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카이 다다토시(酒井 忠利さかい ただとし일본어)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이며, 에도 막부의 로주(老中)를 역임했다. 그는 사카이 씨 우타노카미(雅楽頭) 종가의 분가 당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며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스루가국 다나카 번의 번주와 무사시국 가와고에 번의 초대 번주를 지냈으며, 그의 영지는 최종적으로 37,000석에 달했다. 1559년에 태어나 1627년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생애
사카이 다다토시의 일생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과 봉사로 점철되었으며, 그는 에도 막부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2.1. 출생 및 배경
사카이 다다토시는 에이로쿠 2년(1559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카이 우타노카미 종가의 당주인 사카이 마사치카이며, 다다토시는 그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시카와 기요카네(石川清兼)의 딸인 묘겐니(妙玄尼)이다. 사카이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먼 친척 관계였으며, 이러한 배경은 다다토시가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으로서 활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2. 도쿠가와 가문에서의 활동
다다토시는 형인 사카이 시게타다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기 시작했다. 그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영지를 옮기자, 다다토시는 무사시국 가와고에에 3,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수행하며 도쿠가와 가문의 승리에 기여했다. 게이초 19년(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성 수비 역할을 맡아 막부의 중요한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2.3. 다이묘로서의 통치 및 성장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다다토시에게 7,000석을 추가로 하사하여 총 10,000석의 다이묘가 되었고, 스루가국 다나카 번으로 이봉되었다. 게이초 14년(1609년)에는 다시 10,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20,000석의 영지를 가지고 가와고에 번으로 돌아왔으며, 이로써 가와고에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일부 영어 자료에서는 이 시점의 영지를 30,000석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에도 그의 영지는 여러 차례 가증되었고, 최종적으로 37,000석을 영유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에도 막부의 중요한 직책인 로주를 역임하며 막부의 행정 및 정책 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 가족 관계
사카이 다다토시는 다음과 같은 가족 관계를 가지고 있다.
- 아버지: 사카이 마사치카
- 어머니: 묘겐니 (이시카와 기요카네의 딸)
- 정실: 호쿄인(宝鏡院) - 스즈키 시게나오(鈴木重直)의 딸
- 장남: 사카이 다다카쓰 (1587년 ~ 1662년)
- 차남: 사카이 다다요시(酒井忠吉) (1589년 ~ 1663년)
- 생모 불명
- 아들: 사카이 다다시게(酒井忠重)
- 아들: 사카이 다다히사(酒井忠久)
- 아들: 사카이 다다스에(酒井忠末)
- 아들: 사카이 다다쓰구(酒井忠次)
- 딸: 다카기 마사쓰나(高木正綱)의 아내
- 딸: 가와이 무네토시(河合宗利)의 아내
- 딸: 미우라 요시마사(三浦好正)의 아내
4. 사망
사카이 다다토시는 간에이 4년 음력 11월 14일(1627년 12월 21일)에 향년 69세로 사망했다.
5. 평가 및 유산
사카이 다다토시는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군사적 재능, 그리고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바탕으로 에도 막부 초기 안정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고쿠 확장을 통해 영지를 꾸준히 늘려나갔고, 로주라는 막부의 핵심 요직을 맡아 막부의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사망 이후에도 그의 가문은 가와고에 번의 번주로서 이어졌으며, 이는 그가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