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세노오 기로는 1889년 12월 16일 히로시마현 히바군 토죠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술도가를 운영하는 유복한 환경이었다.
1.1. 질병과 학업
세노오 기로는 구제 제일고등학교에 재학 중 폐병을 앓게 되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21세에 중병에 걸려 30세까지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으며, 이 시기는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1.2. 종교적 각성과 개종
원래 정토진종 신자 집안에서 자랐고 염불 수행 환경에 익숙했으나, 학업 중단 후 인연을 맺은 열성적인 법화경 신도인 두부 상인의 권유로 법화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니치렌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고, 니치렌의 철학을 유일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20년 이상 니치렌 불교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데 매진하면서도, 기존의 종교 기관 전체에 의문을 품고 결국 이를 비판하고 대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2. 초기 활동 및 조직
세노오 기로는 불교 운동가로서 사회 활동을 시작하며 여러 단체를 조직했다.
2.1. 국수회와 일련주의
1918년 그는 다나카 치가쿠와 혼다 닛쇼가 창설한 민족주의적 니치렌 불교 재가 운동 단체인 국수회(国粋会)에 참여했다. 그는 이 단체의 청년 조직인 "대일본일련주의운동청년단"의 잡지 편집장을 맡아 니치렌의 가르침을 우익적으로 재해석하여 전파하는 데 관여했다.
2.2. 대일본일련주의청년단 조직
이듬해인 1919년, 세노오 기로는 혼다 닛쇼가 주재하는 법화 단체인 통일단(統一団)의 청년 신자들을 중심으로 대일본일련주의청년단(大日本日蓮主義青年団다이니혼 니치렌슈기 세이넨단일본어)을 직접 조직했다. 그는 이 단체의 기관지를 발행하고 전국 각지에서 강연을 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청년단 활동을 통해 그는 점차 소작쟁의와 노동쟁의 등 사회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0년 후 그는 무아(無我무가일본어) 운동에 영향을 받아 불교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상으로 사상적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3. 사상 및 철학
세노오 기로의 사상은 불교적 가르침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분석을 융합한 독특한 형태를 띠었다.
3.1. 불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비판
세노오 기로는 "사유 없는 공동사회"를 제창하며 불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고통(dukkha두카팔리어)을 야기하며, 이는 불교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그는 영적인 중요성을 부정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친전쟁 불교도들 모두를 비판했다. 세노오는 고통이 단순히 영성을 통해 초월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분석하고 제거해야 할 실존적 물질적 조건이라고 이해했다.
3.2. 현세의 불국토 건설과 사회적 해방
그는 새로운 불교 사회주의 이념을 통해 이 세상에 "불국토"(浄仏国土조붓코쿠도일본어)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영적인 해방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해방(解放카이호일본어)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3.3. 기존 종단에 대한 비판적 입장
세노오 기로는 기존의 불교 종단들이 불교 정신을 훼손했으며, 단순히 시체와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형태의 불교를 배격하고, 새로운 시대 정신에 따라 불교를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기존 종교 기득권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4. 신흥불교청년동맹
세노오 기로가 주도한 신흥불교청년동맹은 그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긴 핵심적인 단체였다.
4.1. 결성 및 초대 위원장
1931년, 세노오 기로의 주도 하에 대일본일련주의청년단은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초종파적인 신흥불교청년동맹(新興仏教青年同盟신흥불교청년동맹일본어)으로 거듭났다. 같은 해 4월 5일 열린 결성 대회에서 세노오 기로는 동맹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동맹은 단명했지만, 전전 일본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2. 강령과 사회 운동
신흥불교청년동맹은 기관지인 『신흥불교』(新興仏教신코 붓쿄일본어)를 발행하고 매년 전국 대회를 개최했다. 동맹의 강령은 세 가지 주요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 첫째,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과 형제애의 원칙에 따라 인간성의 최고 본질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 불국토를 실현할 것을 결의했다. 둘째, 기존의 모든 종단이 불교 정신을 모독하여 단순한 시체로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러한 형태를 배격하며 새로운 시대 정신으로 불교를 발전시킬 것을 맹세했다. 셋째,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불교 정신과 모순되며 일반 대중의 사회 복지를 저해한다고 인식하고, 보다 자연스러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이 체제를 개혁할 것을 결의했다.
이 강령을 바탕으로 신흥불교청년동맹은 민족주의, 군국주의, '황도 불교',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국제주의, 불교 교파간 협력, 그리고 반자본주의를 주창했다. 동맹은 노동운동, 소비조합운동, 반전운동, 반파시즘운동 등 구체적인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적 노력을 기울였다.
5. 탄압과 투옥
세노오 기로의 급진적인 사회 운동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 정부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5.1. 체포와 기소
1936년 2월, 세노오 기로는 특별고등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한 달 후 석방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7일 다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반전 및 반파시즘 활동으로 인해 반역죄로 고발당했다. 5개월간의 심문 과정 끝에 1937년 그는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5.2. 수감 및 석방
1940년 12월, 세노오 기로는 실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그는 1942년에 석방될 때까지 수감 생활을 했다.
6. 전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노오 기로는 사회 운동과 평화 운동, 그리고 정치 활동으로 복귀하며 그의 신념을 이어갔다.
6.1. 사회 및 평화 운동
석방 후 그는 불교사회동맹 위원장, 평화추진국민회의 의장, 일중우호협회 도쿄도 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전후 일본 사회의 재건과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
6.2. 일본공산당 입당
1959년, 세노오 기로는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는 그의 불교 사회주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적 신념이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진 중요한 행보로 평가된다.
7. 저술
세노오 기로는 자신의 사상과 활동을 담은 여러 저서를 남겼다.
- 『빛을 그리워하며』(光を慕ひて히카리 오 시타이테일본어) 중앙출판사, 1925
- 『사회 변혁 도상의 신흥불교』(社会変革途上の新興仏教샤카이 헨카쿠 토조 노 신코 붓쿄일본어) 불기사 신흥불교 팸플릿, 1933
- 『세노오 기로 일기』(妹尾義郎日記세노오 기로 닛키일본어) 1, 2, 7권, 세노오 테츠타로, 이나가키 마사미 공편 국서간행회, 1974~1975
- 『세노오 기로 종교론집』(妹尾義郎宗教論集세노오 기로 슈쿄론슈일본어) 이나가키 마사미 편 대장출판, 1975
8. 사망
세노오 기로는 1961년 8월 4일 나가노현에 있는 자택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9. 영향 및 평가
세노오 기로는 불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불교 사회주의를 주창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히 종교적 수행에 머무르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사회적 고통의 근원을 불교적 관점에서 비판하며 적극적인 사회 변혁을 추구했다. 특히 신흥불교청년동맹을 통해 노동운동, 반전운동, 반파시즘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 참여하며 사회적 약자의 해방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사상은 기존의 보수적인 불교 종단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었으며, 불교가 현실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제시했다. 비록 전시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았지만, 그의 사상과 실천은 전후 일본의 불교 운동과 사회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반전 및 반파시즘 활동은 군국주의 시대에 용기 있는 저항으로 기억되며,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추구하는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 관련 항목
- 불교 사회주의
- 마르크스주의와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