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education
셰창팅의 초기 삶과 학업은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Childhood and academic background
셰창팅은 1946년 타이베이시 다다오청 (현재 타이베이시 다퉁구)에서 한의사의 다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기계체조에 전념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만성 운동회에 출전하여 링 종목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대학 진학 전에는 음식 노점상으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그는 국립대만대학에서 법학 학사 학위(LL.B.)를 취득했고, 이후 일본 교토대학 법학연구과에서 법철학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교토대학에서의 유학 경험은 그를 지일파 정치인으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2. Early legal career
셰창팅은 1969년부터 1981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했다. 특히 1979년 발생한 미려도 사건 당시, 계엄법정에서 야오자원 (姚嘉文) 등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아 국민당 독재 정권의 탄압에 맞섰다. 이 경험은 그가 정치에 입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야오자원 등이 설립한 '중국 비교법학회' (현재 대만 법학회)에 가입하여 천수이볜, 쑤전창 등과 인연을 맺었다.
2. Political career
셰창팅은 대만 정치계에 입문한 이후 여러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대만의 민주화와 발전에 기여했다.
2.1. Founding of the Democratic Progressive Party
1986년 민주진보당이 창당되기 전, 셰창팅은 천수이볜, 린정제와 함께 "당외 3총사"로 불리며 당외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민주진보당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며, 현재 당명인 '민주진보당'을 제안하고 당 강령 초안 작성의 중심 멤버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당 주석을 두 차례 역임했다.
2.2. Early political activities
셰창팅은 1981년부터 1988년까지 타이베이시 의회 의원을 두 차례 역임했다. 이후 1989년 입법원 입법위원으로 처음 당선되었고, 1992년 재선되어 총 두 차례 입법위원을 지냈다. 1995년 입법위원 재선 대신 1994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내 경선에서 당시 유력 주자였던 천수이볜에게 패배했다. 1995년 9월, 셰창팅은 펑밍민과 함께 1996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에서 민주진보당의 총통-부총통 후보로 출마하여 21.1%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다. 1997년에는 알렉산더 일가 인질극 사건에서 인질범의 투항을 성공적으로 협상하여 전국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2.3. Mayoralty of Kaohsiung
1998년, 셰창팅은 가오슝시 시장 선거에서 당시 중국국민당 현직 시장이던 우둔이를 4,565표 차이로 꺾고 당선되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가오슝시의 도시 개발과 환경 개선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쓰레기 강"으로 불리던 애하의 수질 개선을 위해 1999년부터 정화 노력을 시작하여 2002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항구의 기능적인 개편을 주도했다. 또한 가오슝 첩운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들은 가오슝 시민들 사이에서 높은 지지를 얻어, 2004년 12월 가오슝시가 실시한 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82.6%에 달했고, 만족도는 74%, 불만족도는 16%에 그쳤다. 2002년 가오슝 시장 선거에서 그는 친민당 주석 쑹추위의 지원을 받은 황쥔잉 후보를 24,838표 (3.22%)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가오슝 시장으로서 그는 대한민국, 미국, 세네갈 등 해외에 적극적으로 나가 도시 외교와 정당 외교를 활발히 펼쳤다.
2.4. Premiership
2005년 1월, 셰창팅은 천수이볜 총통에 의해 행정원장으로 임명되어 가오슝 시장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천치마이가 직무대행을 맡았다. 행정원장 재임 초기, 가오슝 첩운 외국인 노동자 스캔들이 터지면서 중국국민당 정치인들은 셰창팅의 사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민주진보당이 압도적으로 패배한 2005년 "3-in-1" 지방선거의 여파로 셰창팅은 2006년 1월 행정원장직에서 사임했다.
2006년 12월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민주진보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중국국민당의 하오룽빈 후보에게 166,216표 (12.92%) 차이로 패배했다. 타이베이는 당시 중국국민당의 텃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의 패배는 예상된 결과였다.
2007년 2월, 셰창팅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55회 미국 국가 조찬 기도회에 대만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으며,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과 교류했다.
2.5. 2008 Presidential Campaign
셰창팅은 2008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의 민주진보당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었으며, 2007년 2월 16일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당시 중국국민당의 마잉주 후보가 출마를 선언한 지 사흘 만에 두 번째로 출마를 공식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민주진보당 경선에서 45%의 득표율로 승리했으며, 경선 상대 후보들이 모두 패배를 인정하면서 민주진보당의 총통 후보로 지명되었다. 2007년 7월, 셰창팅은 미국을 방문하여 "사랑과 신뢰의 여정"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2007년 9월, 그는 공개적으로 "타이완 국가"의 총통 후보로 출마한다고 선언하며, "우리 타이완인 스스로를 먼저 국가로 인정한 다음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중국국민당의 뇌물 의혹 제기로 2007년 검찰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9월에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마잉주 후보의 "양안 공동 시장" 구상에 대해 셰창팅은 대만이 경제에만 집중한다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돈을 버는 것인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경제 발전이 국가적 존엄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하며, 경제 발전의 목표는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민주진보당이 2008년 입법원 선거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셰창팅은 천수이볜의 뒤를 이어 당 주석직을 맡았다. 2008년 1월, 셰창팅은 마잉주 후보가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후속 조사 결과 마잉주의 여동생과 두 딸 중 한 명은 미국 시민권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셰창팅은 마잉주가 영주권을 포기했다는 문서화된 증거를 공개하면 선거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선거에서 셰창팅은 마잉주에게 예상보다 큰 17%포인트 차이로 패배하며 민주진보당에 큰 타격을 입혔다. 셰창팅은 이 선거에서 패배하면 다시는 공직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패배의 책임을 지고 민주진보당 주석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차이잉원이 민주진보당의 새로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7월, 셰창팅은 민주진보당 중앙 상임위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공직 불출마 서약을 깬 것에 대해 사과했다.
2.6. Representative to Japan
2016년 3월, 현지 언론은 셰창팅이 차이잉원 정부에서 주일 대표직을 수락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4월 말에 이 임명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으며, 6월 9일 일본에 첫 공식 방문을 했다. 그는 이전 정부들의 양안 관계와 타이완-미국 관계에 대한 초점이 차이잉원 총통의 목표인 "신남향정책"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셰창팅은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대만이 후쿠시마현 등 일본 일부 지역 식품 수입 제한을 해제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2024년 8월 중순에 주일 대표직에서 물러났으며, 리이양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셰창팅 주일 대표는 2019년 10월 22일 일왕 나루히토의 즉위례 정전의 의에 공식적으로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외빈으로 접대받았다. 또한 그는 2000년에 "민주진보당 대일우호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단장을 맡는 등 대표적인 지일파 인사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본 식민통치 시대에 인프라 건설이 진행되었고, 일본 교육을 받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며 일본과의 상호 이익 관계를 강조했다. 2016년 6월 초에는 구마모토 지진 피해 지역을 방문하여 의연금을 전달하고 "대만도 발전했다.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는 성실한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센카쿠 열도 (대만명: 댜오위타이 열도) 문제에 대해 셰창팅은 "댜오위타이는 대만의 일부"라는 중화민국의 인식을 표명하는 동시에, "주권과 어업권 문제는 분리해야 한다"며 "주권에 대한 협의를 잠정적으로 보류하자"고 주장했다.
3. Political philosophy and cross-strait relations
셰창팅의 정치 사상과 양안 관계에 대한 견해는 그의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3.1. Core political ideology
셰창팅은 행정원장 재임 시절 "화해와 공생"이라는 이념을 강조하며, 야당인 중국국민당과 중국 본토에 대화를 촉구했다. 그는 일본과 대만이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1972년부터 약 4년간의 교토대학 유학 시절 계엄령이 시행되던 대만과 일본을 비교하며 큰 충격을 받았고, 이는 귀국 후 빈곤층을 위한 법률 상담 변호사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1979년 미려도 사건 이후 정계에 입문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대만의 발전을 통해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는 성실한 대일 관계를 후세에 물려주고자 노력했다. 2007년 12월 총통 후보로서 일본을 방문하여 모교인 교토대학에서 "일대만 관계 강화의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일본판 "타이완 관계법" 제정을 주장하기도 했다.
3.2. Views on cross-strait relations
셰창팅은 2012년 10월, 민주진보당 고위 인사로는 전례 없이 중국 본토를 5일간 방문했다. 그는 이 방문을 개인 자격으로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푸젠성의 샤먼과 둥산현을 방문한 후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당시 국무위원 다이빙궈, 당시 해협양안관계협회 주석 천윈린, 그리고 당시 대만사무판공실 주임 왕이 등 중국 고위 인사들과 연이어 회담했다.
그는 양안 관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대해 양측이 동의했지만, 셰창팅은 1992년 합의 대신 "양안 각자 헌법" (兩岸各自憲法)이라는 새로운 합의를 선호했다. 2013년 4월 미국 방문 중에도 "양안 각자 헌법" 이니셔티브를 재차 강조하며, 양측이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대만 해협을 가로지르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중국 베이징에 촉구했다.
2013년 6월 말, 셰창팅은 홍콩에서 열린 이틀간의 "양안 관계의 발전과 혁신" 포럼에 참석했다. 이 포럼은 대만 기반의 대만개혁기금회와 베이징 기반의 대만연구소가 공동 주최했다. 포럼에 앞서 셰창팅은 둥젠화 전 홍콩 행정장관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기도 했다. 셰창팅은 민주진보당과 중국 베이징 간의 상호 신뢰가 중요하며, 양안 간의 모든 교류는 대중에게 이익이 되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양안 상호작용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다시 한번 타이베이와 베이징이 각자의 헌법적 정당성을 존중한다면 공존할 수 있다는 자신의 "서로 다른 해석을 가진 헌법" 견해를 재차 강조했다.
4. Personal life
셰창팅은 유팡즈 (游芳枝)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딸 한 명과 아들 한 명을 두었다. 그의 아들은 롄장현 둥인향의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2014년부터 타이베이시 의원으로 재직 중이다. 셰창팅의 어머니는 2007년에 사망했다. 2000년에는 셰창팅을 포함한 민주진보당 소속 정치인 10명이 앨범 '오! 포모사'의 재발매판에 전통 대만 노래를 불렀다. 이후 그는 오카리나를 배워 2005년 자신의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셰창팅은 2005년 자신이 부분적으로 대만 원주민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부눈족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푸젠성 자오안현 (현재 둥산현의 일부)에 위치한 퉁산 마을에서 이주한 조상 셰광위 (謝光玉)의 후손으로, 7세대 푸젠계 한족 혈통이다.
5. Legacy and evaluation
셰창팅은 대만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그의 업적과 정치적 기여는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일부 논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5.1. Achievements and positive evaluation
셰창팅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가오슝시 시장 재임 시절 이룬 도시의 변화이다. 그는 애하의 수질 개선과 하안 정비, 효율적인 도시 계획, 그리고 가오슝 첩운 건설을 주도하며 도시의 환경 개선과 인프라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노력은 시민들로부터 높은 평가와 지지를 받았다. 또한 그는 민주진보당의 공동 창립자로서 대만의 민주화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당 주석을 역임하며 당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의 "화해와 공생" 철학은 정치적 대화와 협력을 강조하며, 대내외적으로 갈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양안 관계에서 "양안 각자 헌법"을 제안하며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 점은 그의 유연한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그의 진보적인 입장은 대만 사회의 인권과 다양성 증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성혼 지지 및 도쿄 레인보우 프라이드 참여는 그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사회적 포용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하는 지일파 정치인으로서, 외교적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5.2. Criticism and controversies
셰창팅은 정치 경력 중 몇몇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행정원장 재임 시절 불거진 가오슝 첩운 외국인 노동자 스캔들은 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민주진보당이 압도적으로 패배한 2005년 지방선거의 책임을 지고 행정원장직에서 사임한 것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2008년 천수이볜 전 총통 일가의 비리 의혹이 불거졌을 때, 천수이볜의 딸 천싱위는 "쑤전창과 셰창팅, 천쥐도 아버지가 건넨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셰창팅은 천수이볜이 자신의 선거를 도와준 점은 감사하지만, 그의 돈을 받은 적은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청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그는 관련 의혹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2008년 총통 선거 패배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2010년 민주진보당 중앙 상임위원에 재선되며 이 약속을 번복한 것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결과 | 비고 |
|---|---|---|---|---|---|---|---|
| 1981 | 제4회 타이베이시 의원 선거 | 제3선거구 | 무소속 | 17,823표 | 15.03% | 당선 | |
| 1985 | 제5회 타이베이시 의원 선거 | 제3선거구 | 무소속 | 19,906표 | 15.97% | 당선 | |
| 1986 | 제1회 입법위원 제5차 증원 선거 | 타이베이시 선거구 | 민주진보당 | ||||
| 1989 | 제1회 입법위원 제6차 증원 선거 | 타이베이시 제1선거구 (대선거구) | 민주진보당 | 107,218표 | 19.92% | 당선 | |
| 1992 | 제2회 입법위원 선거 | 타이베이시 제1선거구 (대선거구) | 민주진보당 | 83,264표 | 13.79% | 당선 | |
| 1995 | 제3회 입법위원 선거 | 비례대표 | 민주진보당 | 3,128,601표 | 33.60% | 당선 | |
| 1996 | 제9기 총통·부총통 선거 | 타이완 지구 | 민주진보당 | 2,274,586표 | 21.10% | 낙선 | 부총통 후보로 출마 |
| 1998 | 제2회 가오슝 시장 선거 | 가오슝시 | 민주진보당 | 387,797표 | 48.71% | 당선 | |
| 2002 | 제3회 가오슝 시장 선거 | 가오슝시 | 민주진보당 | 386,384표 | 50.04% | 당선 | |
| 2006 | 제4회 타이베이 시장 선거 | 타이베이시 | 민주진보당 | 525,869표 | 40.89% | 낙선 | |
| 2008 | 제12기 총통·부총통 선거 | 타이완 지구 | 민주진보당 | 5,444,949표 | 41.55% | 낙선 | 총통 후보로 출마 |
| 2012 | 제8회 입법위원 선거 | 비례대표 및 해외 화교 | 민주진보당 | 4,556,424표 | 34.62% | 낙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