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블라드 3세의 어린 시절은 그의 아버지의 정치적 격동과 오스만 제국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1.1. 출생과 가족
블라드 3세는 1428년에서 1431년 사이에 태어났으며, 가장 유력한 설은 1431년 11월 또는 12월에 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시기쇼아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드러쿨은 1431년부터 1435년까지 시기쇼아라의 3층 석조 가옥에서 거주했습니다. 블라드 2세는 왈라키아 공국의 미르체아 1세의 사생아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창설한 드라곤 기사단에 입단하여 '드라쿨'(Dracul드라쿨루마니아어, '용')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기사단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막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블라드 3세의 어머니는 몰다비아의 알렉산드루 1세의 딸이거나 친척이라는 설이 있으며, 블라드 2세의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 부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는 이복형 미르체아 2세와 이복동생 라두 미남공, 그리고 서자 이복형 블라드 컬루거룰을 두었습니다. 블라드 3세와 라두 미남공은 어린 시절을 시기쇼아라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른 아내 밑에서 보냈습니다. 블라드 2세가 왈라키아 공작이 된 후, 자녀들을 당시 왈라키아의 수도였던 트르고비슈테로 데려왔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트르고비슈테에서 블라드 2세의 자녀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의 로마 또는 그리스인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추정합니다. 블라드 3세는 전투 기술, 지리, 수학, 과학, 외국어(고대 불가리아어, 독일어, 라틴어)뿐만 아니라 고전 예술과 철학을 배웠습니다.

1.2. 오스만 제국에서의 인질 생활
1436년 블라드 2세는 왈라키아 공작이 되었으나, 1442년 헝가리와 동맹을 맺은 경쟁 파벌에 의해 잠시 폐위되었습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복위할 수 있었지만, 술탄에게 매년 공물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해야 했습니다. 1442년, 당시 13세였던 블라드 3세와 그의 동생 라두 미남공은 아버지 블라드 2세의 충성을 보장하기 위한 인질로 오스만 제국에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튀르키예 콘야주 도그르괴즈에 위치한 에그리괴즈 요새에 감금되어 지냈습니다.
1444년, 아버지 블라드 2세가 브와디스와프 3세가 주도한 바르나 십자군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면서, 블라드 3세와 라두의 생명은 특히 위험에 처했습니다. 블라드 2세는 두 아들이 "기독교 평화를 위해 도살당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그들을 살려두었습니다. 인질 생활 동안 블라드 3세는 오스만 제국의 논리, 이슬람, 튀르키예어 및 문학을 배웠고, 훗날 이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스만 제국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특히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 메흐메트 2세와 친분을 쌓아 '베이' 칭호를 받은 동생 라두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블라드 3세는 거친 성격으로 인해 교관들에게 반항하고 종종 채찍질을 당하며 감금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블라드 3세가 오스만 제국, 예니체리, 동생 라두, 그리고 메흐메트 2세에 대한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오스만 제국에 넘겨주고 드라곤 기사단에 대한 맹세를 저버린 아버지와 헝가리 왕국에 대한 불신을 키웠습니다.
1.3. 아버지의 죽음과 망명
1446년에서 1447년경, 블라드 2세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1447년 11월, 당시 헝가리의 섭정이었던 후녀디 야노시가 왈라키아를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으로 블라드 2세와 그의 장남 미르체아는 살해당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암살이 후녀디 야노시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후녀디는 블라드 2세의 사촌인 블라디슬라프 2세를 왈라키아의 새로운 공작으로 세웠습니다.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블라드 3세는 왈라키아의 잠재적인 왕위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동생 라두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도피했습니다. 1448년 10월, 블라드 3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블라디슬라프 2세를 축출하고 잠시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한 달여 만에 블라디슬라프 2세가 왈라키아를 탈환하면서 블라드 3세는 1448년 12월 7일 다시 오스만 제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블라드 3세는 오스만 제국의 에디르네에 머물다가, 1449년 가을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으로 몰다비아의 통치자가 된 외삼촌 보그단 2세에게 의탁하기 위해 몰다비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451년 10월, 보그단 2세가 페트루 아론에게 암살당하자, 블라드 3세는 보그단의 아들 슈테판 3세와 함께 헝가리로 피신하여 후녀디 야노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후녀디는 1451년 11월 20일 오스만 제국과 3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며, 왈라키아 귀족들이 블라디슬라프 2세 사망 시 후계자를 선출할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에 의해 추방된 왈라키아 귀족들이 모여 살던 브라쇼브에 정착하려 했으나, 후녀디는 1452년 2월 6일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블라드 3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다시 몰다비아로 돌아갔고, 이후 몇 년간의 행적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1456년 7월 3일, 후녀디가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블라드 3세가 트란실바니아 국경 방어를 맡게 될 것이라고 통보한 것으로 보아, 이때쯤 블라드 3세는 헝가리로 돌아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 통치 및 정치 활동
블라드 3세의 통치 기간은 오스만 제국과의 끊임없는 대립과 내부 권력 강화를 위한 잔혹한 숙청으로 점철되었습니다.
2.1. 첫 번째 통치
아버지와 형이 사망한 후, 블라드 3세는 왈라키아 보위의 잠재적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1448년 9월, 후녀디 야노시와 블라디슬라프 2세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펼치기 위해 진군하자, 블라드 3세는 이 틈을 타 오스만 군대의 지원을 받아 10월 초 왈라키아를 침공했습니다. 그는 다뉴브강에 위치한 지우르쥬 요새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고 강화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10월 17일부터 18일까지 벌어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후녀디의 헝가리군을 격파했습니다. 후녀디의 부관 니콜라스 비자크나이는 블라드 3세에게 트란실바니아로 와서 자신을 만나줄 것을 요청했지만, 블라드 3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브라쇼브 시의회에 보낸 편지에서 "무라트 2세가 후녀디를 격파한 지금 알현을 했다간 당신들과 나, 우리 모두 오스만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오"라고 설명했습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돌아왔고, 블라드 3세는 1448년 12월 7일까지 오스만 제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통치는 불과 두 달 만에 끝났습니다.
2.2. 두 번째 통치

블라드 3세가 왈라키아로 돌아온 시점은 불확실하지만,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1456년 4월, 7월 또는 8월에 왈라키아를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 중에 블라디슬라프 2세는 전사했습니다. 1456년 9월 10일, 블라드 3세는 왈라키아 공작으로서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첫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이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할 경우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오스만 제국이 왈라키아를 점령할 경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사람이든 공작이든 강하고 강력할 때 원하는 대로 평화를 이룰 수 있지만, 약할 때는 더 강한 자가 와서 원하는 대로 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권위주의적 성향을 드러냈습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블라드 3세는 통치 초기에 수백 또는 수천 명을 처형하며 공포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특히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연루되었거나 자신에게 반역을 꾀한다고 의심되는 보야르들을 숙청했습니다. 연대기 작가 라오니코스 찰코콘딜레스는 블라드 3세가 희생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가신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왈라키아의 상황을 완전히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고 기록했습니다. 1457년부터 1461년 사이, 공작 회의 구성원 중 단 두 명만이 자신의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블라드 3세는 술탄에게 관례적인 공물을 보냈습니다. 1456년 8월 11일 후녀디 야노시가 사망하자, 그의 장남 후녀디 라디슬라프가 헝가리의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블라드 3세가 헝가리 왕에게 "충성할 의도가 없다"고 비난하며, 블라디슬라프 2세의 형제인 단 3세를 블라드 3세에 대항하여 지원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시비우 시민들은 또 다른 왕위 주장자인 '왕자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루마니아 사제'를 지지했습니다. 이 인물은 블라드 3세의 서자 이복형인 블라드 컬루거룰로 확인되었으며, 그는 왈라키아 통치자들이 관례적으로 트란실바니아에서 소유하던 암라슈를 점령했습니다.
1457년 3월 16일,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헝가리 왕이 라디슬라우스 후녀디를 처형하자, 후녀디의 어머니 실라지 엘리자베트와 그녀의 형제 실라지 미하이가 왕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헝가리는 내전에 휩싸였습니다. 블라드 3세는 이 내전 상황을 이용하여 몰다비아의 보그단 2세의 아들 슈테판이 1457년 6월 몰다비아를 장악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블라드 3세는 또한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여 브라쇼브와 시비우 주변 마을을 약탈했습니다. 초기 독일 민담에는 그가 작센 마을에서 "남성, 여성, 아이들"을 왈라키아로 끌고 가 꼬챙이에 꿰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이 헝가리 왕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블라드 3세의 이 공격은 실라지 가문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블라드 3세의 대표자들은 실라지 미하이와 작센인들 간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브라쇼브 시민들은 단 3세를 도시에서 추방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시비우 상인들이 왈라키아에서 자유롭게 상품을 "사고팔"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신, 트란실바니아에서 왈라키아 상인들에게도 "동일한 대우"를 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1457년 12월 1일 편지에서 실라지 미하이를 "자신의 군주이자 형님"으로 칭했습니다.
1458년 1월 24일, 라디슬라우스 후녀디의 동생인 마차시 1세가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3월 3일 시비우 시민들에게 블라드 3세와 평화를 유지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1459년 9월 20일, 블라드 3세는 자신을 "왈라키아 전역과 암라슈 및 파가라슈 공국의 군주이자 통치자"라고 칭하며, 왈라키아 통치자들이 전통적으로 소유하던 이 두 트란실바니아 영지를 차지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실라지 미하이가 블라디슬라프 2세 시대의 보야르였던 미하일과 다른 왈라키아 보야르들이 1458년 3월 말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자, 블라드 3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야르 미하일을 살해했습니다.
5월에 블라드 3세는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장인들을 왈라키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해 말까지 작센인들과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한 학설에 따르면, 블라드 3세가 작센인들의 왈라키아 입국을 금지하고 강제 국경 시장에서 왈라키아 상인들에게 상품을 팔도록 강요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블라드 3세의 보호주의적 경향이나 국경 시장은 문서화되지 않았으며, 1476년 블라드 3세는 자신이 통치 기간 내내 자유 무역을 장려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작센인들이 브라쇼브에서 왈라키아 상인이 구매한 철강을 몰수하고 대금을 갚지 않자, 블라드 3세는 보복으로 일부 작센 상인들을 "약탈하고 고문했습니다." 바사라브 라이오타 (단 2세의 아들)는 1459년 1월 21일 편지에서 블라드 3세가 왈라키아에서 작센 상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꼬챙이에 꿰거나 산 채로 불태웠다고 기록했습니다. 바사라브는 시기쇼아라에 정착하여 왈라키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마차시 1세는 브라쇼브에 있던 단 3세를 블라드 3세에 대항하여 지지했습니다. 단 3세는 블라드 3세가 왈라키아에서 작센 상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꼬챙이에 꿰거나 산 채로 불태웠다고 주장했습니다.
단 3세는 왈라키아를 침공했지만, 블라드 3세는 1460년 4월 22일 이전에 그를 격파하고 처형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남부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여 브라쇼브 외곽을 파괴하고, 붙잡힌 모든 남녀를 꼬챙이에 꿰어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어진 협상에서 블라드 3세는 브라쇼브에서 모든 왈라키아 난민을 추방하거나 처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1460년 7월 26일 이전에 평화가 회복되었고, 블라드 3세는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형제이자 친구"라고 칭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8월 24일 단 3세를 지지했던 지역 주민들을 처벌하기 위해 암라슈와 파가라슈 주변 지역을 침공했습니다.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는 메흐메트 2세 시기 예니체리로 복무하며 블라드 3세가 특정 연도에 술탄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역사가 조반니 마리아 안지오렐리도 블라드 3세가 3년 동안 술탄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두 기록은 블라드 3세가 1459년경 이미 오스만 술탄의 종주권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시사하지만, 두 기록 모두 사건 발생 수십 년 후에 작성된 것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오스만 궁정 서기 투르순 베그는 술탄이 1461년 트라페준타 제국 원정을 떠났을 때 블라드 3세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투르순 베그에 따르면, 블라드 3세는 마차시 1세와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지만, 술탄은 곧 스파이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메흐메트 2세는 그리스인 토마스 카타볼리노스(유누스 베이로도 알려짐)를 왈라키아에 특사로 보내 블라드 3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두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또한 니코폴리스의 베이였던 함자에게는 블라드 3세가 다뉴브강을 건넌 후 그를 체포하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습니다. 블라드 3세는 술탄의 "기만과 속임수"를 알아채고 함자와 카타볼리노스를 붙잡아 처형했습니다.
오스만 관리들을 처형한 후, 블라드 3세는 유창한 튀르키예어로 지우르쥬 요새 사령관에게 성문을 열라고 명령하여 왈라키아 병사들이 요새에 침입하여 점령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여 다뉴브강을 따라 있는 마을들을 황폐화시켰습니다. 1462년 2월 11일, 그는 마차시 1세에게 군사 행동에 대해 알리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이 작전에서 자신의 명령으로 "23,884명 이상의 튀르크인과 불가리아인"이 살해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마차시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며, 자신이 왕과 성 이슈트반 왕관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기독교의 보존과 가톨릭 신앙의 강화"를 위해 술탄과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선언했습니다. 1462년에는 페오도시야의 제노바 총독의 편지에 따르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간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블라드 3세의 침공 소식을 들은 메흐메트 2세는 15만 명 이상의 대군을 소집했습니다. 찰코콘딜레스에 따르면 이 군대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당시 동원된 군대 다음으로 큰 규모였습니다. 프란츠 바빙거, 라두 플로레스쿠, 니콜라에 스토이체스쿠를 포함한 여러 역사학자들은 이 군대의 규모가 술탄이 왈라키아를 점령하려 했음을 시사한다고 봅니다. 반면, 메흐메트 2세는 왈라키아 침공 전에 블라드 3세의 동생 라두에게 왈라키아를 부여했으므로, 술탄의 주요 목적은 왈라키아 통치자를 교체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1462년 5월, 오스만 함대는 왈라키아의 유일한 다뉴브강 항구인 브러일라에 상륙했습니다. 1462년 6월 4일, 술탄의 지휘 아래 오스만 주력군은 니코폴리스에서 다뉴브강을 건넜습니다. 적군에 수적으로 열세였던 블라드 3세는 초토화 작전을 채택하고 트르고비슈테 방향으로 후퇴했습니다. 6월 16일에서 17일 밤 사이, 블라드 3세는 술탄을 사로잡거나 죽이기 위해 오스만 진영을 급습했습니다. 술탄의 투옥이나 죽음은 오스만군 사이에 공황을 일으켜 블라드 3세가 오스만군을 격파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왈라키아군은 술탄의 본영을 놓치고 마흐무드 파샤와 이사아크 등 재상들의 천막을 공격했습니다. 술탄의 진영 공격에 실패한 블라드 3세와 그의 가신들은 새벽에 오스만 진영을 떠났습니다。6월 말 메흐메트 2세는 트르고비슈테에 입성했습니다. 도시는 버려져 있었지만, 오스만인들은 찰코콘딜레스에 따르면 "꼬챙이 숲"(처형된 사람들의 시체가 박힌 수천 개의 말뚝)을 발견하고 경악했습니다. 이 꼬챙이 숲은 17 스타디온 길이, 7 스타디온 너비에 걸쳐 있었으며, 약 2만 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가 꿰어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아들도 어머니와 함께 꼬챙이에 박혀 있었고, 새들이 그들의 내장에 둥지를 틀기도 했습니다. 술탄은 경악하며,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자신의 왕국과 백성을 다스리는 데 이토록 악마적인 이해력을 가진 자에게서 그의 나라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투르순 베그는 오스만인들이 작전 중 여름 더위와 갈증으로 고통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술탄은 왈라키아에서 철수하여 브러일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슈테판 3세는 헝가리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던 중요한 요새인 킬리아(현재 우크라이나의 킬리야)를 점령하기 위해 서둘러 이동했습니다. 블라드 3세 또한 킬리아로 떠났지만, 술탄 군대의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 6,000명의 병력을 남겨두었으나 오스만군에게 격파되었습니다. 슈테판 3세는 킬리아 공성전 중 부상을 입고 블라드 3세가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몰다비아로 돌아갔습니다.
오스만 주력군은 왈라키아를 떠났지만, 블라드 3세의 동생 라두와 그의 오스만 군대는 버러간 평원에 남아 있었습니다. 라두는 왈라키아인들에게 사절을 보내 술탄이 언제든 다시 그들의 나라를 침공할 수 있다고 상기시켰습니다. 블라드 3세는 다음 몇 달 동안 라두와 그의 오스만 동맹군을 두 차례 전투에서 격파했지만, 점점 더 많은 왈라키아인들이 라두에게 이탈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카르파티아산맥으로 철수하여 마차시 1세가 왕위를 되찾는 것을 도와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스제케이 백작의 부관인 알베르트 이스텐메죄는 8월 중순에 작센인들에게 라두를 인정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라두는 또한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확인하고 15,000 두캇의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2.3. 헝가리와의 관계 및 수감

1462년 11월, 마차시 1세는 트란실바니아에 도착했습니다. 마차시와 블라드 3세 간의 협상은 몇 주 동안 이어졌지만, 마차시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그의 체코 용병 사령관 얀 이스크라는 왈라키아의 루커르 근처에서 블라드 3세를 붙잡았습니다.
교황 비오 2세와 베네치아인들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원정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에게 블라드 3세의 투옥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마차시 1세는 1462년 11월 7일 블라드 3세가 메흐메트 2세, 마흐무드 파샤, 그리고 몰다비아의 슈테판 3세에게 보냈다고 주장되는 세 통의 편지를 제시했습니다. 이 편지들에 따르면, 블라드 3세는 술탄이 자신을 왕위에 복귀시켜준다면 헝가리에 대항하여 술탄의 군대에 합류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문서들이 블라드 3세의 투옥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조된 것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마차시 1세의 궁정 역사가 안토니오 본피니조차 블라드 3세가 투옥된 이유가 결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인정했습니다. 플로레스쿠는 "문체의 서술 방식, 드라큘라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온순한 복종의 수사, 서투른 문구, 그리고 열악한 라틴어"가 모두 이 편지들이 블라드 3세의 명령으로 작성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 위조 문서의 저자를 브라쇼브의 작센인 사제와 연관 지었습니다.
찰코콘딜레스에 따르면, 블라드 3세는 처음에는 "벨그라드 시"(현재 루마니아의 알바이울리아)에 투옥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비셰그라드로 옮겨져 14년 동안 감금되었습니다. 1462년부터 1475년까지 블라드 3세에 관한 문서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1475년 여름, 몰다비아의 슈테판 3세는 마차시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에 복종한 바사라브 라이오타에 대항하여 블라드 3세를 왈라키아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슈테판은 왈라키아인들이 몰다비아인들에게 "튀르크인과 같았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적이었던 통치자를 왈라키아에 확보하기를 원했습니다. 슬라브 민담에 따르면, 블라드 3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야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2.4. 세 번째 통치와 죽음
마차시 1세는 블라드 3세를 왈라키아의 합법적인 공작으로 인정했지만, 그가 공국을 되찾는 데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지는 않았습니다. 블라드 3세는 페슈트에 정착했습니다. 슬라브 민담에 따르면, 한 무리의 병사들이 도둑을 쫓아 그의 집에 침입했을 때, 블라드 3세는 허락 없이 집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그들의 지휘관을 처형했습니다. 1475년 6월, 블라드 3세는 트란실바니아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시비우에 정착하기를 원했고, 6월 초에 자신의 사절을 시비우로 보내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메흐메트 2세는 바사라브 라이오타를 왈라키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9월 21일, 마차시 1세는 시비우 시민들에게 왕실 수입에서 블라드 3세에게 200 골든 플로린을 지급하라고 명령했지만, 블라드 3세는 10월에 부다로 떠났습니다.
블라드 3세는 페치에 집을 샀는데, 이 집은 훗날 드라쿨라 하차(Drakula háza드라쿨라 하차헝가리어, '드라큘라의 집')로 알려지게 됩니다. 1476년 1월,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 존 퐁그라츠는 마차시 1세와 바사라브 라이오타가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브라쇼브 주민들에게 블라드 3세의 지지자들을 모두 그에게 보내라고 촉구했습니다.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과 바사라브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고, 작센인들은 다음 몇 달 동안 바사라브의 반대자들을 보호했습니다. 1476년 초, 마차시 1세는 블라드 3세와 세르비아의 부크 그르구레비치를 보스니아로 파견하여 오스만 제국과 싸우게 했습니다. 그들은 1476년 2월과 3월에 스레브레니차와 다른 요새들을 점령했습니다. 보스니아 전역에서 블라드 3세는 다시 공포 전술을 사용했는데, 붙잡힌 튀르크 병사들을 대량으로 꼬챙이에 꿰고 점령된 정착지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주로 스레브레니차, 쿠슬라트, 즈보르니크를 파괴했습니다.

1476년 7월 26일, 메흐메트 2세는 몰다비아를 침공하여 슈테판 3세를 발레아 알버 전투에서 격파했습니다. 마차시 1세의 편지에 따르면, 슈테판 바토리와 블라드 3세는 몰다비아에 진입하여 술탄이 8월 말 트르구 네암츠 요새의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습니다. 동시대의 야코프 운레스트는 부크 그르구레비치와 야크시치 가문의 일원도 몰다비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싸움에 참여했다고 덧붙였습니다.
1476년 9월 6일, 마차시 1세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에게 바토리의 왈라키아 침공 계획을 지원하라고 명령하며, 슈테판 3세도 왈라키아를 침공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블라드 3세는 브라쇼브에 머물면서 1476년 10월 7일 지역 상인들의 왈라키아 내 상업 특권을 확인해주었습니다. 11월 8일, 바토리의 군대가 트르고비슈테를 점령했습니다. 11월 16일, 슈테판 3세와 블라드 3세는 공식적으로 동맹을 확인하고 부쿠레슈티를 점령하여 바사라브 라이오타를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블라드 3세는 브라쇼브 상인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알리고 왈라키아로 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11월 26일 이전에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바사라브 라이오타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로 돌아왔고, 블라드 3세는 1476년 12월 말 또는 1477년 1월 초에 그들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1477년 1월 10일에 작성된 편지에서 슈테판 3세는 블라드 3세의 몰다비아인 수행원들도 학살당했다고 전했습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따르면, 블라드 3세의 약 2,000명 규모의 군대는 스나고브 근처에서 4,000명 규모의 튀르크-바사라브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전멸했습니다.
그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불분명합니다. 오스트리아 연대기 작가 야코프 운레스트는 변장한 튀르크 암살자가 블라드 3세를 그의 진영에서 살해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반면, 블라드 3세 사망 후 그의 가족을 인터뷰했던 러시아 정치가 표도르 쿠리친은 공작이 전투 중에 자신의 군대에 의해 튀르크인으로 오인되어 공격받아 살해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플로레스쿠와 레이먼드 T. 맥널리는 블라드 3세가 군사적 계략의 일환으로 종종 튀르크 병사로 변장했음을 언급하며 이 기록에 대해 논평했습니다. 밀라노 주재 부다 대사 레오나르도 보타에 따르면, 오스만인들은 블라드 3세의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잘랐습니다. 본피니는 블라드 3세의 머리가 메흐메트 2세에게 보내졌다고 기록했으며,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높은 말뚝에 전시되었습니다. 그의 잘린 머리는 카라쾨이의 보이보다 거리(오늘날 반칼라르 자데시)에 전시되었다가 묻혔다고 전해집니다. 보이보다 한(Bankalar Caddesi 19번지)이 블라드 체페슈의 해골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지역 농민 전설에 따르면, 블라드 3세의 시신 잔해는 훗날 스나고브 습지에서 인근 수도원의 수도사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매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처음 기록된 대중적인 전설에 따르면, 블라드 3세는 스나고브 수도원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1933년 디누 V. 로세티가 수행한 발굴 조사에서는 수도원 교회 내 블라드 3세의 "표식 없는 묘비" 아래에서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로세티는 "블라드에게 귀속된 묘비 아래에는 무덤이 없었다. 단지 많은 뼈와 말의 턱뼈만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역사학자 콘스탄틴 레자체비치는 블라드 3세가 그가 세웠고 그가 살해된 전장 근처에 있던 코마나 수도원의 첫 번째 교회에 묻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했습니다.
3. 통치 방식과 법 집행
블라드 3세는 자신의 통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극단적인 잔혹성을 서슴지 않았으며, 이는 그의 통치 방식의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3.1. 꼬챙이형(Impalement)과 공포 정치

블라드 3세는 꼬챙이형을 가장 선호하는 처형 방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형벌은 희생자의 항문을 통해 말뚝을 박아 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희생자들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연루된 보야르들, 붙잡힌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남성, 여성, 어린이, 심지어 유아까지), 튀르크 병사들, 그리고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이 잔혹한 처형 방식은 불충한 보야르들을 숙청하고, 중앙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며, 군주의 절대적인 권위를 확립하고, 공공 질서를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잔혹성에 대한 이야기는 생전에 이미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체포된 후 마차시 1세의 궁정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교황 비오 2세의 사절 니콜로 모드루시엔세는 1462년에 이미 교황에게 이러한 이야기들을 기록했으며, 2년 후 교황은 이를 자신의 '주석'에 포함시켰습니다. 블라드 3세가 꼬챙이에 꿰인 희생자들의 피에 빵을 찍어 먹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마이클 베하임은 1463년 겨울 비너 노이슈타트의 프리드리히 3세 궁정에서 공연된 '왈라키아의 폭군 드라큘라에 대한 이야기'라는 긴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블라드 3세의 감옥에서 탈출한 가톨릭 수도사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베하임의 이야기 중 하나는 블라드 3세가 두 명의 수도사를 천국으로 보내기 위해 꼬챙이에 꿰었고, 그들의 나귀가 주인들의 죽음 후 울부짖자 나귀까지 꼬챙이에 꿰었다는 내용입니다. 베하임은 또한 블라드 3세가 마차시 1세와 메흐메트 2세 모두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지키지 않았다며 그를 이중성으로 비난했습니다.
1475년, 에게르 대교구의 주교였던 가브리엘레 랑고니는 블라드 3세가 자신의 잔혹성 때문에 투옥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랑고니는 또한 블라드 3세가 감옥에서 "자신의 악행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쥐를 잡아 조각내거나 작은 나무 조각에 꽂았다는 소문을 기록했습니다. 안토니오 본피니도 1495년경 자신의 '판노니아 역사'에서 블라드 3세에 대한 일화를 기록했습니다. 본피니는 마차시 1세의 블라드 3세 폐위와 복권을 모두 정당화하려 했으며, 블라드 3세를 "전대미문의 잔혹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본피니의 블라드 3세 이야기는 제바스티안 뮌스터의 '코스모그라피아'에도 반복되었습니다. 뮌스터 또한 블라드 3세의 "폭군적 정의에 대한 명성"을 기록했습니다.

튀르크 사절단이 블라드 3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왔을 때, 그들은 고대 관습에 따라 터번을 벗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블라드 3세는 그들의 관습을 강화하겠다며 세 개의 못으로 터번을 그들의 머리에 박아버려 벗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독일어권 지역에서 블라드 3세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의 생전부터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1480년 이전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블라드 3세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은 작품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1460년대 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462년 초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블라드 3세의 원정은 묘사하지만 같은 해 6월 메흐메트 2세의 왈라키아 침공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블라드 3세와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 간의 갈등을 상세히 서술하며, "작센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트란실바니아에서의 블라드 3세의 약탈에 대한 이야기들은 파괴된 교회 목록과 약탈 날짜 등 정확한 세부 사항을 포함하고 있어 목격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블라드 3세를 칼리굴라나 네로보다 더 심한 "정신 이상자, 가학증 환자, 끔찍한 살인자, 피학증 환자"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블라드 3세의 잔혹성을 강조하는 이 이야기들은 그의 잔혹한 행위가 작센인들에 의해 매우 과장되거나 심지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활판 인쇄술의 발명은 블라드 3세에 대한 이야기들의 인기에 기여하여, 유럽에서 최초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판매를 늘리기 위해, 이 책들은 표지에 끔찍한 장면을 묘사한 목판화와 함께 출판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499년 뉘른베르크와 150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된 판본들은 블라드 3세가 말뚝에 꿰인 죽거나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식사를 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슬라브 민담에는 '보이보드 드라큘라 이야기'(Skazanie o Drakule voievode스카자니예 오 드라쿨레 보이보데러시아어)가 15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 작성된 20개 이상의 필사본으로 전해집니다. 이 필사본들은 러시아어로 작성되었지만, 러시아어에는 없는 남슬라브어 관용구(예: '악'을 의미하는 '디아볼')를 포함하고 있어 원래 남슬라브어로 기록된 텍스트를 복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본 텍스트는 1482년에서 1486년 사이에 부다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스카자니예'에 수록된 19개의 일화는 독일 이야기보다 더 깁니다. 역사학자 레이먼드 T. 맥널리에 따르면, 이 일화들은 사실과 허구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일화의 거의 절반은 독일 이야기처럼 블라드 3세의 잔혹성을 강조하지만, 그의 잔혹성이 왈라키아에서 중앙 정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음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스카자니예'는 샘물에 놓인 황금 잔에 대해 아무도 감히 훔치지 못했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블라드 3세가 "훔치는 것을 너무나 격렬하게 싫어하여... 어떤 악행이나 강도 행위를 저지른 자도...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에 공공 질서가 확립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독일 이야기가 블라드 3세의 오스만 영토에 대한 잔혹한 작전을 강조하는 동안, '스카자니예'는 그의 성공적인 외교를 강조하며 그를 "악마적으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스카자니예'는 블라드 3세의 가톨릭 개종을 맹렬히 비판하며, 그의 죽음을 이러한 배교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일화의 일부 요소는 훗날 러시아의 이반 뇌제에 대한 러시아 이야기에도 추가되었습니다.
현대적 기준으로 볼 때, 블라드 3세가 무차별적이고 잔혹하게 자행한 대량 학살은 현재의 기준으로 볼 때 집단살해 및 전쟁 범죄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마니아 국방부 장관 이오안 미르체아 파슈쿠는 블라드 3세가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다면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023년에 발표된 블라드 3세가 쓴 편지에서 채취한 샘플 분석을 바탕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는 '혈루증'이라는 희귀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질환은 눈물이 부분적으로 피로 구성되게 만듭니다.
3.2. "꼬챙이 공"이라는 별명의 유래

블라드 3세의 별명 '체페슈'(Țepeș체페슈루마니아어)는 루마니아어로 '꼬챙이 공' 또는 '꿰뚫는 자'를 의미하며, 그가 즐겨 사용했던 잔혹한 처형 방식인 꼬챙이형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작가 투르순 베그는 1500년경 블라드 3세를 '카즈클르 보이보다'(Kazıklı Voyvoda카즈클르 보이보다튀르크어 (오스만) (라틴문자), '꼬챙이 군주')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꼬챙이형을 목격한 오스만 병사들이 그를 처음으로 그렇게 불렀다는 일본어 출처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셰퍼드는 1551년 4월 1일 편지에서 블라드 3세를 지칭할 때 이 별명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꼬챙이형은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 모두에서 드문 형벌은 아니었지만, 주로 중죄를 저지른 농민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블라드 3세의 특이성은 반역자라면 귀족이라 할지라도 꼬챙이형에 처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귀족은 참수형에 처해졌지만, 블라드 3세는 가장 천한 형벌인 꼬챙이형을 고집함으로써 군주의 절대적인 권위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그에 대한 '이상자'라는 이미지는 훗날 헝가리 왕국이 퍼뜨린 프로파간다의 영향이 큽니다.
4. 개인 생활
블라드 3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그의 결혼과 자녀에 대한 정보는 몇몇 기록을 통해 전해집니다.
4.1. 결혼과 자녀
현대 전문가들에 따르면, 블라드 3세는 두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후녀디 야노시의 서녀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역사학자 알렉산드루 시몬은 추정합니다. 블라드 3세의 두 번째 아내는 마차시 1세의 사촌인 유스티나 실라기였습니다. 그녀는 벤첼 퐁그라츠의 미망인이었으며, 블라드 3세와는 1475년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는 블라드 3세보다 오래 살았으며, 이후 두 번 더 결혼했습니다.
블라드 3세의 장남인 미흐네아는 146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둘째 아들은 1486년 이전에 사망했습니다. 블라드 3세의 셋째 아들인 블라드 드라쿨리아(Drakwlya드라쿨리아라틴어)는 1495년경 왈라키아 왕위를 주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헝가리 귀족 드라쿨라 가문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5. 유산 및 평가
블라드 3세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으며, 그의 행적은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담부터 흡혈귀 신화의 영감까지 다양한 형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5.1. 루마니아의 국민 영웅

루마니아인들에게 블라드 3세는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습니다. 이는 그가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 왈라키아를 지키고 루마니아 영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노력 때문입니다. 그의 잔혹한 통치 방식조차도 국가를 안정시키고 중앙 정부를 강화하며, 범죄자와 비애국적인 보야르들을 처벌하기 위한 합리적인 행위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칸타쿠지노 연대기는 블라드 3세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최초의 루마니아 역사서로, 그의 형 단의 살해에 연루된 트르고비슈테의 늙은 보야르들을 꼬챙이에 꿰어 죽인 사건을 서술합니다. 이 연대기는 블라드 3세가 젊은 보야르들과 그들의 아내, 자녀들을 강제로 포에나리 성 건설에 동원했다고 덧붙입니다. 포에나리 성의 전설은 1747년 왈라키아의 수도 대주교 네오피트 1세에 의해 언급되었는데, 그는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신부를 성벽 안에 가두었다는 '메슈테룰 마놀레'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20세기 초, 성이 위치한 무스첼 카운티의 교사 콘스탄틴 러둘레스쿠-코딘은 오스만 침공 중 포에나리 성에서 트란실바니아로 탈출하는 것을 도운 마을 주민들에게 블라드 3세가 "토끼 가죽에 쓴" 하사품 편지를 보냈다는 지역 전설을 출판했습니다. 이 지역의 다른 마을에서는 이 기부가 전설적인 라두 네그루에게 귀속되기도 합니다.
러둘레스쿠-코딘은 더 많은 지역 전설을 기록했는데, 그중 일부는 블라드 3세에 대한 독일 및 슬라브 이야기에서도 알려져 있어, 후자의 이야기들이 구전 전통을 보존했음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블라드 3세의 명령으로 게으른 자, 가난한 자, 절름발이를 불태우고 남편에게 너무 짧은 셔츠를 만들어준 여자를 처형한 이야기는 독일 및 슬라브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농민들은 블라드 3세의 별명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빈번했던 꼬챙이형과 관련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러한 잔혹한 행위만이 왈라키아에서 공공 질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루마니아 예술가들은 블라드 3세를 범죄자를 처벌하고 비애국적인 보야르들을 처형하여 중앙 정부를 강화한 정의로운 통치자이자 현실적인 폭군으로 여겨왔습니다. 이온 부다이-델레아누는 그를 중심으로 한 최초의 루마니아 서사시를 썼습니다. 델레아누의 '치간이아다'(Țiganiada치간이아다루마니아어, '집시 서사시', 작곡 후 거의 한 세기 만인 1875년에 출판)는 블라드 3세를 집시와 천사 군대를 이끌고 보야르, 오스만인, 스트리고이(strigoi스트리고이루마니아어, 즉 흡혈귀) 및 다른 악령에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묘사했습니다. 시인 디미트리에 볼린티네아누는 19세기 중반 자신의 '루마니아인의 전투'에서 블라드 3세의 승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블라드 3세를 보야르들의 전제 정치를 막기 위해 폭력이 필요했던 개혁가로 보았습니다。루마니아의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인 미하이 에미네스쿠는 역사 발라드 '세 번째 편지'를 블라드 3세를 포함한 용감한 왈라키아 공작들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는 블라드 3세가 무덤에서 돌아와 루마니아 민족의 적들을 전멸시키기를 촉구합니다.
1860년대 초, 화가 테오도르 아만은 블라드 3세와 오스만 사절단의 만남을 묘사하며, 사절단이 왈라키아 통치자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루마니아 역사학자들은 블라드 3세를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 통치자 중 한 명으로 대우하며, 루마니아 영토의 독립을 위한 그의 투쟁을 강조했습니다. 블라드 3세의 잔혹한 행위조차도 종종 국익을 위한 합리적인 행위로 묘사되었습니다. 알렉산드루 디미트리에 크세노폴은 블라드 3세가 공포 행위를 통해 보야르 파벌 간의 내부 싸움을 멈출 수 있었다고 강조한 최초의 역사학자 중 한 명입니다. 콘스탄틴 C. 지우레스쿠는 "[블라드 3세가] 명령한 고문과 처형은 변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항상 이유가 있었고, 매우 자주 국가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오안 보그단은 이러한 영웅적 이미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몇 안 되는 루마니아 역사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1896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블라드 체페슈와 독일 및 러시아 서술'에서 루마니아인들이 블라드 3세를 "용기와 애국심의 모범"으로 제시하기보다는 그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1999년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참가자의 4.1%가 블라드 3세를 "루마니아인의 운명에 더 나은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으로 선택했습니다.
5.2. 비판과 논란
블라드 3세의 잔혹한 행위는 그를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만드는 동시에, 현대적 관점에서는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됩니다. 그가 무차별적이고 잔혹하게 자행한 대량 학살은 현재의 기준으로 볼 때 집단살해 및 전쟁 범죄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마니아 국방부 장관 이오안 미르체아 파슈쿠는 블라드 3세가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다면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독일어권 지역에서 블라드 3세의 잔혹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의 생전부터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블라드 3세를 칼리굴라나 네로보다 더 심한 "정신 이상자, 가학증 환자, 끔찍한 살인자, 피학증 환자"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작센인들에 의해 과장되거나 심지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블라드 3세가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피와 살을 먹으며 만찬을 열었다거나, 밭을 불태워 농민들을 굶주리게 했다는 등의 악행은 마차시 1세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과장되거나 날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새로 발명된 인쇄 기술이 이러한 선전물을 퍼뜨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슬라브 민담에서는 블라드 3세의 잔혹성이 중앙 정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음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샘물에 놓인 황금 잔에 대해 아무도 감히 훔치지 못했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블라드 3세가 "훔치는 것을 너무나 격렬하게 싫어하여... 어떤 악행이나 강도 행위를 저지른 자도...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에 공공 질서가 확립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슬라브 민담은 블라드 3세의 가톨릭 개종을 맹렬히 비판하며, 그의 죽음을 이러한 배교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블라드 3세가 쓴 편지에서 채취한 샘플 분석을 바탕으로 한 2023년 연구에 따르면, 그는 '혈루증'이라는 희귀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질환은 눈물이 부분적으로 피로 구성되게 만듭니다.
5.3. 흡혈귀 신화의 영감
블라드 3세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를 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중세 왈라키아 통치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1897년 출판)는 드라큘라와 흡혈귀를 처음으로 연결시킨 작품입니다. 스토커는 에밀리 제라드의 트란실바니아 미신에 대한 기사(1885년 출판)를 통해 피를 빠는 흡혈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왈라키아의 중세 역사에 대한 그의 제한된 지식은 윌리엄 윌킨슨의 1820년 출판된 저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설명 및 관련 정치적 관찰》에서 얻은 것입니다. 윌킨슨은 독일 이야기의 신뢰성을 받아들여 블라드 3세를 사악한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밀러에 따르면, 스토커는 블라드 3세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으며, 블라드 3세가 드라큘라 백작의 영감이라고 말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스토커는 드라큘라가 스제케이인 혈통이라고 썼는데, 이는 그가 아틸라의 파괴적인 원정과 스제케이인들의 훈족 기원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스토커의 소설 작업 노트에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초기 초고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밤피르 백작'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스토커는 드라큘라 백작에 대한 소설을 쓸 때 블라드 3세의 이름과 왈라키아 역사에 대한 "잡다한 정보 조각"을 차용했을 뿐입니다.
'드라큘라'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드러쿨('용'이라는 뜻)의 별명에서 유래했습니다. '드라쿨레아'는 슬라브어 속격 형태로 '드라쿨의 아들' 또는 '용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현대 루마니아어에서 '드라쿨'은 '악마'를 의미하며, 이는 블라드 3세의 명성에 기여했습니다. 훗날 블라드 3세의 잔혹한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드라큘라'는 '악마의 아들'로 해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블라드 3세는 생전에 흡혈귀처럼 피를 마신 적이 없으며, 그의 주적인 오스만 제국조차 그를 피를 빠는 존재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어 출처에는 블라드 3세가 포르피린증을 앓아 햇빛이나 자외선을 피하고 피부가 창백했다는 최신 연구가 언급됩니다.
현재 브란성이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성은 튜턴 기사단이 세웠고 블라드 3세의 할아버지 미르체아 1세가 14세기에 거주했던 곳으로, 블라드 3세 자신은 잠시 머물렀을 뿐입니다. 블라드 3세의 본거지와 궁전은 부쿠레슈티 북서쪽 왈라키아 영내의 트르고비슈테에 있었습니다. 또한 블라드 3세와 인연이 깊은 포에나리 성도 모델로 거론되지만, 스토커가 이 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스토커가 스코틀랜드의 뉴 슬레인스 성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6. 외모 및 묘사

교황 비오 2세의 사절 니콜로 모드루시엔세는 부다에서 블라드 3세를 만났을 때 그의 유일한 현존하는 외모 묘사를 남겼습니다. 블라드 3세의 초상화 사본은 인스브루크의 암브라스 성에 있는 "괴물 초상화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플로레스쿠에 따르면, 이 그림은 "강하고 잔인하며 어딘가 고통받는 듯한 남자"를 "크고 깊게 패인 짙은 녹색의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묘사합니다. 블라드 3세의 머리색은 모드루시엔세가 그가 검은 머리였다고 언급하는 반면, 초상화는 그가 금발이었던 것처럼 보여 불확실합니다. 이 그림은 블라드 3세가 큰 아랫입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독일어권 지역에서 블라드 3세의 나쁜 평판은 여러 르네상스 회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15세기 그림에서 성 안드레아의 순교를 목격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묘사되었으며, 이 그림은 벨베데레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블라드 3세와 유사한 인물이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 예배당에 있는 골고타 언덕의 그리스도를 목격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니콜로 모드루시엔세는 블라드 3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블라드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매우 다부지고 강했으며, 차갑고 무서운 외모를 지녔습니다. 강하고 매부리코에 콧구멍은 부어 있었고, 얇고 붉은 얼굴에는 매우 긴 속눈썹이 크고 활짝 열린 녹색 눈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덥수룩한 검은 눈썹은 그 눈을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그의 얼굴과 턱은 콧수염을 제외하고는 면도되어 있었습니다. 부어오른 관자놀이는 그의 머리를 더 커 보이게 했습니다. 황소 같은 목이 그의 머리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 목에서 넓은 어깨를 가진 그의 몸으로 검은 곱슬머리가 늘어져 있었습니다."


블라드 3세의 악명은 여러 르네상스 회화에도 반영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