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생애는 일본의 근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묘호인의 문주로 예정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군인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일본 해군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1.1. 출생과 가계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1862년 2월 11일(분큐 2년 음력 1월 13일), 교토에서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가신(家臣) 모리 노리코(森則子모리 노리코일본어) 사이에서 넷째 왕자이자 여덟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사와노미야(稠宮사와노미야일본어)였다.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황실 계승권이 있는 신노케 중 하나였다. 그의 이복형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다.
1.2. 교육과 초기 활동
친왕이 태어났을 당시 일본은 아직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나이에 불교 승려가 되어 교토의 묘호인이라는 몬제키 사찰의 문주를 계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여러 제도가 변화하면서 몬제키 제도가 폐지되었고, 1871년(메이지 4년) 친왕의 묘호인 계승 내정은 취소되었다. 이후 그는 메이지 천황의 명에 따라 부모와 함께 도쿄로 거처를 옮겼다.
1874년(메이지 7년) 7월 8일, 그는 메이지 천황의 명을 받아 해군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같은 달 13일 해군병학료 예과에 입학했다. 1876년(메이지 9년)에는 마에다 야스코(前田慰子마에다 야스코일본어)와 약혼했다. 1877년(메이지 10년)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쓰마 반란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가고시마로 파견되어 관찰 임무를 수행했다.
2. 해군 및 외교 활동
다케히토 친왕은 해군 장교로서의 역량과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하여 일본의 근대화와 외교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해외 유학과 주요 임무들은 일본의 대외 관계 발전에 기여했다.
2.1. 해외 유학과 초기 지휘

1878년(메이지 11년) 4월, 40대 중반의 이복형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에게 아들이 없자, 다루히토 친왕은 메이지 천황에게 다케히토 친왕을 사실상의 양자로 삼아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당시 구 황실전범 제정 전이었기 때문에, 황족의 계승 문제는 천황의 재량으로 결정되었고, 같은 해 5월 18일 윤허가 내려졌다. 이를 통해 8월 26일 다케히토 친왕은 메이지 천황의 양자(猶子)가 되었고, 친왕 선하를 받아 '다케히토'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879년(메이지 12년), 다케히토 친왕은 태정관의 명령으로 약 1년간 영국 해군 극동함대 기함 'HMS 아이언 듀크'(HMS Iron DukeHMS 아이언 듀크영어)에 승선하여 훈련을 받았다. 그는 영국 해협 함대에서 복무한 후 해군 소위로 일본에 귀국했다. 1880년(메이지 13년)에는 소위로 임명된 직후인 12월 1일 영국 유학을 명받았고, 12월 11일 마에다 야스코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인 1881년(메이지 14년) 1월, 다케히토 친왕은 야스코를 일본에 남겨두고 영국 그리니치 해군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3년 반 후인 1883년(메이지 16년) 6월에 귀국했다. 이는 일본 황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 유학이었다.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친왕 부부가 함께 유럽과 미주를 아우르는 대규모 순방에 나섰다. 이 순방 비용은 야스코 친왕비의 친정인 마에다 가문에서 전액 부담했다.
친왕의 첫 해군 지휘는 1890년 초 코르벳함 '가쓰라기'(葛城가쓰라기일본어)함장이었고, 그해 말에는 순양함 '다카오'(高尾다카오일본어)의 함장을 맡았다.
2.2. 주요 임무와 승진

해군 대좌이자 순양함 '다카오' 함장으로 재직 중이던 1891년(메이지 24년), 다케히토 친왕은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황태자(후의 니콜라이 2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해외 유학 경험을 인정받아 메이지 천황의 명대(名代)로서 접대역을 담당했다. 니콜라이 황태자 방문 일정 중 시가현오쓰시에서 오쓰 사건이 발생하여 외국 왕실 인물에게 일본 관헌이 위해를 가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으나, 다케히토 친왕의 요청으로 메이지 천황이 직접 니콜라이 황태자를 문병하는 등 일본 측의 성실한 대응으로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를 피할 수 있었다.
1892년에는 순양함 '지요다'(千代田지요다일본어)의 함장으로 부임했다. 청일 전쟁이 발발한 1894년(메이지 27년) 당시 그는 해군 대좌였으며, 개전 초기에는 요코스카 해병단장으로, 이후에는 대본영에 부속되는 등 주로 육상 근무를 했다. 황해 해전 이후인 1894년 12월 8일, 그는 연합 함대 기함 '마쓰시마'(松島마쓰시마일본어)의 함장으로 함대 근무를 시작했으나, 이듬해 1월 이복형 다루히토 친왕의 사망과 장례식 때문에 일시 귀국해야 했다. 그 직후 일어난 웨이하이웨이 전투는 다케히토 친왕이 함대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종결되었고, 결국 그는 실전을 경험하지 못했다.
1896년 11월 11일, 그는 해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그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에 메이지 천황의 대리인으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영국을 방문했다. 1899년 9월 26일에는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02년 11월, 영국의 에드워드 7세 국왕은 다케히토 친왕에게 바스 훈장의 명예 바스 대십자 훈장(GCB)을 수여했다.
1905년 6월 28일, 그는 해군 대장으로 승진했으며, 메이지 천황은 그에게 러일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하여 금치훈장 공3급을 수여했다. 일본 소식통에 따르면 친왕은 러일 전쟁에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공로가 인정되어 훈장을 받았다. 그는 1905년에 다시 유럽을 방문하여 독일 황태자 빌헬름(Wilhelm빌헬름독일어)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부인 체칠리에의 결혼식에 천황의 대리인으로 참석했다. 귀국하는 길에 다시 영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3. 만년과 사망
다케히토 친왕은 해군에서의 활발한 활동 외에도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당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만년은 건강 문제와 가계 승계 문제로 점철되었으며, 결국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3.1. 아리스가와노미야 당주로서의 역할

다케히토 친왕은 1895년 1월 15일 이복형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사망하자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제10대 당주를 계승했다. 그는 다루히토 친왕과 마찬가지로 메이지 천황의 신임이 두터웠다.
1899년부터 1903년까지 그는 황태자 가요히토 친왕(후의 다이쇼 천황)의 교육 담당관인 동궁보도(東宮輔導도구 후쿠도일본어)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이후 그는 해군 현역에 적을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군무에는 거의 종사하지 않았다. 러일 전쟁 개전 당시에도 그는 해군 중장 신분이었지만, 일시적으로 대본영에 소속되었을 뿐 전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쓰시마 해전이 벌어질 무렵에는 독일 황태자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유럽에 체류 중이었다.
3.2. 건강 문제와 가계 승계
다케히토 친왕은 어려서부터 병약한 체질이었고, 해군 재직 중에도 잦은 병가로 요양을 취하곤 했다. 그는 1909년에 고베시에 별장을 짓고 사실상 반 은퇴 생활에 들어갔다.
1908년 3월 2일, 그의 아들 사네히토 왕이 충수염으로 발병하자, 친왕과 딸 미에코 왕녀는 병문안을 갔다. 수술 후 경과는 양호하여 친왕 부녀는 3월 20일 귀경했으나, 4월 2일 사네히토 왕의 병세가 갑작스럽게 악화되어 장폐색증이 발생했다. 친왕은 다시 히로시마현에타지마시로 급히 돌아갔지만, 다음 날인 4월 7일 오후 4시 10분, 사네히토 왕은 결국 사망했다.
남성 후계자가 없던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황실전범 제42조의 양자 금지 규정에 따라 단절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다케히토 친왕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아들을 잃은 슬픔과 함께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선대 계통을 생각하여 "황자손이 들어오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토는 이에 대해 "귀경 후 법규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후속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같은 해 11월 8일, 그의 딸 미에코 왕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작의 장남 도쿠가와 요시히사에게 하가했다.
친왕은 사네히토 왕의 사망 이후 폐결핵을 앓았다. 1909년 9월 18일, 그는 효고현고베시다루미구의 아리스가와노미야 마이코 별장에서 요양을 시작했다.
1910년의 '황족 신위령' 제정 당시, 친왕은 병으로 황족회의에 불참했으나, 메이지 천황의 지시로 그의 의견이 직접 청취되었다. 친왕의 여러 의문점이 제기되어 관계자들이 마이코 별장으로 찾아가 설명을 했고, 친왕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천황에게 의견이 전달된 것에 납득하여 이 법령은 원안대로 3월 3일 재가, 공포되었다.
1911년 4월 4일, 황태자 가요히토 친왕이 마이코 별장을 방문하여 다케히토 친왕을 문병했다. 이듬해인 1912년 4월 12일부터 18일까지는 딸 미에코와 사위 요시히사 부부가 마이코 별장을 방문했는데, 이때 손녀 기쿠코(미에코와 요시히사 사이의 장녀는 요절했으므로 당시 유일한 손녀였다)를 동반했다. 다케히토 친왕은 기쿠코를 보며 미소를 보였고, 부부는 친왕의 바람에 따라 기쿠코를 별장에 남겨두고 귀경했다.
같은 해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친왕은 건강상의 이유로 도쿄로 돌아갈 수 없어 여러 의식에 대리인을 파견했다. 또한 메이지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법화경 푸먼품과 수량품을 직접 필사했다.
3.3. 사망과 국장

1913년(다이쇼 2년) 3월 3일 오전 1시, 다케히토 친왕은 소량의 각혈과 심장 두근거림 증상을 보여 시의의 진찰을 받았으나, 증세가 위중했다. 이에 도쿄와 교토에서 가족들과 의료진이 마이코 별장으로 모여들었다. 3월 8일에 잠시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러나 6월 10일 병이 재발하여 회복되지 않자, 천황의 지시로 미우라 킨노스케 등이 파견되어 치료에 전념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궁내대신이 파견되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후계에 관한 천황의 뜻을 전달했고, 친왕은 아들 사네히토 왕을 잃은 이후 이 문제로 계속 걱정해왔기에 이 소식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사망하기 며칠 전까지도 그는 손녀 기쿠코의 미소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1913년 7월 5일 오후 8시 20분, 다케히토 친왕은 마이코 별장에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이것이 그의 실제 사망일이다.)
7월 6일, 다이쇼 천황의 셋째 황자 노부히토 친왕에게 '다카마쓰노미야'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이는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옛 이름이었다. 같은 날, 한때 귀경했던 다루히토 친왕의 비 도모코(熾仁親王妃董子도모코일본어)도 다시 마이코 별장을 방문했다.
7월 10일 오전 5시 10분, 친왕의 시신은 마이코 별장을 출발하여 같은 날 오후 7시 40분, 야스코 친왕비와 도모코 대비와 함께 도쿄 고지마치구에 있던 아리스가와노미야 저택에 도착했다. 다이쇼 천황은 사자를 보내 조문했으며, 같은 날 오후 8시 20분, 친왕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이것이 그의 공식 사망일이다.) 또한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는 7월 7일 원수 칭호가 추서되고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원수 칭호는 실제 사망일(7월 5일)과 공식 사망일(7월 10일) 사이에 추서되었기에 사후 추서로 간주되지 않았으나, 국화대수장은 사후 추서로 기록되었다.
장례 절차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7월 13일 오후 5시에는 염관의 의(斂棺の儀, 입관식), 7월 15일 오전 10시에는 사뢰의 의(賜誄の儀, 조사 하사식)가 거행되었다. 7월 17일에는 오전 4시에 관전제(棺前祭)가 있었고, 오전 6시에 아리스가와노미야 저택을 출관하여 오전 8시 10분에 도시마가오카 묘지에 도착했다. 오전 8시 50분에 참렬자가 모였으며, 오전 9시 50분에 장례의 의(葬場の儀)가 종료되었다.
이후 7월 17일 염장의 의(斂葬の儀, 안장식), 7월 18일 권사제와 묘소제, 7월 19일 십일제(十日祭)가 이어졌고, 10일마다 제사가 거행되었다. 8월 28일 오십일제, 8월 29일 어령대봉환의 의, 그리고 10월 16일 백일제를 끝으로 국장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린 손녀 기쿠코가 관 속에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 보채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1915년(다이쇼 4년) 11월 10일,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이 교토 어소에서 거행되었다. 천황은 다케히토 친왕의 보도(補導) 공적을 회상하며, 12월 6일 시종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1925년(다이쇼 14년) 결혼 25주년 축전 때도 시종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1917년(다이쇼 6년)에는 다케히토 친왕의 동상 건설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도고 헤이하치로 원수, 이노우에 요시카 원수,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대신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해군 내는 물론 일반 대중으로부터도 자금을 모았다. 동상 부지는 여러 후보지 중 쓰키지의 해군 참고관 내 부지로 선정되었다. 1921년(다이쇼 10년) 10월 24일 동상이 준공되었는데, 좌대 포함 20 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제막식에는 야스코 친왕비의 대리인으로 외손자 도쿠가와 요시미쓰, 해군병학교 재학 중이던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과 야마시나노미야 다케히토 왕, 쿠니노미야 치카나가 비 등 황족들과 하라 다카시 총리, 각 대신, 관민 인사들이 참석했다.
4. 가족
다케히토 친왕의 가족사는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의 아들 사망으로 인해 가문의 직계는 단절되었으나, 후에 천황의 뜻으로 가계가 부활하는 배경이 되었다.
4.1. 결혼과 자녀

다케히토 친왕은 1880년 12월 11일, 가가 번의 마지막 번주였던 마에다 요시야스의 넷째 딸 마에다 야스코(前田慰子마에다 야스코일본어, 1864년 3월 15일 ~ 1923년 6월 30일)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 세키코 여왕(績子女王세키코 조오일본어): 1885년 10월 17일 ~ 1886년 9월 30일 (요절)
- 사네히토 왕(栽仁王사네히토 오일본어): 1887년 9월 22일 ~ 1908년 4월 7일 (요절)
- 미에코 여왕(實枝子女王미에코 조오일본어): 1891년 2월 14일 ~ 1933년 4월 25일; 도쿠가와 요시히사와 결혼. 그녀의 딸이 다카마쓰노미야 비 기쿠코이다.
4.2. 가계의 단절과 부활
친왕은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아들 사네히토는 1908년 해군병학교 재학 중 충수염으로 사망). 이로 인해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친왕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가요히토 친왕(후의 다이쇼 천황)은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전통을 기려 가문을 부활시켰다. 이 가문은 본래 이름인 다카마쓰노미야로 돌아가, 다이쇼 천황의 셋째 아들인 노부히토 친왕에게 계승되었다. 노부히토 친왕은 후에 다케히토 친왕의 손녀인 도쿠가와 기쿠코와 결혼했다.
5. 영예와 포상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그의 생전과 사후에 걸쳐 다양한 영예와 포상을 받았다. 이는 그의 공로와 황족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준다.
- 1875년(메이지 8년) 12월 31일 - 훈일등 욱일대수장
- 1886년(메이지 19년) 12월 29일 - 대훈위 국화대수장
- 1889년(메이지 22년) 11월 29일 -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 1895년(메이지 28년) 11월 20일 - 금치훈장 공4급
- 1902년 11월 -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바스 훈장의 명예 대십자 훈장(GCB) 수여
- 1906년(메이지 39년) 4월 1일 - 금치훈장 공3급 및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
- 1909년(메이지 42년) 4월 18일 - 황태자 도한 기념장
- 1913년(다이쇼 2년) 7월 7일 - 원수 칭호 및 대훈위 국화장경식
6. 기념물 및 관련 단체
다케히토 친왕을 기리기 위한 여러 기념 장소와 그가 관여했던 단체들은 그의 업적과 영향력을 보여준다.
6.1. 기념 장소

- 아리스가와노미야 기념공원: 도쿄도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에 위치한 그의 도쿄 저택 터에 조성된 공원으로, 넓은 정원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
- 가나가와 현립 근대미술관 하야마관: 가나가와현미우라군하야마정에 위치한 그의 해변 여름 별장 터이다.
- 천경각(天鏡閣덴쿄카쿠일본어): 후쿠시마현이나와시로정에 있는 그의 여름 별장으로, 친왕이 직접 설계했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 별장 부지에는 과거 도쿄 쓰키지의 해군참고관 앞에 세워졌던 다케히토 친왕의 대형 청동상이 1984년에 옮겨져 있다.
- 시사이드 호텔 마이코 비라 고베: 효고현고베시다루미구에 위치한 그의 사망 장소인 별장 터에 세워진 호텔이다.
- 야보 텐만구: 도쿄도고쿠분지시에 위치한다. 1908년 8월 1일, 다케히토 친왕의 선도로 일본 최초의 드라이브 투어인 '원승회'(遠乗会엔조카이일본어)가 이곳을 목적지로 개최되었다. 매화나무 숲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전하 대림 기념"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다.
- 도쿠요 기념비: 홋카이도오쿠시리정에 있는 친왕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1931년 건립되었다. 1880년 아오나에 곶에서 영국 군함이 좌초했을 때, 당시 승선해 있던 다케히토 친왕의 유덕과 국경을 초월한 구조 활동의 미덕을 찬양한다.
- 도카이지 오야마 묘지: 시나가와구에 있는 그의 생모 모리 노리코의 묘소이다.
6.2. 관련 단체
- 대일본제국 수난구제회: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 일본 해원익제회: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 제국 해사협회: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 수교사: 총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