는 척추카리에스와 폐결핵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못했다.
2. 초기 정치 활동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아베 간은 도쿄에서 자전거 제조 회사인 산페이 상회를 경영했으나, 1923년(다이쇼 12년) 간토 대지진으로 공장이 파괴되면서 회사는 도산했다. 이후 도쿄에서 혼도 시즈코와 결혼하여 장남 아베 신타로를 낳았으나, 곧 이혼하고 그 후로는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고향인 야마구치현으로 돌아와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28년(쇼와 3년) 제1회 보통 선거로 치러진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입헌정우회 공천을 받아 야마구치현 제1선거구에서 '금권 부패 타파'를 외치며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낙선 후에는 학생 시절 앓았던 결핵이 재발하여 척추카리에스까지 앓게 되어 요양 생활을 했지만, 1933년(쇼와 8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요청으로 헤키촌 촌장에 취임했다. 1935년(쇼와 10년)부터는 야마구치현 의원을 겸임했다. 1937년(쇼와 12년)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엄정 중립'을 표방하며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그는 지역에서 요시다 쇼인의 이름을 따 '신 쇼인' 또는 '쇼와 쇼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3. 중의원 활동
아베 간은 중의원 의원으로서 1937년부터 1946년까지 두 차례 당선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그는 특히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와 제2차 세계 대전 종식을 위한 노력을 통해 주목받았다. 그는 재직 기간 동안 상공성 위원과 외무성 위원 등을 역임하며 국정에 참여했다.
3.1. 군국주의 및 제2차 세계 대전 반대 활동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아베 간은 일관되게 비전(非戰) 평화주의 입장을 견지했다. 1938년(쇼와 13년)의 제1차 고노에 성명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당시의 군국주의적 흐름에 정면으로 맞섰다.
1942년(쇼와 17년) 제21회 총선거(일명 익찬선거)가 치러질 때, 그는 도조 히데키 내각의 군벌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당시 대정익찬회는 후보자 등록 제도를 통해 반전 후보들의 출마를 막으려 했고, 아베 간 역시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못해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하위로 2기 연속 당선에 성공하며 대중적 지지를 증명했다.
의원 재직 중 아베 간은 전쟁 종식과 평화를 주장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훗날 총리대신이 되는 미키 다케오와 함께 국정연구회를 창설하여 국정 전반에 대한 연구와 비판을 주도했다. 또한 시오노 스에히코를 중심으로 한 목요회에 참여하여 도조 내각의 퇴진, 전쟁 반대, 그리고 전쟁 종결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전시 체제 하에서 거의 모든 권력이 제국의회에서 군부로 넘어간 상황에서, 용기와 소신을 가지고 민주주의적 가치와 평화를 옹호하려는 중요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4. 개인 생활과 인물 평가
아베 간은 젊은 시절 척추카리에스와 폐결핵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성격과 대중적 평판은 '청렴결백한 인격자'로 요약된다. 그는 대정당의 금권 부패를 맹렬히 비판하며 투명하고 정직한 정치를 추구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 때문에 고향에서는 '오쓰 성인'(大津聖人), '이마쇼인'(今松陰, 이 시대의 요시다 쇼인)이라 불리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실제로 그의 장남 아베 신타로와 기시 노부스케의 딸 사이에 혼담이 오갔을 때, 기시 노부스케는 "오쓰 성인의 아들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농림대신을 지낸 아카기 무네노리와 중의원 당선 동기였으며, 공사적으로 깊은 친교를 이어갔다. 또한 제66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미키 다케오와는 평생의 친우였다. 한때 위문차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방문한 적도 있다. 사업가로서 그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쓰노시마에 있던 옛 쓰노시마 초등학교(2020년 폐교)의 구 교사 건설에 목재상으로 참여했으며, 해당 학교의 교장실에는 그의 사진이 목재상으로서 전시되기도 했다.
5. 사망
아베 간은 1946년 1월 30일, 전후 첫 총선거(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출마를 준비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일본의 정치 상황과 전후 재건 시기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1946년 4월에 치러질 선거 직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사망은 일본의 정치계에 큰 손실로 여겨졌다.
6. 유산과 평가
아베 간은 격동의 쇼와 시대 초기에 일본의 군국주의에 맞서 비전 평화주의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대정익찬회의 추천 없이도 의회에 재선될 정도로 대중적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그의 청렴한 인격과 반전 신념이 당시 국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음을 시사한다. 도조 히데키 내각에 대한 비판과 전쟁 종결 주장은 전시 상황에서 극히 위험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의회 내에서 반전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훗날 미키 다케오와 같은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일본의 민주주의적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고향에서 '오쓰 성인', '이마쇼인'으로 불리며 존경받았고, 이는 그가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시대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베 간의 정치적 유산은 그의 아들 아베 신타로와 손자 아베 신조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치의 한 축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그의 반전 평화주의 노선은 훗날 그의 손자 아베 신조의 정치 노선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역사적 재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의 삶은 일본의 어두운 시기 속에서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한 정치인의 고귀한 이상을 보여준다.
7. 가족 관계
아베 간은 일본의 주요 정치 가문인 사토-기시-아베 가문의 일원이다. 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조부: 아베 에이닌
- 아버지: 아베 효스케 (1895년 사망)
- 어머니: 아베 타메 (1898년 사망)
- 백부 (어머니의 오빠): 아베 신타로 (정치인)
- 고모: 아베 요시 (1947년 7월 사망, 아베 간을 양육)
- 배우자: 혼도 시즈코 (육군 군의감 혼도 쓰네지로의 장녀이자 육군 대장 오시마 요시마사의 손녀. 결혼 후 이혼)
- 장남: 아베 신타로 (신문기자, 정치인, 전 외무대신)
- 손자: 아베 히로노부 (AB 커뮤니케이션즈 대표이사)
- 증손자: 아베 히로토 (아베 히로노부의 장남, 미쓰비시 상사 2017년 입사)
- 손자: 아베 신조 (정치인, 제90대, 96대, 97대, 98대 내각총리대신)
- 손자: 기시 노부오 (정치인, 기시 가문으로 양자 입적, 전 방위대신)
- 증손자: 기시 노부치요 (기시 노부오의 장남, 후지 TV 보도국 기자 출신, 국무대신 비서관 역임)
- 손자: 아베 히로노부 (AB 커뮤니케이션즈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