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쿠마 사마타(佐久間 左馬太사쿠마 사마타일본어, 1844년 11월 19일 ~ 1915년 8월 5일)는 일본 제국 육군의 육군 대장이자 제5대 대만 총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나가토국(현재의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오무라 마스지로에게 서양 병학을 배우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제2차 조슈 정벌, 보신 전쟁, 사와의 난, 타이완 출병 (1874년), 세이난 전쟁 등 일본 국내외의 주요 군사 작전에 참전하며 경력을 쌓았다. 특히 청일 전쟁에서는 제2사단장으로서 웨이하이 전투에 참여하여 전과를 올렸다.
사쿠마 사마타는 1906년부터 1915년까지 약 9년간 대만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대만의 식민 통치를 주도했다. 재임 중 그는 대만의 아타얄족, 부눈족, 트루쿠족 등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강경한 '이번 사업(理蕃事業, 평정 및 통제 정책)'을 추진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원주민 지역으로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화롄항 확장, 종관 철도 완성, 아리산 산림 벌채 등 대만의 사회 경제적 인프라 개발에도 힘썼으며, 야구를 대만에 전파하기도 했다. 그는 총독 퇴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과 함께 원주민 평정 정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공존하는 인물로 기억된다.
2. 생애 초반 및 군 경력
사쿠마 사마타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서 초기 생애부터 다양한 국내외 군사 작전에 참여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는 서양 병학을 배우고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전쟁들을 거치며 육군 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2.1. 출생과 성장
사쿠마 사마타는 1844년 11월 19일 (덴포 15년 10월 10일)에 나가토국 아부군(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조슈번의 번사(사무라이)인 오카무라 마고시치(岡村孫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사쿠마 가문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문하에서 서양 병학을 배웠고, 이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2.2. 초기 군 복무 및 국내외 참전
사쿠마는 1866년 (게이오 2년) 도쿠가와 막부가 조슈 번에 대항하여 일으킨 제2차 조슈 정벌 당시 조슈 번의 게이슈구(芸州口) 전투에 기헤이타이의 가메야마 부대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번을 수비했다. 이어서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전환점인 보신 전쟁에 참여하여 아즈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1872년 (메이지 5년), 사쿠마는 창설 초기 단계의 일본 제국 육군에 육군 대위로 임관하여 서해 진대(西海鎮台) 소속으로 근무했다. 1874년 2월 사가의 난 진압 작전에 참여하여 구마모토성에서 병력을 이끌었다. 그 후 같은 해 타이완 출병 (1874년)에 종군했는데, 5월 22일 1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원주민의 기습을 받아 석문 전투를 시작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77년 (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에서는 보병 제6연대장으로서 참전했다. 그는 1878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1881년 2월에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센다이 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3. 주요 지휘관 역임
1885년 5월, 사쿠마는 보병 제10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886년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화족 제도에 따라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사쿠마는 제2사단장으로서 참전하여 웨이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웨이하이 점령을 지휘했다. 전쟁이 끝난 1895년 5월에는 점령지 총독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해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고 자작으로 승작했다. 이후 근위사단장과 중부 도독(中部都督)을 거쳐 1898년 9월 28일에는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잠시 휴직 기간을 거친 후, 1904년 5월 1일 도쿄 위수 총독을 역임했다.
3. 대만총독 재임기

사쿠마 사마타는 1906년 4월 11일 제5대 대만 총독으로 부임하여 1915년 5월까지 약 9년간 재임하며 대만의 식민 통치를 주도했다. 그는 역대 총독 중 가장 오랜 기간 재임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대만은 강경한 원주민 정책과 함께 사회 경제적 개발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3.1. 식민 통치 정책
한족 주민들의 무장 저항이 종식된 후, 식민 당국은 산지에 거주하는 타이완 원주민 부족들을 통제하는 데 주력했다. 사쿠마가 총독으로 선택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1874년 타이완 출병에 참여했던 군사적 경험 때문이었으며, 그의 임무는 일본의 지배력을 원주민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사쿠마는 재임 기간 동안 원주민 부족에 대한 강경한 '이번 사업(理蕃事業)'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주로 무력을 사용하여 원주민의 저항을 평정하고 이들을 일본의 통치하에 편입시키려는 정책이었다. 그는 특히 아타얄족, 부눈족, 트루쿠족에 대한 여러 차례의 무장 캠페인을 직접 지휘했다. 이러한 '평정 작전'을 통해 일본은 원주민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지만, 이는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자율성을 크게 침해하고 많은 인명 피해를 야기하여 인권 침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통치 기간에 '이번 사업'은 성공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평가되지만, 이는 일본 제국의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본 것이며 원주민에게는 고통과 억압의 시기였다.
3.2. 사회 경제적 개발
사쿠마 사마타 총독은 식민 통치를 강화하는 동시에 대만의 사회 경제적 인프라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대만 동부 해안의 개발, 특히 화롄항의 확장과 타이루거 협곡 지역의 개발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만 전역을 연결하는 종관 철도의 완공에도 힘썼으며, 이는 대만의 물류 및 통신망을 크게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재임 중에는 박물관 개설, 아리산 삼림 벌채 사업 등도 추진되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1910년에 야구를 대만에 도입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프라 구축과 경제 개발 노력은 대만의 근대화에 기여했지만, 그 목적이 궁극적으로 일본 제국의 자원 수탈과 효율적인 식민 통치에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4. 연보
사쿠마 사마타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 1872년 (메이지 5년) 4월 8일 - 육군 대위로 초임
- 1874년 (메이지 7년) 4월 5일 - 구마모토 진대 참모장
- 1875년 (메이지 8년) 4월 14일 - 보병 제6연대장
- 1878년 (메이지 11년) 11월 21일 - 육군 대령 승진
- 1881년 (메이지 14년) 2월 7일 - 육군 소장 승진, 센다이 진대 사령관
- 1885년 (메이지 18년) 5월 21일 - 보병 제10여단장
- 1886년 (메이지 19년)
- 3월 16일 - 센다이 진대 사령관 (재임)
- 12월 23일 - 육군 중장 승진
- 1887년 (메이지 20년) 5월 24일 - 남작 서훈
- 1888년 (메이지 21년) 5월 14일 - 제2사단장
- 1895년 (메이지 28년)
- 4월 5일 - 점령지 총독
- 8월 20일 - 자작 승작
- 1896년 (메이지 29년)
- 5월 10일 - 근위사단장
- 10월 14일 - 중부 도독(中部都督)
- 1898년 (메이지 31년) 9월 28일 - 육군 대장 승진
- 1902년 (메이지 35년) 10월 29일 - 휴직
- 1904년 (메이지 37년) 5월 1일 - 도쿄 위수 총독
- 1906년 (메이지 39년) 4월 11일 - 대만 총독
- 1907년 (메이지 40년) 9월 21일 - 백작 승작
- 1915년 (다이쇼 4년) 5월 1일 - 대만 총독 사임 및 퇴역
- 1915년 (다이쇼 4년) 8월 5일 - 사망
5. 영전 및 서훈
사쿠마 사마타는 평생에 걸쳐 일본 제국으로부터 다양한 훈장과 작위를 수여받았다.
날짜 | 서훈 내용 |
---|---|
1882년 11월 1일 | 훈3등 욱일중수장 |
1886년 10월 28일 | 종4위 |
1887년 5월 24일 | 남작 작위 수여 (초대 사쿠마 가문) |
1887년 11월 25일 | 훈2등 욱일중광장 |
1889년 11월 25일 | 대일본 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
1895년 8월 20일 | 자작으로 승작, 훈1등 욱일대수장 |
1895년 11월 18일 | 메이지 27·28년 종군기장 (청일 전쟁) |
1895년 12월 20일 | 정3위 |
1901년 1월 31일 | 종2위 |
1906년 4월 1일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 (러일 전쟁) |
1907년 9월 21일 | 백작으로 승작 |
1909년 9월 20일 | 정2위 |
6. 말년과 사망
사쿠마 사마타는 1915년 5월 1일, 약 9년간의 긴 대만 총독 재임 기간을 마치고 퇴역했다. 퇴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15년 8월 5일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는 셋째 아들인 사쿠마 슌이치(佐久間 俊一사쿠마 슌이치일본어)가 가문의 작위를 계승했다. 슌이치의 장녀 미에코는 대만의 인프라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가타 긴자부로(賀田金三郎)의 장남 가타 모토오(賀田以武)와 결혼했다.
7. 평가 및 유산
사쿠마 사마타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서 그리고 대만 총독으로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업적은 긍정적인 측면과 비판적인 측면이 공존하며, 특히 식민 통치 방식에 대한 논란이 크다.
7.1. 긍정적 평가
사쿠마 사마타는 청일 전쟁에서의 웨이하이 전투 지휘 등 군사적 공헌을 통해 일본의 대외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대만 총독 재임 시기에는 동부 해안 개발, 화롄항 확장, 타이루거 협곡 지역 개발 등 대만의 사회 경제적 인프라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종관 철도의 완성과 도시 인프라 정비, 박물관 개설, 아리산 삼림 벌채 사업 등은 대만 근대화의 일부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1910년 대만에 야구를 전파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대만 식민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고 일본의 대만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7.2. 비판 및 논란
사쿠마 사마타에 대한 가장 큰 비판과 논란은 그의 강경한 원주민 평정 정책인 '이번 사업(理蕃事業)'에 집중된다. 그는 원주민을 '미개하고 비문명적'으로 간주하며,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아타얄족, 부눈족, 트루쿠족 등에게 무력을 사용하여 폭력적인 진압 작전을 수행했다. 이러한 평정 작전은 수많은 원주민의 희생을 야기했으며, 그들의 전통적인 사회와 문화를 파괴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했다.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성공적인 통치'로 평가될 수 있지만, 이는 명백한 인권 침해와 폭력적인 지배였으며,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잔혹한 사례로 비판받는다.
7.3. 기념 및 추모
사쿠마 사마타는 사망 후 국가신도의 신으로서 모셔지게 되었다. 그를 기리기 위한 신사들이 일본과 대만에 건립되었다.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는 사쿠마 신사(佐久間神社)가 세워져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대만 타이베이시에도 사쿠마 신사가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고 재건하려는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대만 화롄현에도 사쿠마 신사가 있었으나, 이곳 역시 현재는 폐사되었다.
8. 같이 보기
- 대만일치시기
- 타이완 원주민
- 일본 제국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