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사이초의 초기 생애는 그의 출생 연도와 가계에 대한 논쟁, 그리고 어린 시절의 교육 배경을 통해 형성되었다.
1.1. 출생 및 가계
사이초는 767년 또는 766년에 오미국(현재의 시가현)에서 히로노(広野일본어)라는 속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도는 767년(진고게이운 원년)이라는 설과 766년(덴표진고 2년)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는 사이초 사후에 기록된 전기와 생존 당시의 공문서 기록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766년에 호적에 등록되었으나 스스로는 767년생으로 여겼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출생지는 오미국 시가군 후루이치 향(현재의 오쓰시) 또는 쇼겐지(生源寺일본어)(현재의 오쓰시 사카모토)로 전해진다.
가문에 대한 전승에 따르면, 사이초의 조상은 후한 효헌제의 후손인 도마키 왕(登萬貴王일본어)의 후예로, 오진 천황 시대에 일본에 도래했다고 한다. 이 주장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사이초가 태어난 오미 지역에 중국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했던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중국계 조상을 가졌을 가능성은 있다. 그의 아버지는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일본어) 또는 미쓰노오비토 기요아시(三津首浄足일본어)로, 정8위하의 부지사급 관직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후지와라노 다카토리(藤原鷹取일본어)의 딸 후지코(藤子일본어)라는 설과 오진 천황의 9세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모두 후대의 전승으로 역사적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부모는 자식이 없어 히에이 산 신궁에서 기도를 올린 후 사이초를 잉태했다고 한다.
1.2. 어린 시절과 초기 교육
사이초의 어린 시절 이름은 히로노였다. 전기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초등 교육 기관인 소가쿠(小学일본어)에서 음양도, 의학, 공예 등에서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7세 무렵부터 불도에 뜻을 두기 시작했으며, 오미 고쿠분지에서 법화경, 금광명경, 약사경, 금강반야경 등을 읽으며 경전을 공부했다. 당시 관례에 따라 3년 정도 재가 신자(優婆塞일본어)로서 고쿠분지에서 잡무와 봉사를 하며 경전을 익혔다고 전해진다.
2. 승려로서의 수행과 초기 활동
사이초는 공식적인 승려의 길에 들어선 후, 히에이 산에서의 은둔 수행과 초기 저술 활동을 통해 일본 불교계에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2.1. 출가 및 수계
사이초는 778년 12세의 나이로 오미 고쿠분지에 들어가 교효(行表일본어, 722~797)의 제자가 되어 출가했다. 780년 14세에는 고쿠분지 승려로 보충되면서 법명을 사이초로 바꾸었다. 교효는 중국의 저명한 천태종 승려인 도선(道璿일본어, 702~760)의 제자로, 도선은 736년에 선불교의 동산법문(East Mountain Teaching영어), 화엄종 교학, 그리고 범망경의 보살계를 일본에 전했으며, 감진이 도착하기 전까지 수계의 '계율사' 역할을 했다. 사이초는 교효로부터 선종을 배웠으며, 스승의 가르침인 "마음을 일승에 귀의해야 한다"는 사상이 이후 그가 추구하는 불교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785년 19세에는 도다이사에서 구족계를 받아 공식적으로 비구 승려가 되었다.
2.2. 히에이 산 은둔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785년 7월 중순, 사이초는 갑자기 히에이 산으로 들어가 집중적인 불교 연구와 수행에 몰두했다. 그가 히에이 산으로 들어간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존 불교에 대한 염증 때문이 아니라 공적인 절차를 밟아 입산했음이 분명하며, 입산 후에도 관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난토 육종과 교류를 이어갔다.
입산 직후 그는 자신의 서원(願文일본어)을 담은 《간몬》(願文일본어, "사이초의 기도")을 지었다. 이 서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순수해지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한, 세상에 나아가지 않겠다.
-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한, 특별한 기술이나 예술(예: 의학, 점술, 서예 등)을 익히지 않겠다.
- 모든 계율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는 한, 재가 신자의 불교 모임에 참여하지 않겠다.
- 지혜(般若일본어)를 얻지 못하는 한,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세속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겠다.
-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수행 공덕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중생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도록 회향하겠다.
이 서원을 통해 사이초가 대승불교 경전에 나오는 보살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788년에는 히에이 산에 작은 암자를 짓고 자신이 직접 조각한 약사여래상을 봉안했다. 이 암자는 나중에 엔랴쿠지 근본중당의 자리가 되었으며, 일승지관원(一乗止観院일본어)이라고 불렸다. 그는 이곳에서 법화경 연구에 몰두하며 지자 대사의 천태 교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부처님 앞에 기름 등불을 밝히고 이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기도했는데, 이 등불은 현재 "불멸의 법등"(不滅の法灯일본어)으로 불리며 1200년 동안 계속 타오르고 있다.
2.3. 조정과의 관계 형성
일본의 수도가 784년 나가오카쿄로, 795년에는 교토로 이전되었다. 히에이 산이 교토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풍수지리상 위험한 방향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히에이 산에 있는 사이초의 존재는 새로운 수도를 보호하는 것으로 여겨져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이초와 그의 히에이 산 공동체는 나라의 기존 불교 공동체 및 조정의 승려들과 서신을 주고받고 의식을 교환하며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갔다.
조정의 초기 후원자 중 한 명은 와케노 히로요였다. 그는 802년에 다카오 산사에서 열린 천태 법문 강회에 사이초를 포함한 14명의 저명한 승려를 초청하여 강의를 맡겼다. 사이초가 처음으로 초청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그가 조정에서 점차 명성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강회 소식을 들은 간무 천황은 천태 일승의 흥륭을 발원하고, 같은 해 9월 7일에 히로요를 불러 자문을 구했으며, 히로요는 사이초와 상의했다고 한다. 당시 불교 종파는 난토 육종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특히 법상종과 삼론종 사이에 갈등이 심했다. 조정은 이러한 항쟁을 수습하고 새로운 불교계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불교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천태종 개창에 큰 힘이 되었다.
791년 12월 28일, 사이초는 수행입위(修行入位일본어)라는 승위를 받았다. 이후 전등위(伝燈位일본어)를 받게 되는데, 이 수행위는 당시 사이초의 평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797년 12월 10일에는 내공봉(内供奉일본어)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내공봉은 궁중 내도장에서 독사(読師일본어) 등을 맡는 승려로 정원은 10명이었다.
797년에 사이초는 히에이 산에 일체경을 갖추기 위한 사경 사업을 발원했다. 제자들에게 사경을 시키는 한편,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난토 여러 사찰에 서원을 보냈다. 이에 다이안지의 몬자쿠(聞寂일본어)와 도고쿠의 도추(道忠)가 응했다. 798년 10월에는 법화십강 법회를 열었는데, 이는 사이초가 법화삼부경을 강의한 것으로 매년 열렸다. 801년 11월 24일에는 난토 각 종파의 고승들을 불러 법화십강을 개최하기도 했다.
3. 당나라 유학
간무 천황의 요청으로 당나라를 방문하게 된 사이초는 중국에서 천태 교학과 밀교를 깊이 학습하고 귀국하여 일본 불교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3.1. 방문 목적 및 여정


간무 천황은 사이초의 불교 교학 전파를 돕고 동아시아 유식학파와 동아시아 중관학파 간의 전통적인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사이초와 상의했다. 천황은 사이초의 청원을 받아들여 중국 천태 교학을 더 깊이 연구하고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그를 당나라로 보내기로 했다. 사이초는 중국어를 읽을 수는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어에 능통했던 제자 기신(義真일본어)을 통역승으로 동행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기신은 훗날 천태종의 수석 승려 중 한 명이 된다.
사이초는 803년 견당사의 일원으로 4척의 배로 구성된 사절단에 합류했다. 배들은 강풍으로 인해 되돌아와 다자이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사이초는 비슷한 임무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나 더 오래 머물 예정이었던 동료 승려 구카이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배들이 다시 출항했을 때, 폭풍우로 두 척이 침몰했으나 사이초가 탄 배는 804년 저장성 북부의 닝보항(당시 명주(明州중국어))에 도착했다.
3.2. 중국에서의 학업
명주 도착 직후, 사이초 일행은 천태산으로 갈 허가를 받았고, 천태종의 제7대 조사 도수(道邃중국어)를 소개받았다. 도수는 사이초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 그의 주된 스승이 되어 천태의 좌선법, 승려 규율, 정통 교학을 가르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이초는 약 135일 동안 도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805년 3월 2일, 사이초와 기신은 도수로부터 보살계를 받았는데, 이는 사이초가 천태 법화의 교지에 따른 대승계를 만난 계기가 되었다. 천태산에서의 구법 성과는 《전교대사 장래 대주록》에 따르면 120부 345권의 서적에 달했다. 또한 명주에 머무는 동안 선림사(禅林寺일본어)에서 우두선, 국청사(国清寺일본어)에서 밀교를 배웠으며, 국청사에 한 법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사이초는 이후 몇 달 동안 다양한 불교 서적을 필사하며 일본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이미 일본에 일부 서적이 있었지만, 사이초는 필사 오류나 다른 결함이 있다고 여겨 새로운 사본을 만들었다. 이 작업이 완료된 후, 사이초 일행은 닝보로 돌아왔으나, 배는 당시 푸저우에 정박해 있었고 6주 후에야 돌아올 예정이었다.
이 기간 동안 사이초는 월주(越州중국어, 현재의 사오싱시)로 가서 밀교(Vajrayana영어) 관련 문헌과 정보를 구했다. 천태종은 원래 "잡밀"(雑密일본어)이라는 혼합된 의례를 사용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밀교의 역할이 커졌다. 사이초가 중국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여러 천태 불교 센터에서 밀교 훈련을 제공하고 있었고, 사이초와 기신 모두 월주에서 입문 의식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전수(들)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증거는 사이초가 금강계와 태장계의 양부(両部일본어) 전수를 모두 받지 못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신, 그는 금강계 전수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증거는 확정적이지 않다. 805년 4월 18일에는 월주의 봉산도장(峯山道場일본어)에서 순효(順曉중국어)로부터 관정을 받았다. 《내증불법상승혈맥보》와 《현계론》에 따르면, 이 관정은 금강계와 태장계 양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교대사 장래 월주록》에 따르면, 이로 인해 102부 115권의 서적과 밀교 공양 도구 5점을 입수했다고 한다.
3.3. 귀국
805년 5월 18일, 사이초는 명주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배에 탑승하여 6월 5일 쓰시마섬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에 총 8개월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교토 조정은 그의 귀국을 애타게 기다렸다. 귀국 직후, 그는 고베시 와다 곶에 상륙하여 일본 최초의 밀교 교화 영장인 노후쿠 호국 밀사(能福護国密寺일본어)를 개창했다. 수도에 올라와 체재하는 동안 서사한 불경류는 230부 460권에 달했다. 당시 간무 천황은 병상에 있었고, 사이초는 궁중에서 천황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렸다. 805년 9월, 간무 천황의 요청으로 다카오 산 진고사에서 일본 최초의 공식 관정을 행했다.
4. 일본 천태종 개창
사이초는 엔랴쿠지 건립과 더불어 일본 천태종을 개창하고, 주요 교의 및 수행 체계를 확립하며 일본 불교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4.1. 엔랴쿠지 건립 및 종파 설립

중국에서 돌아온 사이초는 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806년 1월, 병든 간무 천황의 조정은 사이초의 천태 법화종(天台法華宗일본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히에이 산의 사이초가 세운 새로운 종파에 연분도자(年分度者일본어, 매년 국가에서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인원) 2명을 허용했다. 칙령에 따르면, 사이초의 요청에 따라 연분도자는 두 가지 교육 과정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대일경을 중심으로 하는 밀교 교육 과정인 차나업(遮那業일본어)이고, 다른 하나는 천태 대사 지자 대사의 핵심 저작인 《마하지관》을 기반으로 하는 천태 교육 과정인 지관업(止観業일본어)이었다. 이로써 천태 법화종은 창립 초기부터 밀교와 천태 교학을 동등하게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
사이초는 연분도자에 천태 법화종을 추가하는 개정을 상주했다. 그는 "한 그물로는 새를 잡을 수 없고, 한두 종파로는 널리 구제하기에 부족하다"고 상주문에 기록하며 기존의 삼론종과 법상종 외에 새로운 종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상주는 천태 법화종의 공인을 넘어 새로운 불교계 질서를 만들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 상주는 즉시 승강(僧綱일본어, 승려들을 관리하는 기관)의 의견을 물었고, 승강도 동의하여 1월 26일의 태정관부에 의해 제정되었다. 천태종은 이 날을 개종일로 삼고 있다. 이 관부에는 연분도자의 학업과 임용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천태 법화종에는 차나업(밀교) 1명과 지관업(천태) 1명이 할당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공인은 어디까지나 나라 불교의 승강 아래에서 인정된 것이었다.
《천태 법화종 연분 득도 학생 명장》에 따르면, 이 제도에 의해 818년까지 천태 법화종에서 24명이 득도했으나, 14명이 히에이 산을 떠났고 그 중 6명은 법상종으로 넘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사이초는 "천태 학생들은 소의에 얽매여 경도로 흩어지니, 원도를 끊으려 한다"고 《현계론》에 기록하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사이초는 813년에 저술한 《의빙천태의집》(依憑天台義集일본어)에서 중국과 한국의 주요 불교 대사들이 천태 교학에 의존하여 저작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론종의 길장, 법상종의 지주, 화엄종의 법장, 밀교의 일행 등 저명한 스승들의 저작에서 천태 논서에 대한 수많은 언급과 인용을 찾아내어, 천태가 동아시아 모든 주요 불교 종파의 토대를 이룬다고 역설했다.
사이초는 모든 승려의 수계가 도다이사에서 고대 율장에 따라 이루어지던 관행을 벗어나, 자신의 종파를 순수한 대승불교 기관으로 설립하고 보살계만을 사용하여 승려를 수계하고자 했다. 나라의 전통 불교 종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청은 822년 그가 입적한 지 며칠 후 사가 천황에 의해 허락되었다. 이는 수년간의 노력과 공식적인 논쟁의 결실이었다. 823년 2월 26일, 칙령에 의해 일승지관원은 엔랴쿠지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3월 17일에는 첫 득도가 이루어졌고, 이어서 4월 14일에는 광정 등이 수계를 받았다.
4.2. 주요 교의 및 수행
일본 천태종의 주장은 중국 천태종과 다르지 않다. 이는 법화경과 석가모니 부처의 실제 설법에 기반을 둔다. 사이초는 다른 종파들이 주로 논서에 의존하고 부처의 공식 경전에 기반하지 않는다고 보아 천태종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교학 체계는 천태교학의 핵심을 이루며, 밀교와의 융합인 원밀일치(円密一致일본어) 사상을 강조했다.
사이초는 연화경에 주로 초점을 맞춘 천태종에서 밀교가 중요한 측면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진언종이 밀교 수행을 연화경보다 우월하게 본 것과 달리, 사이초는 "원밀일치"(円密一致일본어, 완전한 가르침과 밀교 가르침의 취지 일치)를 주장했다. 이는 연화경의 가르침과 밀교가 통일되고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사이초는 구카이에게 보낸 서신에서 "차나종(밀교)과 천태는 서로 융합한다. 또한 같은 주석을 공유한다. 어느 한쪽을 다른 쪽보다 선호해서는 안 된다. 법화와 금광명경은 선제(간무 천황)께서 전념하신 경전이며, 일승(천태)과 진언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썼다. 그는 천태와 밀교 수행이 깨달음에 이르는 직접적인 길(直道일본어)을 제공하는 반면, 나라 불교의 가르침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보았다.
천태 법화종에는 지관업(천태)과 차나업(밀교) 각각 1명의 연분도자가 허용되었다. 이는 사이초가 현교(천태 교학)와 밀교(밀교학)의 통합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관업은 지자 대사가 저술한 《마하지관》에서 유래했다. 《마하지관》은 불도 수행의 기초적인 규범을 기록한 것으로, 실천과 수행의 입장에서 법화경을 해석한 것이다. 사이초는 《권장천태종연분학생식》에 "지관업은 사종삼매를 수습하게 한다"고 기록했듯이, 《마하지관》에 기록된 실천 수행인 사종삼매(四種三昧일본어, 상좌삼매, 상행삼매, 반행반좌삼매, 비행비좌삼매)의 실천을 중시했다. 그는 실천의 장으로서 사종삼매당(四種三昧堂일본어)의 건립을 계획했으나, 이 당은 《고닌 9년 히에이 산사 승원지》에 일승지관원에 이어 기록되어 있어 엔랴쿠지 가람 구상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동탑의 반행반좌삼매당(법화삼매당)은 사이초가 812년에 건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상좌일행삼매당(문수루), 상행삼매당, 비행비좌삼매당(수자위당)은 사이초 입적 후에 완성되었다.
차나업은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에서 유래한다. 사이초가 당나라에서 전해온 밀교는 불완전하여 구카이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교의의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훗날 천태밀교는 엔닌과 엔친의 입당으로 연구가 활발해졌고, 안넨에 의해 완성되어 이후 100여 년간 천태밀교가 융성했다. 그러나 엔닌은 구카이의 현밀이교판(밀교가 현교보다 우월하다는 설)을 일부 수용하여 사이초가 내세운 현밀양학(원밀일치)은 무너지게 된다. 지관업이 재조명된 것은 엔랴쿠지 중흥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료겐이 등장하는 10세기 중반 이후이다.
사이초는 또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仏性일본어, 모든 중생은 본래 불성을 가지고 있다) 사상을 강조했다. 이 사상은 대반열반경에 설해진 "일체개성"(一切皆成일본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을 근본으로 한다. 법상종을 포함한 난토 불교도 이를 인정했지만, 그 해석(불성론)에 대해 사이초와 법상종은 격렬한 논쟁(도쿠이치와의 삼일권실론쟁)을 벌였다. 사이초는 법상종의 주장을 소승적이라고 비판하며, 다섯 가지 본성(五性일본어)의 구별 없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는 "수행의 어려움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석가모니와 같은 특별한 존재뿐이다"라는 일반적인 불교관을 부정하고,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믿고 이타행에 힘쓰며 성불의 길을 나아가는 자야말로 보살이다"라고 하여 대승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사이초는 승려를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가장 뛰어난 승려들은 "국가의 보물"로 여겨 사찰에 머물며 국가에 봉사하도록 했다. 그보다 못한 승려들은 관청에 들어가거나, 교육을 담당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등 사회에 봉사하도록 했다.
5. 구카이와의 관계
사이초와 구카이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만나 초기에는 밀교 전수를 통해 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나, 교리적 차이와 제자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겪으며 관계가 악화되었다.
5.1. 초기 교류 및 협력
사이초는 중국 유학길에서 동료 승려인 구카이를 만났고, 이들의 우정은 훗날 불교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이초는 귀국 시 밀교(탄트라) 경전을 가져왔고, 이 새로운 자료에 매료되어 더 배우고 싶어 했다. 귀국길에 그는 구카이가 이러한 가르침을 깊이 연구했으며 방대한 밀교 자료를 소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구카이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806년에 사이초는 구카이에게 밀교 학습을 요청했다. 이는 천태 법화종의 연분도자에 차나업(밀교) 1명이 할당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교대사 소식》에 기록된 서신에 따르면, 사이초는 809년부터 816년경까지 제자들을 구카이에게 보내고, 빌린 경전을 필사하는 일을 반복했다.

812년 10월 27일, 사이초는 오토쿠니데라에 있던 구카이를 찾아갔다. 이때 구카이는 사이초에게 법을 전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진고사에 남아있는 《관정기》에 따르면, 사이초는 11월 15일에 금강계 관정을, 12월 14일에는 태장계 관정을 구카이로부터 받았다. 사이초는 구카이에게 "차나종(밀교)과 천태는 서로 융통하며, 법화와 금광명경은 선제(간무 천황)의 서원이니, 일승의 취지는 진언과 다르지 않다"고 서신을 보냈다. 사이초는 구카이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귀국 직후, 그가 나라 불교계의 고승들과 헤이안 조정의 고위 관리들을 위해 밀교 입문 의식인 관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사이초는 조정이 구카이에게 교토 북서쪽의 다카오 산사(진고사)를 진언종의 첫 거점으로 제공하도록 지지했다. 이에 구카이는 사이초와 그의 제자들에게 밀교 의식을 가르치고, 중국에서 가져온 다양한 밀교 경전을 빌려주며 천태종의 절충적인 체계에 밀교를 통합하려는 사이초의 바람에 응했다.
5.2. 갈등과 교리적 차이
사이초와 구카이의 관계는 밀교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밀교로 인해 끝을 맺었다. 사이초가 구카이로부터 관정을 받은 후 서둘러 히에이 산으로 돌아가 새로운 천태종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그들의 동맹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사이초는 구카이에게 빌린 밀교 경전을 계속 연구하고 필사했지만, 구카이의 반복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다카오 산사로 돌아가 학업을 재개하지 않았다. 결국 구카이는 사이초의 밀교 접근 방식을 사마야 계율 위반(밀교 가르침을 사적으로 비밀로 유지해야 하는 약속)이라며 가혹하게 비난했고, 사이초는 구카이의 가르침 방식을 비난하며 맞섰다. 이로 인해 사이초와 구카이의 단절은 천태종과 진언종에 오래 지속되는 유산을 남겼으며, 이 두 종파의 복잡한 관계는 헤이안 시대 불교사의 윤곽을 형성했다.
사이초는 천태와 진언이 일치하며 같은 일승이라고 보았다. 반면 구카이는 천태를 진언보다 낮은 가르침으로 여겼다. 이러한 교리적 차이도 두 사람을 갈라놓는 이유가 되었다. 사이초는 자신의 "원밀일치" 사상이 진언종, 특히 그 창시자인 구카이와 정확히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또한, 제자 다이한(泰範일본어)의 거취 문제가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다이한은 본래 천태종 이외의 승려였으나 히에이 산에 들어와 밀교를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수한 제자였고, 812년 5월 8일자 사이초의 유서에는 다이한을 히에이 산의 총 별당(관리 책임자)으로 지명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직후인 6월 29일에 다이한은 히에이 산을 떠났다. 사이초가 보낸 답신에서 사이초의 놀라움과 다이한이 계율을 어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사이초는 다이한을 만류했지만, 다이한은 히에이 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구카이에게 몸을 의탁했다. 816년에 사이초가 다이한에게 보낸 서신에는 깊은 자기반성과 다이한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서신에 대한 답장은 구카이의 대필로 쓰였으며, "진언의 가르침이 천태보다 우월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다이한은 구카이의 십대 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사이초가 《이취석경》(理趣釈経일본어)의 대여를 요청했을 때, 구카이가 "이취는 논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며, 입단하지 않은 자에게는 진언을 전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보이며 거절한 것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서신에 나오는 "징법사"(澄法師일본어)가 사이초가 아닌 엔초(円澄일본어)라는 설도 있지만, 진위 여부를 떠나 구카이 밑에서 사이초가 수행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 두 사람을 소원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초는 말년에 저술한 《의빙천태의집》에서 삼론종, 법상종, 화엄종 등 나라 불교의 주요 종파들이 중국 조사들의 저작에서 천태의 영향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히 진언종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졌는데, 그는 "밀교 진언종은 문자를 통한 전수(필수)의 유효성을 부정하기까지 했다"고 기록하며 구카이와 진언종의 불교 및 종교 연구 방식에 대해 비난했다. 그러나 사이초의 말년 비판은 그의 주요 제자들에 의해 무시되었고, 천태종은 계속해서 밀교와 지관업을 가르쳤다. 사이초의 구카이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은 훗날 가마쿠라 시대에 니치렌이 자신의 논쟁에서 그 저작을 인용하며 비판의 씨앗이 되었다.
6. 대승 계단 설립 노력
사이초는 계율 개혁 운동을 통해 일본 불교의 독자성을 확립하고, 기존의 수계 제도를 혁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6.1. 계율 개혁 운동


사이초 이전에는 모든 승려 수계가 도다이사에서 고대 율장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사이초는 자신의 종파를 순수한 대승 기관으로 설립하고 보살계만을 사용하여 승려를 수계하고자 했다. 나라의 전통 불교 종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청은 822년 그가 입적한 지 며칠 후 사가 천황에 의해 허락되었다. 이는 수년간의 노력과 공식적인 논쟁의 결실이었다.
사이초의 제자이자 조정과의 교섭을 담당했던 광정이 저술한 《전술일심계문》에 따르면, 818년에 사이초는 천태 법화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대승사를 짓고 광정에게 일승의 호를 사용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광정은 이 사실을 후지와라노 후유쓰구를 통해 천황에게 상주했으나, 나라 승려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에이잔 대사전》에 따르면, 같은 해 3월에 사이초는 "앞으로 성문의 이익을 받지 않고, 영원히 소승의 위의에 어긋나겠다"고 선언하며 구족계를 파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족계를 파기하는 것은 승려 자격을 포기하는 것과 동의어이지만, 조정이나 나라의 승강은 그를 그렇게 취급하지 않았다.
이어서 사이초는 《산가학생식》 등을 저술하여 천태 법화종의 승려 양성 제도에 대해 조정의 재가를 요청했다. 이 저술에서 사이초는 "국보란 무엇인가. 도심(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국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옛 철인은 '지름 1촌의 구슬 10개는 국보가 아니다. 세상의 한구석을 비추는 사람이 국보이다'라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이 안에서 사이초는 대승계(보살계, 천태종은 범망경에 기반한 보살계를 원돈계(円頓戒일본어)라고 부른다)만을 통한 수계와 십이년농산행(十二年籠山行일본어, 12년간 산에 머물며 수행) 등 혁신적인 수계 제도와 양성 제도를 제창했다. 820년에 그는 《현계론》을 저술하여 보살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821년 2월 29일에는 《현계론》과 《내증불법상승혈맥보》를 궁중에 제출하여 반박했다. 그러나 사이초의 제안은 생전에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6.2. 일본 불교의 독자성
사이초가 독자적인 천태종의 제도 수립을 시도한 의도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호국이다. 나라 시대의 불교는 도다이사나 고쿠분지의 건립에서 볼 수 있듯이 호국을 기대했지만, 재해와 역병은 끊이지 않았다. 사이초는 그 원인을 소승계(구족계)를 받은 승려에게서 찾았고, 이를 대승승의 순수 양성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둘째는 시대적 배경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2000년 가까이 지나 말법 시대가 다가오는 세상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 아니라 크고 곧은 길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율 제도의 개혁을 제창했다.
감진이 일본에 전한 계율 제도는 당나라의 천태종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표준이 되었으며,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구족계를 삼사칠증(三師七証일본어) 앞에서 받아야 했다. 또한 보살계는 구족계를 받은 승려가 보조적으로 받거나 재가 신자가 받는 계율로 여겨졌다. 이에 반해 사이초는 범망경 보살계만으로 승려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수계 시에는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미륵보살을 삼사로 삼고, 모든 부처를 증사로 삼은 후 한 명의 전계사(伝戒師일본어)만 있으면 된다고 보았다. 전계사가 없으면 자서수계(自誓受戒일본어)도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재가자와 출가자는 모습(삭발과 가사)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과감한 계율 제도는 일본 독자적인 대승 불교를 육성했으며, 훗날 엔랴쿠지에서 배출되는 가마쿠라 신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사이초가 의도한 셋째는 히에이 산에서 승려의 유출을 막는 것이었다. 천태 법화종에서 수계한 승려들이 법상종으로 자주 넘어갔기 때문이다. 넷째는 천태 교단의 독립이다. 난토 육종은 승강을 정점으로 하는 관리 기관을 가지고 있었고, 천태 법화종의 연분도자도 도다이사에서 수계했다. 또한 승려는 치부성에 속하는 겐바료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를 극복하는 방법이 히에이 산상에서의 수계와 이어지는 12년에 걸친 농산행 등이었다.
천태 법화종에 연분도자가 주어진 지 10년 동안 수계한 20명 중 히에이 산에 거주하는 승려는 불과 6명이었다. 이는 나라의 사찰에 소속된 승려들이 천태 법화종의 할당을 이용하여 수계한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생각된다. 사이초는 득도를 받고 수계를 거쳐 그 후의 수학에 이르기까지 히에이 산 내에서 완결함으로써 많은 천태 승려를 양성하고자 했다. 그전에도 농산 수행을 하는 승려가 있었지만, 이를 제도화한 것은 사이초가 처음이다. 또한 농산 수행을 마치고 학문과 수행 모두에 만족한 자에게는 최고의 승위인 대법사위를 주기를 호소했다. 사이초가 대법사위를 받은 것은 이 이후의 일로, 매우 높은 요구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승계를 받은 승려에 대해서는 승적을 치부성으로 옮기지 않고 민부성에 둔 채로 두었으며, 수계 시 발급되는 도첩에 대해서는 구족계와 마찬가지로 관인을 찍도록 했다. 그리고 관의 파견으로 속별당(俗別当일본어, 승려가 아닌 관리자)을 두는 것, 타 종파로부터의 입문 규정, 관비의 불필요한 지급, 파계승의 처벌 등을 명문화했다. 이들은 천태 법화종이 기존의 불교 정책에서 벗어나 태정관의 직속으로 놓여 독자적인 관리 조직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7. 주요 저술 및 사상적 기여
사이초는 그의 생애 동안 여러 중요한 저작을 남겼으며, 특히 교리 논쟁을 통해 일본 불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작 대부분은 도쿠이치와의 논쟁과 관련이 있다.
7.1. 대표 저작
- 《현계론》(顕戒論일본어, 820): 보살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존의 수계 제도에 대한 비판과 대승 계단 설립의 정당성을 주장한 논서이다. 그의 대승 계단 설립 노력의 핵심을 담고 있다.
- 《산가학생식》(山家学生式일본어, 818~819): 천태종의 승려 교육 및 양성 제도를 제안한 문서로, 12년 농산행과 대승계 수계 등의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 《수호국계장》(守護国界章일본어, 818): 국가의 보호와 불교의 역할에 대한 사이초의 사상을 담은 저작이다.
- 《조권실경》(照権実鏡일본어, 817): 도쿠이치의 《불성초》에 대한 반박으로, 천태종의 교의가 진실된 가르침임을 밝히고 법상종의 주장을 비판했다.
- 《의빙천태의집》(依憑天台義集일본어, 813): 중국과 한국의 주요 불교 대사들이 천태 교학에 의존하여 저작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천태종이 동아시아 모든 주요 불교 종파의 토대를 이룬다고 역설했다.
- 《내증불법상승혈맥보》(内証仏法相承血脈譜일본어): 자신의 법맥이 정통임을 주장하며, 자신이 계승한 다섯 가지 가르침(달마 대사 부법, 천태 법화종, 천태 원교 보살계, 태장 금강계 양만다라, 잡만다라)을 통합하여 새로운 사상적 입장을 수립했음을 밝혔다.
- 《법화수구》(法華秀句일본어): 법화경의 핵심 구절들을 모아 설명한 저작이다.
- 《구격첩》(久隔帖일본어): 813년 11월 25일자로 쓰인 척독(서한)으로, "오랜만에 맑은 소식을 듣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수신인은 다카오 산사에 파견된 사이초의 제자 다이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구카이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이 서신은 왕희지의 서풍을 연상시키는 뛰어난 필치로 평가받으며, 나라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국보이다.

- 《월주 장래 목록》(越州将来目録일본어): 사이초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서적 등의 목록이다. 102부 115권의 서적과 밀교 법구가 기록되어 있다. 엔랴쿠지에 소장된 국보이다.
- 《갈마금강 목록》(羯磨金剛目録일본어): 당나라에서 가져온 물품들을 경장에 영구히 봉납할 때 작성된 총목록이다.
- 《공해 장래 목록》(空海将来目록일본어): 구카이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교 경전의 총목록을 사이초가 필사한 것이다. 도지에 소장된 국보이다.
- 《천태 법화종 연분 연기》(天台法華宗年分縁起일본어): 천태 법화종의 연분도자와 대승 계단 설립에 관한 문서를 모은 책이다. 엔랴쿠지에 소장된 국보이다.
7.2. 교리 논쟁
천태 법화종이 확산되면서 법상종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되었다. 813년 사이초가 저술한 《의빙천태의집》 등이 논쟁의 발단으로 여겨진다. 814년 봄, 사이초는 우사 신궁과 가하 신궁사(香春神宮寺일본어)에 참배하여 입당의 무사함을 감사하고 묘법연화경 등을 봉납했다. 815년 1월, 사가 천황의 희망으로 궁중에서 사이초와 난토 승려들 간의 대론이 벌어졌다. 815년 8월에는 다이안지에서 사이초가 천태 교학을 강의하며 난토 승려들과 대논쟁을 벌였다. 이때의 주제는 이른바 삼일권실론쟁이었다. 《에이잔 대사전》에 따르면 난토 승려들은 공격적인 자세로 논쟁에 임했다고 한다.
이어서 817년 2월, 동국에 머물던 사이초는 에이치지의 법상종 승려 도쿠이치가 저술한 《불성초》에 대한 반박으로 《조권실경》을 저술했다. 이후 두 사람의 논쟁은 사이초가 입적하기 전년인 821년까지 계속되었다. 사이초의 저작 대부분은 도쿠이치와의 논쟁과 관련이 있다. 두 사람의 논쟁은 두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천태와 법상의 교학적 차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에 대한 논쟁이다. 사이초는 "도쿠이치가 제시하는 수행은 정법 시대(석가모니 시대)의 것으로, 말법에 가까운 시대에는 실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 사상은 후술할 대승 계단 설립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주제는 삼일권실론쟁인데, 이는 "천태의 일승"과 "법상의 삼승" 중 어느 쪽이 권실(가설과 진실)의 사상인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법화칠유 중 화택의 유가 비유로 사용되었다. 이 논쟁은 《법화거혹》(法華去惑일본어), 《수호국계장》, 《결권실론》(決権実論일본어), 《법화수구》(法華秀句일본어) 등의 저술로 이어졌지만, 결론이 나기 전에 사이초와 도쿠이치 모두 입적하면서 사이초의 제자들이 도쿠이치의 주장을 조목조목 논파했다고 선언하며 끝이 났다.
8. 말년과 입적
사이초는 말년에 병환으로 고통받았으나, 대승 계단 설립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입적 후 마침내 그 염원이 이루어졌다.
8.1. 최후 활동 및 죽음
사이초는 822년 2월 14일에 전등대법사위(伝燈大法師位일본어)를 받았다. 이 무렵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간무 천황의 국기(国忌일본어)인 3월 17일에 그의 제자 광정은 "사이초 법사가 중병을 앓고 있으며,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계를 허락하지 않으면 선제(간무 천황)의 서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계단 설립의 칙허를 촉구했다.

사이초는 822년 6월 4일 辰時에 히에이 산의 중도원(中道院일본어)에서 입적했다. 향년 56세(만 54세)였다. 그의 묘소는 히에이 산 동탑의 정토원이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매일 모든 대경을 오랫동안 강의하여, 은근히 정진하여 법이 오래도록 머물게 하라. 국가를 이롭게 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힘쓰고 힘쓰라. 매년 관정 시기에는 호마를 행하고, 불법을 계승하여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라."
8.2. 사후 추증
사이초의 죽음을 계기로 후지와라노 후유쓰구, 요시미네노 야스요, 도모노 구니미치 등이 《산수산학의 표》(山修山学の表일본어)를 천황에게 주청했고, 그가 입적한 지 7일 후 대승 계단 설립과 천태 승려 양성 제도 수립에 대한 칙허가 내려졌다. 일부 학자들은 칙허가 사이초 입적 전날인 6월 3일에 내려졌으며, 사이초가 이를 듣고 입적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823년 2월 26일, 칙령에 의해 일승지관원은 엔랴쿠지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3월 17일에는 새로운 제도에 따른 첫 득도가 이루어졌고, 이어서 4월 14일에는 광정 등이 수계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17일, 사가 천황은 사이초를 애도하는 시인 《곡징상인시》(哭澄上人詩일본어)를 내렸다.
866년 7월 12일, 세이와 천황에 의해 덴교 대사(伝教大師일본어)라는 시호가 칙시되었다. 이는 엔닌의 지카쿠 대사(慈覚大師일본어)와 함께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사 칭호이다. 이후 그는 덴교 대사 사이초로 불리게 되었다. 천태종에서는 그를 개조로서 오늘날까지 존경하고 있으며, 2021년 6월 4일 엔랴쿠지에서는 그의 입적 1200주년 대원기 법요가 거행되었다.
9. 영향과 평가
사이초는 일본 불교와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헤이안 시대 불교의 형성과 후대 종파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9.1. 일본 불교에 미친 영향
중국 천태종은 6세기 수나라의 지자 대사가 개창한 종파로, 훗날 일본에 전래된 난토 불교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 사이초는 자신이 계승한 가르침에 대해 《내증불법상승혈맥보》에서 달마 대사 부법, 천태 법화종, 천태 원교 보살계, 태장 금강계 양만다라, 잡만다라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이 중 천태 법화종에만 "종"이 붙어 있는 것에 대해, 이부키 아쓰시는 "계승한 사상적 전통을 혈맥이라 칭하고, 그것들을 통합하여 새롭게 수립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종이라 불렀다"고 평가하며, "중국 천태종과는 다른 일본 독자적인 천태종이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신카와 데쓰오는 난토 육종의 종파를 "경전이나 논서의 이해에 관한 핵심적인 교의 및 그것을 배우는 '학파'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사이초의 개종으로 인해 "어떤 입장의 교의를 동일하게 존숭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종'으로 삼고, 나아가 그 한 종단 안에서 교의를 둘러싼 해석의 차이 등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분파가 생겼을 때 '파'로 보는 새로운 종파 의식의 원형이 탄생했다"고 평가했다.
현밀양학(顕密両学일본어)은 천태 법화종에 지관업(천태)과 차나업(밀교) 각각 1명의 연분도자가 허용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이초가 현교(천태 교학)와 밀교(밀교학)의 통합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관업은 지자 대사가 저술한 《마하지관》에서 유래하며, 불도 수행의 기초적인 규범을 기록한 것이다. 사이초는 《권장천태종연분학생식》에서 사종삼매(四種三昧일본어)의 실천을 중시했으며, 실천의 장으로서 사종삼매당의 건립을 계획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삼매당은 서탑의 법화당과 상행당(니나이당)뿐이다.
차나업은 《마하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에서 유래한다. 사이초가 당나라에서 전해온 밀교는 불완전하여 구카이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교의의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훗날 천태밀교는 엔닌과 엔친의 입당으로 연구가 활발해졌고, 안넨에 의해 완성되어 이후 100여 년간 천태밀교가 융성했다. 그러나 엔닌은 구카이의 현밀이교판(밀교가 현교보다 우월하다는 설)을 일부 수용하여 사이초가 내세운 현밀양학(원밀일치)은 무너지게 된다. 지관업이 재조명된 것은 엔랴쿠지 중흥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료겐이 등장하는 10세기 중반 이후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은 중생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이다. 사이초는 도쿠이치와의 삼일권실론쟁에서 이 불성론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도쿠이치는 일체개성을 인정하면서도 "불성을 드러내기 위한 행을 이룰 인(행불성)을 갖지 못한 중생이 있다"는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説일본어)을 지지했다. 사이초는 법상종의 이러한 입장을 소승적이라고 비판하며, 오성의 구별 없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는 수행의 어려움 때문에 성불할 수 있는 존재가 석가모니와 같은 특별한 존재뿐이라는 일반적인 불교관을 부정하고,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믿고 이타행에 힘쓰며 성불의 길을 나아가는 자야말로 보살이다"라고 하여 대승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사이초는 대승 계단 설립을 통해 일본 독자적인 계율 제도를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감진이 일본에 전한 "구족계 수계로 비구가 될 수 있다"는 동아시아의 기준에 맞지 않는 비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훗날 묘젠이 송나라에 입국했을 때, 히에이 산의 대승 계단에서 수계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다이사 계단에서 수계한 계첩을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현재 일본 불교가 계율을 경시한다는 평가가 있는데, 오키모토 가쓰미는 그 큰 전환점 중 하나로 사이초의 대승 계단 설립을 꼽았다. 이러한 계율 개혁은 훗날 가마쿠라 신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9.2. 문화적 기여
사이초는 일본에 차를 처음으로 전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서예는 스승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804년 입당하여 귀국 시 왕희지의 《십칠첩》, 왕헌지, 구양순, 저수량 등의 필적과 법첩류를 가져왔다. 그의 서풍은 구카이의 변화무쌍함에 비해 해서에 가깝다.
사이초가 지은 와카 9수가 전해진다. 그 중 "히에이 산 중도 건립 시 /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부처님들 내가 세운 숲에 명가(冥加일본어) 있으소서"라는 노래가 있다. 또한 "법화 28품 노래 중에 / 방편품 / 세 강이 하나의 바다가 될 때 사리불이 건너셨네 / 법사품 / 이 법을 만약 한마디라도 설하는 사람은 사방 부처의 사자이리 / 분별공덕품 / 내 명이 길다고 듣고 기뻐하는 사람은 마치 부처와 같네"와 같은 노래도 있다. "히에이 산 중당에 처음으로 상등을 켰을 때 / 밝게 빛나 후세 부처의 세상까지도 빛을 전하소서 법의 등불이여"라는 노래는 불멸의 법등에 대한 그의 염원을 담고 있다.
덴교 대사 동형상(伝教大師童形像일본어)은 쇼겐지(生源寺일본어), 소린지(雙林寺일본어), 산젠인, 마쓰오지(松尾寺일본어), 노후쿠지(能福寺일본어), 후코지(普光寺일본어), 조호지(長法寺일본어), 덴노인(天王院일본어), 릿샤쿠지(立石寺일본어) 등 천태종 사찰에 설치되어 있다.
10. 관련 항목
- 천태종
- 엔랴쿠지
- 구카이
- 간무 천황
- 사가 천황
- 도다이사
- 히에이 산
- 일본의 불교
- 밀교 (불교)
- 엔닌
- 엔친
- 안넨 (승려)
- 일본의 서도사
- 풍신첩
- 도쿠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