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및 프로 입단
서봉수는 독학으로 바둑을 익혀 프로 기사로 입단하였으며, 그의 초기 활동은 이후 그가 보여줄 파격적인 바둑 스타일의 기반을 다졌다.
1.1. Birth and Family
서봉수는 1953년 2월 1일 충청남도 대덕군 유천면(현재 대전광역시 서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서승달로, 대전에서 기원을 운영했다. 어머니는 유필례로, 1992년에 별세했다. 그는 1976년 이영화 씨와 결혼했으나 2003년 5월에 이혼했고, 이듬해인 2004년 10월 베트남 출신의 람티히 무아 씨와 재혼했다. 슬하에 아들 서상현과 딸 서진을 두고 있다.
1.2. Education and Entry into Go
서봉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배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70년에 프로 바둑 기사로 입단했다. 그는 다른 많은 프로 기사들과 달리 특정 프로 사사 없이, 동네 기원에서 독학으로 바둑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독학 과정은 그의 파격적이고 전투적인 바둑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 수련한 기존 강자들과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데 기여했다. 입단 이듬해인 1971년, 그는 만 18세의 나이로 명인전에서 우승하며 당시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고, 이로 인해 '서명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2. 바둑 스타일
서봉수 9단은 그의 독특한 바둑 학습 방식만큼이나 개성 강한 바둑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의 바둑은 강력한 전투력과 난전을 마다하지 않는 과감함이 특징이며, 이는 여러 별명으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야기사' 또는 바둑계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바둑이 정형화된 이론이나 수법에 얽매이지 않고, 실전에서 기민하게 대처하며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야전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특히 대마를 잡는 데 능하며, 불리한 형세에서도 끈질긴 승부 호흡으로 역전을 노리는 투지가 강점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명인전 타이틀을 획득한 후부터는 바둑팬들 사이에서 '서명인'으로도 불리며 그의 명인 등극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전투적인 스타일은 그의 독학 배경과 맞물려 정통 엘리트 교육을 거치지 않은 그만의 독창적인 바둑 세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주요 경력
서봉수는 한국 바둑계의 오랜 강자이자, 수많은 국내외 대회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전설적인 기사이다. 특히 그의 바둑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조훈현과의 라이벌 관계, 응씨배와 진로배에서의 국제적인 활약은 한국 바둑사에 길이 남을 기록이다.
3.1. Rivalry with Cho Hunhyun
1980년대는 서봉수와 조훈현 9단의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가 한국 바둑계를 양분하던 시기였다. 두 기사는 당대 최고의 강자로 군림하며 수많은 국내외 타이틀을 놓고 치열한 승부를 벌였고, 당시 한국 바둑의 '양강 체제'를 형성했다. 특히 공식 대국에서 350국 이상 대결한 기록은 바둑 역사상 세계 최다 대국 기록으로 남아있다.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주요 기전 결승에서 여러 차례 패배하며 '만년 2인자'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지만, 이러한 라이벌 관계는 한국 바둑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고, 팬들에게도 큰 관심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1990년대에는 서봉수,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4명의 기사가 '한국 바둑계의 4대 천왕'으로 불리며 한국 바둑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3.2. International Titles and Achievements
서봉수는 국내에서의 활약뿐만 아니라 국제 바둑계에서도 중요한 족적을 남기며 한국 바둑의 위상을 높였다.
3.2.1. Ing Cup Victory
1993년 제2회 응씨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는 서봉수 9단이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만천하에 떨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1회전에서 정명황, 2회전에서 후지사와 히데유키(藤沢秀行후지사와 히데유키일본어) 9단, 3회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다케미야 마사키일본어) 9단을 차례로 꺾고 승승장구했다. 1992년 11월에 열린 준결승에서는 조치훈 9단에게 2대1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5번기에서 그는 일본의 강자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오타케 히데오일본어) 9단을 상대로 3대2의 치열한 승부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은 제1회 응씨배에서 조훈현 9단이 우승한 데 이어 한국 기사가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것이어서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서봉수 9단의 응씨배 우승은 그의 전투적인 바둑 스타일이 세계 최고 수준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입증한 쾌거였다.
3.2.2. Jinro Cup 9-Win Streak
1997년 제5회 진로배 SBS 세계 바둑 최강전에서 서봉수 9단이 달성한 9연승은 한국 바둑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로 기록된다. 그는 한국팀의 4번째 주자로 출전하여 중국팀의 위빈(兪斌위빈중국어) 9단을 시작으로 일본의 히코사카 나오토(彦坂直人히코사카 나오토일본어) 9단, 중국의 창하오(常昊창하오중국어) 9단, 일본의 야마다 기미오(山田規三生야마다 기미오일본어) 9단, 중국의 차오다위안(曹大元차오다위안중국어) 9단, 일본의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오타케 히데오일본어) 9단, 중국의 천린신(陳臨新천린신중국어) 9단,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요다 노리모토일본어) 9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국의 마샤오춘(馬暁春마샤오춘중국어) 9단을 연파하며 9연승을 달성했다. 이 9연승으로 그는 홀로 중국팀 전원과 일본팀 잔여 기사를 제압하며 한국팀에게 5연패 우승을 안겼다. 이 기록은 세계 단체전에서 단일 기사가 거둔 최고의 연승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그의 끈질긴 투지와 승부사적 기질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3.3. Domestic Titles and Achievements
서봉수는 국제 대회뿐만 아니라 국내 바둑 대회에서도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하며 한국 바둑의 역사를 수놓았다.
그는 1971년 만 18세의 나이로 명인전에서 우승하며 최연소 명인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웠고, 이후 5연패를 포함하여 총 7차례 명인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 외에도 1975년과 1980년 왕위전, 1980년과 1988년, 1992년 국기전, 1983년과 1988년 기왕전, 1986년과 1987년 국수전, 1983년 KBS 바둑왕전, 1980년 최고위전, 1991년 동양증권배, 1999년 LG정유배 등 다수의 국내 주요 기전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특히 1999년 LG정유배 우승은 유창혁 9단을 3대2로 꺾고 6년 만에 따낸 타이틀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또한 1984년 제3기 KBS 바둑왕전에서 조훈현 9단을 2대1로 꺾고 우승했으며, 이듬해인 1985년 제4기 KBS 바둑왕전에서는 조훈현 9단에게 1대2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3.4. Career Milestones and Records
서봉수는 한국 바둑 역사에 여러 중요한 이정표와 기록을 남겼다. 1994년, 그는 장수영 9단을 상대로 승리하며 한국 프로 바둑 사상 최초로 통산 1000승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그의 꾸준함과 오랜 기간 최정상급 기량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또한 2023년 8월에는 통산 2811국을 기록하며 조훈현 9단의 기록을 넘어 한국 프로 기사 통산 최다 대국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바둑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3.5. Senior Go Career
원로 바둑 기사가 된 이후에도 서봉수 9단은 꾸준히 시니어 기전에서 활약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2000년 제1기 청풍 공기청정기배 프로 시니어 기전에서 홍태선 8단을 2대1로 꺾고 우승했으며, 2002년과 2003년에도 돌씨앗배 프로 시니어 기전에서 각각 임창식 7단과 강훈 9단을 꺾고 2연패를 달성했다. 2014년에는 시니어 바둑 클래식 시니어 왕위전에서 우승했고, 2021년과 2024년에는 대주배 프로시니어 최강전에서 우승하며 원로 기사로서의 기량을 입증했다.
그는 2005년 한국 바둑리그에 한게임 팀으로 출전했으며, 2008년과 2009년에는 T브로드 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16년부터 한국기원 총재배 시니어 바둑리그에 참가하여 2016년 상주 곶감팀 소속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2017년, 2018년, 2021년에는 시니어리그 최다승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2022년에는 '소파코사놀 서봉수 열혈도전' 5번기에서 김지석, 신민준, 변상일, 박정환 등 현역 최강 기사 5명과 대결하여 1승 4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4. 국제 대회 성적
아래는 서봉수 9단의 주요 국제 기전 참가 이력 및 성적을 보여주는 표이다.
기전 | 1988 | 1989 |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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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씨배 | × | 우승 | 16강 | 24강 | × | × | |||||||||||||||
후지쯔배 | 16강 | 4강 | 16강 | 8강 | 16강 | 16강 | 16강 | 24강 | 24강 | 16강 | 24강 | 24강 | × | × | × | × | × | × | × | × | × |
동양증권배 | 8강 | 우승 | 16강 | - | 16강 | 16강 | 32강 | × | - | 32강 | 32강 | 중지 | |||||||||
삼성화재배 | 8강 | 32강 | 32강 | × | 4강 | 32강 | 32강 | × | × | × | 4강 | 32강 | × | ||||||||
LG배 | × | 8강 | × | × | × | 16강 | × | × | × | × | × | × | × | ||||||||
춘란배 | × | 16강 | 24강 | - | × | - | × | - | × | - | × | ||||||||||
TV아시아 | - | × | × | × | × | 준우승 | × | × | 1회전 | × | × | × | × | × | × | × | × | × | × | × | × |
농심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외 국제 기전 주요 기록:
-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 준우승 (1993년, 대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요다 노리모토일본어) 9단 0:1 패배)
- 삼성화재배 4강 (2000년, 2006년)
- 진로배 SBS 세계 바둑 최강전 (1993년 2승 1패, 1994년 4승 1패, 1997년 9승 0패)
- 신사배 세계 우승전 (1995년)
- 장수 중국약도배 중일한 바둑대사전 (2017년)
- 1004섬 신안 국제 시니어 바둑대회 단체전 3위 (2019년)
- 로테배 중한 바둑 대항전 (1994년 0승 2패, 대 창하오(常昊창하오중국어) 0승 1패, 대 마샤오춘(馬暁春마샤오춘중국어) 0승 1패)
- 염성 동방집단배 중한 바둑 단체 명인전 (2016년 1승 2패, 대 창하오(常昊창하오중국어) 0승 1패, 대 녜웨이핑(聶衛平녜웨이핑중국어) 1승 0패, 대 마샤오춘(馬暁春마샤오춘중국어) 0승 1패)
- 편강배 중한 바둑 국수 우의전 (2019년 1승 1패, 대 창하오(常昊창하오중국어) 0승 1패, 대 녜웨이핑(聶衛平녜웨이핑중국어) 1승 0패)
- 농심 백산수배 세계 바둑 시니어 최강전 (2023-24년 0승 1패, 대 류샤오광(劉小光류샤오광중국어) 0승 1패)
- 대주배 프로시니어 최강전 준우승 (2010년, 2013년)
- 스미레 오로 챌린지 (2020년 3승 0패, 대 나카무라 스미레(仲邑菫나카무라 스미레일본어))
- 전자랜드 라이벌 대전 (2021년 1승 1패, 대 조훈현 0승 1패, 대 유창혁 1승 0패)
5. 주요 대국
서봉수 9단의 바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대국 중 하나는 단연 1993년 제2회 응씨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결승 5번기였다. 특히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오타케 히데오일본어) 9단을 상대로 펼쳐진 이 결승전의 제3국은 그의 전투적인 스타일과 뛰어난 계산 능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대국이다.

결승 5번기 제1국은 백을 쥔 오타케 히데오가 초반부터 우세를 잡으며 선승했다. 제2국에서는 흑을 쥔 오타케가 초반에 유리한 형세였으나, 중반에 서봉수 9단이 역전에 성공하며 승부를 1대1 원점으로 돌렸다. 제3국(사진 참고)은 초반 백을 쥔 오타케가 우변에 △(40수)로 삭감해온 수가 상변 흑을 압박했어야 할 지점으로, 이후 좌변 흑 1(41수)이 결정적인 요충수가 되었다. 이어 흑 11, 13 등 일방적인 공격으로 오타케를 몰아붙였고, 119수 만에 흑 중반 불계승을 거두며 서봉수가 연승을 기록했다.
제4국은 흑을 쥔 오타케가 초반부터 우세를 지켜내며 2대2 동률을 만들었다. 운명의 최종 제5국은 5월 20일에 진행되었는데, 초반 백을 쥔 오타케가 좋은 흐름을 보였으나 의문수들이 나오며 서봉수에게 역전의 기회를 내주었다. 결국 219수 만에 흑 중반 불계승으로 서봉수 9단이 3대2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에 응씨배 2연패를 안겼다. 이 대국은 서봉수 9단이 세계 무대에서 그의 야전적인 스타일을 증명하며 정상에 등극하는 결정적인 승부가 되었다.
6. 개인 생활
서봉수 9단의 개인적인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몇 가지 변화를 겪었다. 그는 1976년 이영화 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서상현과 딸 서진을 두었다. 그러나 2003년 5월 이영화 씨와 이혼했으며, 이듬해인 2004년 10월 베트남 농촌 출신의 람티히 무아 씨와 재혼했다. 그의 취미는 당구로 알려져 있다.
7. 수상
서봉수 9단은 그의 뛰어난 기량과 바둑계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여러 상을 수상했다.
- 기수문화상**:
- 1979년: 연승상
- 1979년, 1981년 ~ 1983년: 최다승상
- 1980년 ~ 1982년: 우수기사상
- 바둑문화상**:
- 1993년, 1997년, 1999년: 우수기사상
- 바둑대상**:
- 2006년: 감투상
- 2021년: 시니어기사상
8. 유산 및 평가
서봉수 9단은 한국 바둑계에 독자적인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정식 프로 사사 없이 독학으로 바둑을 익혀 최고 기사의 반열에 오른 전무후무한 사례로, 이는 한국 바둑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의 '야전사령관'이라는 별명처럼, 기존의 정형화된 바둑을 벗어나 예측 불가능하고 전투적인 스타일로 승부를 이끌어가는 그의 바둑은 많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조훈현 9단이라는 거대한 산과 대등하게 겨루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한국 바둑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점은 그의 역사적 위상을 확고히 한다.
또한 응씨배 우승과 진로배 SBS 세계 바둑 최강전 9연승 등 국제 무대에서의 눈부신 활약은 한국 바둑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최연소 명인 등극, 통산 1000승 달성, 최다 대국 기록 경신 등 수많은 기록을 세우며 꾸준함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서봉수는 단순히 뛰어난 기사를 넘어, 불굴의 투지와 끊임없는 도전 정신으로 후대 바둑 기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한국 바둑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바둑은 정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승리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바둑인에게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