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배경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의 유년기와 교육, 그리고 포르투갈 유학 시절의 정치 활동은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1.1. 유년기와 교육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는 1922년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의 앙골라 벵구주 이콜루 이 벵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학교 교사이자 감리교 신자였으며, 아버지 또한 아고스티뉴 네투라는 이름의 감리교 목사였다. 그는 수도 루안다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식민지 보건 서비스에서 일하다가 대학교에 진학했다.
1.2. 포르투갈 유학 및 초기 정치 활동
네투는 포르투갈로 건너가 코임브라 대학교와 리스본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학업과 동시에 비밀리에 혁명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당시 포르투갈 총리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이끌던 이스타두 노부 정권의 비밀경찰인 PIDE에 의해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51년에는 분리주의 활동으로 3개월간 구금되었으며, 1952년에는 포르투갈 민주 청년 연합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다. 1955년에도 또다시 체포되어 1957년까지 구금되었다. 그는 학업을 마쳤고, 졸업하던 해인 1958년에 트라스우스몬트스 출신의 23세 포르투갈 여성 마리아 에우제니아 다 실바와 결혼했다.
1.3. 독립운동 합류 및 MPLA 지도자
1959년 의사가 되어 앙골라로 귀국했으나, 1960년 6월 8일 식민지 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그의 체포에 항의하며 환자들과 지지자들이 벵구에서 카테테까지 행진했으나, 포르투갈 군인들의 발포로 3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이는 이콜루 이 벵구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앙골라 식민 당국은 네투를 처음에는 카보베르데로 추방했고, 그 후 다시 리스본의 감옥으로 보냈다. 살라자르 행정부에 대한 네투의 석방을 촉구하는 국제적인 항의가 있은 후, 네투는 감옥에서 풀려나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그는 가택 연금을 탈출하여 처음에는 모로코로, 그 다음에는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망명했다.
1956년 12월, 앙골라 공산당(PCA페세아포르투갈어)과 앙골라 아프리카인 통일투쟁당(PLUAA피엘유에이에이포르투갈어)이 통합하여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이 창설되었고, 이때 PCA 의장이었던 비리아투 다 크루스가 사무총장으로, 네투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망명 후에도 그는 MPLA의 지도자로서 식민 지배에 맞선 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2. 독립 전쟁 및 대통령 재임
네투는 앙골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끌었고, 앙골라가 독립한 후에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초기 국가 건설 과정을 주도했다.
2.1. 앙골라 독립 전쟁
네투는 1961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진 포르투갈 식민 통치에 맞선 앙골라 독립 전쟁에서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을 이끌었다. 이 전쟁은 앙골라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2. 국제 관계 및 지지 확보


앙골라 독립운동을 위한 국제적 지원 확보는 네투의 주요 외교 활동 중 하나였다. 1962년, 그는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존 F. 케네디 행정부에 포르투갈에 대항하는 전쟁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당시 식민지 앙골라의 석유 이권을 가지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반공적인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의 홀덴 로베르토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에 네투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후 네투는 1965년에 체 게바라를 만나 쿠바로부터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차례 쿠바의 하바나를 방문했으며, 피델 카스트로와 유사한 이념적 견해를 공유하며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1973년 2월, 네투와 MPLA는 2월 12일부터 16일까지 4일간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과 아프리카의 정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2월 17일에는 불가리아를 방문하여 루시우 라라, 루스 네투 및 기타 당 관계자들과 함께 불가리아 당국의 지원을 모색하고, 불가리아에 유학 중인 MPLA 학생들(이후 MPLA 사무총장이 되는 디노 마트로스 포함)을 만났다. MPLA 대표단은 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여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네투는 1973년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으며, 노르웨이 오슬로와 제네바를 방문했다. 같은 해 7월 15일과 16일에는 티토와 차우셰스쿠가 유고슬라비아에서 앙골라 상황을 논의했고, 네투는 7월 17일부터 19일까지 불가리아 공산당 전원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2.3. 앙골라 인민공화국 수립
1974년 4월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발생하여 살라자르의 후임자인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실각하면서, 앙골라의 권력을 놓고 세 개의 주요 정치 파벌(MPLA, FNLA, UNITA)이 경쟁하게 되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는 포르투갈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달성했으며, MPLA가 다른 반식민 운동 세력들을 제치고 루안다를 장악한 후 네투는 앙골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일당제 국가를 수립하고 소련 및 기타 동구권 국가들, 특히 쿠바와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쿠바는 FNLA, UNITA,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MPLA에게 상당한 지원을 제공했다.
2.4. 대통령 재임 기간 활동
대통령으로서 네투는 MPLA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이 결과, 그는 1977년 앙골라 공산주의자 조직(Organização dos Comunistas de Angola오르가니자상 두스 코무니스타스 드 앙골라포르투갈어)이 주도한 쿠데타 시도인 '프락시오니즘'(Fractionism)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후 2년에 걸쳐 니투 알베스의 지지자(또는 혐의를 받은 자들) 수만 명이 처형되었지만, 아고스티뉴 네투는 니투 알베스의 사형 집행만을 재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투는 실종자들의 친척들과 서신 교환을 한 후, 앙골라 정보보안국(DISA디사포르투갈어)이 저지른 "과잉 진압"을 이유로 DISA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77년 12월 첫 회의에서 MPLA는 공식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채택하며 당명을 MPLA-PT(MPLA Partido do Trabalho엠피엘에이 파르티두 두 트라발류포르투갈어)로 변경했다.
3. 문학 활동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는 앙골라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앙골라 문학의 저명한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시 작품은 주로 1946년에서 1960년 사이에 쓰였으며, 대부분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창작되었다.
1948년 루안다에서 첫 시집을 출판하며 이름을 알렸고, 앙골라 고유 문화를 재발견하기 위한 민족문화 운동에 가담했다. 그의 시는 1958년에 마리우 드 안드라드의 포르투갈식 흑인 시선집(Antologia da Poesia Negra de Expressão Portuguesa안톨로지아 다 포에지아 네그라 드 이스프레상 포르투게자포르투갈어)을 비롯하여 포르투갈과 여러 문학 평론지에 발표되었다. 그는 생전에 세 권의 시집을 출판했는데, 대표작으로는 1974년에 출간된 신성한 희망(Sacred Hope세이크리드 호프영어, 포르투갈어판 제목은 메마른 눈(Olhos Secos올류스 세쿠스포르투갈어)이었다) 등이 있다. 그의 여러 시들은 앙골라의 국가적인 노래가 되기도 했다.
네투는 앙골라 작가 연합(Anglo Writers Union)과 리스본 아프리카 연구 센터(The Center for African Studies in Lisbon)의 첫 번째 투표 회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아시아-아프리카 작가 회의(Conference of Afro-Asian Writers)에서 수여하는 로터스 상을 수상했다.
4. 개인 생활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는 포르투갈 여성 마리아 에우제니아 다 실바와 결혼했다. 그의 아들들에 따르면, 네투 대통령은 논란이 많았던 재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녀들에게 사업이나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가 자신의 겸손한 출신 성분을 잊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네투는 1973년 7월 17일부터 19일까지 불가리아 공산당 전원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머무는 동안 불가리아 여성과 짧은 관계를 가졌으며, 이로 인해 딸 미하엘라 마리노바가 태어났다. 2013년에 실시된 DNA 감정 결과, 그녀가 네투의 딸일 확률이 95%라는 결론이 나왔다.
5. 사망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는 1979년 9월 10일 월요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는 암과 간염 수술을 받기 위해 소련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 당시 그는 57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네투는 췌장암과 만성 간염으로 오랫동안 투병해왔으며, 결국 이 질병들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는 소련의 높은 의료 수준 때문에 여러 차례 소련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의 건강 악화는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와 동료들이 정보를 숨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의 사망 이후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가 앙골라의 뒤를 이었다. 네투의 시신은 소련 측에 의해 미라화되었으나, 그의 유해를 안치할 묘당이 완성되지 않아 1992년 12월 앙골라 정부는 그의 유해를 매장하기로 결정했다.
6. 평가와 유산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는 앙골라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이자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통치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평가가 존재한다.
6.1. 긍정적 평가
네투는 앙골라를 포르투갈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혁명가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또한 저명한 시인이자 의사로서 사회와 문화에 기여했으며, 그의 시는 앙골라의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앙골라에서는 그의 생일이 영웅의 날로 지정되어 전국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6.2. 비판과 논란
네투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은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1977년 '프락시오니즘' 쿠데타 시도 진압 과정에서 수만 명의 니투 알베스 지지자들이나 혐의자들이 처형된 사건은 인명 살상 및 인권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일당제 국가를 구축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선포한 것 또한 비판적인 시각을 받기도 한다. 비록 네투가 니투 알베스의 사형을 재가했을 뿐이며, 나중에 앙골라 정보보안국의 "과잉 진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해당 기관을 해체하는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 발생한 인권 유린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그에게 귀속된다.
6.3. 추모 및 기념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를 기리기 위해 앙골라와 여러 국가에 다양한 기념물과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루안다의 공립대학교인 아고스티뉴 네투 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저명한 나이지리아 작가 치누아 아체베는 그를 기리는 '아고스티뉴 네투'라는 시를 썼다.
그가 의사로서 사랑받았던 활동 덕분에 카보베르데의 산투 안탕섬에 있는 공항은 아고스티뉴 네투 공항으로 명명되었으며, 카보베르데 수도 프라이아의 주요 병원 또한 "병원 아고스티뉴 네투(Hospital Agostinho Neto오스피탈 아고스티뉴 네투포르투갈어)"로 불린다. 그의 이름을 딴 모르나 음악도 있다.
세르비아 노비 베오그라드에는 '닥터 아고스티나 네타 거리'(Dr Agostina Neta street)가 있으며, 가나 수도 아크라의 에어포트 시티에는 '아고스티뉴 네투 로드'(Agostinho Neto Road)가 있다. 또한, 2023년 11월 10일에 개항한 루안다의 새로운 국제공항인 닥터 안토니우 아고스티뉴 네투 국제공항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4. 국제적 수상 및 명예
네투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국제적인 상과 훈장들을 받았다.
7. 같이 보기
- 앙골라의 역사
- 앙골라 독립 전쟁
- 앙골라 내전
- 아고스티뉴 네투 대학교
- 앙골라 해방인민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