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과 가족
샤 자한은 1592년 1월 5일 오늘날 파키스탄의 라호르에서 자한기르 황제(당시 살림 왕자)와 그의 왕비 자갓 고사인(빌키스 마카니 베굼, 마르와르 왕국의 라토르 라지푸트 공주) 사이에서 아홉째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악바르 대제였고, 할머니는 마리암-우즈-자마니였다.
어린 왕자에게 '기쁨'을 뜻하는 이름 خرم코람페르시아어을 지어준 것은 그의 할아버지 악바르 대제였는데, 어린 코람은 할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자한기르는 악바르가 코람을 매우 좋아했으며 종종 그에게 "그 아이와 다른 아들들 사이에는 비교할 것이 없다. 나는 그를 나의 진정한 아들로 여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코람이 태어났을 때, 악바르는 그를 상서롭게 여겨 살림의 집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양육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루카이야 술탄 베굼의 보살핌에 맡겨졌다. 루카이야는 코람을 애정으로 키웠으며, 자한기르는 회고록에서 루카이야가 코람을 "자신의 아들이었다면 사랑했을 것보다 천 배나 더 사랑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1605년 할아버지 악바르가 사망한 후, 코람은 그가 매우 아끼고 사랑했던 어머니 자갓 고사인의 보살핌으로 돌아왔다. 태어날 때 어머니와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에게 헌신했으며 궁정 연대기에는 어머니를 하즈라트로 칭했다. 1619년 4월 8일 악바라바드에서 자갓 고사인이 사망했을 때, 자한기르는 그가 위로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하며 21일간 애도했다고 기록했다. 이 3주간의 애도 기간 동안 그는 공개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간단한 채식 식사만 했다. 그의 황비 뭄타즈 마할은 이 기간 동안 직접 빈민들에게 음식을 분배하는 것을 감독했다. 그녀는 매일 아침 꾸란 암송을 주도했으며 남편에게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고 슬퍼하지 말 것을 간청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코람은 어린 시절 무굴 왕자로서의 지위에 걸맞은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여기에는 군사 훈련과 다양한 문화 예술(시, 음악 등)이 포함되었으며, 궁정 연대기에 따르면 대부분 자한기르가 가르쳤다. 연대기 작가 카즈비니에 따르면, 코람 왕자는 어린 시절 차카타이어 단어 몇 개만 알고 있었고 그 언어를 배우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람은 어린 시절부터 힌디어 문학에 매료되었으며, 그의 힌디어 편지들은 아버지의 전기인 『자한기르나마』에 언급되어 있다.
1605년 악바르가 임종을 맞았을 때, 당시 13세였던 코람은 임종 직전까지 침대 곁을 지켰으며 어머니가 그를 데려가려 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악바르의 사망 직전 정치적으로 불확실한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코람은 아버지의 정치적 반대자들로부터 상당한 신체적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는 마침내 할아버지의 집안의 고위 여성들, 즉 살리마 술탄 베굼과 할머니 마리암-우즈-자마니의 명령에 따라 거처로 돌아갔다.
1.3. 초기 군사 활동


코람 왕자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코람이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시험할 첫 기회는 악바르 통치 이래 무굴에 적대적이었던 라지푸트 국가 메와르에 대한 무굴 군사 작전 중이었다.
1년간의 혹독한 소모전 끝에 라나 아마르 싱 1세는 무굴군에게 조건부 항복하여 메와르 원정의 결과로 무굴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1615년, 코람은 아마르 싱의 후계자인 쿤와르 카란 싱을 자한기르에게 알현시켰다. 코람은 어머니와 계모들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보내졌고, 나중에 자한기르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같은 해, 그의 만삽(지위)은 12000/6000에서 15000/7000으로 증가하여 그의 형제 파르베즈와 동등해졌고, 1616년에는 다시 20000/10000으로 증가했다.
1616년, 코람이 데칸으로 떠날 때, 자한기르는 그에게 샤 술탄 코람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617년, 코람은 제국의 남부 국경을 확보하고 그 지역에 대한 제국의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데칸의 로디족을 다루도록 지시받았다. 이 작전에서 성공을 거둔 후 1617년에 돌아왔을 때, 코람은 자한기르 앞에서 '코로누쉬' 의식을 행했고, 자한기르는 그를 '자루카'(발코니)로 불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안아주었다. 자한기르는 또한 그에게 '세계의 왕'을 의미하는 샤 자한(Shah Jahan샤 자한페르시아어)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으며, 그의 군사 계급을 30000/20000으로 올리고, 왕자로서는 전례 없는 영예인 특별한 옥좌를 '두르바르'(궁정)에 허용했다. 에드워드 S. 홀든은 "그는 어떤 이들에게는 아첨받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질투받았으며,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1618년, 샤 자한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투주크-이-자한기리』의 첫 사본을 선물받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의 모든 아들 중에서 모든 면에서 첫째"라고 여겼다.
1.4. 궁정 정치와 반란

무굴 제국의 상속은 장자 상속이 아니라, 왕자들이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궁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결정되었다. 이는 종종 반란과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샤 자한의 형성기에는 무굴 궁정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1611년 그의 아버지는 페르시아 귀족의 과부 딸인 누르 자한과 결혼했다. 그녀는 빠르게 자한기르 궁정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고, 그녀의 오빠 아사프 칸 4세와 함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르주만드는 아사프 칸의 딸이었고, 그녀와 코람의 결혼은 누르 자한과 아사프 칸의 궁정 내 입지를 더욱 굳혔다.
그러나 궁정의 음모, 특히 누르 자한이 첫 결혼에서 낳은 딸을 코람 왕자의 막내 동생 샤리아르 미르자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하고 그의 왕위 주장을 지지하면서 많은 내부 분열이 발생했다. 코람 왕자는 누르 자한이 아버지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을 불쾌하게 여겼고, 그녀의 총애를 받는 샤리아르에게 밀려 2인자 역할을 하는 것에 분노했다. 페르시아인들이 칸다하르를 포위했을 때, 누르 자한이 국정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녀는 코람 왕자에게 칸다하르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코람 왕자가 누르 자한의 명령에 불복한 결과, 칸다하르는 45일간의 포위 끝에 페르시아인들에게 넘어갔다. 코람 왕자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르 자한이 아버지를 독살하려 하거나 자한기르를 설득하여 샤리아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할 것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코람 왕자는 페르시아인들과 싸우기보다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1622년, 코람 왕자는 군대를 일으켜 아버지와 누르 자한에게 대항했다. 그는 1623년 3월 빌로치푸라에서 패배했다. 이후 그는 마하라나 카란 싱 2세와 함께 우다이푸르 메와르로 피신했다. 그는 처음에는 델와다 키 하벨리에 머물렀고, 요청에 따라 자그만디르 궁전으로 옮겨졌다. 코람 왕자는 마하라나와 터번을 교환했으며, 그 터번은 현재도 우다이푸르 프라탑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자그만디르의 모자이크 작품이 아그라의 타지마할에 모자이크 작품을 사용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믿어진다. 1623년 11월, 그는 아그라와 데칸에서 쫓겨난 후 벵골 수바에서 안전한 망명을 찾았다. 그는 미드나푸르와 부르드완을 거쳐 진격했다. 악바르나가르에서 그는 당시 벵골 수바다르였던 이브라힘 칸 파트-이-장을 1624년 4월 20일에 물리치고 살해했다. 그는 다카에 입성하여 "정부에 속한 모든 코끼리, 말, 그리고 4백만 인도 루피의 현금"을 넘겨받았다. 짧은 체류 후 그는 파트나로 이동했다. 그의 반란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으며, 알라하바드 근처에서 패배한 후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왕자는 1626년에 그의 잘못에 대해 용서받았지만, 누르 자한과 그녀의 의붓아들 사이의 긴장은 표면 아래에서 계속 고조되었다.
자한기르가 1627년에 사망하자, 오랫동안 코람 왕자의 조용한 지지자였던 재상 아사프 칸은 예상치 못한 강력함과 결단력으로 자신의 누이인 누르 자한이 샤리아르 왕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계획을 저지했다. 그는 누르 자한을 엄중히 감금했다. 그는 그녀의 보호 아래 있던 코람 왕자의 세 아들들을 확보했다. 아사프 칸은 또한 코람 왕자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궁정 음모를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코람 왕자는 아부 우드-무자파르 시하브 우드-딘 무함마드 사히브 우드-쿠이란 우드-타니 샤 자한 파드샤 가지(شهاب الدین محمد خرم시하브 우드-딘 무함마드 코람우르두어) 또는 샤 자한으로 무굴 황위에 올랐다.
그의 제왕명은 여러 부분으로 나뉜다. 시하브 우드-딘은 "신앙의 별"을 의미하며, 사히브 알-쿠이란 우드-타니는 "목성과 금성의 행복한 합의 두 번째 군주"를 의미한다. 샤 자한은 "세계의 왕"을 의미하며, 그의 티무르 제국 뿌리에 대한 자부심과 야망을 암시한다. 더 많은 칭호들은 그의 세속적, 종교적 의무를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하즈라트 샤헨샤("황제 폐하"), 하즈라트-이-킬라파트-파나히("칼리프의 피난처 폐하"), 하즈라트 질-이-일라히("신의 그림자 폐하")라는 칭호를 받았다.
2. 왕위 계승
2.1. 계승 분쟁
자한기르 황제가 1627년 10월 28일 카슈미르에서 펀자브의 라호르로 향하던 중 사망하자, 황제의 죽음은 코람과 샤리아르에게 모두 즉시 알려지지 않았다. 궁정에는 누르 자한과 아사프 칸만 있었다. 아사프 칸은 코람을 지지했으며, 누르 자한을 감금하고 코람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쿠스로 미르자의 아들인 다와르 바크슈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다. 이후 아사프 칸은 라호르에서 제위를 선포하던 샤리아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체포했다.
2.2. 즉위와 권력 강화
데칸에 있던 코람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고, 그는 아사프 칸에게 다와르 바크슈를 비롯한 다른 왕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한 뒤 데칸에서 아그라로 돌아왔다.
1628년 1월 24일, 코람은 아그라에 입성하여 '세계의 황제'를 의미하는 "샤 자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의 첫 통치 행위는 주요 경쟁자들을 처형하고 계모 누르 자한을 감금하는 것이었다. 샤 자한의 명령에 따라 1628년 1월 23일에 여러 처형이 이루어졌다. 처형된 이들 중에는 그의 동생 샤리아르; 이전에 처형된 쿠스로 왕자의 아들인 조카 다와르와 가르샤스프; 그리고 고(故) 다니얄 미르자 왕자의 아들인 사촌 타흐무라스와 호샹이 포함되었다. 이는 샤 자한이 경쟁 없이 제국을 통치할 수 있게 했다.
1628년 2월 14일, 샤 자한은 아그라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는데, 그 화려함은 이전 황제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럽인들은 그를 오스만 제국 황제에 비유하여 "장엄왕"이라고 칭했다. 황후 뭄타즈 마할과 장녀 자한아라 베굼을 비롯한 황자들과 황녀들에게는 샤 자한의 호의에 따라 황금과 현금 등의 선물이 하사되었다. 샤 자한은 즉위에 공헌한 이들에게 보상했는데, 아사프 칸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했으며, 마하밧 칸에게는 '최고의 칸'을 의미하는 "칸-이-하난" 칭호를 수여했다.
3. 통치 기간 (1628-1658)
3.1. 행정과 경제
샤 자한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거대한 군사 기계가 되었고, 귀족들과 그들의 부대 규모는 거의 4배로 늘었으며, 이에 따라 시민들로부터 더 많은 세수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1648년 기록에 따르면 군대는 911,400명의 보병, 총병, 포병과 왕자 및 귀족이 지휘하는 185,000명의 소와르로 구성되었다. 그의 재정 및 상업 분야 조치 덕분에 전반적인 안정기였으며, 행정은 중앙집권화되었고 궁정 업무는 체계화되었다.
당시 인도는 예술, 공예, 건축의 풍요로운 중심지였으며, 세계 최고의 건축가, 장인, 화가, 작가들이 샤 자한의 제국에 거주했다.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에 따르면, 무굴 시대 인도의 세계 국내총생산 점유율은 1600년 22.7%에서 1700년에는 24.4%로 성장하여 중국을 넘어 세계 최대가 되었다. 그러나 사치로 인한 세금 증가는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샤 자한의 문화적, 정치적 초기 조치는 일종의 티무르 르네상스로 묘사되는데, 그는 주로 조상 지역인 발흐에 대한 수많은 실패한 군사 작전을 통해 티무르 유산과 역사적, 정치적 유대를 형성했다. 다양한 형태로 샤 자한은 자신의 티무르적 배경을 활용하여 이를 제국 유산에 접목시켰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마르와리 말이 도입되어 샤 자한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되었고, 자이 가르 성에서는 다양한 무굴 대포가 대량 생산되었다.
3.2. 군사 원정과 영토 확장
샤 자한의 통치 기간 동안 무굴 제국은 꾸준히 확장되었다. 그의 아들들은 여러 전선에서 대규모 군대를 지휘했다.
3.2.1. 데칸 술탄국
샤 자한의 통치 기간 동안 무굴 제국의 세력은 데칸 지역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1632년, 샤 자한은 마하라슈트라 주의 다울라타바드 요새를 점령하고 아흐마드나가르 술탄국의 후세인 샤를 감금했다. 이는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이 1633년 6월 4일 사실상 멸망했음을 의미한다. 1635년에는 골콘다가, 1636년에는 비자푸르가 무굴에 복종했다.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를 칸데시, 베라르, 텔랑가나, 다울라타바드로 구성된 데칸의 부왕으로 임명했다. 아우랑제브는 부왕 재임 중 바갈라나의 라자 바하르지를 격파하고 바갈라나를 정복했다. 수세기 동안 이슬람 통치에 복종해 온 소규모 마라타 왕국 바갈라나는 수라트와 서부 항구에서 부르한푸르로 가는 주요 경로에 위치해 있었다. 1637년, 샤 자한은 완전한 합병을 결정했다. 바갈라나 군대를 지휘했던 바하르지는 정복 직후 사망했다. 그의 아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다울라트만드 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우랑제브는 이후 1656년에 골콘다를, 1657년에는 비자푸르를 격파했다.
1636년 5월, 비자푸르 왕국과 골콘다 왕국은 무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주화를 주조하여 사용하고 금요일 예배에서도 황제의 이름을 읊도록 했다. 또한 아흐마드나가르 왕국의 옛 영토를 분할하여 북쪽 절반은 무굴 제국에 병합하고, 비자푸르 왕국은 남쪽 절반을, 골콘다 왕국은 그 일부를 병합했다. 1630년대, 무굴 제국이 데칸으로 영토를 확장한 결과, 두 왕국은 1565년 탈리코타 전투에서 패배하여 쇠퇴했던 남인도의 비자야나가라 왕국을 추가로 공격하여, 1649년 비자야나가라 왕국은 비자푸르 왕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 일련의 원정으로 제국의 영토는 데칸 지역으로 크게 확장되었으며, 데칸 지역이 평정되자 샤 자한은 아그라로 돌아왔다.
3.2.2. 북서부 국경 및 중앙아시아

북서부 국경에서는 데칸과는 달리 제국의 영토 확장이 어려웠고, 오히려 영토가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샤 자한이 조상들의 꿈이었던 사마르칸트 탈환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칸국에서는 1598년 샤이바니 칸이 사망한 후 내란이 발생했고, 1599년에는 새로운 잔 왕조가 수립되었다. 무굴 제국은 잔 왕조와 처음에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샤 자한의 통치에 들어서면서 잔 왕조는 제국령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샤 자한은 1646년부터 1647년까지 부하라 칸국을 상대로 중앙아시아 침공을 개시했다. 총 7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샤 자한과 그의 아들들인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슈는 발흐와 바다흐샨 영토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우즈베크인들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1647년에 무익한 땅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발흐와 바다흐샨은 부하라의 통제권으로 돌아갔다. 결국 카불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한편, 무굴 제국과 사파비 왕조의 분쟁 지역인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 칸다하르는 1622년부터 사파비 왕조의 영토였다. 그러나 1637년 사파비 왕조의 칸다하르 장관 알리 마르단 칸이 무굴 제국 편으로 돌아서면서 칸다하르는 제국령이 되었다. 사파비 왕조는 우즈베크와의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1649년 제국령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칸다하르를 재점령했다.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게 탈환을 명령했지만, 1649년과 1652년 두 차례의 공격에도 칸다하르는 버텨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1653년 샤 자한은 칸다하르 탈환을 위해 아들 다라 시코를 파견했지만, 칸다하르를 탈환하지 못했으며 이 지역은 다시는 제국령이 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에서 샤 자한은 1637년에 미르 자리프를 이끄는 사절단을 오스만 궁정으로 보냈다. 그는 다음 해 무라트 4세가 바그다드에 주둔하고 있을 때 도착했다. 자리프는 그에게 훌륭한 선물과 사파비 페르시아에 대한 동맹을 격려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술탄은 아르살란 아가를 이끄는 답례 사절단을 보냈다. 샤 자한은 1640년 6월에 대사를 접견했다. 무라트 4세는 바그다드에 주둔하면서 무굴 황제 샤 자한의 사절인 미르 자리프와 미르 바라카를 만났는데, 그들은 1000장의 정교한 자수 직물과 심지어 갑옷까지 선물했다. 무라트 4세는 그들에게 최고급 무기, 안장, 카프탄을 주었고 그의 군대에 바스라 항구까지 무굴인들을 동행하도록 명령하여 그들은 타타를 거쳐 마침내 수라트로 항해했다. 그들은 호화로운 선물을 교환했지만, 샤 자한은 술탄 무라트의 답신 서한의 어조가 무례하다고 생각하여 불쾌해했다. 술탄 무라트의 후계자인 이브라힘 1세는 샤 자한에게 페르시아인들과 전쟁을 벌이도록 격려하는 또 다른 서한을 보냈지만, 답신 기록은 없다.
3.2.3. 기타 분쟁
샤 자한은 1631년 벵골의 무굴 부왕 카심 칸에게 후글리 항구의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이 항구는 대포, 전함, 요새화된 벽 및 기타 전쟁 도구로 중무장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무굴 고위 관리들에 의해 인신매매 혐의를 받았으며, 상업적 경쟁 때문에 무굴이 통제하는 삽타그람 항구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샤 자한은 특히 예수회의 활동에 격분했는데, 그들은 농민들을 납치한 혐의를 받았다. 1632년 9월 25일, 무굴군은 황실 깃발을 들고 반델 지역을 장악했으며, 수비대는 처벌받았다. 1635년 12월 23일, 샤 자한은 아그라 교회를 철거하도록 명령했는데, 이 교회는 포르투갈 예수회 소유였다. 그러나 황제는 예수회가 사적으로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허용했다. 그는 또한 예수회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설교하고 개종자를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 칙령에서 그는 현재 서벵골에 있는 반델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신부들과 기독교 공동체에게 777 비가의 무상 토지를 부여하여, 이곳의 포르투갈 유산이 후대에 이어지도록 했다.
구루 하르고빈드가 이끄는 시크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대응하여 샤 자한은 그들을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구루 하르고빈드는 1634년 암리차르 전투, 카르타르푸르 전투, 로힐라 전투, 라히라 전투에서 무굴군을 격파했다。
구자라트의 쿨리족은 샤 자한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1622년, 샤 자한은 구자라트 총독 라자 비크람지트를 아메다바드의 쿨리족을 진압하도록 보냈다. 1632년에서 1635년 사이에 쿨리족의 활동을 관리하기 위해 네 명의 부왕이 임명되었다. 북구자라트의 칸크레지 쿨리족은 과도한 행동을 저질렀고, 나바나가르의 잼은 샤 자한에게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곧 아잠 칸이 쿨리족을 진압하고 지방에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아잠 칸은 쿨리 반란군에 대항하여 진격했다. 아잠 칸이 싯푸르에 도착했을 때, 지역 상인들은 춘발리아 쿨리인 칸지(Kánji)의 폭행에 대해 격렬하게 불평했다. 칸지는 특히 상품을 약탈하고 도로 강도를 저지르는 데 대담했다. 아잠 칸은 아메다바드로 진군하기 전에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열망하여, 아메다바드 북동쪽 96560 m (60 mile) 떨어진 케랄루 근처 바하 다르 마을로 도피한 칸지에 대항하여 진군했다. 아잠 칸은 그를 맹렬히 추격하여 칸지는 항복하고 약탈한 물품을 넘겨주었으며, 더 이상 강도질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간 1.00 만 INR의 조공을 바치겠다고 보장했다. 아잠 칸은 이어서 쿨리족 영토에 두 개의 요새화된 주둔지를 건설하고, 하나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자마바드라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칼릴라바드라고 명명했다. 또한 그는 나바나가르의 잼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다음 부왕인 이사 타르칸은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1644년, 무굴의 왕자 아우랑제브가 부왕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후 아메다바드의 자이나교 사원 파괴와 같은 종교 분쟁에 관여했다. 이러한 분쟁으로 인해 그는 샤이스타 칸으로 교체되었으나 샤이스타 칸은 쿨리족 진압에 실패했다. 이후 1654년 무라드 바크슈 왕자가 부왕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질서를 회복하고 쿨리족 반란을 진압했다.
3.3. 사회 및 종교 정책
3.3.1. 종교 정책
샤 자한의 통치는 할아버지 악바르 대제의 종교 관용 정책에서 벗어나 이슬람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를 보였다. 17세기 전반의 무굴 제국에서는 수니파 무슬림들 사이에서 이슬람 부흥 운동이 강화되었고, 울라마들은 엄격한 샤리아 법의 적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샤 자한은 힌두교 사원과 기독교 교회의 건축 및 개조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두었다. 1632년, 샤 자한은 새로 지어진 힌두 사원의 파괴와 기존 사원의 보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바라나시에서는 76개의 힌두 사원이 파괴되었다.
또한, 벵골 지역의 치타공과 후글리에 거주하던 기독교 포르투갈인들과의 관계는 그들이 절도와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악화일로를 걸었다. 특히 황비 뭄타즈 마할의 하렘에 있던 두 명의 여성 노예가 포르투갈 해적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양측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샤 자한은 부친과 조부의 관용주의를 계승했지만, 그들을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는 후글리에 있는 포르투갈 상업 지구를 파괴시켰고, 300여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아그라로 이송된 후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개종을 거부한 이들은 살해되었다. 당시 영국의 여행가는 포로들의 그 후 상황에 대해 "아름다운 여인들과 딸들은 하렘에 갇혔고, 늙은 여인들과 다른 이들은 아미르에게 넘겨졌다"고 기록했다. 샤 자한은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라호르에 있던 기독교 교회도 철거시켰다.
샤 자한 자신은 이슬람 축일을 경축하고 메카와 메디나에 9번의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위에서 언급된 사건들 외에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종교적 대립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3.3.2. 기근과 반란
1630-32년 데칸과 구자라트, 칸데시 지역에서 세 차례의 주요 흉작으로 인해 대기근이 발생했다. 약 200만 명이 굶어 죽었으며, 식료품점에서는 개고기를 팔고 뼈가루를 밀가루에 섞어 팔았다. 부모가 자녀를 잡아먹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일부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어 거리가 시체로 가득 찼다. 이러한 황폐화에 대응하여 샤 자한은 기근 희생자들을 위해 '랑가르'(무료 급식소)를 설치했다.
3.4. 예술과 건축 후원



샤 자한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건설된 웅장한 건축물들의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의 통치는 무굴 건축의 황금기를 열었으며, 그는 무굴 건축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사랑하는 황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지은 타지마할이다. 타지마할의 구조는 매우 신중하게 설계되었고, 전 세계의 건축가들이 이 목적을 위해 초빙되었다. 이 건물은 완공하는 데 20년이 걸렸고, 벽돌 위에 흰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그의 죽음 후,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그를 뭄타즈 마할 옆에 안장시켰다. 타지마할은 163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2년 뒤인 1653년에 완성되었다.
그의 다른 건축물들로는 다음과 같다.
- 붉은 성: '델리 포트' 또는 우르두어로 '랄 킬라'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샤 자한 황제가 기존 성 양식을 통합하고 보강하여 조성한 것이다. 성곽 형태의 궁전은 중요한 도시적 면모를 띠며 인도의 중세 시기를 잘 드러낸다. 전체적인 면모와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무굴 제국의 활동과 창조성에 대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샤 자한은 아그라 성에서 천도하여 당대의 번영을 뽐내고자 했다. 그는 천도하면서 방대한 건물 계획과 능력을 자축했다. 이 성은 델리 시의 동쪽 외곽에 있으며, 거대한 벽이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붉은 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체 벽은 2.5 km에 달하며 높이는 차이가 나지만 대개 16 m에서 33 m이다. 야무나 강변에 서 있는 성은 벽의 대부분이 연못으로 둘러싸여 해자 형태를 띤다. 건축은 1638년 시작되었으며 1648년에 완공되었다. 붉은 성의 디와니앰과 디와니하스도 샤 자한의 치세에 지어졌다. 델리의 궁성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진다.
- 아그라 성의 많은 부분.
- 델리의 자마 마스지드.
- 와지르 칸 모스크 (라호르): 가장 화려한 무굴 시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진다.
- 모티 마스지드 (진주 모스크).
- 샬리마르 정원 (라호르).
- 라호르 성의 일부.
- 페샤와르의 마하밧 칸 모스크.
- 하스타알의 미니 쿠툽 미나르.
- 그의 계모 누르 자한이 건설을 감독한 아버지의 무덤인 자한기르 영묘.
- 타타의 샤 자한 모스크: 파키스탄 신드 주 타타에 있는 이 모스크는 1647년 샤 자한 통치 기간에 지어졌다. 붉은 벽돌과 파란색 유약 타일로 지어졌으며, 아마도 신드의 다른 도시인 할라에서 수입되었을 것이다. 이 모스크는 총 93개의 돔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수의 돔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이다. 음향을 염두에 두고 지어졌는데, 돔 한쪽 끝에서 말하는 사람이 100 데시벨을 초과하면 다른 쪽 끝에서도 들을 수 있다. 1993년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샤 자한은 그의 통치를 기념하기 위해 공작새 옥좌, 즉 타흐트 이 타우스(Takht e Taus)를 만들도록 했다. 그 재료로 860.00 만 INR에 달하는 보석과 140.00 만 INR에 달하는 금이 사용되었으며, 7년에 걸쳐 1635년에 완성되었다. 옥좌 표면에는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귀한 보석이 아낌없이 사용되었고, 그 천개 중앙에는 사파비 왕조의 아바스 1세가 자한기르에게 보낸 특대형 루비가 사용되었다. 역사가 이나야트 칸은 이 루비에 대해 티무르, 샤 루흐, 울루그 베그, 샤 아바스의 이름과 함께 악바르, 자한기르, 그리고 자신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샤 자한은 또한 그의 건축 걸작에 꾸란의 심오한 구절들을 새겼다.
샤 자한은 또한 지금은 구 델리라고 불리는 샤자하나바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1639년 4월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648년 4월에 완성된 이 신도시에는 황제의 거처인 델리 성이 포함되었다. 성 안에는 57,000명이 살았으며, 성벽 밖에는 2590 ha의 시가지가 펼쳐져 약 400,000명의 시민이 거주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샤 자한 자신은 델리와 아그라를 오갔다.
3.4.1. 예술, 문학, 화폐

샤 자한 시대에는 무굴 회화가 발전했다. 1635년, 샤 자한은 궁정의 무굴 회화 화가들에게 자신의 업적에 대한 삽화가 포함된 사료인 『파드샤나마』를 제작하도록 명령했다. 이 작품의 한 권은 현존하며, 현재 영국 윈저 성 왕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샤 자한이 열중하거나 흥미를 가졌던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삽화는 승리한 전쟁이나 궁정 의식만을 묘사하고 있다.
샤 자한은 또한 시를 비롯한 다른 예술 분야도 후원했다.
샤 자한은 금(모후르), 은(루피), 구리(담) 세 가지 금속으로 주화를 계속 발행했다. 그의 즉위 전 주화에는 코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4. 사생활
4.1. 결혼과 자녀

1607년, 코람은 뭄타즈 마할로도 알려진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1593-1631)과 약혼했다. 그들은 약 14세와 15세 때 약혼했고, 5년 후에 결혼했다.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은 악바르 통치 이래 무굴 황제들을 섬겨온 명문 페르시아인 귀족 가문에 속했다. 이 가문의 가장은 이티마드-우드-다울라, 즉 "국가의 기둥"이라는 칭호로도 알려진 미르자 기야스 베그였다. 그는 자한기르의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그의 아들인 아사프 칸(아르주만드 바누의 아버지)은 무굴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결국 수석 장관을 역임했다. 그녀의 이모 메흐르-운-니사는 나중에 자한기르 황제의 황비 누르 자한이 되었다.
코람 왕자는 1612년(이슬람력 1021년)에 결혼하기 위해 5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 날짜는 행복한 결혼을 보장하기 위해 궁정 점성술사들이 가장 유리하다고 선택한 날이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긴 약혼 기간이었다. 그러나 샤 자한은 먼저 페르시아인 공주인 칸다하리 베굼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위대한 이스마일 1세의 고손녀였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첫 딸을 낳았다.
1612년, 20세의 코람은 궁정 점성술사들이 택한 날에 뭄타즈 마할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행복했으며, 코람은 그녀에게 헌신했다. 그들은 14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 7명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이름 | 어머니 | 생몰년도 | 비고 |
---|---|---|---|
파르헤즈 바누 베굼 | 칸다하리 베굼 | 1611년 8월 21일 - 1675년 | 샤 자한의 첫째 자녀로, 그의 첫째 왕비 칸다하리 베굼의 유일한 자녀였다. 미혼으로 사망했다. |
후르-울-니사 베굼 | 뭄타즈 마할 | 1613년 3월 30일 - 1616년 6월 5일 | 샤 자한의 둘째 왕비 뭄타즈 마할 소생의 14명의 자녀 중 첫째였다. 3세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
자한아라 베굼 | 뭄타즈 마할 | 1614년 3월 23일 - 1681년 9월 16일 | 샤 자한의 가장 총애하고 영향력 있는 딸이었다. 어머니 사망 후 무굴 제국의 첫 영부인(파드샤 베굼)이 되었다. 미혼으로 사망했다. |
다라 시코 | 뭄타즈 마할 | 1615년 3월 20일 - 1659년 8월 30일 | 장남이자 태자. 샤 자한과 그의 누이 자한아라 베굼 공주가 후계자로 선호했으나, 제위 다툼에서 동생 아우랑제브에게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샤 슈자 | 뭄타즈 마할 | 1616년 6월 23일 - 1661년 2월 7일 | 계승 전쟁에서 살아남았으나 후에 사망했다.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로샨아라 베굼 | 뭄타즈 마할 | 1617년 9월 3일 - 1671년 9월 11일 | 자한아라 베굼 다음으로 샤 자한의 딸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계승 전쟁 중 아우랑제브 편에 섰다. 미혼으로 사망했다. |
아우랑제브 | 뭄타즈 마할 | 1618년 11월 3일 - 1707년 3월 3일 | 1657년 샤 자한의 병 이후 발생한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제6대 무굴 황제로 즉위했다. |
자한 아프로즈 | 이즈-운-니사 베굼 | 1619년 6월 25일 - 1621년 3월 | 샤 자한의 셋째 왕비 이즈-운-니사(아크바라바디 마할 칭호)의 유일한 자녀였다. 1년 9개월의 나이로 사망했다. |
이자드 바크슈 | 뭄타즈 마할 | 1619년 12월 18일 - 1621년 2/3월 | 영아기에 사망했다. |
수라야 바누 베굼 | 뭄타즈 마할 | 1621년 6월 10일 - 1628년 4월 28일 | 7세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
무명 아들 | 뭄타즈 마할 | 1622년 | 출생 직후 사망했다. |
무라드 바크슈 | 뭄타즈 마할 | 1624년 10월 8일 - 1661년 12월 14일 | 1661년 아우랑제브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루트프 알라 | 뭄타즈 마할 | 1626년 11월 4일 - 1628년 5월 13일 | 1년 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
다울라트 아프자 | 뭄타즈 마할 | 1628년 5월 8일 - 1629년 5월 13일 | 영아기에 사망했다. |
후스나라 베굼 | 뭄타즈 마할 | 1629년 4월 23일 - 1630년 | 영아기에 사망했다. |
가우하라 베굼 | 뭄타즈 마할 | 1631년 6월 17일 - 1706년 | 뭄타즈 마할은 1631년 6월 17일 부르한푸르에서 그녀를 낳다가 사망했다. 미혼으로 사망했다. |
뭄타즈 마할과의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지만,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은 정치적으로 수완이 좋은 여성이었으며 남편에게 중요한 조언자이자 친구 역할을 했다. 나중에 황후가 된 뭄타즈 마할은 국가 문제에서 남편의 자문을 받고, 회의(슈라 또는 디완)에 참석하며, 최종 초안의 공식 문서를 검토할 수 있는 황실 인장을 책임지는 등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샤 자한은 또한 그녀에게 독자적인 명령(후쿰)을 내리고 자신에게 임명할 권한을 부여했다.
뭄타즈 마할은 1631년 6월 7일 부르한푸르에서 공주 가우하라 베굼을 낳던 중 30시간의 고통스러운 분만 후 상당한 출혈을 동반한 산후 출혈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동시대 역사가들은 17세였던 자한아라 공주가 어머니의 고통에 너무 괴로워 신의 개입을 바라며 빈민들에게 보석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으며, 샤 자한은 "슬픔에 마비되어" 울음을 터뜨렸다고 기록했다. 그녀의 시신은 처음에는 샤 자한의 삼촌 다니얄 미르자가 타프티 강변에 건설했던 자이나바드라는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에 임시로 매장되었다. 그녀의 죽음은 샤 자한의 성격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나중에 그녀가 재매장된 경이로운 타지마할 건설에 영감을 주었다.
코람은 다른 부인들도 두었는데, 그 중에는 칸다하리 베굼(1610년 10월 28일 결혼)과 이즈-운-니사 베굼(1617년 9월 2일 결혼, 무자파르 후세인 미르자 사파위의 딸이자 샤나와즈 칸의 딸)이 있었다. 그러나 궁정 연대기에 따르면 이 결혼들은 정치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들은 단지 왕실 부인의 지위만을 누렸다. 코람은 또한 그의 모계 이복 사촌인 라토르 라지푸트 공주 쿤와리 릴라바티 데이지와 결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결혼은 코람이 아버지 자한기르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던 중 조드푸르에서 이루어졌다.
4.2. 자한아라 베굼과의 관계
1658년 샤 자한이 병에 걸렸을 때, 그의 딸 자한아라 베굼은 무굴 행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샤 자한과 자한아라 사이에 근친상간 관계가 있었다는 여러 비난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비난을 단순한 험담으로 일축하며, 사건의 목격자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역사가 K.S. 랄은 이러한 주장을 궁정인과 물라들이 퍼뜨린 소문으로 일축한다. 그는 아우랑제브가 자한아라를 왕실 죄수와 함께 아그라 성에 감금한 것과 하층민들이 소문을 확대한 것을 언급한다.
프랑스 의사 프랑수아 베르니에는 무굴 궁정에서 근친상간 관계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베르니에는 그러한 관계를 직접 목격했다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베네치아 여행가 니콜라오 마누치는 베르니에의 이러한 비난을 험담이자 "하층민들의 이야기"로 일축했다. 마누치는 더 나아가 베르니에가 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역사가 K.S. 랄이 주장하듯이, 이 소문은 궁정인과 물라들의 악의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자한아라를 아그라 성에 감금했다. 이 모든 정황은 아우랑제브가 소문을 공식적인 스캔들로 과장하는 데 연루되었음을 시사한다. 애초에 다라와 아우랑제브의 관계는 친밀하지 않았고, 자한아라는 다라의 편이었다. 계승 전쟁 동안 귀족과 궁정인들은 두 왕자를 지지하며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아우랑제브가 왕위를 차지하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다. 물라들도 아우랑제브와 친밀했다. 따라서 물라의 판결과 함께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 자한과 이복누이 자한아라의 이미지를 동시에 파괴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5. 쇠퇴와 감금
5.1. 질병과 계승 위기

1657년 9월, 샤 자한은 델리에서 중병에 걸려 일주일 이상 사경을 헤매었다. 그의 병의 원인 중 하나는 뭄타즈 마할의 사망 후 방탕한 생활과 최음제의 과다 복용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샤 자한은 장남 다라 시코의 간호로 겨우 회복에 성공했다. 회복 후 샤 자한은 델리에서 아그라로 거처를 옮겼고, 다라 시코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다라 시코가 굳이 사양했다.
다라 시코는 샤 자한이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자 제국의 태자였다. 그는 유능한 학자였으며,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수피 및 예수회 신부들과도 교류하는 등 종교적 관용의 입장을 취했다. 다라 시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본질이 같다고 보았으며, 힌두교 경전인 우파니샤드의 일부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고 6권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그는 문화에 관심이 많아 무굴 회화와 힌두스타니 음악의 후원자였다. 샤 자한은 다라 시코를 다른 아들들을 지방으로 보낸 것과 달리 자신의 곁에서 떠나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샤 자한의 중병 소식이 각지에 전해지면서, 그가 아직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네 아들들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샤 자한의 삼남 아우랑제브는 데칸 총독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는 다라 시코와는 대립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니 이슬람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우랑제브는 다라 시코가 제국에서 이슬람교를 배척하려 한다고 우려했으며, 아버지가 다라 시코를 편애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샤 자한의 차남 샤 슈자는 벵골 태수, 사남 무라드 바크슈는 구자라트 태수를 역임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능한 인물들이었지만, 샤 슈자는 향락에 빠져 있었고, 무라드 바크슈는 무용에는 뛰어났으나 판단력이 부족하고 쾌락을 좇는 인물이었다. 또한 샤 자한의 두 황녀도 각각 계승 후보자들을 지지하며 암암리에 다툼에 참여했다. 자한아라 베굼은 다라 시코를 지지했고, 로샨아라 베굼은 아우랑제브를 지지했다.
5.2. 계승 전쟁


샤 슈자는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행동하여, 부황의 병세가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11월에 제위를 선포하고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주화를 주조한 뒤 델리로 진군했다. 무라드 바크슈도 제위를 선포하고 수라트 성채에서 얻은 약탈품으로 재정을 확보한 뒤 델리로 향했다. 아우랑제브는 다른 형제들보다 신중했으며, 자신의 우위가 확실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적절한 때를 기다려 그는 동생 무라드 바크슈에게 자신이 이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면 펀자브, 카슈미르, 신드, 아프가니스탄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동맹을 맺었다.
1658년 2월, 다라 시코의 아들 술라이만 시코가 샤 슈자의 군대를 격파했다. 같은 달,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슈의 연합군도 황제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샤 자한은 술라이만 시코에게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면 전투를 시작하지 말라"고 명했다. 이는 샤 자한이 자신의 병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고,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슈가 실패하는 것을 확인한 후 전력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1658년 4월 15일, 다라 시코의 군대는 우자인 근교 날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슈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다르마트 전투). 전투 초반에는 자스와트 싱의 분투로 다라 시코 군이 우세했지만, 무라드 바크슈의 용맹함에 기가 꺾인 카심 칸이 도주하고, 자스와트 싱도 많은 부하를 잃으면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다라 시코는 이에 격분하여, 아우랑제브의 미르 줌라가 병력, 대포, 군자금을 제공했다며 그의 아들 무함마드 아미르 칸을 죽이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샤 자한이 만류하여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샤 자한은 다라 시코의 군대가 패배하고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슈의 연합군이 아그라로 진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국가의 모든 전력을 다라 시코에게 맡기고 모든 무장들에게 그를 따르도록 명령했다. 다라 시코의 군대는 아우랑제브의 군대처럼 장거리 이동으로 인한 피로가 없었고 대포 수도 훨씬 많았지만, 그에게 유리한 예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다라 시코가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으며, 그의 군대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인 자이 싱이 술라이만 시코와 함께 아그라로 진군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라 시코의 측근들뿐만 아니라 샤 자한까지도 아들 술라이만 시코의 군대가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 위험한 싸움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또한 샤 자한은 스스로 출전할 것도 제안했지만, 다라 시코는 이 역시 거부했다. 다라 시코는 아그라를 떠나기 전에 샤 자한을 만났는데, 샤 자한은 눈물을 글썽이며 엄한 어조로 "그러면 다라, 모든 것을 네가 결정한 대로 하고 싶다면, 가거라. 신의 축복이 너에게 있기를. 하지만 이 짧은 말만은 잘 기억해 두어라. 만약 싸움에 진다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했다.
5.3. 아그라 성에서의 감금

1658년 6월 8일, 다라 시코의 군대는 아그라 근처 사무가르에서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슈의 연합군과 격돌했다(사무가르 전투). 샤 자한은 전투가 시작되기 3, 4일 전까지 계속해서 그에게 술라이만 시코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그동안 진지를 구축할 유리한 장소를 선택하라고 서신으로 전했다. 그러나 다라 시코는 초반에는 유리했으나, 한 무장에게 기만당해 결국 군대가 궤멸되었고,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슈의 승리로 끝났다. 다라 시코는 샤 자한을 만나러 아그라로 향했지만, 아버지의 엄한 말을 떠올리며 만나려 하지 않았다. 다라 시코는 아버지에게 사절을 보낼 생각도 없이, 누이 자한아라 베굼에게 몇 차례 사절을 보낸 후 아그라에서 도주했다.
샤 자한은 다라 시코를 버리지 않고, 한 명의 신뢰할 수 있는 환관을 사자로 보내 술라이만 시코와 합류할 것을 조언하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설득했다. 심지어 델리로 가라고 말하며, 델리에 있는 왕궁 마구간에 1,000필 정도의 말이 있으니, 그곳 사령관에게 코끼리와 군자금을 준비하도록 명령하겠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샤 자한의 예상과 달리, 술라이만 시코의 군대는 스스로 붕괴되어 다라 시코가 술라이만 시코와 합류하는 일은 없었다. 다라 시코는 라호르로, 술라이만 시코는 우타라칸드 주의 슈리나가르로 향하며 각각 세력을 재건하려 했다.
사무가르 전투 며칠 후, 아우랑제브와 무라드 바크슈는 아그라 시내로 입성했다.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에게 사자를 보내 애정과 복종의 뜻을 전하며, 자신은 단지 아버지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샤 자한은 일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염려했고, 아우랑제브가 제위에 대한 비범한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게 자신을 알현하러 오라고 명령했지만, 아우랑제브는 그날이 되면 다음 날로, 하루하루 일정을 미뤘다.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의 곁에 자한아라 베굼이 있어 그녀의 지시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자신이 체포될까 경계했다.
이처럼 교착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을 알현하겠다며 대리인으로 장남 술탄을 아그라 성으로 보냈다. 술탄은 성의 보초들을 비롯한 성 내의 사람들을 가차 없이 몰아내고, 많은 부하들이 밀려들어 성벽을 점거했다. 샤 자한은 술탄의 진심을 떠보기 위해 "만약 네가 나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나를 섬긴다면 너를 왕으로 삼겠다"고 왕관과 꾸란에 맹세하며 약속했다. 그러나 술탄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감금될까 두려워 샤 자한을 만나지 않고 아버지 아우랑제브의 명령으로 왔다고 전했다.
1658년 6월 22일, 아우랑제브가 임명한 아그라 성 사령관 이티바르 칸은 샤 자한을 자한아라 베굼 등의 여성들과 함께 성 안쪽에 유폐시켰고, 많은 문을 울타리로 막았다. 또한 샤 자한은 누구와도 서신을 주고받지 못하게 했고, 허가 없이 거실에서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에게 짧은 편지를 써서 "샤 자한이 아우랑제브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다고 하지만, 다라 시코에게 루피 금화가 실린 두 마리의 코끼리를 보내어 태세를 재정비하게 하려 한다. (...) 이 형이야말로 불행의 원인이며,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직접 찾아갔을 것이고, 좋은 아들이 기대할 수 있는 효도를 아버지에게 다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수아 베르니에에 따르면, 샤 자한이 루피 금화가 실린 두 마리의 코끼리를 보낸 것은 다라 시코가 퇴거한 그날 밤의 일이었고,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이 다라 시코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를 압수했다고 전한다.
아우랑제브는 이처럼 샤 자한을 포로로 잡고,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성 내의 국고와 대량의 폭약을 얻었다. 아우랑제브는 샤이스타 칸에게 아그라를 맡기고, 무라드 바크슈와 함께 다라 시코를 추격하기 위해 아그라를 출발했다.
이후 아우랑제브는 무라드 바크슈와 발을 맞춰 델리로 진군하던 중, 어느 날 밤 마투라에서 연회를 열었다. 아우랑제브는 술에 취해 잠든 무라드 바크슈를 배신하여 체포하고, 그의 군대를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7월 31일, 아우랑제브는 델리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제위를 선포했다. 그는 '세계를 빼앗은 자'를 의미하는 "아람기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샤 자한"이 '세계의 황제'를 의미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뭄타즈 마할의 장녀이자 샤 자한의 가장 총애하는 딸인 자한아라 베굼은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8년간의 감금 생활을 함께하며 노년의 아버지를 간호했다. 계승 전쟁 이후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과 단 한 번도 직접 만나지 않았으나 서신 교환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우랑제브의 서신 내용은 다라 시코에 대한 편애에 대한 불만으로, 아버지가 형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오만한 어조의 불평이었다.
또한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게 개인 보석을 빼앗기기도 하여, 그의 소유인 바이올린 수리나 변변한 신발을 구하는 데도 돈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불편한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샤 자한은 장녀 자한아라 베굼을 비롯한 왕실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외로운 만년을 보내지는 않았다. 특히 장녀 자한아라 베굼은 헌신적으로 아버지를 보살폈다.
6. 죽음과 매장
6.1. 말년
1666년 1월, 샤 자한은 계승 전쟁 때 겪었던 병이 재발하여 침상에 누워 점차 쇠약해졌다.
6.2. 죽음과 장례

샤 자한은 1666년 1월 22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그는 황실 여성들, 특히 만년의 황비 아크바라바디 마할을 자한아라에게 부탁했다. 그는 샤하다(لا اله الا الله라 일라하 일랄라아랍어)와 꾸란 구절을 암송한 뒤 세상을 떠났다.
샤 자한의 예배 인도자 사이이드 무함마드 카나우지와 아그라의 카지 쿠르반이 성으로 와서 그의 시신을 근처 홀로 옮겨 씻기고 수의를 입힌 후 백단향 관에 안치했다. 자한아라 베굼은 고명한 귀족들이 샤 자한의 시신을 운반하고 아그라 시민들과 관리들이 빈민과 궁핍한 이들을 위해 동전을 뿌리는 장례 행렬을 포함한 국장을 계획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그러한 과시를 허용하지 않았다.
6.3. 매장

샤 자한의 시신은 타지마할로 옮겨져 그가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의 시신 옆에 안장되었다. 장례 관습에 따라 궁성의 벽을 허물어 그 틈으로 시신을 강가의 배로 옮겼다. 그리고 그 시신은 강을 건너 사랑하는 황비가 잠든 타지마할로 운반되어 뭄타즈 마할의 유해 옆에 안치되었다.
7. 유산과 역사적 평가
7.1. 건축 유산
샤 자한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건설된 웅장한 건축물들의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의 통치는 무굴 건축의 황금기를 열었으며, 그는 무굴 건축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사랑하는 황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지은 타지마할이다. 타지마할 외에도 붉은 성, 아그라 성의 대규모 부분, 자마 마스지드, 와지르 칸 모스크, 모티 마스지드, 샬리마르 정원, 라호르 성의 일부, 마하밧 칸 모스크, 미니 쿠툽 미나르, 자한기르 영묘, 타타의 샤 자한 모스크 등이 있다. 그는 또한 공작새 옥좌를 제작했다. 이 건축물들은 무굴 제국과 인도 문화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 가치는 매우 높이 평가된다.
7.2. 사회정치적 영향
샤 자한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동쪽의 아삼에서 서쪽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북쪽의 티베트 고원 남단, 남쪽의 데칸 고원 중앙부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로 인해 그의 시대에 제국의 세입은 악바르 시대의 두 배로 증가했으며, 이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성 향상에서도 기인했다. 제국의 영토 확장과 더불어 귀족의 수도 증가하여, 1640년대에는 악바르 시대의 두 배인 443명에 달했다. 이 중 73명의 최고위 귀족이 제국 세입의 37%를 관리했고, 샤 자한의 네 아들은 8.2%를 관리했다. 또한, 제국 상위 귀족의 20%가 힌두교도였으며, 73명이 라지푸트 출신, 10명이 마라타 출신이었다. 역사학자 프랜시스 로빈슨은 마라타족이 제국 귀족층에 편입된 것은 데칸 지역에서 제국의 영토 확장에 성공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황제와 귀족의 관계에서는 '디니 이라히' 종교를 존중하던 관념이 종식되고 '황제의 자손'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확산되었다. 귀족들은 아들이 태어나면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고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귀족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뿐만 아니라 무훈, 페르시아식 예절, 교양인에게 필요한 미술 지식에도 중점을 두었다. 샤 자한의 통치 기간 동안 막대한 자금이 군사 행동과 건설 사업에 투입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 초부터 축적된 준비금 9500.00 만 INR가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은 화폐였고 절반은 보석이었다.
7.3. 비판과 논란
샤 자한의 통치에는 여러 비판과 논란이 따른다. 첫째, 그의 종교 정책은 할아버지 악바르의 종교 관용 정책에서 벗어나 이슬람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 비무슬림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힌두 사원 파괴(바라나시에서 76개의 힌두 사원 파괴), 기독교 교회 철거, 그리고 포로들에 대한 강제 개종 시도 등이 그 예이다. 둘째, 사치스러운 건축 사업과 끊임없는 군사 원정으로 인한 막대한 지출은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 부담으로 작용하여 국가의 경제적 안정을 저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셋째,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잔혹한 왕위 계승 전쟁은 제국 내부의 불안정을 초래했으며, 특히 장남 다라 시코, 샤 슈자, 무라드 바크슈의 처형과 아우랑제브에 의한 자신의 감금은 그의 통치 말년을 비극으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딸 자한아라 베굼과의 관계에 대한 근친상간 소문은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부인되지만, 당대 여행가들의 언급과 아우랑제브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7.4. 후대에 미친 영향
샤 자한이 남긴 건축물들은 무굴 제국 예술의 정점을 상징하며, 후대 통치자들과 예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주었다. 그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와 경제적 안정은 제국의 번영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종교 정책은 후대의 아우랑제브에게 영향을 미쳐, 제국의 종교적 균형을 깨고 내부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또한, 그의 재위 말년에 벌어진 잔혹한 계승 전쟁은 무굴 제국의 안정성을 해치고 이후 황제들의 권력 약화를 초래하는 선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