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카이 사부로(坂井 三郎사카이 사부로일본어)는 1916년 8월 26일 일본 사가현에서 태어나 2000년 9월 22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한 일본 제국 해군 소속의 전투기 조종사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해군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종전 시 최종 계급은 해군 중위였다. 공식 기록상 그의 공중전 격추수는 28기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그의 공동 저술가 마틴 케이딘(Martin Caidin)은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서 64기의 격추수를 주장하여 논란이 있었다. 사카이는 특히 과달카날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귀환한 일화로 유명하며, 전쟁 후에는 인쇄업을 운영하며 민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전쟁 경험과 인생관을 담은 여러 저서를 출판했으며, 『대공의 사무라이』는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저서 내용과 실제 기록 간의 불일치, 고스트라이터 논란, 그리고 전후 특정 사회 활동 참여 등으로 인해 다양한 비판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문서는 그의 초기 생애부터 군 경력, 전후 활동, 그리고 그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를 포괄적으로 다룬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사카이 사부로는 사가현에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해군에 입대하여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사카이 사부로는 1916년 8월 26일 일본 사가현 사가시 니시요가초에서 농부인 사카이 하루이치와 히데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 가쓰사부로(勝三郎)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사카이 가문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참전했던 사무라이 가문이었으나, 1871년 폐번치현 이후 농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사카이가 5세 때 가족은 밤중에 도망치듯 할아버지 집을 떠나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28년 가을, 36세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어머니는 홀로 7명의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보다 못한 친척 백부가 그의 학비를 대주며 도쿄로 보내 아오야마 학원 중등부에 진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카이는 학업 성적이 부진하여 낙제하고 중등부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뒤, 약 2년간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빠른 것에 대한 동경심이 있어 기수가 되려 했으나, 본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던 중 같은 니시요가촌 출신인 사세보 해군항공대 소속 히라야마 고로(平山五郎) 해군 대위가 조종하는 비행정이 고향 상공을 저공 비행하는 모습을 농작업 중에 올려다보면서 비행기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다. 이후 '해군소년항공병' 모집 포스터를 보고 두 번 응시했으나 불합격했다.
2.2. 해군 입대와 조종사 훈련
비행기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에 1933년 5월 1일 16세의 나이로 일본 제국 해군 사세보 해병단에 4등 수병으로 입대했다. 사카이는 당시 신병 시절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하사관들은 훈련 중 규율을 위반하거나 실수를 저지른 신병들에게 가혹한 구타를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징계를 받거나 훈련에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하사관에게 침대에서 끌려나와 '벽에 똑바로 서라! 숙여라, 신병 사카이!'라고 고함을 들었다. 그는 '내가 너를 미워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너를 좋아하고 훌륭한 수병이 되기를 원해서 그러는 것이다. 숙여라!'라고 말하며 큰 나무 막대기로 내 엉덩이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고통은 끔찍했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타격에 때로는 정신을 잃기도 했다. 의식을 잃는다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사관은 그저 차가운 물 한 양동이를 내 몸에 퍼붓고는 자세를 다시 잡으라고 고함쳤고, 내가 잘못을 고칠 것이라고 확신할 때까지 '훈련'을 계속했다."
다음 해 훈련을 마친 사카이는 3등 수병으로 졸업하고, 전함 키리시마에서 1년간 복무했다. 1935년, 그는 요코스카의 해군포술학교 경쟁 시험에 합격했다. 다음 해 200명 중 2등으로 졸업한 그는 1936년 2등 수병으로 진급하여 전함 하루나에 배치되어 주포의 포수로 근무했다. 당시 대함거포주의 시대에 전함의 주포 포수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사카이는 해군 입대 목표였던 조종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상급자에게 밝혀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주포 포수 보직에서 해제되어 함선 밑바닥에서 장약이나 포탄을 다루는 탄고원(彈庫員)이라는 고된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이 제한으로 마지막 기회였던 조종 연습생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1937년 3월 10일, 가스미가우라 항공대에 입대하여 4월 1일 첫 비행을 했다. 그는 조종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어서 단독 비행 허가를 받은 것이 졸업을 앞둔 마지막 시기였다. 졸업 후 연장 교육에서의 사격 훈련 역시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수석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한 결과, 희망대로 함상 전투기 조종사로 선발되었고, 같은 해 11월 30일 제38기 조종 연습생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식에서는 쇼와 천황을 대신한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으로부터 은사의 은시계를 수여받으며 해군 전투기 조종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사에키 해군항공대에서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연장 교육을 받았으며, 이 시기에 3기 선배인 하라다 가나메와 공중전 훈련 상대로 겨루며 기량을 연마했다. 1938년 4월 9일, 오무라 해군항공대에 배치되었고, 5월 11일에는 3등 항공병조로 승진하여 가오슝 해군항공대 소속이 되었다.
3. 군 경력
사카이 사부로는 중일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 걸쳐 다양한 전선에서 활약하며 일본 해군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명성을 쌓았다.
3.1. 중일 전쟁 참전
1938년 9월 11일, 사카이는 제12항공대에 배속되어 근무지인 중국 주장으로 이동했다.

1938년 10월 5일, 사카이는 한커우 공습에 참가하며 첫 출격을 경험했다. 그는 지휘관 아이오 다카히데(相生高秀) 대위의 3번기로 96식 함상 전투기에 탑승하여 중화민국 국군의 I-16 전투기 1기를 격추했다. 1939년 5월 1일, 2등 항공병조로 승진했으며, 같은 달 주장 기지에서 난창 기지 공격에 참가했다. 6월에는 점령한 난창 기지로 진출했다. 10월 3일, SB 폭격기 12기 편대가 한커우 기지를 공습하자 사카이는 요격에 나서 단독으로 이창 상공 8000 m까지 추격하여 1기를 격추했다. 11월에는 상하이 기지로 이동했다. 1940년 5월, 윈청 기지로 진출하여 상공 초계 임무 등을 수행했다.
1940년 6월, 오무라 항공대에 배속되어 일본 본토로 귀환했다. 8월, 요코스카 해군항공대에서 열린 신형 기체 취급 강습회에서 막 등장한 0식 함상 전투기(제로센)를 처음 보았다. 1940년 10월 17일, 가오슝 해군항공대에 배속되었고, 탑승기가 96식 함상 전투기에서 제로센으로 변경되었다. 사카이는 나고야 비행장에서 제로센을 인계받아 가노야 항공기지를 경유하여 타이완 가오슝 공군 기지로 공수하는 방식으로 10월 24일 가오슝 기지에 착임했다. 그는 제로센에 대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격투 성능과 연료 고갈 걱정 없이 공중전에 집중할 수 있는 긴 항속거리(≒체공 시간)를 높이 평가했다. 이 때문에 날개폭을 깎아 속도를 높이고 다른 성능이 저하된 제로센 32형이 도입되자, 조종성 및 격투전 관점에서 개악(改悪)이라고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1941년 봄, 사카이는 가오슝 항공대의 제로센 18기 중 1기로 하이난섬의 싼야 기지로 전진 배치되었다. 이어서 사카이를 포함한 12기는 육군의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호응하는 형태로 하노이 비행장으로 진출했다.
1941년 4월 10일, 제12항공대에 배속되었고, 12항공대의 요코야마 다모쓰 대위의 요청으로 중국 대륙에 재진출했다. 한커우 기지에서 화중 작전에 참가했다. 5월 3일, 충칭 공격에 출격했다. 6월 1일, 1등 비행병조로 승진하여 7월 9일 량산 공격, 7월 27일 청두 공격에 참가했다. 8월 11일, 제로센 16기, 1식 육상 공격기 7기 편대가 참여한 청두 여명 공습에 참가했다. 공격에 참가하는 전투기들은 전날 미리 한커우 기지에서 이창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야간에 이륙한 후, 한커우에서 출격한 1식 육상 공격기와 합류했다. 사카이는 중화민국 국군의 I-15 전투기 1기를 격추했는데, 이것이 제로센으로 달성한 첫 격추 기록이다. 8월 21일, 다시 청두 공격에서 I-16 전투기 1기를 격추했다. 소련으로부터의 원장 루트(북방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파견된 제로센 18기 중 1기로 윈청 기지로 진출했다. 8월 25일, 제로센 7기 중 1기로 란저우 기지 공격에 출격하여 상공을 제압했다. 며칠 후, 더 깊은 내륙의 시닝으로 제로센 12기가 공격에 참가했다. 8월 31일, 민산 산맥의 계곡이라는 지형적으로 상공에서의 공격이 어려운 쑹판 기지 공격에 지휘관 신교 에이시(新郷英城) 대위 이하 제로센 4기가 참가했으나, 기상 불량으로 회항했다. 사카이는 중일 전쟁에서 실전은 몇 번밖에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3.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1년 10월, 사카이는 타이완섬의 타이난 기지에 신설된 타이난 해군항공대(이하 타이난 공군)에 배속되었다. 사카이는 타이난 공군에서 선임 하사관 조종병이었다. 타이난 공군에서는 하사관으로만 구성된 소대도 편성되었으며, 사카이는 처음으로 동료기 조종사들을 갖게 되었다. 전후 사카이는 하사관으로만 구성된 소대는 자신의 부대가 유일했으며 주목받았다고 말했지만, 타이난 공군에는 유사한 소대가 여러 개 존재했다. 사카이는 부대장 고조노 야스나 중좌의 부탁으로 신임 상관인 사사이 준이치 중위의 전투 교육을 맡았다고 한다. 또한 한밤중에 현지 주민의 닭을 훔치다가 고조노 야스나에게 "아무리 일본 해군의 군인이라도 닭 한 마리라도 원주민의 것을 약탈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며 꾸중을 들었지만, 그 후에도 돼지를 훔치러 간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어떤 때는 군에서 금지된 마약 성분이 포함된 카나카 담배를 피우며 다른 하사관, 병사들에게도 그것을 권하다가 상관인 사사이에게 발각되어 "그것은 카나카가 아닌가. 그것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에는 아편이 들어있다"라고 주의를 받았음에도 사카이는 그만두지 않고, 타이난 공군 사령부의 장교들에게만 고급 담배가 지급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자 사사이는 분노로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찡그린 채 떠났다가, 장교들에게 지급된 일반 담배를 가득 담은 상자를 가져와 "모두 나눠 가져라. 그런 시시한 담배는 버려라"라고 지시했고, 사카이의 뜻대로 되었다고 한다.
3.2.1. 동남아시아 전선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타이난 공군은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공격에 참가했다. 제1중대(신교 에이시 대위 지휘)의 제3소대(사카이 1등 비행조병, 요코가와 2등 비행조병, 혼다 3등 비행조병)의 소대장으로서 타이난 기지를 출격했다. 사카이는 타이난 공군 제로센 36기가 호위한 가오슝 해군항공대의 1식 육상 공격기 27기, 제1항공대의 96식 육상 공격기 27기의 폭격 성공 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비행장 500 m 상공에서 미 육군 제21추격비행대의 P-40 워호크 전투기와 첫 공중전을 벌였다. 사카이는 제로센 특유의 왼쪽 급선회로부터의 일격으로 P-40 전투기를 크게 손상시켰고, 이 기체는 활주로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전후 1991년 5월, 미국 텍사스주에서 이 기체에 탑승했던 샘 그라시오(Sam Gracio) 중위와 만나 이 공중전의 기억이 일치했음을 확인했다.
1941년 12월 10일, 일본은 '하늘의 요새'라 불리던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를 처음으로 격추했다. 전후 사카이가 AP통신 도쿄 지국장 러셀 브라이언(Russell Bryan)에게 이 격추자가 사카이 자신이며, 추락할 때까지 기체를 확인하지 않고 "전과 미확인"으로 보고했다고 말했고, 러셀이 "그것은 격추였다"고 답한 회견 내용이 『일본 타임스』와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사카이는 당일 출격했지만, 당시 타이난 공군과 3공군의 자료에 기재된 B-17을 공격한 다수의 조종사들 중 사카이의 이름은 없다. 전투 행동 조서에 따르면, 교전한 도요다 미쓰오, 야마가미 쓰네히로, 기쿠치 도시히코, 이즈미 히데오, 노자와 사부로의 공동 격추이며, 사카이는 교전하지 않았다.
1942년 초, 사카이는 보르네오섬 타라칸섬으로 전진 배치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선에서 전투에 임했다. 일본군 사령부는 전투기 초계대에 무장 여부를 불문하고 조우하는 모든 적기를 격추하라고 지시했다. 사카이는 자와섬 상공에서 제로센으로 초계 비행 중, 적기를 격추한 직후 울창한 정글 위를 저공 비행하는 네덜란드 민간 DC-3 수송기를 만났다. 사카이는 처음에는 이 수송기가 중요한 인물들을 수송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조종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신호했지만, 조종사는 따르지 않았다. 사카이는 고도를 낮춰 DC-3에 접근했고, 창문 너머로 금발 여성과 어린 아이, 그리고 다른 승객들을 보았다. 그 여성은 아오야마 학원 중등부 시절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미국인 마틴 부인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명령을 무시하고 조종사의 앞을 지나가며 가라고 신호했다. 조종사와 승객들은 그에게 경례를 보냈다. 사카이는 이 만남에 대해 공중전 보고서에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사카이 사부로 공중전 기록』이 집필되던 1950년대는 맥아더 사령부가 전범 추적을 하던 시기였기에, 이에 얽히고 싶지 않아 당시로서는 사실과 다르게 썼다고 후일 밝혔다. 사카이의 주장과는 별개로, '해외 조사에서 기내에서 사카이 기를 보았던 네덜란드인 전직 간호사 생존이 확인되었고', '간호사가 '그 조종사를 만나고 싶다'며 적십자 등의 단체를 통해 조회하여 사카이와 재회했으며', '간호사가 사카이의 저서를 읽고 알게 되어 재회하여 날짜와 양측의 기억이 일치하고 서로의 무사를 기뻐했다'는 등의 상세 불명의 후일담이 다양한 형태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전투 행동 조서에 따르면, 저서에 기재된 2월 25일은 수송 선단 상공 직위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2월 18일, 25일 모두 수송기를 발견하지 못했고, 다른 날에도 사카이가 수송기를 발견한 출격 기록은 없다.
보르네오 전역에서 사카이는 질병으로 지상에 발이 묶이기 전까지 13기의 추가 격추를 달성했다. 세 달 후인 4월에 회복한 사카이 1등 비행조병은 뉴기니섬 라에에 주둔한 사사이 준이치 소위 휘하의 타이난 항공대 소대(중대)에 합류했다. 그 후 4개월 동안 그는 포트모르즈비에 기지를 둔 미국 및 호주 조종사들을 상대로 비행하며 대부분의 전과를 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이야기가 퍼졌지만, 사카이의 저서 『사무라이!』의 공동 저자인 마틴 케이딘(Martin Caidin)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로 판명되었다. 1942년 5월 16일 밤, 사카이와 동료 니시자와 히로요시, 오타 도시오는 호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는데, 니시자와가 카미유 생상스의 섬뜩한 『죽음의 무도』를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영감을 받은 니시자와가 적 비행장 상공에서 시범 비행을 할 아이디어를 냈다고 전해진다. 다음 날, 18기의 제로센이 포트모르즈비를 공격한 후, 이 세 조종사는 연합군 기지 상공에서 근접 편대로 세 번의 급선회를 선보였다. 니시자와는 이 공연을 다시 반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1829 m (6000 ft) 고도로 하강한 세 대의 제로센은 대공포화를 받지 않고 세 번 더 선회했다. 다음 날, 한 대의 연합군 폭격기가 라에 비행장 상공을 날아 긴 천 리본에 묶인 쪽지를 떨어뜨렸다. 한 병사가 쪽지를 주워 비행대장에게 전달했다. 내용은 (의역하자면) "귀 조종사 세 명의 멋진 곡예 비행에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에 우리 비행장 상공을 비행할 때는 따뜻한 환영을 준비해 두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비행대장은 격분하여 세 조종사를 어리석다고 질책했지만, 타이난 항공대의 세 선두 에이스는 니시자와의 『죽음의 무도』 공중 안무가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투 행동 조서에 따르면, 5월 17일에는 13기가 11시 45분에 라에로 귀환했고, 2기가 살라모아로 귀환했으며, 5월 27일 공격은 야마시타 마사오(山下政雄) 지휘의 제로센 27기가 라에에서 8시 50분에 발진하여 모레스비 상공에서 교전 후 11시 30분에 전기가 라에로 귀환했고, 또한 모두 사카이는 소대장이었으며, 세 명은 같은 중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사카이가 다른 저서에서 주장한 6월 25일에는 오타가 출격하지 않았다. 다른 날도 포함하여 일본군과 연합군 모두 사카이 일행이 별도 행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1942년 6월 9일, 내습하는 적 폭격기 요격에 참가했다.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이 하원의원 시절 B-26 머로더 폭격기에 동승하여 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격추당할 뻔했다고 말했지만, 존슨의 탑승기는 엔진 문제로 회항했으며, 의원의 안전을 우선시했기 때문인지 폭탄도 투하하지 않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는 공식 기록이 있다.
3.2.2. 태평양 전선 및 뉴기니
1942년 8월 3일, 사카이의 항공대는 라에에서 라바울의 비행장으로 재배치되었다.

8월 7일, 그날 아침 미국 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연합군이 처음 상륙하여 점령한 비행장은 일본군이 건설 중이던 곳으로, 나중에 연합군에 의해 헨더슨 비행장으로 명명되었다. 이 비행장은 과달카날 전역에서 몇 달간 지속된 전투의 초점이 되었는데, 미 공군이 일본군의 보급 시도를 방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고, 그 결과 타이난 항공대는 거의 매일 공중전을 벌여야 했다.
과달카날의 헨더슨 비행장에서 F4F 와일드캣을 조종하던 미 해병대는 존 태치와 에드워드 오헤어가 1941년에 개발한 새로운 공중전 전술인 "태치 위브"를 사용하고 있었다. 라바울에서 출격하던 일본 제로센 조종사들은 처음에는 이 전술에 당황했다. 사카이는 과달카날 와일드캣이 태치 위브를 사용할 때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처음으로 나카지마 다다시 중령은 적군의 유명한 더블 팀 기동을 만났다. 두 대의 와일드캣이 사령관의 비행기에 달려들었다. 그는 적 전투기의 꼬리를 잡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루먼의 동료기가 측면에서 포효하며 달려들기 전에 발사할 기회조차 없었다. 나카지마는 라바울로 돌아왔을 때 격분했다. 그는 안전을 위해 급강하하여 도망쳐야만 했다."
8월 7일, 사카이와 세 명의 조종사는 제임스 서덜랜드 소위(훗날 5기의 격추수를 기록한 에이스)가 조종하던 제5전투비행대대(VF-5)의 F4F 와일드캣을 격추했다. 사카이는 서덜랜드의 총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그의 자서전에서 이 결투를 회상했다. "필사적으로 나는 일격을 날렸다. 그러자 그루먼은 즉시 오른쪽으로 굴러가더니, 급격한 선회로 돌아서서 내 비행기를 향해 똑바로 상승했다. 이전에 적기가 이렇게 빠르거나 우아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매초 그의 총구가 내 전투기의 동체 아래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를 따돌리려 급회전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곧 숙련된 기동을 통한 도그파이트에 돌입했다. 두 조종사가 우위를 점했다가 잃기를 반복하는 오랜 전투 끝에 사카이는 서덜랜드의 와일드캣을 격추했고, 서덜랜드는 안전하게 낙하산을 타고 탈출했다. 사카이는 와일드캣의 견고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루먼을 파괴할 수 있다는 능력에 전적으로 확신했고, 내 7.7mm 기관총만으로 적 전투기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20mm 기관포 스위치를 '끔' 위치로 돌리고 접근했다. 어떤 이상한 이유에서인지, 내가 그루먼에 5, 600발의 탄약을 직접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는 떨어지지 않고 계속 날아갔다. 나는 이것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은 전에는 없었다. 나는 두 비행기 사이의 거리를 거의 그루먼에 손이 닿을 정도로 좁혔다. 놀랍게도 그루먼의 방향타와 꼬리 부분은 찢어진 낡은 천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비행기가 그런 상태이니 조종사가 계속 싸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 정도 총알을 맞은 제로센이라면 지금쯤 화염 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서덜랜드를 격추한 직후, 사카이는 와스프의 제71정찰비행대대(VS-71) 소속 더들리 애덤스(Dudley Adams) 중위가 조종하던 단독 SBD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다. 애덤스는 사카이의 캐노피에 총알을 맞혀 에이스의 머리를 간신히 비켜나갔지만, 사카이는 빠르게 우위를 점하여 애덤스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다. 애덤스는 탈출하여 살아남았지만, 그의 사수였던 해리 엘리엇(Harry Elliot)은 사망했다. 사카이에 따르면, 이것이 그의 60번째 격추였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해군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제로센과 교전했다고 보고한 폭격기 편대는 엔터프라이즈 소속으로, 칼 호렌버거(Carl Horenberger) 중위가 이끄는 제6폭격비행대대(VB-6)의 SBD 돈틀리스 8기 편대 하나뿐이었다. SBD 승무원들은 두 대의 제로센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는데, 그중 한 대는 직접 후방에서 접근하여 후방에 장착된 7.62mm 쌍열 기관총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후방 사수들은 제로센이 고통스럽게 급강하하자 격추로 주장했으며, 그 대가로 두 대의 비행기가 손상되었다(한 대는 심각하게).
3.2.3. 공중전 기량과 전과
사카이는 공중전에서 "최후의 의지는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고 말하며, 격투전에서 일대일 전투를 벌일 때는 철저한 근성 없이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버텨낸 자가 공중전에서 적을 이기는 사람이며, 힘들다고 느낄 때에는 호각이거나 오히려 이기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 힘든 마지막 순간에 지친 자가 격추되는 운명이라고 보았다. 또한 공중전의 철칙은 "먼저 보고", "적을 발견하면 자신은 쏠 수 있지만 상대는 쏠 수 없는 위치로 파고들어라", "공중전은 목양견의 움직임과 같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격투전에 돌입하면 자신의 특기인 기술로 상대를 끌어들이듯 조종해야 한다. 상대의 꼬리 부분이 시야에 들어오면 "내가 이겼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격투전이란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의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야 하며,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정된 물체 자르기'(据え物切り)야말로 공중전의 극의라고도 했다. 만년의 가토 히로이치로와의 인터뷰에서는 "격투전이란 위기에 처했을 때의 탈출법으로 이해하라", "공중전은 고정된 물체 자르기로 이해하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카이는 도그파이트에서는 자신도 위기에 처할 수 있으므로, 압도적으로 유리한 기습 일격으로 선수를 잡는 것을 선호했다. 저서에는 '좌선회 급강하'(左捻り込み)로 격추하는 묘사가 자주 나오지만, 최만년의 사카이는 실전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각지대이며, 눈치채고 급강하하는 적도 날개를 기울여 등면(背面)이 되어 절호의 표적이 되므로 후방 하단에서의 공격을 선호했다. 사카이는 공중전 공역에 진입했을 때의 정찰 방식을 "앞을 2, 뒤를 9"의 비율로 수색한다고 했다. 수평선 위쪽의 정찰에 능숙했다고 한다.
공중전 지도에 관해 사카이는 초보자에게는 상대에게 달라붙어 기총 발사 직전에는 후방을 확인하도록 가르치고, 그보다 숙련된 조종사에게는 쫓아오는 다음 적의 미래 위치를 상정하여 공격을 피하도록 가르치고, 더 숙련된 조종사에게는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되받아쳐서 반격으로 격추하도록 가르쳤다고 말했다.
시력에 관해서는, 사사이의 편지에 있는 "사카이 사부로라는 남자가 있는데, 한쪽 눈이 0.8이면서도 나보다 적을 더 빨리 발견하고..."라는 문구에 대해 질문받자 사카이는 중일 전쟁에서 한 번 부상당했을 때 파편이 눈동자 한가운데에 박혀서 바셀린으로 닦아내자 보이기 시작했지만, 왼쪽 눈이 조종사로서 최저인 0.8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른쪽 눈은 단련으로 시력이 계속 좋아졌고, 이번에는 과달카날에서 오른쪽 눈을 다치자 왼쪽 눈이 계속 잘 보이게 되었다고 했다. 사카이는 낮에 별을 보며 시력을 단련했다고 주장했지만, 가토 히로이치로는 "낮에 별이 보였다"는 것은 남쪽 섬에서 위를 향해 머리를 고정하고, 별자리표로 별의 위치를 미리 확인해둔 뒤 오후 2시에서 3시경에 5개나 6개의 별이 보인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제로센의 최대 무기는 20mm 기관포라는 설에 대해 사카이는 "20mm는 초속이 느리고, 오줌총알"이라며 낮은 평가를 내렸다. 명중률이 나쁜 데다 휴대 탄수도 7.7mm보다 적고, 탄창에 피탄되면 기체가 산산조각 날 정도의 유폭을 일으킬 위험을 지적했다. 그러나 "적기 날개 밑동에 한 발이라도 명중하면 날개가 두 동강 났다"고도 말하며, 그 위력에 대해서는 평가하기도 했다. 자신의 전과의 대부분은 기체 앞부분의 7.7mm 기관총으로 달성했다고 말했다. 또한 "날개 가장자리 가득 13mm 포탄을 뿜어내는 미국군 전투기가 부러웠다"고도 했다.
특공 작전에 나서는 특공대원들에게는 "늦든 빠르든 우리도 가야 한다. 늦고 빠름의 문제일 뿐이다. 다만, 어차피 갈 거라면 명중하고 싶다. 그러려면 내 말을 들어라. 절대로 (각도를) 너무 깊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격려를 보냈다. 전후 사카이는 이오지마에서 특공을 명령받은 것(실제로 명령받았다는 기록은 없음)에 대해, 특공을 명예롭게 여기는 한편 "왜 나에게"라는 심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특공으로 사기가 올랐다고 대본영은 발표했지만 새빨간 거짓말. '반드시 죽는' 작전으로 사기가 오를 리 없으며,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고도 답했다.
사카이의 공식 격추수는 28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저서 등에는 64기라는 격추수가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마틴 케이딘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진검 승부 횟수에서 따온 숫자이며, 작가 간다치 나오키의 취재에 대해 사카이는 "실제로 격추한 수는 64기보다 훨씬 적을 수도 있고, 더 많을 수도 있다"며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저서에 언급된 출격 횟수 200회도 사실과 다르며, 가토 히로이치로의 취재에서 사카이도 이를 인정했지만 "다만 공중전 횟수는 200회 정도 된다. 야구에 비유하면 한 경기에서 타석에 4번 정도 들어선다. 그러니 공중전도 여기서 한 발, 저기서 또 한 발이라는 식으로 횟수를 세기 어렵다", "이 숫자는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에 가토가 "하지만 그것으로 (격추) 최고 기수를 기록하셨다는 말씀이시죠"라고 질문하자 사카이는 "그래서 (격추) 확률이 매우 높았다", "결국 상대가 형편없었다"고 답했다.
전후 사카이는 자신의 동료기 조종사가 격추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2년 5월 12일 적에게 피탄된 고바야시 다미오(小林民夫)가 귀환 중 불시착하여 침몰(고바야시는 경상)한 기록이 있으며, 1944년 6월 24일에는 적 함상기 요격 전투에서 가시와기 미오(柏木美尾) 1등 비행조병과 노구치 히사시(野口壽) 비행장이 미귀환하는 등, 실제로는 사카이의 동료기들이 격추되거나 사망한 경우가 있었다. 이 "동료기를 죽게 한 적이 없다"는 자랑에 대해 "좋은 동료기를 만나 살아남은 것 아니냐. 하다못해 한마디 감사라도 했다면 더 존경받았을 텐데..."라는 비판도 있었다. 사카이의 "단 한 번도 비행기를 망가뜨린 적이 없다"는 주장도 1941년 12월 12일 전투에서 피탄되어 불시착했을 때 기체 수리가 필요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실제로는 기체를 손상시킨 적이 있다. 그는 저연비 항해에 능숙하며, 최저 연비 최고 기록 보유자라고 자부했다.
3.2.4. 부상과 회복
1942년 8월 7일, 사카이는 서덜랜드와 애덤스를 격추한 직후 툴라기섬 근처에서 선회 중인 8대의 항공기를 발견했다. 그는 이를 또 다른 와일드캣 편대로 오인하고 아래쪽 뒤에서 접근하여 기습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 비행기들은 사실 후방 기관총을 장착한 항공모함 기반 폭격기였다. 이러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공격을 너무 깊이 진행하여 물러설 수 없었고, 끝까지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카이의 전투 회고록에서는 이 항공기들을 TBF 어벤저로 식별하고 밀폐된 상부 터렛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그는 자신의 비행기가 반격으로 피탄되기 전 어벤저 2기(자신의 61번째, 62번째 격추)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이 격추는 그를 뒤따르던 제로센 조종사 세 명에 의해 확인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날 어벤저의 손실은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 해군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제로센과 싸웠다고 보고한 폭격기 편대는 엔터프라이즈 소속으로, 칼 호렌버거 중위가 이끌던 제6폭격비행대대(VB-6)의 SBD 돈틀리스 8기 편대 하나뿐이었다. SBD 승무원들은 두 대의 제로센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는데, 그중 한 대는 직접 후방에서 접근하여 후방에 장착된 7.62mm 쌍열 기관총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후방 사수들은 제로센이 고통스럽게 급강하하자 격추로 주장했으며, 그 대가로 두 대의 비행기가 손상되었다(한 대는 심각하게).
어떤 경우든, 사카이는 폭격기들의 반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7.62mm 기관총탄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손상되고 몸의 왼쪽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이 부상은 다른 곳에서는 그의 고글 금속 프레임을 파괴하고 두개골을 "찢었으며", 스치듯 맞은 상처로 피부가 찢기고 홈이 파이거나 두개골에 금이 갔지만 실제로 관통하지는 않았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캐노피의 산산조각난 유리 파편으로 인해 오른쪽 눈은 일시적으로 실명되었고, 왼쪽 눈의 시력도 크게 저하되었다. 제로센은 거꾸로 뒤집혀 바다를 향해 강하했다. 심각한 머리 부상에서 오는 피와 유리 파편 때문에 왼쪽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눈물로 피가 씻겨나가면서 시야가 다소 맑아졌고, 그는 비행기를 급강하에서 벗어났다. 그는 미국 군함을 들이받는 것을 고려했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적어도 사무라이처럼 죽을 것이다. 내 죽음은 적 몇 명과 함께할 것이다. 배. 배가 필요했다." 마침내 조종실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그를 충분히 소생시켜 계기를 확인할 수 있게 했고, 그는 연료 혼합비를 조절하면 라바울 비행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카이는 손상된 제로센을 560 nmi (약 1037 km) 이상을 4시간 47분 동안 비행하여 익숙한 화산 봉우리를 길잡이 삼아 라바울 기지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비행장에 착륙하려 했을 때 그는 거의 일렬로 주차된 제로센에 충돌할 뻔했지만, 네 번 선회하고 연료 게이지가 빈 상태에서 두 번째 시도 끝에 제로센을 활주로에 내렸다. 착륙 후 그는 상관에게 임무 보고를 하겠다고 고집했고, 보고를 마친 후 쓰러졌다. 니시자와는 그를 외과의에게 데려갔다. 사카이는 8월 12일 일본으로 후송되어 마취 없이 오랜 수술을 받았다. 수술로 머리 손상 일부는 복구되었지만, 오른쪽 눈의 시력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니시자와는 요코스카 병원에서 회복 중인 사카이를 방문했다.
사카이가 받은 상처는 라바울의 군의관으로는 치료할 수 없었기에 일본 본토로 송환되었다. 사카이는 사사이 준이치로부터 "네놈과 헤어지는 것이 네놈보다 더 괴롭다"는 말을 들었으며, 호랑이는 천 리를 가서 천 리를 돌아온다는 길조에 따라 사카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사사이가 아버지에게 받은 호랑이 벨트 버클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사사이는 전사했지만, 사카이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 6개월 동안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사카이는 자신이 함께 있었더라면 죽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요코스카 해군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오른쪽 눈의 시력은 거의 상실되었고 왼쪽 눈도 0.7로 떨어졌으며, 왼쪽 반신은 마비된 상태였다.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조종사는 물론 군인으로서도 근무할 수 없을 것이라며 군인을 그만두라는 선고를 받았다. 시중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단으로 지압사나 안마사의 길을 권유받았고 연수도 받았지만, 전직하기 전에 병원을 옮기게 되었다. 사세보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라바울에서 귀국하여 재편성 중이던 제251해군항공대(개칭 후의 타이난 공군)에 간 사카이는 사령관이 된 고조노 야스나 중좌에게 "한쪽 눈으로도 공중전 경험이 적은 전투기 조종사들보다 제가 더 쓸모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득했다. 군의관은 반대했지만, 고조노도 훈련을 보고 상태가 좋지 않아 날 수 없더라도 교관으로 삼겠다고 말하여 사카이는 항공대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타이난 공군이 본토에서 훈련하는 동안 사카이가 후배들을 배트로 때리는 지도 방식도 있었다. 사카이는 라바울에서는 10월이 되자 사망자가 발생했고, 본토에서 가르칠 시간이 없으니 서툰 전투를 한 녀석은 때렸다, 때리면 반성하니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1942년 10월, 비행병조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2월, 도요하시 항공대에서 조종사로 복귀하여 훈련을 수행했지만, 라바울 진출 직전인 1943년 4월, 오무라 항공대로 이동하여 교관으로 배속되었다.
3.2.5. 후기 전쟁 활동
1944년 4월 13일, 사카이는 요코스카 해군항공대에 배속되었다. 타이난 항공대의 상관이었던 나카지마 마사 소좌에 의해 오무라 항공대에서 교관으로 있던 사카이는 요코스카 항공대로 불려오게 되었다.

전황 악화와 절대국방권의 중요한 일각이었던 사이판섬에 미군이 상륙하자, 요코스카 항공대에 출격 명령이 내려졌고, 1944년 6월 22일 사카이를 포함한 나카지마 마사 소좌 지휘의 제로센 27기가 이오지마로 진출했다. 나카지마는 훈련을 본 결과 사카이가 전투에 나설 수 있을 정도로 눈이 회복되었다고 판단했고, 젊은 조종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라도 출격해달라고 부탁하여 사카이는 오른쪽 눈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전선에 복귀하게 되었다. 요코스카 항공대 파견 부대는 이오지마 방어 외에도 마리아나 해전에서 막 승리하여 마리아나 제도 앞바다에 전개 중인 미 해군 기동부대(제58임무부대)를 공격하는 것도 염두에 두면서, 미사와 기지에서 훈련 중이던 제252해군항공대 등과 함께 제로센 외에 함상 공격기 덴잔, 함상 폭격기 스이세이 등을 포함하여 급히 편성된 '하치만 공습부대'의 휘하에 편입되었다.
사카이의 저서에는 6월 24일, 7월 4일, 7월 5일에 이오지마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 행동 조서에 따르면 이오지마에서 사카이가 참전한 것은 6월 24일의 적 함상기 요격 전투와 공격기대 엄호뿐이다.
하치만 공습부대가 아직 이오지마로 이동 집결 중이던 6월 24일 이른 아침, 미 해군 제58임무부대 제1군 소속 VF-1, VF-2, VF-50 항공대의 F6F 헬캣 전투기 약 70기가 호넷, 요크타운, 바탄 항공모함에서 발함하여 이오지마에 내습했다. 이를 레이더로 탐지하여 요코스카 항공대 25기, 그리고 252항공대와 제301해군항공대의 32기, 총 57기의 전투기가 6시 20분에 이오지마 상공으로 요격에 나섰다.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고도 4000 m 부근에 두꺼운 구름층이 깔린 가운데, 요격기는 구름 위와 구름 아래로 나뉘었고, 7~8기를 이끌고 있던 사카이의 구름 아래 그룹은 이륙 후 이오지마 서해안의 구름 아래, 고도 3000 m에서 급상승하던 중 이미 침공해 온 F6F 헬캣 전투기 편대와 조우했다. 사카이가 속한 구름 아래 그룹은 이륙 순서가 늦어 예정 고도를 잡지 못하고 이오지마 방어전에 돌입했다. 사카이는 한 기와 선회전에 돌입하여 왼쪽 비틀기 동작으로 유인한 뒤 격투전에서 격추했고, 시야 확보가 어려운 오른쪽 후방에서 갑작스러운 적 전투기의 사격을 알아차리고, 도중부터 어깨끈을 풀고 몇 번이고 오른쪽을 돌아보며 오른쪽 시야를 보완하면서 격추하여, 총 2기의 F6F 헬캣 전투기를 격추했다고 한다.
사카이는 이 공중전 종료 시, 시력 부족으로 인해 모함으로 귀환하는 F6F 헬캣 전투기 편대를 아군 제로센으로 오인하여 편대에 합류했고, 적 전투기 15기에 포위되었다고 말했다. 반면 상공에서의 목격 증언에 따르면, 사카이가 포위된 것은 4기의 러프버리 서클(Lafberry circle)이었다고 한다. 사카이는 왼쪽 선회만으로 도망쳤다고 말했지만, 목격 증언에 따르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도망쳤다고 한다. 전후 사카이는 미국에서 자신을 공격했던 생존자를 만났는데, 사카이의 비행 방식이라면 헬캣 100기가 덤벼들어도 격추할 수 없었다며 칭찬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이른 아침의 요격전에서 사카이 소대에 소속된 동료기 가시와기 미오 1등 비행조병과 노구치 히사시 비행장은 미귀환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첫 요격전이 벌어진 6월 24일 오후, 미 기동부대 공격에 발진하여 16시 35분, 울라카스섬 북동쪽 50 nmi, 고도 4500 m에서 30기 이상의 F6F 헬캣의 요격을 받았다. 편성은 제로센 23기, 스이세이 함상폭격기 3기, 덴잔 함상공격기 9기(이 중 요코스카 항공대 제로센대는 9기. 전투기대 지휘관은 야마구치 사다오 대위, 제2중대장은 오오키 카즈오 대위, 제3중대장은 사카이)였다.
그러나 사카이의 저서에는 요격전 후 컨디션 불량으로 며칠간 지상 대기 명령을 받았으며, 7월 4일 덴잔 8기와 제로센 9기, 총 17기로 미 기동부대 공격을 위해 이오지마 기지를 출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기대 지휘관은 야마구치 사다오 대위, 제2소대장으로 사카이, 제3소대장으로 무토 비행조장이 참가했다. 출격 전, 요코스카 항공대 사령관 미우라 간조 대좌로부터 "오늘은 절대로 공중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 뇌격기도 어뢰를 투하해서는 안 된다. 전투기, 뇌격기 모두 하나가 되어 전 기체, 적 항공모함 측면에 몸통박치기하라"는 훈시가 내려져 특공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적고 있다.
공격대는 미군 레이더에 포착되어 적기의 공격을 받았다. 명령으로 제로센대도 공중전을 할 수 없는 채로 덴잔은 차례차례 대폭발을 일으키며 격추되었다. 사카이는 반격하여 F6F 헬캣 1기를 격추했다. 그 사이 무토 기체와도 헤어진 사카이 소대 3기는 계속 적 함대를 수색했지만 발견하지 못했고, 사카이는 이오지마로의 귀환을 결심했다. 다만 편도만을 전제했기에 귀환 경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상황에서 정확한 현재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고, 일몰이 다가오는 가운데 이오지마로의 귀환은 절망적이었지만, 사카이의 오랜 감으로 일몰 후 기적적으로 이오지마로 귀환했다. 사카이는 2번기 시가 마사미(志賀正美) 상등비행조병과 3번기 바바 하치로(馬場八郎) 비행장과 함께 어둠 속 비행장에서 먼저 귀환한 무토 비행조장과 재회했다. 사카이와 무토가 보고하러 가자, 미우라 대좌는 상황 보고를 들은 후 "수고 많았다"는 한마디뿐이었다. 사카이 일행이 생환한 것으로 인해 오히려 씁쓸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전투 행동 조서에 따르면, 공격대의 총 피해는 미귀환 제로센 10기, 덴잔 함상공격기 7기(이 중 요코스카 항공대 피해는 미귀환 제로센 4기, 덴잔 함상공격기 7기)였다. 사카이의 저서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된 야마구치 대위는 이 공격에서는 전사하지 않았으며, 야마구치 대위의 전사는 '7월 4일'의 제4차 이오지마 상공 요격전이었고, 같은 날 오후 미 함대의 함포 사격으로 남아있던 모든 기체가 파괴되었다.
1944년 8월, 사카이는 이오지마에서 귀환 후 소위 (특무장교 소위)로 승진했다. 같은 해 12월, 제343해군항공대(통칭 '검(剣)' 부대) 전투 701비행대대 '유신대'에 배속되었다. 343항공대가 장비한 최신예 전투기 시덴카이의 조종 등을 지도했다.
시덴카이에 대해서는 항속력이 없다는 점에서 96식 함상 전투기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 있지만, 극히 참신한 설계(공전 플랩)가 적용된 우수한 전투기라고 평가했지만, 만년에는 "제공 전투기라고도 국지 전투기라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전투기"라고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지도에 나선 사카이는 공중전 강연을 했지만, 격렬한 전투를 경험한 젊은이들에게는 불평이 많았다. 이른바 옛날이야기에 불과했으며, 폭력을 자주 행사한 것도 반감을 샀다. 특히 사카이보다 8살 어리면서도 사카이의 격추수를 뛰어넘은 스기타 쇼이치는 오무라 항공대에서도 사카이와 함께 있었지만, 스기타는 사카이가 전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 승리해온 자부심이 있었다. 또한 스기타는 후배들에게 주먹 제재를 싫어하고 잘 챙겨주는 온화한 성격이었기에, 자신보다 어린 조종사들을 모두 '미숙자'라고 부르는 사카이를 싫어하여 "사카이는 적이 아직 약했을 때밖에 모른다. 사카이가 사라진 후가 훨씬 힘들었다"고 말하며 사카이와 대립했다. 343항공대에서도 스기타는 "제로센은 올바르게 정비, 조정되어 있다면 설령 손을 놓고 날아도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다가 결국 수평 비행으로 돌아온다. 의식을 잃고 등면(背面) 상태가 계속되는 일은 없다. 애초에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자세한 상황을 말할 수 있는가"라며 사카이의 과달카날 상공에서의 부상 이야기를 비판했고, "그런 사기 치는 녀석(사카이)은 때려줄 것"이라고 공언했다. 비행대장 시가 요시오 소좌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고심했고, 공중전에 쓸모 있는 스기타를 남기고, 사카이의 경험을 살리기 위해 비행 실험을 임무로 하는 요코스카 항공대로 무토 가네요시와 교환하는 형태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에 대해 요코스카 항공대는 반발했고, 특히 쓰카모토 유조(塚本祐造)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사카이와 무토의 교환은 불공평하며, 요코스카 항공대가 비행 실험만이 임무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맹렬히 반발했다. 결국 노구치 다케지로(野口毅次郎) 소위를 붙여 2대 1 교환으로 합의되었다. 교환된 무토 가네요시 소위가 분고 수도 상공의 공중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사카이는 무토 소위가 자신의 대신으로 전사한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 마쓰다 치아키 사령관은 준사관 이상을 강당에 집합시켜 "유감스럽지만 일본은 항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쓰기 항공대 등에서는 철저 항전을 외치며 항복을 거부하려 하지만, 우리(요코스카 항공대)는 이에 가담하지 않겠다. 제군들도 무념하겠지만,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그러나 만년이 되자 사카이는 요코스카 항공대가 무조건 항복에 납득하지 않고 아쓰기 항공대에 동조했으며, 마쓰다 사령관이 철저 항전을 외치고 조종사들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다가오는 항공기에 대한 공격은 국제법상 정당방위라고 들었고, 8월 17일에 다른 기종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제로센 52형으로 출격했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17일, 미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오키나와현의 기지에서 일본 본토 정찰을 위해 공중 사진 촬영에 나선 B-32 도미네이터 2기를 다수의 일본 해군기가 습격하여 보소반도에서 이즈 제도 상공에서 교전한 제2차 세계 대전 최후의 공중전이 있었다. 사카이 또한 이때 출격하여 제로센으로 교전했다고 전해진다. 공중전 결과는 B-32 탑승원 1명 전사, 2명 부상으로, 손상을 입은 기체는 오키나와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의 사망자는 미국군 병사의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최후의 전사자가 되었다. 이 공중전에 참가한 고마치 사다무는 "시덴조차 쫓아가기 힘들었는데, 제로센으로는 무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이륙한 사카이가 공격에는 참가하지 못했음을 시사했다. 한편, 오하라 료지 상등비행조병은 제로센 52형으로 같은 날 B-32를 요격하고 세 번째까지 공격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고마치와 오하라의 증언을 책으로 엮은 간다치 나오키는 이 날 날아온 B-32는 여러 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고마치와 오하라가 요격한 것은 각각 다른 기체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9월 5일, 포츠담 특진에 의해 해군 중위로 진급했다.
4. 전후 생활
종전 후 사카이는 인쇄 사업을 시작했으며, 개인적인 변화를 겪었다.
4.1. 민간인으로서의 삶
전후 사카이는 해군에서 퇴역했다. 그는 불교 신자가 되어 다시는 살아있는 어떤 것도, 심지어 모기 한 마리조차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막대한 인명 손실과 함께 패배했지만, 사카이는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만약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시애틀이나 로스앤젤레스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국인들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폭격한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말했다.
사카이에게 전후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일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하쓰요는 1947년에 사망했다. 그는 1952년 재혼하여 인쇄소를 열었다. 사카이는 자신의 딸을 "영어도 배우고 민주주의도 배우라"며 미국 대학에 보냈다.
사카이는 미국을 방문하여 자신에게 부상을 입혔던 SBD 돈틀리스 후방 사수(로버트 C. 쇼(Robert C. Shaw) 소위가 조종)였던 해군 소령 해롤드 "루" 존스를 비롯한 많은 옛 적수들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거의 죽을 뻔했던 과달카날 임무에서 입었던 찢어지고 손상된 비행 헬멧을 들고 1982년 메모리얼 데이에 존스와 재회했다.
4.2. 개인사 및 가족
사카이는 재혼 후 두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2000년 사망 시까지 두 번째 아내 하루(Haru)와 함께했다. 1944년, 사카이는 사촌 하쓰요(Hatsuyo)와 결혼했는데, 하쓰요는 사카이가 전사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단검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 『사무라이! (책)』은 일본 항복 후 하쓰요가 단검을 버리며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5. 평가 및 유산
사카이 사부로의 생애와 업적은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되며, 그가 남긴 유산은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5.1. 저술 활동과 논란
사카이가 전후 출판한 저서들은 고스트라이터의 존재가 지적되었다. 작가 간다치 나오키의 취재에 따르면, 『사카이 사부로 공중전 기록』은 후쿠바야시 마사유키가 사카이와의 인터뷰와 독자적인 취재를 바탕으로 썼고, 『사무라이! (책)』은 프레드 사이토(Fred Saito)가 사카이와 인터뷰한 내용을 마틴 케이딘이 각색하여 썼으며, 『대공의 사무라이』는 고진샤 사장 다카시로 하지메(高城肇)가 미국적인 공중전 활극인 『사무라이!』를 사카이와 상의하여 일본 독자층에 맞게 고쳤다는 것을 사카이도 인정했다. 한편 도쿄대학 교수 가토 히로이치로의 취재에서는 "저서에 고스트라이터의 존재가 소문나는데,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카이는 "처음에는 그것을 생각했지만, 비행에 관한 부분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결국 전부 직접 다시 썼다", "한마디 한마디 직접 쓴다", 또한 "몇 번이고 다시 쓴다"고 답했다. 단, 각 에피소드의 순서에 대해서는 출판사의 의견을 듣기도 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사카이의 저서 내용은 각 저서 사이와 실제 기록 사이에서도 여러 모순이 지적되고 있다.
『사무라이!』에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책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마틴 케이딘에 의해 격추 수가 부풀려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출판되지 않았으며, 일본 내 그의 전기들과는 내용이 다르다. 『날개 달린 사무라이: 사카이 사부로와 제로 전투기 조종사들』(Winged Samurai: Saburo Sakai and the Zero Fighter Pilots)은 1985년 헨리 사카이다(Henry Sakaida)가 저술한 사카이 사부로의 전시 역사를 다룬 책이다.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이라크 정부군의 일부 부대에서는 사기 진작의 일환으로 마틴 케이딘의 『사무라이!』를 아랍어로 번역하여 조종사들에게 필독을 의무화했다고 한다. 작가 와타나베 요지(渡辺洋二)는 제2차 세계 대전 항공전사와 비행기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신으로서는 제로센 관계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댈 수 있지만, 조종사 이름을 관심이 큰 순서로 말한다면 사카이 사부로는 한참 뒤로 밀린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까지 사카이를 취재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만년에는 태평양 전쟁 연구가를 자칭하며 일본군 수뇌부에 대한 비판이 많이 보인다. 불시착하여 포로가 된 후 육군에 의해 구출되어 귀환한 육상 공격기 조종사들에 대해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자폭 명령을 내렸고, 5월 초 그 육상 공격기 부대가 라에 기지에 왔을 때 사카이가 이를 비판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육상 공격기의 자폭 명령은 제11항공함대에서 발령되어 3월 31일에 실행되었고 사카이와는 접점이 없었다는 등 사카이의 비판에는 지식의 오류나 허위가 보인다. 또한 사카이는 옛 상관들이 사망하여 반론할 수 없게 될 때마다 이니셜을 사용하여 폄하했지만, 같은 이니셜을 가진 다른 사람까지 괜한 의심을 받아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또한 사람에게는 상성이 있으므로, 사카이가 싫어했던 상관들에게도 따르는 부하들이 있었고, 사카이가 '적'이라고 지목한 장교보다, 아군이어야 할 하사관 조종병들로부터 많은 반감을 샀다.
사카이는 "어떤 실책이 있어도 정치인이나 대기업 경영자가 책임을 지지 않고 문제가 흐지부지되는 오늘날 일본의 상황은, 애초에 천황의 전쟁 책임이 엄격히 추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더욱이 사카이는 일본인을 "일억 총 기생충"이라고 평하며, "전후 일본의 물질적인 번영은 미국에 기생해온 덕분입니다. 일본인의 근면함이 어쩌고 하지만, 이만큼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 50.00 억 USD의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피를 흘려 싸웠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이 있는 것이다. 50.00 억 USD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그것은 맞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가장 용감했던 것은 한국군이었습니다. 전사자가 많았던 것도 한국군입니다. 일본은 전후 피도 흘리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돈벌이만 했습니다. 일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경제 발전에 매진한 결과, 미국의 기생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기생충들이 제각기 제멋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일본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신의 지론을 펼쳤다.
사카이에게는 '제로의 회'(零の会)라는 출판 관계자들로 조직된 후원 단체가 존재한다(회 내에서는 '사카이교'라고 불린다). 사카이 사부로의 선전 활동을 목적으로 하며, 사카이 사망 후에도 활동하고 있다.
전쟁 만화를 그리다가 팔리지 않아 고민하던 미즈키 시게루에게 "전쟁 만화는 이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우세했던 시기에 활약했고, 열세기에 부상으로 물러나 있었던 사카이와 달리, 패색이 짙어진 후에 전선에 보내져 열세기밖에 몰랐던 미즈키는 조언대로 만화를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사카이는 최근 젊은이들에게 향상심이 부족하고 나태하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아사마데 나마테레비!』에 출연했을 때 현재 젊은이들에 대한 비판을 기대한 질문에 "내 시대에도 젊은 놈들은 쓸모없다고 계속 들었다"고 답하여 스튜디오 내의 젊은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5.2. 문화적 영향력
1976년 영화 『제로 파일럿』은 사카이 사부로의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경험을 극화했다. 영화에서 사카이는 배우 후지오카 히로시가 연기했다. 시나리오는 사카이의 저서 『사무라이!』를 기반으로 한다.
2000년, 사망 직전 사카이는 (미국 해병대 에이스 조 포스와 함께) 『Microsoft Combat Flight Simulator 2』 개발의 컨설턴트로 참여했다.
6. 사망
2000년 9월 22일, 사카이는 미군 아쓰기 해군항공시설의 사령관 교체식에 초대받았을 때 쓰러졌다. 귀가 도중 컨디션 불량을 호소하여 정밀 검사를 받던 중 같은 날 밤 사망했다. 향년 84세. 검사 중 주치의에게 배려하여 "이제 잠들어도 될까요"라고 물은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사카이의 장례식 옆에서는 전 제로센 조종사 약 30명이 모이는 회합도 있었지만, 사카이의 생전 행동으로 인해 전 제로센 조종사 중 참석한 이는 4명에 불과했다. 다른 제로센 조종사들의 반감, 고스트라이터의 존재, 피라미드 사기 사건 등 비판을 받았던 사카이의 행동을 다룬 『할아버지들의 제로센』을 읽은 딸 미치코(道子)는 열광적인 팬들에게는 듣기 거북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아버지 사카이 사부로에게서 듣고 알고 있던 일이라고 말했다.
7. 관련 항목
- 에이스 파일럿
-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
- 미쓰비시 A6M 제로센
- 제2차 세계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