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소철(蘇轍소철중국어, 1039년 ~ 1112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저명한 문인이자 관료, 역사가, 시인이었다. 자는 자유(子由자유중국어) 또는 동숙(同叔동숙중국어)이며, 호는 영빈유로(潁濱遺老영빈유로중국어)이다. 그는 아버지 소순과 형 소식과 함께 '삼소(三蘇)'로 불리며,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아 '당송팔대가'에 포함되었다.
소철은 19세에 형 소식과 함께 진사시에 급제하며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당시 사회 정책이 민중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깊이 우려했다. 이러한 비판적 견해로 인해 여러 차례 좌천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었으나, 백성에 대한 깊은 공공적 관심과 정의를 사랑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의 문학은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관점을 반영하며, 특히 정치 논평과 역사 논평에 뛰어났다. 소철은 유교, 특히 맹자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작품 창작에서 '기(氣)'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독자적인 문학 이론을 정립했다. 그는 1112년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문학적 성취와 정치적 유산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및 배경
소철의 생애는 북송 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유교적 학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관료로서의 길을 준비했다.
2.1. 출생과 가족
소철은 1039년 2월 20일(음력 2월 26일), 현재의 사천성 메이산시에 해당하는 미주(眉州) 미산현(眉山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문인이자 학자인 소순이며, 형은 '소동파'로도 알려진 대문장가 소식이다. 소철은 소순의 차남이자 소식의 세 살 어린 동생이었다. 그의 자는 자유(子由)와 동숙(同叔)이며, 만년에는 영빈유로(潁濱遺老)라는 호를 사용했다.
2.2. 교육 및 과거 급제
소철은 어린 시절 아버지 소순으로부터 엄격한 학문적 교육을 받았다. 또한 미산성 서쪽에 있던 유순(劉純, 자는 휘지)에게서도 배웠다. 그는 17세에 일찍 결혼했다. 1057년(인종 보원 2년), 19세의 나이에 형 소식과 함께 개봉에서 치러진 진사시에 나란히 급제하며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1061년에는 형과 함께 제과(制科)에도 급제했으나,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잠시 미루었다.
3. 정치 경력
소철은 관료로서 북송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에 깊이 관여했으며, 특히 왕안석의 신법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며 여러 차례 좌천되는 고난을 겪었다.
3.1. 초기 관직 생활
과거 급제 후 소철의 첫 관직은 상주군사추관(商州軍事推官)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수도에 머물렀고, 형 소식이 임지에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위주 대명부추관(大名府推官)이 되었다. 1072년에는 하남의 추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073년에는 제주의 장서기(掌書記)로 발령받았고, 1077년에는 저작좌랑(著作佐郎)이 되었다.
3.2. 신법 반대와 좌천
신종이 즉위하고 왕안석이 재상이 되어 신법을 추진하자, 소철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1070년, 그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법제를 개혁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주장했으며, 왕안석에게도 서신을 보내 신법을 비판했다. 그는 신법이 백성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깊이 우려했다. 이로 인해 왕안석의 분노를 샀으나, 진승지(陳勝之)의 변호로 죄를 면하고 하남 진수(鎭守)로 좌천되었다.
1079년에는 형 소식이 시로 조정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투옥되는 '오대시안'에 연루되었다. 소철은 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관직을 내놓고 형의 안전을 빌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군주의 염주세(鹽酒稅) 감독관으로 좌천되었다. 이 시기 그는 20여 년간 여주(汝州), 원주(袁州), 화주(華州), 뇌주(雷州) 등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힘든 관직 생활을 보냈다. 1084년에는 적계현의 현령으로 승진하여 잠시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하여 칭송을 받았다.
3.3. 복귀와 후기 관직
철종이 즉위하고 구법당이 득세하자, 소철은 1085년에 조정으로 다시 불려왔다. 그는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郎)을 시작으로 우사간(右司諫), 기거랑(起居郎), 중서사인(中書舍人), 호부시랑(戶部侍郎)을 거쳐 1089년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권이부상서(權吏部尚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서우승(尚書右丞)을 역임한 후 문하시랑(門下侍郎)에까지 올랐다. 1089년에는 형부시랑 조군적(趙君適)과 함께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자주 상소를 올려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나, 황제의 뜻에 맞지 않아 다시 여주지주(汝州知州)로 좌천되었다. 이후 원주지주(袁州知州)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조의대부(朝議대부)로 강등되었고, 남경을 거쳐 군주(筠州)에 이르렀다.
3.4. 은퇴와 만년
휘종이 즉위한 후에도 소철은 화주별가(化州別駕), 뇌주(雷州), 순주(循州), 영주(永州), 악주(岳州) 등 여러 지방을 전전하는 유배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대중대부(大中대부)로 복직되었고, 봉상상청(鳳翔上清) 및 태평궁(太平宮)의 제거(提舉)로 허주로 옮겨갔다.
1102년부터 1106년 사이의 숭녕 연간에 소철은 62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사임하고 은퇴했다. 그는 허창 (또는 영천, 허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영빈유로(潁濱遺老)라 자칭하며 외부와의 교류를 끊었다. 그는 이곳에서 10년 동안 경전, 역사, 제자백가를 연구하며 평화로운 만년을 보냈다.
4. 문학적 업적과 사상
소철은 아버지 소순과 형 소식의 영향을 받아 유교를 근간으로 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으며, 특히 정치적, 역사적 논평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4.1. 문학적 특징 및 주요 저술
소철은 산문, 특히 정치 논평과 역사 논평에 뛰어났다. 그의 산문은 사회 문제와 역사적 사건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의 문체는 인생의 시기별로 변화했는데,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관직에 나아가기 전에는 《육국론》(六國論)처럼 통찰력 있고, 《삼국론》(三國論)처럼 생생한 문체를 구사했다. 지방 관료로 재직할 때는 점차 논평에서 감정 표현으로 바뀌었으며, 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풍경과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능했다. 조정에 복귀한 후에는 실제적인 정치 개혁 제안을 담은 실용적인 글을 썼다. 만년에는 독서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색적인 글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난성집》(欒城集) 50권 (또는 84권), 《후집》(後集) 24권, 《삼집》(三集) 10권, 《응조집》(應詔集) 12권 등이 있다. 또한 《시집전》(詩集傳) 20권, 《춘추집해》(春秋集解) 12권, 《논어습유》(論語拾遺) 1권, 《맹자해》(孟子解) 1권, 《고사》(古史) 60권, 《용천략지》(龍川略志) 10권, 《별지》(別志) 8권, 《도덕경해》(道德經解) 2권 등의 저서도 남겼다. 그는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금 세상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재물이 부족한 것이다(今世之患, 莫急于無財)"라고 지적하며 사회 문제를 비판했다. 또한 《삼국론》에서는 유비를 유방과 비교하며 유비가 지혜와 용기가 부족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형 소식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받지만, 너그럽고 담백하며 침착하고 간결한 그의 인품을 잘 드러낸다고 평가된다.
4.2. 사상적 영향
소철의 문학과 정치적 견해는 유교 사상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맹자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맹자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했으며, 그의 작품 전반에 유교적 이상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그는 여러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배웠으며, 선인들의 경험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 애국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작품에서 불교의 영향도 짙게 나타난다고 언급한다.
4.3. 문학 이론 (기(氣) 이론)
소철은 작품 창작에 있어 '기(氣)'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문(文)은 기(氣)가 형상화된 것이다. 그러나 문은 배워서 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기는 길러서 이룰 수 있다(文者, 气之所形.然文不可以学而能, 气可以养而致)"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는 위대한 작품을 쓰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며, 이는 내면의 수양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5. 평가 및 유산
소철은 그의 가족과 함께 중국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정치적 신념과 사상 또한 후대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5.1. 당송팔대가로서의 위상
소철은 그의 아버지 소순, 형 소식과 함께 '삼소'로 불리며,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가들을 일컫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는 그가 송나라 문학계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형 소식에게 가려지는 면도 있었으나, 소식은 소철의 산문이 "결코 끝나지 않을 지점"에 도달했다고 평가하며 그의 문학적 역량을 인정했다.
5.2. 후대의 평가와 영향
소철의 문학 작품, 특히 역사 논평은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황제의 주의를 환기시켜 더 나은 사회 발전을 도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과 사상은 후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청렴하고 강직한 태도는 귀감이 되었다. 소철의 후손 중에는 근현대 중국의 저명한 수필가이자 소설가인 소설림(蘇雪林)이 있다. 소씨 가족이 거주했던 삼소사(三蘇祠)는 1984년에 삼소사 박물관으로 재건되어 유명한 문화 명소가 되었다.
6. 개인적인 삶
소철은 17세에 결혼했으며, 형 소식과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형을 매우 존경했으며, 형의 삶과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형 소식이 사망했을 때 장문의 묘지명인 '망형자첨단명묘지명(亡兄子瞻端明墓誌銘)'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글씨에도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7. 사망
소철은 1112년 10월 3일(음력 10월 3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후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로 추증되었으며, 남송 순희 연간에는 시호 문정(文定)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