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시마즈 다다히사의 생애는 그가 시마즈 씨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으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의 출생과 초기 삶에 대한 기록은 여러 학설이 얽혀 있으며, 막부 내에서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며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다.
1.1. 출생과 초기
시마즈 다다히사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지쇼 3년(1179년) 12월 31일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야마다 세이에이가 쓴 『야마다 세이에이 자전』에는 분지 5년(1189년) 오슈 합전 당시 13세의 나이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에보시 친으로 하여 원복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어 안겐 3년 또는 지쇼 원년(1177년) 출생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1166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
출생지는 오사카시의 스미요시 신사 경내로 전해지며, 현재도 그곳에 그의 탄생석이 남아있다고 한다. 다다히사는 본래 고레무네 씨 출신으로, 초기에는 '고레무네노 다다히사'(惟宗忠久고레무네노 다다히사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산괴기』(1179년 2월 8일자)와 『교쿠요』(이듬해)에는 '사효에노조 다다히사'(左兵衛尉忠久사효에노조 다다히사일본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1179년생이라면 10세도 채 되지 않은 나이로 관직에 임명된 것이므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그의 손자인 시마즈 다다카게는 『신고센 와카집』에서 할아버지 다다히사가 겐비이시와 가모 축제의 제관을 지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시마즈 가문의 전승에 따르면, 다다히사의 아버지는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이며, 어머니는 '단고노 쓰보네'(丹後局단고노 쓰보네일본어) 또는 단고 나이시로 알려진 히키 요시카즈의 누이였다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다다히사는 요리토모의 사생아로서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다히사가 요리토모의 자식이라는 기록은 15세기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며, 동시대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1.2. 가마쿠라 고케닌으로서의 활동
시마즈 다다히사는 겐랴쿠 2년(1185년) 3월, 히키 요시카즈의 군세에 합류하여 헤이케 추토에 참여했다. 그 공로로 같은 해 6월 요리토모로부터 이세국의 하데노미쿠리야, 스카쇼의 지토 직에 '사효에노조 고레무네노 다다히사'라는 이름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분지 원년(1185년) 8월 17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추천으로 셋칸케 영지였던 시마즈 장원의 게시시키에 임명되면서 남큐슈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곧 그는 시마즈 장원의 소지토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시나노국 시오다 장원의 지토 직도 받았다.
분지 5년(1189년)의 오슈 합전에서는 요리토모의 휘하 고케닌으로 참전했으며, 겐큐 원년(1190년) 요리토모가 상경했을 때도 행렬을 따랐다. 겐큐 8년(1197년) 12월에는 오스미국과 사쓰마국의 슈고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휴가국 슈고직도 받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가장 넓은 영지인 시마즈 장원의 이름을 따서 '시마즈 사에몬노조'(島津左衛門尉시마즈 사에몬노조일본어)라 칭하기 시작했다. 『아즈마카가미』에 다다히사가 처음 언급된 것은 쇼지 2년(1200년) 2월 26일,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궁 참배 기사에 그가 20명의 미우라슈(어후중) 중 한 명으로 등장하면서부터이다.
1.3. 히키 요시카즈의 난과 복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겐닌 3년(1203년) 9월, 히키 요시카즈의 변이 발생하자, 시마즈 다다히사는 히키 요시카즈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오스미국, 사쓰마국, 휴가국의 슈고직을 몰수당했다. 당시 그는 다이묘지의 분쟁 해결을 위해 슈고로서 처음으로 자신의 임지인 오스미국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마쿠라에는 없었다. 그는 같은 해 10월 19일, 임무를 마치고 교토로 돌아가는 무사를 기원하며 다이묘지에 기원문을 바쳤다.
히키 요시카즈의 난 이후 다다히사는 한동안 교토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며, 겐랴쿠 3년(1213년) 2월에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학문소반이 되면서 고케닌으로서 복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 6월의 와다 합전에서는 승자의 편에 서서, 난에 가담했던 가이국 쓰루군의 후루고리 씨 소유였던 하카리 장원(신쇼)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7월에는 사쓰마국 지토직에 환복되었고, 같은 해 슈고직도 재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스미국과 휴가국 슈고직은 호조 씨의 손에 넘어간 채로, 이 두 지역의 슈고직 복권은 일본의 남북조 시대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1.4. 만년과 죽음
복권 이후의 시마즈 다다히사는 조큐 3년(1221년)의 조큐의 난 직후인 같은 해 7월, 에치젠국의 슈고로 임명되었다. 이보다 앞선 5월에는 에치젠국 아스와군의 도고 장원 지토직도 받았다. 이 무렵 그는 고레무네 성에서 후지와라 씨 성을 칭하기 시작했다.
겐닌 원년(1224년)에는 야소시마 축제의 수행 병사를 지냈고, 가로쿠 원년(1225년)에는 겐비이시에 임명되었다. 가로쿠 2년(1226년)에는 분고노카미가 되는 등 관직이 계속 올랐다.
가로쿠 3년(1227년) 6월 18일, 그는 각기병과 이질로 사망했다(『아즈마카가미』 기록). 그의 묘는 에도 시대 후기, 시마즈 씨 제25대 당주 시마즈 시게히데에 의해 가마쿠라의 니시미카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묘와 함께 건립되었으며, 요리토모의 묘에서 약 70 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2. 출신과 혈통에 대한 학설
시마즈 다다히사의 출신과 혈통에 대해서는 여러 역사적 기록과 학설이 존재한다. 이는 그의 생애와 시마즈 씨의 초기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주목받는 부분이다.
2.1. 출생과 초기

가장 널리 알려진 시마즈 가문의 전승인 『시마즈 국사』와 『시마즈 씨 정통 계도』에 따르면, 다다히사의 어머니는 셋쓰국 오사카의 스미요시 신사 경내에서 다다히사를 낳은 단고 나이시(丹後内侍단고 나이시일본어)였다고 한다. 이 단고 나이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측실이었으며, 이에 따라 다다히사는 요리토모의 사생아, 즉 '낙인'(落胤라쿠인일본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설은 그가 요리토모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아 지토에 임명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다른 학설들도 존재한다. 『요시미 가계도』에 따르면, 히키 아마의 셋째 딸이었던 단고 나이시가 교토에서 니조 천황을 모시던 중 고레무네노 히로코토(惟宗広言고레무네노 히로코토일본어)와 관계하여 다다히사를 낳았다고 한다. 이후 단고 나이시는 가마쿠라에서 아다치 모리나가에게 재가했는데, 이 설이 사실이라면 단고 나이시는 요리토모의 유모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즈마카가미』에는 단고 나이시와 다다히사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다히사의 실제 아버지는 고레무네노 히로코토였다는 설도 있지만, '쓰지'(通字쓰지일본어, 대대로 이어지는 이름의 글자) 문제 등으로 인해 최근에는 히로코토의 친아들이 아닌 양자였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경우 다다히사와 그의 동생 쓰쓰미 다다스에의 이름에 '다다'(忠다다일본어) 자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고레무네 씨 중 '다다' 자를 가진 고레무네노 다다야스(惟宗忠康고레무네노 다다야스일본어)가 친아버지였을 가능성도 제시된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다다히사가 겐닌 3년(1203년)의 히키 요시카즈의 변에 '연좌'되어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히키 씨의 인척(히키 요시카즈의 의자매의 아들)으로 여겨진다. 이로 보아 『요시미 계도』에 기록된 대로 히키 아마의 맏딸인 단고 나이시가 그의 어머니라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평가된다.
다다히사가 쇼군의 학문소반을 지내고 음양도와 관련된 행사의 지휘를 맡는 등 공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그의 출신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특히 『요시미 계도』에 따르면 단고 나이시가 '비할 데 없는 가인'(無双の歌人무소노 가인일본어)이었다고 하며, 다다히사의 손자와 증손자, 현손에 해당하는 에치젠 시마즈 씨의 시마즈 다다카게, 시마즈 다다무네, 시마즈 다다히데가 모두 유명한 가인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다다히사의 출생지인 스미요시 신사는 항해의 신으로 숭배되었지만, 당시에는 와카의 신으로도 숭배받았다. 쇼겐 2년(1208년) 스미요시 신사 와카회합에 참여했던 뇨보 산주로쿠가센 중 한 명인 기슈몬인 단고(宜秋門院丹後기슈몬인 단고일본어)가 셋쓰 겐지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기슈몬인 단고가 다다히사의 어머니라는 설도 제시되고 있다.
생년에 대해서는 『시마즈 계도』 등에서 지쇼 3년(1179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해에 이미 『산괴기』나 『교쿠요』에 '사효에노조 다다히사'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179년에는 이미 관직에 임명될 만한 성인 남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실제 생년은 지쇼 3년보다 십수 년 이상 더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3. 시마즈 씨의 기반 확립
시마즈 다다히사는 직접 남큐슈에 거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토의 공가인 고노에 가문과의 관계와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의 입지를 활용하여 시마즈 씨가 규슈 남부에 강력한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1. 시마즈 장원 지토 및 슈고 임명
시마즈 다다히사가 시마즈 장원의 지토 및 슈고로 임명된 배경에는 가마쿠라 시대 이전부터 교토의 공가를 경호하는 무사였다는 점과, 그의 친척들이 오스미국 및 휴가국의 고쿠시를 지냈다는 점이 있다. 특히 그의 본가인 고레무네 씨는 대대로 고노에 가문의 가시를 역임한 가문이었다. 다다히사는 이러한 고노에 가문을 섬기는 동시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고케닌이기도 했다. 그는 동국 무사인 히키 씨와 하타케야마 씨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예법에 능통하여 요리토모의 신임을 얻었다.
고레무네 가문이 원래 섬기던 고노에 가문은 다이라노 스에키로부터 시마즈 장원을 기증받았던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자손인 간파쿠 후지와라노 다다미치의 장남 후지와라노 모토자네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고노에 가문은 시마즈 장원의 쇼엔 영주였다.
또한, 모토자네의 아들 고노에 모토미치와 관련하여, 약혼자였던 미나모토노 요시타카가 살해당한 직후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장녀 오히메를 모토미치에게 시집보내려는 구상이 있었다. 이 구상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다히사의 관여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러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고노에 가문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가 시마즈 다다히사가 시마즈 장원의 지토직 및 슈고직을 얻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시마즈 가문은 시마즈 장원을 둘러싸고 고노에 가문과 오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3.2. 남큐슈에서의 활동과 실제 거주 여부

시마즈 다다히사가 지토가 된 후, 『야마다 세이에이 자전』과 『시마즈 국사』(에도 시대 후기 성립)에 따르면, 분지 2년(1186년)에 사쓰마국 야마토인(山門院야마토인일본어, 현재 가고시마현 이즈미시)의 기무레 성에 입성했고, 이후 휴가국 시마즈인(島津院시마즈인일본어, 현재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조시)의 호리노우치 어소(堀之内御所호리노우치 고쇼일본어)로 거처를 옮겼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산고쿠 메이쇼즈에』(에도 시대 후기 성립)에는 겐큐 7년(1196년)에 야마토인에서 시마즈인의 이와이야시 어소(祝吉御所이와이야시 고쇼일본어)로 들어갔다가 호리노우치 어소로 옮겼다는 전승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로 볼 때, 다다히사 자신이 야마토인이나 시마즈인 어느 곳에도 직접 이주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이는 단순한 전승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즈미시 교육위원회의 기무레 성터 해설판에 따르면, 다다히사는 분지 2년(1186년) 사쓰마, 오스미, 휴가 삼국의 지토직에 임명된 후, 가신 혼다 사다치카를 임지에 파견하여 삼국의 정세를 살피게 했다고 한다. 혼다 사다치카는 야마토인의 호족들을 평정하고 겐큐 7년(1196년) 야마토인의 기무레에 성을 쌓아 시마즈 가문의 삼주 지배의 기초를 마련했다. 즉, 다다히사 본인이 기무레 성에 정착한 적은 없지만, 기무레 성은 사쓰마국의 슈고소(수호소)가 되어 혼다 씨 등 슈고 시마즈 씨의 가신들이 상주하며 수호 세력의 거점이 되었고, 이는 5대 시마즈 사다히사까지 이어졌다.
다다히사는 가마쿠라에서 활동하며 생애를 마쳤고, 그의 아들인 2대 시마즈 다다토키 또한 가마쿠라에서 사망했다. 3대 시마즈 히사쓰네가 원구를 계기로 비로소 남큐슈로 내려오면서 현지화가 본격화되었고, 4대 시마즈 다다무네는 시마즈 씨 당주로서는 처음으로 사쓰마에서 사망했다. 시마즈 가문의 당주가 남큐슈에 토착화된 것이 확인되는 것은 5대 시마즈 사다히사 이후이며, 사다히사의 슈고소가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의 이카리야마 성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4. 유산과 평가
시마즈 다다히사는 시마즈 씨의 실질적인 창건자로서 중요한 역사적 유산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후대 시마즈 가문의 번영에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4.1. 시마즈 씨의 창건자로서의 기여
시마즈 다다히사는 비록 남큐슈에 직접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핵심 고케닌이자 여러 구니의 지토 및 슈고로서 시마즈 씨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시마즈 장원의 지토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사쓰마국, 오스미국, 휴가국의 슈고직을 겸임하며 시마즈 가문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혼다 사다치카와 같은 유능한 가신들을 파견하여 현지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영지를 안정시킨 것이 시마즈 씨의 확고한 토착화로 이어졌다.
비록 그의 출신과 생년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지만, 그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신임을 얻어 막부 내에서 중요한 지위를 확보하고, 히키 요시카즈의 난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결국 복권되어 에치젠국 슈고와 같은 주요 직책을 맡았다는 점은 그의 정치적 역량과 영향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다히사의 노력 덕분에 시마즈 씨는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 규슈 남부를 대표하는 유력 가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는 이후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에 걸쳐 시마즈 가문이 사쓰마번으로서 강력한 다이묘 가문으로 번영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4.2. 고노에 가문과의 관계
시마즈 다다히사의 생애에서 고노에 가문과의 관계는 그의 정치적 입지와 시마즈 씨의 영지 지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다히사의 본가인 고레무네 씨는 대대로 고노에 가문의 가시를 역임하며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다다히사가 고노에 가문 소유의 시마즈 장원 지토직을 획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마즈 장원은 원래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자손이자 고노에 가문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모토자네의 영지였으며, 가마쿠라 시대부터 고노에 가문은 이 장원의 쇼엔 영주로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다다히사가 시마즈 장원의 지토로 임명된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추천과 더불어 고노에 가문과의 오랜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심지어 고노에 모토미치와 요리토모의 딸 오히메의 혼사 구상에서 다다히사의 관여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그는 공가와 무가 사이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중요한 중개자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고노에 가문과의 정치적, 혈연적 관계는 시마즈 씨가 단순한 지방 호족이 아닌, 중앙의 유력 공가와 연결된 강력한 무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시마즈 가문은 이후에도 시마즈 장원을 둘러싸고 고노에 가문과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는 시마즈 씨가 규슈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시마즈 다다히사에 의해 시작된 이 고노에 가문과의 관계는 시마즈 씨의 발전과 번영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