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스페우시포스의 생애는 아테네에서 시작되어 플라톤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고, 아카데미아의 학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만년에는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1.1. 출생과 가족
스페우시포스는 아테네 출신으로, 에우리메돈과 플라톤의 누이인 포토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리누스 데메에 속했다. 위작으로 알려진 『플라톤의 열세 번째 편지』에 따르면 스페우시포스는 자신의 조카(어머니의 손녀)와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1.2. 플라톤과의 관계 및 시라쿠사 방문
스페우시포스의 생애는 플라톤이 시라쿠사로 세 번째 여행을 떠날 때 그를 동반하면서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디오니시오스 2세에 의해 추방당했던 시라쿠사의 디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상당한 능력과 신중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도덕적 가치는 티몬조차 인정할 정도였으나, 티몬은 그의 지적 능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조롱을 퍼부었다. 그가 갑작스러운 분노 발작, 탐욕, 방탕함에 시달렸다는 보고는 아마도 매우 불순한 출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테나이오스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스페우시포스의 협력으로 디온에게 추방당한 소 디오니시오스의 위작 편지에 담긴 욕설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했다.
1.3. 아카데미아 학장
스페우시포스는 플라톤에 의해 아카데미아의 학장(스콜라르크)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기원전 348/7년부터 기원전 339/8년까지 단 8년 동안 학파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스페우시포스가 플라톤의 뒤를 이어 아카데미아의 학장이 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를 떠났다.
1.4. 사망 및 후계
스페우시포스는 만년에 오래 지속된 마비성 질환, 즉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뒤를 이어 크세노크라테스가 아카데미아의 학장직을 계승했다.
2. 사상
스페우시포스의 철학은 플라톤주의의 계승자이면서도 동시에 독자적인 방향을 모색하여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이데아론과 선의 개념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2.1. 전반적인 철학적 경향
스페우시포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거부하고, 플라톤이 선을 궁극적인 원리로 보았던 것과 달리, 선이 단지 이차적인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수학적 대상을 일차적인 실재로 이해하는 등 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 수론에 기울었다. 그는 변증법, 윤리학, 자연학으로 철학을 삼분하는 플라톤의 기초를 더욱 발전시켰으며, 이 세 분야의 상호 연관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모든 차이점을 알지 못하면 완전한 정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수학적 학문이 곧 철학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스페우시포스를 겨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 형이상학
스페우시포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거부했다. 플라톤이 이상적인 수(즉, 수의 플라톤적 이데아)와 수학적 수를 구별했던 반면, 스페우시포스는 이상적인 수를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이데아 자체를 부정했다. 그는 실체의 개념을 더욱 명확히 규정하려 노력했으며, 실체의 유형을 구분하여 그 차이가 기반이 되는 '원리'(아르카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수의 실체, 크기의 실체, 영혼의 실체를 구별했는데, 플라톤은 이들을 별개의 실체로서 이상적인 수에 귀속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우시포스가 "하나에서 시작하여 각 실체 유형마다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수의 원리, 공간적 크기의 원리, 그리고 영혼의 원리 등을 설정하여 실체의 유형을 더욱 늘렸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우시포스 역시 이러한 다양한 실체 유형들 사이에 공통적인 무언가를 인정했을 것이다. 첫째, 그는 절대적인 일자에서 출발하여 이를 공통적인 형식적 원리로 간주했으며, 둘째, 다수성과 다형성이 그 구성에서 공통적인 일차적 요소라고 가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플라톤주의적 교리에서 이러한 유사한 일탈을 하게 된 어려움이지, 그가 상이한 종류의 원리들을 구별함으로써 그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피했다고 생각했는지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스페우시포스가 원래의 플라톤주의적 교리를 수정한 것에 대해 얼마나 불만족스러웠는지를 보여준다.
플라톤의 교리에서 이러한 일탈과 관련하여 또 다른 광범위한 차이가 존재한다. 스페우시포스는 플라톤과 같이 궁극적인 원리로서 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심할 여지 없이 플라톤주의자들도 포함)과 함께 더 오래된 신학자들로 거슬러 올라가, 우주의 원리들은 선하고 완전한 것의 원인으로 설정되어야 하지만, 그 자체로 선하고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선하고 완전한 것은 생성된 존재나 발전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마치 식물과 동물의 씨앗이 완전히 형성된 식물이나 동물 그 자체가 아닌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우시포스는 최고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시작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식물과 동물의 시작은 원인이지만, 아름다움과 완전함은 이들의 결과물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스페우시포스는 궁극적인 원리를 플라톤처럼 절대적인 일자로 지칭했지만, 모든 존재는 발전의 결과일 뿐이므로 그것을 존재하는 실체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피타고라스 학파와 함께 '하나'를 '선한' 것들의 계열에 포함시켰을 때, 그는 아마도 그것을 '다수'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만 이해했으며, 선하고 완전한 것이 '다수'가 아닌 '하나'로부터 파생되어야 함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우시포스는 원초적인 통일성에 생명 활동을 불가분하게 속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그것이 어떻게 자기 발전 과정을 통해 선, 정신 등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신 또한 일자로부터, 그리고 선으로부터 구별했으며, 선은 쾌락과 고통으로부터 구별했다. 스페우시포스가 플라톤의 불확정한 이원성인 물질적 원리에 대해 더 적합한 표현을 찾으려 했던 시도와, 피타고라스적 방식으로 수론을 다루었던 방식은 주목할 가치가 적다.
특히, 그는 여러 수 체계에 개인에게 내재된 불멸의 영혼을 깨우치는 통로가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10'이라는 정수는 영혼의 완전성에 도달하는 진리의 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수 체계에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매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론을 여러 갈래로 나눈 것이므로, 이데아의 절대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주장에 해당됐다. 사실상 플라톤의 정통 이데아론에 반대한 격이 되었으며, 피타고라스의 정수론을 받아들인 것과 같았다. 그의 철학적 방법론은 아직까지도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2.3. 인식론
스페우시포스는 지식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며, 사유의 대상과 감각적 지각의 대상을 구별했다. 그는 이성의 인지와 감각적 지각을 구분했다. 그는 그러나 합리적 진리에 참여함으로써 지식의 지위로 상승하는 지각을 가정하여, 지각이 어떻게 지식으로 받아들여지고 변형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즉각적인 (최초에는 미학적인) 개념 방식을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예술적 기술이 감각적 활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을 오류 없이 구별하는 능력, 즉 대상들에 대한 합리적 지각에 기반을 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아름다움'을 분류하는 작용에도 이성의 힘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감각적 인지와 이성적 인지인 '사유'를 더 세분화했다. 그는 감각적 인지는 사유의 과정 없이 일방적이고 즉각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감각적 인지를 한 개인은 추가적인 사유를 할 필요가 없으며, 이는 단순한 자극에 불과할 뿐, 선과 악을 판단하거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거나, 미와 추를 판단할 수 있는 높은 영역의 인지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이미 특정 대상에 대해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느낀다는 것은 판단이 전제된 것이며, 판단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이미 미추를 판단한 것이고, 이러한 판단은 결국 사유의 결과로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아름다움의 영역에서도 이성적 인지인 사유가 필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의 논리에 따르면, 시와 예술 등을 비롯한 여러 미적 활동도 결국 사유의 지배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영역이 된다. 이는 플라톤의 "시와 예술은 정열을 부추기기 때문에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와 충돌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2.4. 윤리학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스페우시포스 저작 목록에는 정의, 우정, 쾌락, 부에 관한 제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스페우시포스가 행복을 "자연에 부합하는 것들로 완전한 상태이며, 모든 인간이 바라는 조건"으로 보았고, "선한 것은 평온함을 목표로 하며, 덕은 행복을 생산한다"고 보았다고 전한다. 이러한 증언은 스페우시포스의 윤리학이 스토아 학파의 윤리적 사상(의지의 자연 순응)과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평온함, 아타락시아 개념과 비교되는 '아오클레시아' 즉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현대 학자들은 스페우시포스와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 사이에 선에 관한 논쟁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에우독소스 또한 선이 모든 사람이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인정했지만, 이를 쾌락과 동일시했다. 반면 스페우시포스는 도덕적 선에만 집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울루스 겔리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스페우시포스는 쾌락이 선이 아니라, 선은 "쾌락과 고통이라는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 있다"고 주장했다. 스페우시포스와 에우독소스 간의 이러한 논쟁이 플라톤의 『필레보스』(특히 53c-55a)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선은 사물을 파생시키는 원리가 아니라, 사물이 최종적으로 형상으로 전환되면 규정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연물의 일부인 사물에도 선의 원리가 파생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선이 일자에 의해 강력히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려고 했으며, 일자에서 파생된 이자도 또한 선의 일부라고 보았다. 또한, 쾌락은 이러한 자연에서 멀리 떨어진 희미한 것이므로, 그것 자체가 '악'이라는 논리를 폈다.
스페우시포스는 또한 플라톤의 정의와 시민, 그리고 입법의 근본 원리에 대한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3. 저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스페우시포스의 저작 일부를 나열하고, 그의 모든 저술이 총 43,475줄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 『키레네의 아리스티포스』
- 『부(富)에 대하여』 (1권)
- 『쾌락에 대하여』 (1권)
- 『정의에 대하여』
- 『철학에 대하여』
- 『우정에 대하여』
- 『신들에 대하여』
- 『철학자』
- 『케팔로스에 대한 반론』
- 『케팔로스』
- 『클리노마코스 또는 리시아스』
- 『시민』
- 『영혼에 대하여』
- 『그릴루스에 대한 반론』
- 『아리스티포스』
- 『예술 비평』 (각 예술마다 1권)
- 『회고록』 (대화록 형식)
- 『체계론』 (1권)
- 『과학의 유사성에 대한 대화』 (10권)
- 『유사성에 관한 구분과 가설』
- 『전형적인 유(類)와 종(種)에 대하여』
- 『익명 저작에 대한 반론』
- 『플라톤 찬가』
- 『시라쿠사의 디온에게 보낸 편지』,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보낸 편지』, 『필리포스에게 보낸 편지』
- 『입법에 대하여』
- 『수학자』
- 『만드로볼루스』
- 『리시아스』
- 『정의(定義)』
- 『주석 배열』
4. 영향 및 평가
스페우시포스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받았으나, 그의 후계자인 크세노크라테스에게 계승되며 아카데미아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4.1.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우시포스의 철학, 특히 수학의 철학적 역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우시포스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수정하고, 선을 궁극적인 원리가 아닌 발전의 결과로 본 점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우시포스가 플라톤의 원래 교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종류의 '원리'를 구별하려 했던 방식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아를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2. 아카데미아의 계승
스페우시포스의 사상은 그의 뒤를 이은 아카데미아의 학장인 크세노크라테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크세노크라테스는 스페우시포스의 수학 중심적 경향을 일부 이어받으면서도, 플라톤주의의 다른 측면들을 재해석하여 아카데미아의 철학적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스페우시포스의 철학적 방법론은 여전히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남아있지만, 그의 사유는 플라톤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