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배경
매사추세츠주 글로스터 출신인 존 팔렌 매키니스는 1890년 9월 19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보스턴 교외 야구 리그에서 그의 인상적인 플레이를 본 사람들이 "That's the stuff, kid!" (바로 그거야, 꼬마!)라고 감탄하면서 "스터피"(Stuffy)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별명은 그의 야구 경력 내내 따라다니며 그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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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로 야구 경력
매키니스의 프로 야구 경력은 총 19시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통산 타율 .307, 20 홈런, 1,063 타점을 기록했다. 그의 경력은 크게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의 초기 전성기와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를 포함한 여러 팀에서의 활약으로 나뉜다.
2.1.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09-1917)
매키니스는 1909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소속의 유격수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했다. 두 시즌 후인 1911년, 그는 해리 데이비스를 대신하여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이때 그는 에디 콜린스(2루수), 프랭크 베이커(3루수), 잭 배리(유격수)와 함께 유명한 "10만 달러 내야진"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이 내야진은 그 어떤 야구 선수들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시기 애슬레틱스는 전성기를 구가하며 1910년, 1911년, 1913년, 1914년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우승했으며, 특히 1910년과 1911년에는 연속으로 월드 시리즈를 제패했다. 그러나 1914년 월드 시리즈에서 보스턴 브레이브스에게 스윕을 당한 후, 구단주 코니 맥은 새로운 페더럴 리그의 선수 영입 시도로 인해 팀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0만 달러 내야진"은 해체되었는데, 콜린스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베이커는 뉴욕 양키스로, 배리는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다. 이들 중 매키니스만이 애슬레틱스에 남았으나, 그 역시 1917년 시즌이 끝난 후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2. 보스턴 레드삭스 및 기타 팀 (1918-1926)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활동하면서 매키니스는 1918년 월드 시리즈에서 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1918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베이브 루스의 1대0 승리 투수 기록을 이끈 결승 타점을 올렸다.
레드삭스 이후 매키니스는 1922년 한 시즌 동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뛰었고, 1923년에는 내셔널 리그로 이적하여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활약했다. 이후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뛰며 1925년 파이리츠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당시 59경기에 출전해 .368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
2.3. 경기 스타일 및 업적
매키니스는 좋은 콘택트 능력을 가진 라인 드라이브 타자였다. 그는 19시즌 중 12시즌에서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특히 1910년부터 1915년까지 6년 연속 .300 이상의 타율을 유지했다. 그의 가장 생산적인 시즌은 1912년으로, 당시 그는 .327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는 삼진을 당하기 매우 어려운 타자로 알려져 있다. 통산 7,822 타석에서 겨우 189번 삼진을 당했으며, 총 2,405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특히 1921년에는 584타석 동안 단 9번만 삼진을 당했다. 또한 매키니스는 주자를 다음 루로 보내는 희생 번트에도 매우 능했다. 그의 통산 384개의 희생 번트 기록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세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매키니스는 또한 매우 뛰어난 수비력을 가진 선수였다. 그는 수십 년 동안 1루수 부문에서 메이저 리그 수비 기록들을 보유했다. 1921년,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152경기에 출전하여 1,651번의 토탈 챈스에서 단 1개의 실책만을 기록하여 .9993의 높은 수비율을 달성했다. 그가 기록한 1,300번의 무실책 토탈 챈스 역시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이었다. 또한 그는 1921년 5월 31일부터 1922년 6월 2일까지 163경기 동안 1,700번의 토탈 챈스에서 무실책을 기록하며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그의 메이저 리그 통산 수비율은 .991이었다.
매키니스의 수비 기록들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다. 2007년 6월 25일, 케빈 유킬리스가 1루수로 실책 없이 120경기 연속 출전하여 1921년 매키니스가 세웠던 레드삭스 기록을 깼다. 이어서 2008년 4월 27일, 유킬리스는 무실책 205번째 경기에서 1,701번째 연속 토탈 챈스 무실책을 기록하며 매키니스의 1,700개 기록을 넘어 메이저 리그 1루수 신기록을 세웠다. 유킬리스의 연속 무실책 기록은 238경기(2,002 수비 시도)에서 2008년 6월 7일에 종료되었다.
2.4. 선수 겸 감독 활동
매키니스는 선수 경력의 마지막 해인 1927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이는 그의 메이저 리그 경력의 마지막 기록이기도 하다.
3. 선수 은퇴 후 경력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매키니스는 야구계에서 계속해서 활동했다. 1928년에는 마이너 리그 팀인 세일럼 위치스의 감독을 맡았다. 이후 노리치 대학교 야구팀에서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코치로 재직했으며, 하버드 대학교 야구팀에서는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코치로 활동하며 젊은 선수들을 지도했다.
4. 유산 및 기록
스터피 매키니스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에서 꾸준한 타격과 특히 탁월한 수비력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이다. 그는 통산 타율 .307을 기록하며 19시즌 중 12시즌 동안 .300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는 등 타석에서의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삼진율이 극도로 낮아 7,822타석 동안 단 189번만 삼진을 당한 것은 그의 뛰어난 콘택트 능력을 방증한다. 또한 384개의 희생 번트 기록은 그가 주자 진루에 기여하는 팀 플레이에도 능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유산은 1루수로서 세운 수비 기록들이다. 1921년 시즌 동안 1,651번의 토탈 챈스에서 단 하나의 실책만을 기록하며 .9993의 수비율과 1,300번의 무실책 토탈 챈스라는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을 세웠다. 또한 1921년 5월 31일부터 1922년 6월 2일까지 163경기 동안 1,700번의 연속 토탈 챈스 무실책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수립했다. 이 기록들은 수십 년간 1루수 부문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었으며, 그의 후계자인 케빈 유킬리스에 의해 갱신되기 전까지 그의 수비적 위대함을 상징했다. 매키니스는 단순히 뛰어난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1루수 수비의 기준을 세우고 미래 세대 선수들에게 영감을 준 야구사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5. 사망
존 팔렌 "스터피" 매키니스는 1960년 2월 16일 매사추세츠주 입스위치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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