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비타소카 (또는 티사)는 마우리아 제국의 황자이자 아소카 대왕의 유일한 동복형제이다. 그는 초기에는 자이나교 또는 기타 티르티카 사상에 깊이 빠져 불교 승려들의 안락한 삶을 비판했으나, 궁정 내의 사건과 아소카 대왕의 설득을 계기로 불교로 개종하고 엄격한 금욕 생활을 통해 아르하트의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불교 문헌인 디비야바다나에 기록된 한 사건에서 비타소카가 자이나교도로 오인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아소카 대왕이 이를 막고 자이나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이후 삶에 대한 기록은 불확실하지만, 다양한 사료에서 그의 종교적 여정과 아소카 대왕의 통치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어 역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신분과 이름
비타소카는 마우리아 제국의 황자로, 아소카 대왕의 유일한 동복형제이자, 아소카가 다른 형제들을 숙청한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제였다.
그는 여러 역사 및 종교 문헌에서 다양한 이름과 칭호로 불린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비타소카(वितशोक비타쇼카산스크리트어)와 티사(तिस्सा티사산스크리트어)이다. 스리랑카 문헌에서는 주로 그를 티사(또는 티샤)로 지칭한다. 그러나 테라가타 주석서는 티사와 비타소카를 서로 다른 인물로 간주하기도 하여, 이름과 인물 동일성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 외 다른 사료에서는 그를 비가타쇼카(विगताशोकVigatāshoka산스크리트어), 수다타(सुदत्तSudatta산스크리트어), 또는 수가트라(सुगात्रSugatra산스크리트어)라고도 불렀다. 후대에 편찬된 스리랑카의 불교 대사서인 마하밤사에서는 그를 에카비하리카(Ekavihārika에카비하리카팔리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3. 초기 생애와 종교적 배경
아소카 대왕의 동생인 비타소카는 마우리아 왕실에서 황자로서 성장했으나, 초기에는 불교와는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졌다.
3.1. 가족 배경과 지위
비타소카는 마우리아 왕조의 황자로서, 아소카 대왕과 어머니가 같은 유일한 동복형제였다. 아소카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다른 형제들을 모두 숙청했으나, 비타소카는 유일하게 목숨을 보전한 형제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마우리아 왕실 내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3.2. 초기 신념과 비판
디비야바다나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따르면, 비타소카는 초기에는 비불교적 신앙인 자이나교 또는 티르티카의 추종자였다. 그는 당시 불교 승려들이 왕실의 후원을 받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비타소카는 승려들이 세속적인 안락함 속에서 어떻게 번뇌를 끊고 해탈에 이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그들의 생활 방식을 비판하곤 했다.
4. 불교로의 개종
초기에는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비타소카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불교로 개종하게 되었고, 이후 엄격한 승려의 삶을 살았다.
4.1. 개종 상황
궁정의 대신들은 비타소카를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를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소카 대왕은 동생인 비타소카에게 불교로 개종하도록 설득했다. 아소카는 비타소카가 황제로서의 삶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독특한 설득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비타소카를 7일 동안 왕좌에 앉히고 황제에게 주어지는 모든 호화로운 편의와 대접을 받게 했다. 7일 후, 아소카가 비타소카에게 황제의 삶이 편안했는지 묻자, 비타소카는 오히려 그 삶이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황제로서의 책임과 속박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깨달았다고 진술했다. 이 경험을 통해 비타소카는 세속적인 삶의 무상함과 번뇌를 이해하게 되었고, 아소카 대왕의 설명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4.2. 승려 생활
세속적인 삶의 허무함을 깨달은 비타소카는 아소카 대왕의 설득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매우 엄격하게 금욕주의적 수행 생활을 실천했다. 태국어 문헌에 따르면, 그는 이러한 수행을 통해 아르하트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해진다.
5. 디비야바다나 서사
불교 경전인 디비야바다나는 비타소카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이 사건은 아소카 대왕의 종교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5.1. 오인 사건
디비야바다나는 당시 푸르바르다나와 파탈리푸트라에서 누군가가 마하비라 앞에서 절하는 부처의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를 전한다. 이에 분노한 아소카 대왕은 자이나교 승려들(일부 기록에서는 아지비카교도 포함)을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이나교도를 죽인 자에게는 큰 보상을 선언했다. 이 혼란 속에서 비타소카는 자이나교도로 오인되어 붙잡히게 되었다. 그를 잡은 자는 보상을 받기 위해 비타소카를 아소카 대왕에게 끌고 갔다.
5.2. 아소카 정책에 미친 영향
아소카 대왕은 자신에게 끌려온 자이나교도가 다름 아닌 자신의 친동생 비타소카임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다. 이 사건은 아소카 대왕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즉시 자이나교도에 대한 처형 명령을 철회하고 박해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일화는 아소카 대왕의 종교 정책이 강경한 탄압에서 점차 관용적인 태도로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6. 이후 삶과 역사적 해석
불교로 개종한 이후 비타소카의 삶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며, 여러 역사 문헌들은 그에 대해 상이한 해석을 제시한다.
6.1. 개종 이후의 운명
비타소카가 불교 승려가 되어 엄격한 수행을 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특히, 아소카 대왕이 황제가 된 이후 비타소카의 운명은 미상으로 남아있다. 일부 학자들은 비타소카가 비록 출가했지만, 아소카의 통치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가 아소카의 장군이나 대신이 되어 제국에 봉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들은 확실한 역사적 증거보다는 해석에 가깝다.
6.2. 다양한 역사 기록
비타소카의 삶은 다양한 역사적, 종교적 사료에서 다르게 묘사되며, 이는 서술의 불일치성을 초래한다. 예를 들어, 스리랑카 문헌에서는 그를 '티사'라고 부르지만, 테라가타 주석서는 티사와 비타소카를 서로 다른 인물로 간주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고대 인도 역사 기록의 복잡성과 특정 종교적 관점에서 인물을 묘사하는 경향을 반영한다. 각 문헌이 특정 메시지나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인물의 생애를 재구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비타소카에 대한 완전하고 통일된 역사적 서술은 부재하며, 여러 출처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