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열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중 한 명인 시몬 열심당원은 그의 삶과 활동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신약성경과 후대 기독교 전승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흔히 '열심당원 시몬' 또는 '가나안 사람 시몬'으로 불리며, 이는 그의 유대 민족주의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 사도가 되기 전, 그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극단적인 열심당의 일원으로서 폭력적인 활동에 가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감화되어 자신의 사상을 폭력적 저항에서 평화적 가르침으로 전환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시몬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응답하셨다' 또는 '들으심'을 의미한다.
그는 시몬 베드로나 예수의 형제 시몬과는 다른 인물로 구별된다.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사도 목록의 일부로 이름이 언급될 뿐 자세한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후대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 페르시아, 브리튼섬 등 다양한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유다 타데오와 함께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기독교 미술에서는 주로 톱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가 톱으로 몸이 두 동강 나는 순교를 당했다는 전승에서 유래한다. 이슬람교에서도 그는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언급되며, 베르베르족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몬의 삶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에서 평화의 사도로 변화한 과정을 보여주며, 이는 사회 정의와 민족 해방 운동의 맥락에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2. 신원 및 명칭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시몬은 여러 명칭으로 불리며, 다른 동명의 인물들과 구별된다. 그의 이름 '시몬'은 히브리어 שמעון시메온히브리어에서 유래했으며, '응답하셨다' 또는 '들으심'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를 다른 시몬들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별칭으로는 주로 '열심당원 시몬'과 '가나안 사람 시몬'이 있다. 루카와 사도행전에서는 그를 Ζηλωτης젤로테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라고 부르는데, 이는 '열심당원'을 의미한다. 반면 마태오와 마르코에서는 그를 Κανανίτης카나니테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또는 Καναναιος카나나이오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라고 칭한다.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 קנאי카나이히브리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열심 있는', '열성적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열심당원'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와 베다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카나나이오스'나 '카나니테스'를 '가나안 사람' 또는 '카나안 사람'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시몬이 갈릴래아의 카나 마을 출신임을 의미할 수 있다. 만약 이 해석이 옳다면 그의 별칭은 '카나이오스'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베드로와는 분명히 다른 인물이며, 마르코 복음서 6장 3절에 언급된 예수의 형제 시몬과도 직접적으로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톨릭 대백과사전은 시몬 열심당원이 예루살렘의 시메온 또는 예수의 형제 시몬과 동일 인물일 수 있다고 제안하며, 이 경우 그는 예수의 사촌이거나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얻은 아들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3. 성경에서의 기록
시몬 열심당원의 이름은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행적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 루카 복음서 6장 14-16절: "시몬 곧 베드로라 이름하신 자와 그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마태와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팔 자 가룟 유다라."
- 사도행전 1장 13절: "그들이 들어간 후에는 그들이 유숙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더라."
- 마태오 복음서 10장 4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과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 마르코 복음서 3장 18절: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가나안 사람 시몬과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이처럼 시몬은 항상 사도 목록의 후반부에 등장하며, 그를 다른 시몬들과 구별하기 위한 별칭('열심당원' 또는 '가나안 사람')이 덧붙여진다. 성경은 그가 사도로서 어떤 특별한 역할을 했는지, 어떤 가르침을 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4. '열심당원' 및 '가나안 사람' 별칭의 해석
시몬에게 붙여진 '열심당원'(Ζηλωτης젤로테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과 '가나안 사람'(Κανανίτης카나니테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또는 Καναναιος카나나이오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이라는 별칭은 그의 정체성과 배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열심당원'이라는 명칭은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사용되며, 이는 시몬이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유대인의 독립을 주장했던 정치적, 종교적 단체인 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을 시사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시몬은 사도가 되기 전 유대아의 열심당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 사용된 '가나안 사람'이라는 별칭은 히브리어 קנאי카나이히브리어에서 유래했으며, '열심 있는' 또는 '열성적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열심당원'으로 번역하여 시몬이 정치적 열심당과 연관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와 베다 같은 초기 기독교 학자들은 '카나나이오스'나 '카나니테스'가 시몬이 갈릴래아의 카나 마을 출신임을 나타내는 '가나안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그의 별칭은 '카나이오스'가 되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별칭의 의미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다. 로버트 아이젠만은 동시대의 탈무드 기록에서 열심당원을 '칸나임'(קנאיםkanna'im히브리어)으로 지칭하며, 이는 '성전에서 복수하는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젠만의 더 넓은 결론, 즉 원래 사도 집단 내의 열심당적 요소가 이방인을 위한 바울적 기독교를 지지하도록 위장되고 덮어씌워졌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존 P. 마이어는 '열심당원'이라는 용어가 오역이며, 복음서의 맥락에서는 단순히 '열심 있는' 또는 '종교적으로 열성적인' (이 경우 모세 율법을 지키는 데 열성적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열심당 운동이 복음서 사건들로부터 30~40년 후에야 존재했기 때문에, 시몬이 이 정치적 단체의 일원이었을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S. G. F. 브랜던이나 마르틴 헹겔과 같은 학자들은 마이어의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처럼 '열심당원'이라는 별칭이 정치적 열심당과의 연관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율법에 대한 종교적 열심을 나타내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5. 초기 생애 및 사상적 배경
시몬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태어나 자랐다. 사도가 되기 전, 그는 극단적인 유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열심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열심당은 마카베오 가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유대인의 해방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들은 로마인들과 그들에게 순종하는 동족 유대인들에 대해 약탈과 살인 등 테러와 유사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열심당원들은 예언에 따라 메시아가 이 땅에 강림하면 군대를 이끌고 로마 제국을 몰아내 조국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초라한 행색의 예수를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로 쉽게 인정하지 못했으며, 그의 사상과 열심당의 폭력적 저항 이념은 극과 극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의 설교와 기적을 직접 듣고 목격하면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열심당의 이념에서 벗어나 예수의 제자가 되었으며, 폭력적 저항에서 평화적 가르침으로 그의 사상이 전환되는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예수는 시몬이 열심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는 예수가 성실하거나 수동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포용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 제국에 순종하며 세리였던 마태오와 로마 제국에 극렬히 반대했던 열심당원 시몬을 모두 자신의 제자로 삼음으로써, 예수는 서로 상반된 이념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고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시몬의 이러한 사상적 전환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평가된다.
6. 사도 활동 및 전승
시몬 열심당원의 사도적 활동에 대한 신약성경의 기록은 매우 적지만, 후대의 다양한 기독교 전승들은 그의 선교 활동과 순교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전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전승에 따르면, 시몬은 유다 타데오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로 활동했으며, 서방 기독교에서는 이 두 사도의 축일을 10월 28일에 함께 기념한다. 이 전승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한 후,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또는 오늘날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가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고 전한다. 그들은 서기 65년에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이야기는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의 13세기 저서인 황금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페르시아에서의 순교 전승에 따르면, 시몬과 유다 타데오는 그 지역의 신상을 파괴했고, 이로 인해 신상 속에 있던 악마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자신들이 섬기던 신상이 부서지자 격분한 이교도들은 그들을 붙잡아 죽였다. 시몬은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사타구니에서부터 머리까지 톱으로 몸이 두 동강 나는 잔혹한 형벌을 당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전승들은 시몬의 선교 지역과 순교 방식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 캅카스 지역:** 동방 전승에 따르면, 시몬은 선교를 위해 조지아로 여행하여 압하지야에서 사망했으며, 흑해 연안의 아직 확인되지 않은 장소인 니콥시아에 묻혔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오늘날 압하지야의 아나코피아로 옮겨졌다. 모세스 코레나치는 시몬이 캅카스 이베리아 왕국의 베리오스포라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했다.
- 중동 및 아프리카:** 또 다른 전승은 그가 중동과 아프리카를 여행했다고 말한다. 에티오피아 기독교인들은 그가 사마리아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 페르시아:** 유스투스 립시우스는 시몬이 페르시아의 수아니르에서 톱으로 몸이 두 동강 났다고 기록했다.
- 에데사:** 일부 전승은 시몬이 에데사에서 평화롭게 사망했다고 전한다.
- 로마 브리튼:**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시몬은 로마 브리튼을 방문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서기 60년 부디카의 반란이 시작될 무렵 두 번째 브리튼 선교를 위해 도착했다. 그는 서기 61년 5월 10일 링컨셔의 캐스터에서 로마인 카투스 데키아누스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했다. 카이사르 바로니우스와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시몬의 첫 브리튼 도착은 서기 44년 로마의 브리튼 정복 시기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니케포로스 1세는 시몬이 이집트, 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리비아를 거쳐 서쪽 바다와 브리타니아 섬들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다.
- 유대-로마 전쟁:** 그의 별칭 '열심당원'에서 영감을 받은 또 다른 전승은 그가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서기 66-73년)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한다.
7. 신원 관련 논의
시몬 열심당원은 신약성경에 이름만 언급될 뿐 자세한 행적이 기록되지 않아, 다른 동명의 인물들과의 동일성 또는 연관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존재한다.
복음서에서 시몬 열심당원은 마르코 복음서 6장 3절에 언급된 예수의 형제 시몬과 직접적으로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톨릭 대백과사전은 시몬 열심당원이 예루살렘의 시메온이나 예수의 형제 시몬과 동일 인물일 수 있다고 제안하며, 이 경우 그는 예수의 사촌이거나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얻은 아들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 다른 전승은 그가 서기 62년부터 107년까지 의로운 야고보의 처형 이후 예루살렘의 두 번째 주교를 지낸 예루살렘의 시메온과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시메온은 갈릴래아에서 태어났지만 말이다.
2세기 위경인 사도들의 서신(Epistula Apostolorum에피스툴라 아포스톨로룸라틴어)은 그를 '유다스 젤로테스'(Ἰούδας Ζηλωτής유다스 젤로테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로 언급하며 사도 목록에 포함시킨다. 마태오 복음서 10장 3절의 일부 구 라틴어 번역본에서는 타대오/레배오 대신 '열심당원 유다'로 대체되어 있다. 일부 독자들은 이를 통해 그가 요한 복음서 14장 22절에 언급된 "가룟이 아닌 유다"와 동일 인물일 수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유다가 사도 도마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열심당원 시몬'이 도마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바바라 티어링이 시몬 열심당원을 시몬 마구스와 동일시한 견해는 학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가설과 전승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은 시몬에 대해 이러한 가능성 있는 가명들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8. 성인으로서의 위상
시몬 열심당원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기독교 교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가톨릭 교회를 포함),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루터교회, 그리고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 로마 가톨릭교회:** 시몬 열심당원은 유다 타데오와 함께 10월 28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이는 서방 기독교에서 두 사도를 함께 기리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 동방 정교회:** 동방 정교회에서는 시몬 열심당원의 축일을 5월 10일로 지정하여 기념한다.
- 성공회:** 잉글랜드 성공회에서는 시몬을 유다와 함께 10월 28일에 축일(Festival)로 기억한다.
- 콥트 정교회:** 콥트 정교회에서도 시몬의 축일을 5월 10일로 기념한다.
이처럼 시몬 열심당원은 다양한 기독교 전통 속에서 그의 신앙과 사도적 헌신을 기리며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9. 기독교 미술에서의 표현
기독교 미술에서 시몬 열심당원은 특정 상징물과 함께 묘사되어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가장 흔한 상징물은 톱이다. 이는 그가 톱으로 몸이 두 동강 나는 순교를 당했다는 널리 퍼진 전승에서 유래한다. 이 외에도 배, 십자가, 물고기 또는 두 마리의 물고기, 창, 노 등이 그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물은 그의 선교 활동이나 순교와 관련된 다양한 전승을 반영한다.
시몬 열심당원을 묘사한 주요 미술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미술 작품들은 시몬 열심당원의 순교와 사도적 삶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기독교 신앙에 있어 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0. 이슬람에서의 언급
이슬람교에서도 시몬 열심당원은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이슬람의 쿠란 주석과 하디스 전통에서는 예언자 이사의 열두 사도 목록에 시몬이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시몬은 알라의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외곽의 베르베르족에게 파송되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기독교 전승에서 언급되는 선교 지역 외에 이슬람 세계에서도 중요한 선교 활동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이슬람 문헌에서의 이러한 언급은 시몬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11. 역사적 평가 및 영향
시몬 열심당원의 삶은 그의 독특한 사상적 배경과 예수의 제자로서의 변화를 통해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초기 생애에서 그는 로마 제국에 대한 극렬한 저항을 표방하는 열심당의 일원으로서 폭력적 수단까지 불사했던 민족 해방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이는 그가 사회 정의와 민족의 독립을 열망하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을 접한 후, 시몬은 자신의 이념을 폭력적 저항에서 평화적 가르침으로 전환하며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예수가 로마 제국에 순종했던 세리 마태오와 로마 제국에 극렬히 반대했던 열심당원 시몬을 모두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서로 상반된 이념을 가진 이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예수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사회 통합과 평화적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시몬의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후대에 사회 정의, 평화, 그리고 민족 해방 운동과의 연관성 측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그는 단순히 폭력적인 저항자에서 멈추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의 평화와 정신적 해방을 추구하는 인물로 변화함으로써, 진정한 사회 변화가 내면의 변화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삶은 극단적인 이념을 가진 사람조차도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며, 이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사회 운동과 종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