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황족인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さねひとしんのう일본어, 1552년 5월 16일 ~ 1586년 9월 7일)은 오기마치 천황의 장남으로, 생전에는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부황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자 오기마치 천황의 황태손인 고요제이 천황이 즉위하면서, 고요제이 천황에 의해 태상천황으로 추존되어 요코인(陽光院ようこういん일본어)이라는 존호가 주어졌다. 현재 일본 황실은 사네히토 친왕의 남계 자손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그가 일본 황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2. 생애
사네히토 친왕은 오기마치 천황의 적자로서 황족 교육을 받았으며, 비공식적으로 '황태자'로 불리며 황실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조정의 정치적 문제에 깊이 관여했으며, 혼노지 변 당시 위험한 상황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2.1. 출생 및 친왕 선하
사네히토 친왕은 덴분 21년 4월 23일(1552년 5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오기마치 천황의 장남이자 유일하게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한 아들이었다. 에이로쿠 11년 12월 15일(1568년), 그는 친왕 선하를 받고 원복을 치렀다. 이 원복은 당시 일본 황실의 재정난으로 인해 계속 연기되어 왔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재정적 지원으로 마침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별당으로는 기쿠테이 하루스에가, 가사로는 간로지 쓰네모토, 니와타 시게미치, 야마시나 도키쓰네, 나카야마 지카쓰나, 가라스마 미쓰노부가 임명되었다. 공식적인 입태자 의식은 거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기마치 천황에게는 사네히토 외에 다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시대 사료에서는 그를 '하루노미야'(春宮), '도구'(東宮), '태자' 등으로 부르는 사례가 발견되어 사실상 황태자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복에 앞서 에이로쿠 10년(1567년) 11월에는 간슈지 하루코를 상로로 맞이했는데, 명목상 여방(女房)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비(妃)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2.2. 정치 활동 및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
덴쇼 연간에 접어들면서 사네히토 친왕은 조정에 제기된 여러 소송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견의상론과 덴쇼 4년 고후쿠지 벳토 소론 등이 있었는데, 특히 후자의 경우 오다 노부나가가 천황의 의견이 무시당한 것에 분노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친왕은 즉시 천황을 대신하여 사죄의 서신을 보내 노부나가를 달랬다. 또한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이시야마 전투에서 노부나가와 겐뇨의 화해를 중재하는 인물로 여러 차례 등장했으며, 덴쇼 8년(1580년) 칙명에 의한 최종적인 화해 시에는 겐뇨에게 이시야마 혼간지에서의 퇴거를 설득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덴쇼 7년(1579년) 11월 이후, 사네히토 친왕은 오다 노부나가가 헌상한 '니조 신 어소'라는 저택에 거처를 정했다. 이 저택은 본래 니조 가문의 소유였으나, 노부나가가 마음에 들어 니조 가문으로부터 양도받아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자신의 거처로 삼은 건물이었다. 이는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영한 니조성과는 다른 건물이다. 니조 신 어소는 오기마치 천황이 거주하는 '가미고쇼'(上御所, 상어소)에 대해 '시모고쇼'(下御所, 하어소)라 불렸으며, 금리(가미고쇼)와 마찬가지로 소반(小番)도 정비되었다. 오기마치 천황 역시 조정의 의사 결정 시에는 반드시 사네히토 친왕의 의견을 묻는 등, 마치 '부(副) 조정'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나라 고후쿠지의 승려가 남긴 일지인 『다몬인 일기』와 『렌쇼인 기록』에서는 사네히토를 '왕', '주상', '금상황제' 등으로 부르며 사실상의 천황(공동 통치자)으로 간주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오기마치 천황은 당시로서는 고령이었고, 사네히토 친왕 또한 언제 즉위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그러나 조정이 양위에 따른 일련의 의식을 자력으로 거행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했으며, 또한 선선대 고카시와바라 천황, 선대 고나라 천황, 그리고 오기마치 천황 자신처럼 전국 전국 다이묘들로부터 널리 기부금을 모으는 방식 또한 노부나가의 패권 아래에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조정은 양위의 실현을 오직 노부나가에게만 호소할 수밖에 없었고, 좌대신 추임, 삼직추임 등 조정으로서는 파격적인 교환 조건을 제시하며 노부나가를 움직이려 했으나, 노부나가는 명시적으로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극적인 태도를 일관했다. 그러나 아즈치성에는 천황의 행차를 맞이하는 '고교노마'(御幸の間)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사네히토 친왕의 즉위를 상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혼노지 변 당시, 노부나가의 적남인 오다 노부타다는 숙소로 삼았던 묘가쿠지를 포기하고, 군사 시설로서 더욱 유리했던 니조 신 어소에 농성했다. 예수회의 『일본 연보』에 따르면,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대가 어소를 포위하는 가운데, 사네히토 친왕은 미쓰히데에게 "나도 할복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이 노부나가에 의해 옹립되고 노부나가에 의존하는 존재이며, 노부나가가 몰락하면 그를 따라 순사할 수도 있는 입장이라고 사네히토가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다행히 노부타다와 동행하던 무라이 사다카쓰의 협상으로, 사네히토 친왕과 그의 처자, 숙직하던 공가(公家)들은 어소를 탈출하여 금리(禁裏)로 피난했다. 사네히토 친왕 일행에 도망자가 섞여 들어가는 것을 경계한 미쓰히데는 말이나 수레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사네히토 친왕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동행하던 렌가시 사토무라 조하가 어디선가 허름한 짐 운반용 가마를 구해와 사네히토 친왕만은 도중에 그것을 탔다고 한다.
덴쇼 12년(1584년) 1월, 그는 3품에 서임되었다.
2.3. 죽음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양위하여 상황이 될 오기마치 천황을 위한 '인고쇼'(院御所) 건설에 착수하는 등, 양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사네히토 친왕은 양위를 기다리지 못하고 덴쇼 14년 7월 24일(1586년 9월 7일)에 갑작스럽게 서거했다. 그의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는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네히토 친왕의 측실과 밀통한 것에 항의하여 자살했다"거나 "사네히토 친왕 대신 히데요시가 천황이 될 작정이다"라는 등 여러 소문이 나돌았다. 또한 부황인 오기마치 천황도 충격이 매우 커서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으며, 세간에는 절식 끝에 굶어 죽었다거나 사네히토를 따라 할복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3. 개인적인 관심사와 문화 활동
사네히토 친왕은 정치적인 역할 외에도 다양한 학문적, 예술적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와카, 렌가, 아악, 서도에 능통했으며, 만년에는 자주 와카 모임을 열기도 했다. 또한 이케바나와 양궁 등에도 깊은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문화적 활동은 황실 내부뿐만 아니라 당시 귀족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3.1. 축국 대회
덴쇼 3년(1575년), 사네히토 친왕은 교토에서 대규모 축국 대회를 주최했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이 대회는 정식 의례에 준하는 화려한 행사였으며, 오다 노부나가 등은 여관을 통해 오기마치 천황으로부터 술잔을 하사받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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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마치 천황 |
고셋케 인사들 |
세이카 가문 인사들 |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마와리(측근) |
벳쇼 나가하루 |
벳쇼 시게무네 |
미요시 야스나가 |
다케다 모토아키 |
헷미 마사쓰네 |
아와야 가쓰히사 |
구마가이 나오유키 |
야마가타 모리노부 |
나이토 시게마사 |
시라이 미쓰타네 |
시오카와 나가미쓰 |
인물 | 복장 | 회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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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네히토 친왕 | 1회차 | |
아스카이 마사아쓰 | 다마무시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1회차 |
간슈지 하루스에 | 히와다색 가리키누, 사시누키 | 1회차 |
다카쿠라 나가스케 | 자주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1회차 |
아스카이 마사노리 | 자주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1회차 |
고쓰지 다메나카 | 1회차 | |
니와타 시게야스 | 연두색 가리키누, 가즈하카마 | 1회차 |
산조니시 사네에다 | 흰색 나오시, 사시누키 | 1회차 |
간슈지 하루토요 | 도카게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2회차 |
히노 데루스케 | 자주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2회차 |
다케우치 나가하루 | 연두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2회차 |
간로지 쓰네모토 | 다마무시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2회차 |
산조 기미노리 | 지문양 있는 감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2회차 |
산조니시 기미아키 | 연두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2회차 |
아스카이 마사아쓰 | 2회차 | |
야마시나 도키쓰네 | 자주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2회차 |
우스 모로미쓰 | 스오 | 3회차 |
미나세 지카토모 | 연두색 몬샤, 가즈하카마 | 3회차 |
히로하시 가네카쓰 | 연두색 몬샤 | 3회차 |
고쓰지 모토나카 | 야나기색 스이칸 | 3회차 |
마데노코지 미쓰후사 | 노란색 바탕에 녹청 문양 스이칸, 가즈하카마 | 3회차 |
니와타 시게미치 | 자주색 스이칸, 가즈하카마 | 3회차 |
다카쿠라 나가타카 | 금사 스이칸, 가즈하카마 | 3회차 |
나카인 미치카쓰 | 관, 속대 | 3회차 |
사네히토 친왕 | 4회차 | |
다카쿠라 나가스케 | 4회차 | |
산조니시 사네에다 | 4회차 | |
고쓰지 다메나카 | 4회차 | |
간슈지 하루스에 | 4회차 | |
가라스마 미쓰노부 | 자주색 몬샤, 가즈하카마 | 4회차 |
아스카이 마사아쓰 | 4회차 | |
아스카이 마사노리 | 4회차 |
4. 사후 추존 및 유산
사네히토 친왕은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이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특별한 추존을 받았다. 그의 직계 혈통은 현대 일본 황실로 이어져 중요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과 소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4.1. 사후 추존
사네히토 친왕이 서거한 후, 그의 유복자인 와히토 친왕(훗날의 고요제이 천황)은 같은 해 11월에 조부인 오기마치 천황의 양자가 되어 황위를 계승받았다. 시기는 불확실하나, 고요제이 천황은 일찍 사망한 아버지에게 '요코인'이라는 시호와 함께 태상천황의 존호를 추증했다. 게이초 3년 7월 20일부터 24일(1598년 8월 21일~25일)에는 황궁의 세이료덴에서 사네히토 친왕의 13주기를 기념하는 불교 의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4.2. 황실에 미친 영향
오늘날 일본 황실은 사네히토 친왕의 남계 자손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네히토 친왕의 다섯째 아들인 고이 호신노는 오다 노부나가의 양자가 되었고, 여섯째 아들인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다. 사네히토 친왕이 노부나가의 양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사네히토 친왕과 고이 호신노가 모두 '고노미야'(五宮)로 불렸던 것에서 온 오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기마치 천황에게 사네히토 친왕 외에 다른 아들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사네히토 친왕이 '고노미야'로 불린 이유도 불분명하므로, 사네히토가 '고노미야'로 불렸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4.3. 논란 및 소문
사네히토 친왕의 죽음을 둘러싸고 당시 사회에는 여러 소문이 나돌았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된 소문은 그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님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사네히토 친왕의 여방(女房) 중 한 명인 덴지노쓰보네는 덴쇼 10년(1582년)에 사네히토 친왕 곁을 떠나 혼간지 문주 겐뇨의 차남이자 고쇼지 문주인 겐손과 결혼했다. 이를 두고 혼담에 적극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소극적이었던 사네히토 친왕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으며, 이것이 덴지노쓰보네의 친정인 가미레이제이 가문의 당주이자 오빠인 레이제이 다메마스, 친오빠이자 시조 가문을 이은 시조 다카마사, 그리고 언니의 남편인 야마시나 도키쓰네 세 사람이 덴쇼 13년(1585년)에 칙감을 받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기리노 사쿠토의 설도 있다.
5. 가계
사네히토 친왕의 혈통은 역대 천황들과 연결되며, 그의 가족 구성은 당시 황실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5.1. 조상
사네히토 친왕은 오기마치 천황의 장남으로, 그의 조상들은 다음과 같다.
세대 | 인물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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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사네히토 친왕 | |
2 | 오기마치 천황 (1517-1593) | 아버지 |
3 | 마데노코지 후사코 (d. 1581) | 어머니 |
4 | 고나라 천황 (1495-1557) | 친조부 |
5 | 마데노코지 에이코 (1494-1522) | 친조모 |
6 | 마데노코지 히데후사 (1492-1563) | 외조부 |
8 | 고카시와바라 천황 (1462-1526) | 고조부 |
9 | 간슈지 후지코 (1464-1535) | 고조모 |
10 | 마데노코지 가타후사 (1466-1507) | 외고조부 |
12 | 마데노코지 가타후사 (1466-1507) | 외외고조부 |
16 | 고쓰치미카도 천황 (1442-1500) | 현조부 |
17 | 니와타 아사코 (1437-1492) | 현조모 |
18 | 간슈지 노리히데 (1426-1496) | 고고조부 |
19 | 아스카이 마사나가의 딸 | 고고조모 |
20 | 간슈지 노리히데 (1426-1496) | 외고고조부 |
24 | 간슈지 노리히데 (1426-1496) | 외외고고조부 |
5.2. 비와 자녀
사네히토 친왕의 어머니는 나이대신 마데노코지 히데후사의 딸이자 준산구인 마데노코지 후사코(藤原房子)이다. 그는 여러 비와 첩을 두었으며, 그들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얻었다.
- 여방: 간슈지 하루코(藤原勧修寺晴子, 신조토몬인) (1553년 ~ 1620년) - 간슈지 하루스케의 딸
- 장녀: 에이쇼 여왕 (1569년 ~ 1580년)
- 장남: 와히토 친왕(和仁親王, 훗날의 고요제이 천황) (1571년 12월 31일 ~ 1617년 9월 25일)
- 차남: 구세이 호신노(空性法親王, 사다스케) (1573년 ~ 1650년) - 시텐노지 별당
- 삼남: 료조 호신노(良恕法親王, 쇼스케) (1574년 ~ 1643년) - 덴다이 좌주
- 사남: 이름 미상 (1575년) - 요절
- 오남: 고이 호신노(興意法親王, 구니노리) (1576년 ~ 1620년) - 오다 노부나가의 양자
- 삼녀: 이름 미상 (1577년 ~ ?)
- 육남: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 초대 하치조노미야) (1579년 2월 3일 ~ 1629년 5월 29일)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 오녀: 이름 미상 (1580년 ~ ?)
- 육녀: 이름 미상 (1581년 ~ 1584년)
- 칠녀: 이름 미상 (1583년 ~ ?)
- 팔녀: 이름 미상 (1584년 ~ ?)
- 구녀: 이름 미상 (출생년 미상 ~ 사망년 미상)
- 여방: 덴지노쓰보네(典侍局, 1565년 ~ 1616년 3월 9일) - 레이제이 다메마스의 딸. 훗날 고쇼지의 겐손과 혼인
- 장녀: 이름 미상 (안젠지노미야) (출생년 미상 ~ 1579년) - 안젠지
- 차녀: 신게쓰 여왕(心月女王) (1580년 ~ 1590년) - 안젠지
6. 릉
사네히토 친왕의 묘소는 태상천황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릉'으로 불린다. 그의 릉은 일본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교토시히가시야마구 이마구마노이즈미야마초의 센뉴지 경내에 위치한 월륜릉(月輪陵つきのわのみさ사기일본어)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내청상의 형식은 무방탑(無方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