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빅토르 스타루힌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가족의 망명, 무국적자로서의 삶의 어려움, 그리고 야구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일본 프로 야구의 전설로 성장했다. 그의 삶은 시대적 격변 속에서 개인의 의지와 재능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1.1. 출생 및 어린 시절
빅토르 스타루힌은 1916년 5월 1일 러시아 제국 우랄 산맥 지역의 니즈니타길에서 러시아 제국군 장교인 아버지 콘스탄틴과 어머니 에프도키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그의 가족은 왕당파라는 이유로 볼셰비키 정권의 박해를 피해 우랄 산맥과 광대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의 하얼빈으로 도피했다. 1925년에는 어머니가 숨겨둔 보석으로 간신히 일본 입국에 필요한 거액을 지불하고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에 정착했다. 이로써 그는 일본에서 무국적 '백계 러시아인'으로 살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의 애칭은 '위자'였다.
아사히카와 시립 닛쇼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백인이 드물었던 일본 사회에서 그는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운동 신경이 뛰어나 달리기 경주에서는 20NaN 경 m 뒤에서 출발해도 1등을 차지할 정도였다. 야구를 접한 후 학교 팀에서 활약했으며,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키가 180NaN 경 cm를 넘어서는 큰 체격 덕분에 너무 크다는 이유로 고등소학교 팀에 합류하기도 했다.
1.2. 학창 시절과 야구 입문
구제 아사히카와 중학교(현재의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히가시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야구부에 들어간 스타루힌은 고등소학교 시절 또래들과 야구를 할 수 없었던 아쉬움 때문인지 야구부 입단 당시 "정말 모두와 함께 야구를 해도 되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그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의 홋카이도 대회에서 1933년과 1934년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했으나, 동료들의 실책 등으로 아쉽게 패배하며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1932년, 그가 고요가쿠인 고등학교 야구부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자 가족은 효고현 고베시로 이사하여 학교의 지원으로 빵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학교들의 항의로 이적 제안이 무산되면서 가족은 다시 아사히카와로 돌아왔다. 구제 중학교 1학년 때,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찻집 '바이칼'의 종업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사히카와 중학교의 유명 투수였던 스타루힌에게는 오히려 동정 여론이 모였다. 이 사건으로 스타루힌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졌고, 학비와 생활비조차 동급생들의 모금에 의존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으며, 이는 그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초 그는 와세다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대학 진학은 요원한 상황이었다.
1.3. 프로 데뷔와 초기 경력

1934년 11월 25일, 구제 중학교 3학년이던 스타루힌은 당시 일본에 와 있던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팀과의 미일 야구 경기에 출전할 전일본팀에 반강제적으로 합류하게 된다. 전년도 미일 야구에서 17전 전패를 당하고 그해에도 5연패를 기록하던 전일본팀 감독 이치오카 다다오에게는 1승을 거두라는 지상 명령이 있었고, 이를 위해 '괴물 투수' 스타루힌을 영입하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당시 프로 야구가 존재하지 않고 육대학 아마추어 야구가 야구 인기를 지탱하던 시절, 문부성은 '학생 야구 선수가 프로 구단과 경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통지를 내렸다. 이에 미일전을 주최하던 요미우리 신문은 전일본팀을 모체로 직업 야구단 '대일본도쿄야구구락부'를 결성했다. 교토 상업고등학교의 사와무라 에이지를 중퇴시킨 것과 같은 수법으로 스타루힌을 중학교에서 자퇴시켜 팀(훗날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영입하기 위해 아사히카와에 스카우트를 보냈다. 지역 스타를 빼앗기는 것에 아사히카와 시민과 학교 측은 저항했다. 하지만 스타루힌 본인은 고시엔 출전이라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된 경제적 사정뿐만 아니라 망명자 신분이었기에 거절할 경우 가족 전원이 국외 추방, 즉 소련으로 강제 송환되어 NKVD에 체포될 가능성을 시사받았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아사히카와 중학교를 중퇴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어머니와 함께 상경했다. 그는 나중에 아내에게 기차가 "가지 마!"라고 외치는 동료들의 절규처럼 들렸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중퇴와 전일본팀, 그리고 교진군 입단 뒤에는 미일전을 주최했던 요미우리 신문 오너 쇼리키 마쓰타로의 의지가 있었다. 작가 사노 신이치는 자신의 저서에서 "요미우리 인수 이전 경시청의 실력자였던 쇼리키가 아버지의 범죄 이력을 빌미로 일본 국적이 없는 스타루힌 일가를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미일 야구 17차전에서 구원 등판하여 1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러나 경기는 이미 승패가 결정된 상태였고, 스타루힌의 제구력 불안정으로 미국 팀이 소극적으로 임한 결과였다. 1934년 11월 29일 사이타마현립 오미야 공원 야구장에서 열린 미일 야구 17차전 8회부터 패전 처리로 2이닝을 던진 것이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데뷔가 되었다. 1935년 2월부터의 미국 원정에도 참가하게 되었으나, 이때 우익 거물인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의 간섭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더욱이 무국적자였기에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출국 시 경시청으로부터 '국외로 나가도 좋다'는 허가증만 받았을 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도 여권이 없어 비자를 받지 못해 입국할 수 없었고, 무허가 이민자로 간주되어 자칫 수용소에 보내질 뻔했으나, 프랭크 오도울 등의 노력으로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의 초등학교에 다녔던 시골 소년 스타루힌은 미즈하라 시게루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을 때, 자신도 백인이면서 "선배, 미국은 외국인들만 있네요", "외국인들은 전혀 일본어를 못하네요"라고 감상을 말해 미즈하라를 어이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빅토르 스타루힌은 일본 프로 야구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투수였으며, 전시 상황과 전후 혼란 속에서도 꾸준히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2.1. 제2차 세계 대전과 이름 변경

1936년 대일본도쿄야구구락부의 후신인 도쿄 교진군에 입단했다. 7월 3일 다이도쿄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3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교진군의 공식전 첫 승리에 기여했다. (현재 규칙으로는 세이브에 해당한다.)
스타루힌은 경기에서 빠른 공은 좋았지만, 초기에는 제구력이 좋지 않아 볼넷이 많았다. 이 때문에 미즈하라 시게루 등 베테랑 선수들과 선배들은 "풋내기!", "바보!", "어디 보고 던지는 거야!"라고 번갈아 소리쳤다고 한다. 섬세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 스타루힌은 상처받고 낙담하여 눈물을 흘리며 감독에게 "이대로는 무서워서 던질 수 없습니다"라고 호소하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마운드에 계속 섰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교진군 감독으로 취임한 후지모토 사다요시의 격려와 맹훈련을 통해 제구력을 익혔다. 이듬해인 1937년 춘계 리그에서는 7월 3일 이글스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역대 두 번째 기록을 세웠고, 13승을 거두었다. 추계 리그에서는 15승을 올리며 최다 승리 타이틀을 획득, 사와무라 에이지를 대신하여 에이스로 부상했다.
1938년에도 춘계 리그에서 14승으로 최다 승리를 기록했고, 추계 리그에서는 19승, 평균자책점 1.05, 146 탈삼진, 승률 .905, 7 완봉승을 기록하며 투수 5관왕을 달성했다. 1939년에는 팀의 41번째 경기인 6월 20일 라이언군전에서 일찌감치 20승에 도달했다. 시즌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인 시즌 42승(전후 한때 스코어북 재검토로 40승으로 기록되었으나, 후술할 이유로 42승으로 환원)을 기록했으며, 이는 팀의 66승 중 2/3에 해당하는 수치로 MVP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에는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100승을 달성했는데, 165경기 만에 달성한 이 기록은 2019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역대 최단 기록이다. 또한 그해 시즌 4개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는데, 이는 1969년 오스기 가쓰오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었다. 1940년에도 38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최고 수훈 선수 및 최다 승리에 선정되었고, 5시즌 연속 최다 승리 역시 일본 프로 야구 최장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시기 1939년 할힌골 전투와 같은 대규모 군사 충돌이 발생하며 일소 관계가 악화되자, 스타루힌은 일본군으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 그는 군부에 소환되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 스파이 용의자이므로 일본 국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 스이도바시역에서 고라쿠엔 구장으로 가는 길에 다리 위에서 간다 강을 엿보는 것을 금지한다 (간다 강에서는 선박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고 있었기 때문).
- 야구장 외야 스탠드에 세워진 깃발을 보는 것을 금지한다 (깃발을 통해 풍력·풍향 등 날씨 정보를 파악하여 소련에 전달할 것을 우려).
이러한 상황에서 직업 야구의 에이스인 스타루힌이 헌병에게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나고야 킨샤치군 대표 아카미네 마사시의 권유로 1940년 須田 博스다 히로시일본어로 개명했다. 한편, 스타루힌은 무국적자였기에 징병되지 않았다.
1941년에는 7월 14일 난카이전에서 40NaN 경 °C가 넘는 고열을 무릅쓰고 등판하여 15승을 거두었으나, 경기 후 병원으로 이송되어 늑막염 진단을 받고 전열에서 이탈했다. 한때는 사경을 헤매며 목숨을 건진다 해도 야구 선수로서 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의 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2년 4월 말 복귀하여 26승을 거두었다. 1943년에도 5월 중순까지 6승을 추가했으나, 늑막염이 재발하여 다시 전열을 이탈했고 10월이 되어서야 복귀하여 10승을 달성했다. 1944년에는 개막 후 6월까지 무패 6연승을 기록했으나, 7월 이후 국적을 이유로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11월에는 스타루힌이 무국적자임에도 불구하고 '외국 국적자'로 분류되어 다른 외국 국적자들과 마찬가지로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정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는 수도권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외국 국적자들에게 내려진 조치였다. 프로 야구 공식 기록상으로는 '질병으로 인해 격리'된 것으로 되어 있다. 가루이자와에서는 구두 수선공으로 생계를 이어갔다고도 전해진다. 1945년 8월 9일, 중립국이었던 소련이 일소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 침략을 개시하면서 그는 추방 조치를 받았다.
2.2. 전후 복귀와 팀 이동
종전 후인 1946년, 스타루힌은 진주군의 통역으로 지프를 타고 가던 중 우연히 퍼시픽 감독을 맡고 있던 후지모토 사다요시와 재회했다. 이 만남으로 그는 교진군의 제안을 거절하고 퍼시픽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야구를 떠나 있던 스타루힌은 몰라볼 정도로 살이 쪄 있었고, 연습을 시작해도 좀처럼 원래 체형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13일 골드스타전에서 전후 첫 등판을 가졌고, 10월 20일 골드스타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일본 프로 야구 최초로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1948년 후지모토 감독이 긴세이 스타스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스타루힌은 그와 배터리를 이루던 이세가와 마스미와 함께 후지모토를 따라 긴세이로 이적했다. 1949년에는 27승을 거두며 9년 만에 최다 승리 타이틀을 획득했다. 하지만 전전과 같은 몸놀림은 아니었고, 이전의 강속구 투수에서 변화구 위주의 노련한 피칭으로 바뀌었으며, 화려한 제스처가 많은 쇼맨 타입의 능숙하게 피하는 스타일이 되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1952년 6월 15일 마이니치 오리온스전에서는 2개의 홈런을 치고 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의 득점 지원을 받지 못해 2대3으로 패전 투수가 되기도 했다.
1954년에는 다카하시 유니온스로 이적했다. 이때는 따르던 후지모토 감독과 함께가 아니라, 후지모토가 "다카하시가 계약금을 줄 것이다. 이제 오래 할 수 없을 테니 받아두라"고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 돈을 바탕으로 미용실과 약국을 경영했다。 시즌 전에는 상당히 비만하여 "마치 스모 선수 같다"는 말을 들었으며, 7월까지 2승 7패로 부진했다. 8월 이후 6승 6패로 회복하며 약한 팀 지원 속에서도 시즌 8승(13패)을 기록했다.

1955년 봄 오카야마현 캠프에서는 '살 빼기'를 과제로 삼아 무라샤 코헤이 임시 코치의 지도를 받아 싫어하던 달리기 훈련을 철저히 하여 체중을 32관(약 120 kg)에서 26관(약 97.5 kg)까지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스타루힌의 3연패를 포함하여 다카하시는 개막 12연패를 당했으나, 4월 13일 다이에이 스타스전에서 현역 마지막 완봉승(통산 83번째)으로 팀의 첫 승리를 장식했다. 9월 4일 니시쿄고쿠에서 열린 다이에이전에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300승을 완투승으로 달성했다. 그러나 나중에 1939년 기록을 원래 공식 기록대로 되돌리면서, 같은 해 7월 30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 펄스전에서의 승리가 실제 300승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100승, 200승, 300승을 모두 다른 팀에서 기록했는데, 이는 300승 이상 투수 6명(그 외 가네다 마사이치, 요네다 데쓰야, 고야마 마사아키, 스즈키 게이시, 벳쇼 다케히코) 중 유일한 기록이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는 "와카바야시 씨(와카바야시 다다시)도 42세까지 했으니 저도 계속하고 싶다"고 의지를 밝혔고, 니혼케이자이 신문에도 "나도 앞으로 5~6년은 던질 생각이다. 목표는 탈삼진 2,000개와 완봉승 100승이다"라는 수기를 실었다. 퍼시픽 리그에서는 보상금 5.00 만 JPY이 지급되었으나, 공식적인 표창 행사는 열리지 않았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구단주 다카하시 류타로가 직접 기념 축하회를 주최했다.
같은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 해 팀 내 2위인 7승(21패)을 기록했고 본인도 현역 생활을 이어가기를 희망했지만, 이듬해부터 감독으로 취임이 결정된 가사하라 가즈오가 반(反)가사하라파로 여겨지던 스타루힌을 해고했다고도 전해진다. 마지막에는 무급이라도 좋으니 교진에서 던지고 싶다고 희망했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같은 해에는 따르던 어머니 에프도키아를 잃었다. 은퇴 후의 스타루힌은 늘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고 한다.
2.3. 통산 300승 및 주요 기록
스타루힌은 1955년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 그의 통산 83완봉승은 NPB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1939년 시즌 42승(NPB 타이 기록)과 1940년 시즌 38승을 기록하며 2년 연속 MVP에 선정되었다. 1937년 가을부터 1940년까지 5시즌 연속 최다 승리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최장 기록이다. 그는 또한 1937년 7월 3일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역대 두 번째 기록을 세웠다.
그의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최다 승리**: 6회 (1937년 가을, 1938년 봄, 1938년 가을, 1939년, 1940년, 1949년)
- 5시즌 연속 최다 승리는 최장 기록이다.
- 9년의 공백 후 최다 승리 수상은 동상 역사상 최장 기록이다.
- 최우수 평균자책점**: 1회 (1938년 가을)
- 최다 탈삼진**: 2회 (1938년 가을, 1939년)
- 최고 승률**: 2회 (1938년 가을, 1940년)
- 베스트 나인**: 1회 (투수 부문: 1940년)
- 최우수 선수 (MVP)**: 2회 (1939년, 1940년) ※2년 연속은 사상 최초
- 통산 완봉승**: 83회 (NPB 기록)
- 시즌 승리**: 42승 (1939년) ※NPB 타이 기록 (1961년 이나오 가즈히사가 기록)
- 시즌 선발 승리**: 32승 (1940년) ※NPB 타이 기록 (1942년 노구치 지로, 1943년 후지모토 히데오가 기록)
- 2년 연속 35승**: 1939년 ~ 1940년 (NPB 사상 유일)
- 복수 구단 최다 승리 타이틀 획득**: NPB 사상 최초
- 15개 구단 상대 승리**: 달성자 2명 (오가타 도시야키도 기록)
- 통산 승리**: 303승 (NPB 역대 6위, 은퇴 당시 NPB 기록)
- 통산 완투**: 350회 (NPB 역대 2위, 은퇴 당시 NPB 기록)
- 통산 선발 승리**: 257승 (NPB 역대 6위, 은퇴 당시 NPB 기록)
- 통산 투구 이닝**: 4,175.1이닝 (NPB 역대 7위, 은퇴 당시 NPB 기록)
- 시즌 연승**: 18연승 (1940년 8월 7일 대 킨샤치전 ~ 11월 17일 대 한신전) ※1리그 시대 기록
- 동일 팀 상대 연승**: 17연승 (대 한큐전, 1940년 8월 8일 ~ 1943년 10월 1일) ※1리그 시대 기록
- 투수 삼관왕**: 1회 (1938년 가을) ※NPB 사상 2번째
- 노히트 노런**: 1회 (1937년 7월 3일, 대 이글스전, 스자키 구장) ※NPB 사상 2번째
- 올스타전 출장**: 1회 (1952년)
- 마일스톤 기록 (모두 NPB 최초 및 최단 기록)**
- 1939년 승리 수에 대한 논란**
1939년 스타루힌의 승리 수는 42승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전후 퍼시픽 리그 기록부장 야마우치 이쿠시 등이 전전 스코어북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스타루힌에게 승리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명백한 두 경기(5월 9일 대 나고야전, 7월 15일 대 세네터스전)가 발견되었다. 이 두 경기는 모두 나카오 데루조가 선발로 5이닝 이상을 던지고 교진이 리드한 상태에서 물러난 후 스타루힌이 구원 등판하여 끝까지 던져 교진이 승리한 경기였다. 이에 따라 기록이 변경되어 40승으로 조정되었다. 전전에는 승리 투수 인정 기준이 모호하여 기록원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공식 기록원이었던 히로세 겐조는 "구원 투수에게 비중을 두어 (승리 투수, 패전 투수 기록을) 부여했던 기억이 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스타루힌 사후인 1961년 이나오 가즈히사가 시즌 최다 승리에서 스타루힌의 기록을 경신하는 42승을 기록하자, 전전 스코어 수정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어났다. 결국 1962년 3월 30일 커미셔너 재정이 내려져 "나중에 보기에 이상하더라도 당시 공식 기록원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원래의 42승으로 환원되었다. 그 결과 이나오의 기록은 스타루힌과 동률이 되었다. 42승 중 4승은 자신의 끝내기 안타에 의한 것이었다. 이 시즌 4개의 끝내기 안타는 196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오스기 가쓰오가 경신하기 전까지 30년간 프로 야구 기록이었다. 11월 9일, 교진이 우승을 확정한 경기도 스타루힌의 끝내기 안타에 의한 승리였다.
3. 선수로서의 특징
빅토르 스타루힌은 일본 프로 야구 초창기의 대표적인 강속구 투수로, 그의 압도적인 구위와 노련한 투구 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3.1. 투구 스타일 및 구종
프로 야구 초창기의 강속구 투수로서 사와무라 에이지와 자주 비교되었다. 두 선수 모두와 대결했던 타자들은 "속도는 거의 같았다. 사와무라가 타자 앞에서 더 뻗어나가는 느낌이 있어서 감각적으로는 사와무라가 더 빠르게 보였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반면 191NaN 경 cm의 장신에서 더욱 솟아오르며 내리꽂는 투구 폼 때문에 타자들은 "2층 지붕에서 공이 급강하하는 것 같아 치기 어려웠다"고 평했다.
투수로서의 구종은 드롭볼, 슈트, 싱커 등 다양했다. 강속구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와의 수싸움에 능숙했으며, 강속구를 중심으로 슈트와 드롭으로 완급을 조절하고, 때로는 싱커로 내야 땅볼을 유도하는 투구를 특기로 삼았다. 가끔 긴 템포에서 퀵 모션으로 던지거나 사이드암으로 던지기도 했다. 말년에는 흔들리며 떨어지는 포크볼이나 너클볼과 같은 변화를 보이는 '아베크볼'도 던졌다고 한다.
3.2. 타격 능력 및 기타 재능
투수로서의 역할 외에 타격 능력도 뛰어났다. 1939년에는 4개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으며, 1940년에는 한 경기 5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대타로 등장했으나 고의 사구를 얻어내기도 했다. 초구에 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 투수들은 초구를 볼처럼 던졌지만, 장신에 완력이 좋았던 스타루힌은 다소 볼성인 공이라도 강하게 당겨서 안타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4. 개인사 및 가족 관계
빅토르 스타루힌은 야구 선수로서의 영광 뒤에 무국적자로서의 고뇌와 복잡한 가족사를 안고 살았다. 그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의리 있는 성품으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다'는 평을 들었지만, '외국인'과 '망명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동료들과의 깊은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오차노미즈의 니콜라이도와 같이 백계 러시아인들이 모이는 정교회에 자주 방문하여 친구를 찾고 배우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하룻밤에 맥주 대병 24병 이상을 마실 수 있는 주당이기도 했다.
4.1. 가족 관계
- 아버지 콘스탄틴 스타루힌**: 러시아 니즈니타길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러시아 제국군 장교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 발발로 군직을 잃고 한때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러시아 임시 정부에 대항하는 백군에 가담한 후 시베리아로 도피했다. 하얼빈의 난민 수용소를 거쳐 처자식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에는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에서 모직물 행상과 밀크홀을 운영했고, 아내는 빵을 구워 가계를 도왔다. 1932년 아들이 고요가쿠인 고등학교 야구부에 초청되자 가족은 효고현 고베시로 이사하여 학교의 지원으로 빵집을 경영했으나, 동현 다른 학교들의 항의로 이적 이야기가 무산되면서 아사히카와로 돌아왔다. 고베에서 알게 된 망명 러시아인 마리아와 연인 관계가 되었고, 마리아를 웨이트리스로 고용하여 아사히카와에서 찻집 '바이칼'을 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변심으로 1933년 그녀의 집에 침입하여 칼로 찔러 살해했다. 처음에는 질투로 인한 살해를 인정했지만, 나중에는 마리아가 스파이였기 때문이라고 진술을 바꾸었으나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1938년 석방되어 아들의 활약을 지켜보았고, 1943년 도쿄에서 사망했다. 그는 아내 에프도키아와 함께 다마 영원에 잠들어 있다.
- 전처 레나**: 같은 망명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미용사로, 니콜라이도에서 만나 1938년 결혼하여 1941년 장남 조지(러시아어로는 게오르기)를 낳았다. 1944년 야구 시즌 종료 후 특별고등경찰의 권유로 가루이자와정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억류 생활을 강요받았다. 전후에도 남편의 병간호와 가계 악화로 불화가 심해졌다. 과거 러시아 이민자 동료이자 전전에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전후 진주군 통역으로 재방일한 점령군 장교 알렉산더 볼로비요프와 연인 관계가 되어 1948년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을 남겨둔 채 알렉산더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알렉산더는 소년 시절 아사히카와 시영 구장에서 오타루 상업고등학교 내야수로 스타루힌의 아사히카와 중학교와 대결한 적도 있었다.
- 후처 다카하시 구니에**: 일러 혼혈로 러시아 이름은 타냐이다. 아키타 현립 아키타 고등 여학교, 일본 여자대학을 졸업한 후 1948년 도쿄의 러시안 클럽에서 스타루힌을 만나 1950년 결혼했다. 장녀와 차녀를 낳았고, 남편과 전처의 아들인 장남도 키우면서 우울증과 과도한 음주에 시달리던 남편 대신 1956년부터 스타루힌이 1948년에 개업한 미나토구 아오야마의 미용실에서 일하며 가계를 도왔고, 약국과 러시아 음식점 '레카'도 경영했다. 한때는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다시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다. 나중에 아오야마의 도시 계획으로 거액의 이주 보상금을 받았으나, 남편 사망 10년 후 생긴 연인이 이 돈과 3개 점포의 경영권을 담보로 빌린 돈으로 골프장 개발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여 전 재산을 잃었다. 연인과 헤어진 후 세이부 백화점 등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나, 음주량이 늘어 간 질환을 앓다가 1971년 자택 맨션에서 뛰어내려 49세로 사망했다. 남편과 함께 잠들어 있는 아키타현 요코테시 오모노가와정의 숭념사는 친정이며, 남동생 다카하시 다이가가 12대 주지를 맡고 있다. 선대 주지이자 아버지인 다카하시 요시오(1887년생)는 나고야의 정토진종 중학교를 중퇴 후 내처와 자식을 데리고 1910년 대륙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체류 중 러시아 혁명을 겪었다. 처자식이 귀국한 후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하얼빈에서 구니에를 낳았고, 처자식과 함께 1919년 귀국했다. 나중에 통역으로 아키타 보병 제17연대의 시베리아 출병에 동행했으며, 망명 러시아인들을 모은 '볼가 예능단'의 단장을 맡기도 했다. 그의 발자취는 『유라시아를 달린 남자』(아키타 사키가케 신보사, 1994년)로 출판되었다.
- 장남 조지 스타루힌** (1941년 ~ ): 아버지와 함께 종종 잡지나 텔레비전에 출연했으며, 아버지 사망 후 텔레비전·라디오 탤런트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 『지구는 맡았다』(니혼TV 계열)로 배우 데뷔하여 미국 유학생 와인클러를 연기했다.
- 장녀 나타샤 스타루힌** (1951년 ~ ): 일본항공의 객실 승무원을 거쳐 동료와 결혼, 일본 최초의 선탠 살롱을 창업했다. 나중에 홀리스틱 영양사로 활동하며 각지에서 강연회와 건강을 주제로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2008년 7월 15일 교진 대 주니치전에서 아버지와 같은 등번호 17번 유니폼을 입고, 2016년 6월 7일 닛폰햄 대 히로시마전에서도 '스타루힌 탄생 100주년 기념 경기'로 닛폰햄 유니폼을 입고 (모두 아사히카와 스타루힌 구장) 각각 시구를 맡았다. 일반 사단법인 일본 홀리스틱 뉴트리션 협회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백구에 영광과 꿈을 싣고 우리 아버지 V. 스타루힌 이야기』 외에 다이어트 관련 저서가 있다.
- 다나카 마리**: 여배우 다나카 마리는 스타루힌의 후처 다카하시 타냐(구니에)의 조카(남동생의 자녀)이다.
- 다카하시 레나**: 일렉톤 연주자 다카하시 레나(본명 히사에)는 구니에의 여동생이다.
5. 사망
빅토르 스타루힌은 은퇴 후 새로운 삶을 모색하던 중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고 경위에 대한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다.
5.1. 교통사고 및 사망 경위
은퇴 후 스타루힌은 "볼보이라도 좋다"며 야구 관련 일을 희망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내 타냐가 경영하는 미용실 일을 도왔다.
1957년 1월 12일 밤 10시 40분경, 그는 도쿄 시내에서 열린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택이 있는 미나토구 남아오야마에서 자신의 차(1941년식 쉐보레 스페셜 디럭스 2도어 쿠페)를 운전하고 세타가야구 미슈쿠에 있는 국도 246호선(타마가와도리)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도큐 다마가와선 미슈쿠역 부근에서 앞차를 추월하려다 후타코타마가와엔행 전차와 충돌했다. 차는 크게 파손되었고, 스타루힌은 구급차로 국립 세타가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도착 전에 사망했다. 경찰은 사고 원인을 음주 운전 및 과속으로 발표했다.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스타루힌은 동창회 장소와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고 있었고, 동승했던 동창생을 차에서 내리게 한 뒤 전차를 타고 가라고 지시하는 등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사고 직전에는 친구가 경영하는 아오야마의 볼링장 개장식에 참석하여 음주를 했으며, 만취 상태는 아니었지만 음주운전이었다고 한다.
1월 20일 비공식적으로나마 프로 야구 최초의 '야구장'이 열렸다. 장례식에 앞서 영전 추모 좌담회가 열렸는데, 생전 스타루힌과 교류가 있었던 장례위원장 이치오카 다다오를 중심으로 전전부터 전후까지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던 후지모토 사다요시, 교진에서는 스즈키 소타로, 미즈하라 시게루, 가와카미 데쓰하루, 다카하시에서는 전 감독 하마사키 신지, 그리고 고니시 도쿠로가 참석했다.
스타루힌은 아버지 콘스탄틴이 사망했을 때 자신이 건립한 다마 영원의 외국인 묘지(외국인 구역 1종 2측)에 안장되었다. 1989년, 33주기 기일에 장녀 나타샤에 의해 1971년 사망한 아내 타냐(다카하시 구니에)의 친정이자 타냐의 묘가 있는 아키타현 요코테시 오모노가와정의 숭념사에 유골이 분골되었다. 그는 망명부터 최후까지 무국적자였다.
6. 유산 및 평가
빅토르 스타루힌은 일본 야구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사후에도 꾸준히 기려지고 있다.
6.1.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60년, 그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의 외국인 선수로 헌액되었다. 이는 그가 일본 야구계에 기여한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6.2. 기념물 및 스타디움 명명
아사히카와 시민들에게 스타루힌은 전설적인 영웅으로 남아있다. 1984년 개수 공사가 완료된 아사히카와 시립 구장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스타루힌 구장'(スタルヒン球場)이라는 애칭이 붙여졌다. 구장 정면에는 스타루힌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이는 일본 최초로 야구장에 개인 이름이 사용된 사례이다.
7. 통계
빅토르 스타루힌은 19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 동안 뛰어난 투구 기록을 남겼다.
7.1.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볼넷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회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36년 하계 | 교진 | 1 | 0 | 0 | 0 | 0 | 0 | 0 | -- | -- | ---- | 14 | 3.0 | 3 | 0 | 1 | -- | 0 | 4 | 0 | 0 | 0 | 0 | 0.00 | 1.33 |
1936년 추계 | 3 | 3 | 2 | 0 | 0 | 1 | 2 | -- | -- | .333 | 89 | 21.0 | 17 | 0 | 7 | -- | 0 | 19 | 0 | 0 | 10 | 7 | 3.00 | 1.14 | |
1937년 춘계 | 25 | 16 | 10 | 3 | 0 | 13 | 4 | -- | -- | .765 | 592 | 147.1 | 100 | 1 | 58 | -- | 1 | 92 | 2 | 0 | 34 | 25 | 1.53 | 1.07 | |
1937년 추계 | 26 | 18 | 13 | 4 | 1 | 15 | 7 | -- | -- | .682 | 658 | 164.2 | 115 | 0 | 51 | -- | 2 | 95 | 2 | 0 | 53 | 34 | 1.86 | 1.01 | |
1938년 춘계 | 24 | 16 | 13 | 5 | 2 | 14 | 3 | -- | -- | .824 | 639 | 158.2 | 106 | 5 | 57 | -- | 2 | 76 | 1 | 0 | 42 | 36 | 2.04 | 1.03 | |
1938년 추계 | 24 | 19 | 17 | 7 | 1 | 19 | 2 | -- | -- | .905 | 765 | 197.2 | 111 | 0 | 59 | -- | 1 | 146 | 1 | 1 | 32 | 23 | 1.05 | 0.86 | |
1939년 | 68 | 41 | 38 | 10 | 1 | 42 | 15 | -- | -- | .737 | 1838 | 458.1 | 316 | 4 | 156 | -- | 11 | 282 | 6 | 0 | 114 | 88 | 1.73 | 1.03 | |
1940년 | 55 | 42 | 41 | 16 | 2 | 38 | 12 | -- | -- | .760 | 1688 | 436.0 | 241 | 3 | 145 | -- | 4 | 245 | 5 | 0 | 67 | 47 | 0.97 | 0.89 | |
1941년 | 20 | 14 | 13 | 4 | 0 | 15 | 3 | -- | -- | .833 | 587 | 150.0 | 93 | 3 | 45 | -- | 1 | 58 | 2 | 0 | 28 | 20 | 1.20 | 0.92 | |
1942년 | 40 | 30 | 27 | 8 | 1 | 26 | 8 | -- | -- | .765 | 1196 | 306.1 | 174 | 3 | 119 | -- | 2 | 110 | 6 | 0 | 50 | 38 | 1.12 | 0.96 | |
1943년 | 18 | 14 | 11 | 3 | 0 | 10 | 5 | -- | -- | .667 | 537 | 136.0 | 75 | 2 | 57 | -- | 3 | 71 | 3 | 0 | 22 | 18 | 1.19 | 0.97 | |
1944년 | 7 | 7 | 7 | 2 | 1 | 6 | 0 | -- | -- | 1.000 | 254 | 66.0 | 40 | 0 | 23 | -- | 0 | 27 | 2 | 0 | 9 | 5 | 0.68 | 0.95 | |
1946년 | 퍼시픽 다이요 | 5 | 4 | 2 | 0 | 0 | 1 | 1 | -- | -- | .500 | 138 | 31.2 | 35 | 1 | 16 | -- | 0 | 11 | 0 | 0 | 10 | 7 | 1.99 | 1.61 |
1947년 | 20 | 19 | 16 | 1 | 2 | 8 | 10 | -- | -- | .444 | 662 | 162.1 | 142 | 3 | 48 | -- | 2 | 77 | 1 | 0 | 59 | 37 | 2.05 | 1.17 | |
1948년 | 긴세이 다이에이 | 37 | 32 | 28 | 3 | 1 | 17 | 13 | -- | -- | .567 | 1187 | 298.1 | 240 | 6 | 80 | -- | 3 | 138 | 4 | 1 | 90 | 72 | 2.17 | 1.07 |
1949년 | 52 | 40 | 35 | 9 | 6 | 27 | 17 | -- | -- | .614 | 1519 | 376.0 | 357 | 24 | 69 | -- | 4 | 163 | 2 | 1 | 130 | 109 | 2.61 | 1.13 | |
1950년 | 35 | 28 | 17 | 2 | 3 | 11 | 15 | -- | -- | .423 | 995 | 234.1 | 270 | 21 | 48 | -- | 4 | 86 | 1 | 1 | 115 | 103 | 3.96 | 1.36 | |
1951년 | 14 | 13 | 8 | 0 | 2 | 6 | 6 | -- | -- | .500 | 391 | 100.2 | 79 | 5 | 22 | -- | 2 | 47 | 0 | 5 | 39 | 30 | 2.68 | 1.00 | |
1952년 | 24 | 18 | 12 | 1 | 1 | 8 | 10 | -- | -- | .444 | 618 | 150.1 | 145 | 9 | 43 | -- | 2 | 44 | 3 | 0 | 63 | 51 | 3.05 | 1.25 | |
1953년 | 26 | 23 | 17 | 3 | 2 | 11 | 9 | -- | -- | .550 | 811 | 201.2 | 175 | 11 | 42 | -- | 4 | 61 | 3 | 0 | 67 | 60 | 2.68 | 1.08 | |
1954년 | 다카하시 돈보 | 29 | 25 | 11 | 1 | 1 | 8 | 13 | -- | -- | .381 | 756 | 178.1 | 191 | 12 | 45 | -- | 3 | 52 | 2 | 0 | 85 | 74 | 3.73 | 1.32 |
1955년 | 33 | 27 | 12 | 1 | 4 | 7 | 21 | -- | -- | .250 | 820 | 196.2 | 205 | 9 | 30 | 3 | 4 | 56 | 4 | 0 | 102 | 85 | 3.89 | 1.19 | |
통산 : 19년 | 586 | 449 | 350 | 83 | 31 | 303 | 176 | -- | -- | .633 | 16754 | 4175.1 | 3230 | 122 | 1221 | 3 | 55 | 1960 | 50 | 9 | 1221 | 969 | 2.09 | 1.07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빨간색 굵은 글씨는 NPB 기록.
- 퍼시픽은 1947년 다이요(다이요 로빈스)로 구단명 변경.
- 긴세이(긴세이 스타스)는 1949년 다이에이(다이에이 스타스)로 구단명 변경.
- 다카하시(다카하시 유니온스)는 1955년 돈보(돈보 유니온스)로 구단명 변경.
7.2. 타격 성적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
718 | 1879 | 125 | 446 | 77 | 5 | 19 | 590 | 252 | 7 | 2 | 29 | 8 | 52 | 0 | 160 | 22 | .237 |
7.3. 개인 타이틀 및 수상
- 최다 승리: 6회 (1937년 가을, 1938년 봄, 1938년 가을, 1939년, 1940년, 1949년)
- 최우수 평균자책점: 1회 (1938년 가을)
- 최다 탈삼진: 2회 (1938년 가을, 1939년)
- 최고 승률: 2회 (1938년 가을, 1940년)
- 최고 수훈 선수 (MVP): 2회 (1939년, 1940년)
- 베스트 나인: 1회 (투수 부문: 1940년)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19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