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서왈보는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항공 분야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1.1. 출생 및 초기 성장
서왈보는 1886년에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달성 서씨이며, 조부 대부터 평양에 거주해왔다고 전해진다. 1888년, 서왈보가 두 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체신분장국(遞信分掌局)의 통역 일을 얻게 되면서 가족은 함경도 원산으로 이주하여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일본인 소학교를 거쳐 1907년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1.2. 중국 망명 및 초기 독립운동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서왈보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그는 베이징의 육영학교(育英學校)에서 중국어를 익혔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류동설과 함께 마적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는 또한 1909년과 1915년에 중국 군사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베이징 강무당(講武堂)을 졸업한 후에는 직례파 군벌인 풍옥상馮玉祥중국어이 이끄는 제16혼성여단에 소속되었다. 1919년 이후 그의 주요 활동 무대는 남만주로 옮겨졌다. 1925년에는 베이징에서 결성된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인 다물단多勿團한국어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이후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자 최용덕 및 송호성 등과 함께 신의단(申義團)을 결성하기도 했다.
2. 항공 경력
서왈보는 중국 망명 후 항공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조종사로서의 전문적인 역량을 키웠고, 중국 군벌 휘하에서 중요한 항공 관련 직책을 수행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2.1. 항공 훈련 및 자격 취득
서왈보는 1920년 남원항공학교南苑航空學校중국어 제3기생으로 입학하여 항공 훈련을 받았다. 약 3년에 걸친 훈련 과정을 거쳐 1923년 4월에 정식으로 졸업하며 항공기 조종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를 통해 그는 한국인으로서 군용기를 조종하는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2.2. 중국 군벌과의 관계 및 복무
남원항공학교 졸업 후 서왈보는 직례파 군벌인 풍옥상馮玉祥중국어 휘하의 항공대에서 복무하며 항공 부대 지휘 경험을 쌓았다. 그는 풍옥상 군벌의 항공 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군사적 직책을 역임했다. 1924년 3월 19일에는 공병 소교(工兵少校)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에는 중앙항공사령부 제1대 비행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9월에는 장궤蒋逵중국어가 이끄는 중앙임시항공대의 비행원으로서 강소절강 전쟁江浙战争중국어에 참전하기도 했다. 베이징 정변 이후, 서왈보를 비롯한 직례파 항공대 관계자들은 풍옥상이 이끄는 국민군 제3군에 편입되었다. 1925년 3월, 장가구에 서북변방독판공서 항공사령부(西北邊防督辦公署航空司令部)가 설립되자, 서왈보는 장화일(張畫一), 구양장欧陽璋중국어, 조보청曹宝清중국어 등과 함께 참의(參議)로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서북군 항공처 처원(西北軍航空處處員)이 되었고, 이후 서북군 항공사령부 상교참모장(上校參謀長)까지 역임하며 군사 요직을 맡았다. 서왈보는 또한 최용덕이 보정항공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돕는 등 후배 독립운동가들의 항공 훈련을 지원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3. '최초의 한국인 조종사' 논쟁
오랫동안 서왈보는 한국 최초의 항공기 조종사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의 연구와 자료 발견으로 인해 이 기록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1918년 미국 공군 소속으로 비행을 한 한국계 미국인 이응호(조지 리)의 사례가 발견되면서, 서왈보보다 앞서 비행한 한국인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서왈보의 역사적 위상을 퇴색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항공 분야의 선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변함없이 인정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4. 사망
1926년 6월 28일, 서왈보는 중국 장가구張家口중국어 공가장(孔家庄) 비행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새로 수입된 이탈리아제 안살도 SVA-9Ansaldo S.V.A.-9이탈리아어 비행기를 시승하던 중 조종하던 기체가 추락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당시 독립운동계와 국내 언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5. 평가 및 기념
서왈보는 비록 젊은 나이에 비행 사고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독립운동 활동과 한국인으로서의 항공 개척자 정신은 사후에도 높이 평가받으며 기억되고 있다.
5.1. 정부 포상
서왈보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는 그의 헌신과 희생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5.2. 추모 활동
서왈보가 사망했을 당시 국내외 언론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사를 두 차례에 걸쳐 보도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또한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원산과 평양, 간도 용정 등지에서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추모 활동은 서왈보가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조종사를 넘어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6. 관련 항목
- 안창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