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와 부활
라자로의 개인적인 배경과 예수에 의한 그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 서술은 라자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1. 베다니의 친구
라자로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마을에 살았으며, 마르타와 베다니의 마리아 자매의 오빠로 알려져 있다. 이 세 남매는 예수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예수는 그들의 집을 자주 방문하여 휴식을 취했다. 요한복음 11장 5절에는 "예수께서 마르타와 그 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어 예수와 라자로 가족 사이의 깊은 유대감을 보여준다. 베다니 마을은 오늘날 알에이자리야로 불리며, 이 아랍어 이름은 "라자로의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2.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44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라자로가 병에 걸리자 그의 자매들은 예수에게 "주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소식을 전했다. 예수는 이 소식을 듣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시며, 곧바로 베다니로 가지 않고 이틀을 더 머물렀다. 제자들이 유대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예수는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말했고, 제자들이 그 의미를 오해하자 "라자로가 죽었느니라"라고 명확히 밝히며,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라고 덧붙였다.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라자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난 상태였다. 예수는 먼저 마르타를 만나 마르타의 믿음을 시험하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었다. 마르타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나와 마르타와 같은 말을 하며 울자, 예수는 깊이 탄식하며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장 35절)라고 기록될 정도로 슬픔을 표했다.
예수는 무덤으로 가서 돌을 옮기라고 명했다. 마르타는 나흘이나 되어 시신에서 냄새가 날 것이라며 주저했지만, 예수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답했다. 돌이 옮겨지자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 둘러선 무리를 위하여 하옵는 것이오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라자로야, 나오라!"라고 외쳤다. 그러자 라자로가 수의에 싸인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일렀다.
이 기적을 본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이 소식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알렸고, 이는 나중에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형 직전에 행한 마지막 기적이며, 예수의 권능과 신성을 가장 강력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묘사된다. 이와 유사한 부활 이야기가 논쟁이 되는 비밀 마르코 복음에도 등장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버전이 요한복음의 정경 이야기보다 더 오래된 형태를 대표한다고 본다.
1.3. 부활 이후의 상황
요한복음 12장에는 라자로가 부활한 후의 상황이 다시 언급된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기 전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다니로 돌아왔을 때, 라자로의 집에서 만찬이 베풀어졌다. 마르타는 음식을 차리고, 라자로는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이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보러 왔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죽음에서 살려낸 라자로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이러한 상황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요한복음 12장 10절과 11절에 따르면, 대제사장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음모했다. 그 이유는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떠나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자로의 부활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표적" 중 가장 큰 절정이었으며, 성지주일에 예수를 따르는 군중을 설명하고, 대제사장 가야파와 산헤드린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라자로의 무덤
베다니의 라자로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소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순례지로 남아 있다. 이 무덤 위에는 수세기에 걸쳐 여러 기독교 교회들이 세워졌다. 16세기부터는 알-우자이르 모스크가 이 무덤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접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 라자로 성당은 안토니오 바를루치가 설계하여 프란치스코회의 후원으로 1952년부터 1955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이는 이전의 여러 고대 교회들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1965년에는 무덤 서쪽에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 추가로 건축되었다.
오늘날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거리에서부터 바위를 깎아 만든 불규칙한 계단을 통해 이어진다. 1896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현대적인 거리 수준에서 24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기도 공간으로 사용되는 사각형 방이 나오고, 그곳에서 더 많은 계단을 내려가면 라자로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아래쪽 방이 있었다. 이 묘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베다니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첫 언급은 4세기 후반에 나타나지만, 역사가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서기 330년경)와 보르도 순례자 모두 라자로의 무덤을 언급했다. 390년에는 히에로니무스가 성 라자로에게 헌정된 '라자리움(Lazarium)'이라는 교회를 언급했으며, 이는 약 410년경 순례자 에게리아에 의해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교회는 333년에서 39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정원에는 4세기 교회 모자이크 바닥의 잔해가 남아 있다. 라자리움은 6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더 큰 교회로 대체되었는데, 이 교회는 십자군 전쟁 시대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1143년, 당시 존재하던 건물과 토지는 예루살렘의 풀크 왕과 예루살렘의 멜리장드 여왕에 의해 매입되었고, 라자로의 무덤 근처에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헌정된 큰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1187년 예루살렘 공방전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수도원은 버려져 폐허가 되었고 무덤과 아치형 천장만이 남았다. 1384년경에는 그 자리에 단순한 모스크가 세워졌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당시 (현재 무슬림이 된) 마을 주민들을 위해 더 큰 알-우자이르 모스크를 지었고, 마을의 수호성인인 베다니의 라자로를 기려 이름 붙였다.
1913년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부 학자들은 현재의 베다니 마을이 고대 마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이 백과사전의 저자는 이를 반박하며 현재의 마을이 라자로의 전통적인 무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굴을 라자로의 무덤으로 식별하는 것은 단지 "가능할 뿐"이며, "강력한 본질적 또는 외재적 권위가 없다"고 언급되었으나, 현재 마을의 위치가 고대 마을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았다.
3. 후대 전승
성경에는 라자로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이 없지만,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은 그의 후대 삶에 대해 다양한 기록을 전한다. 그는 주로 키프로스와 프로방스와 관련되어 있으며, 각각 키티온(라르나카)과 마르세유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3.1. 키프로스 전승

동방 정교회 전승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라자로는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소문난 음모 때문에 유대를 떠나 키프로스로 도피해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바르나바와 사도 바울에 의해 키티온 (현재의 라르나카)의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30년을 더 살았고, 죽은 후 그곳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묻혔다고 전해진다.
라자로의 주교 임명의 사도적 승계를 더욱 확고히 한 이야기는 주교의 오모포리온 (사제복의 일부)이 성모 마리아가 직접 짠 것으로 라자로에게 증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적 연관성은 325년부터 431년 사이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지배를 받던 키티온 주교들이 독립교회를 주장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키티온 교회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자치권을 선언했다.
전승에 따르면, 라자로는 부활 후 30년 동안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지옥에서 본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모습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누군가 냄비를 훔치는 것을 보고 "진흙이 진흙을 훔치는구나"라고 웃으며 말했을 때였다고 한다.
890년, 라르나카에서 "그리스도의 친구 라자로"라는 비문이 새겨진 무덤이 발견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6세 황제는 898년에 라자로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장시켰다. 이 이장은 카이사레아의 주교 아레타스에 의해 기념되었고, 동방 정교회는 매년 10월 17일에 이를 기념한다.
라르나카에 대한 보상으로, 레오 황제는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성 라자로 교회를 라자로의 무덤 위에 세웠다. 이 성당 안의 지성소 아래에는 대리석 석관이 있다. 16세기, 프스코프-페체리 수도원의 러시아 수도승이 라르나카에 있는 라자로의 무덤을 방문하여 유해의 작은 조각을 가져갔다. 아마도 그 조각이 오늘날까지 보관되어 있는 프스코프 수도원(엘리자로프 수도원)에 성 라자로 경당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72년 11월, 라르나카의 성 라자로 교회에서 보수 공사 중 제단 아래에서 대리석 석관에 담긴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성인의 유해 일부로 확인되었다. 2012년 6월, 키프로스 정교회는 모스크바 키릴 총대주교가 이끄는 러시아 정교회 대표단에게 성 라자로의 성유물 일부를 전달했다. 이 유해는 모스크바로 옮겨져 자차티예프스키 수도원에 안치되어 신자들의 경배를 받고 있다.
3.2. 프로방스 전승

서방 교회 (특히 프로방스)의 중세 시대 전승에 따르면, 라자로와 그의 자매들 마르타, 마리아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유대인들에 의해 돛, 노, 키 없는 배에 태워져 바다에 버려졌다. 이들은 기적적으로 항해하여 오늘날 생트마리드라메르라고 불리는 프로방스의 한 지역에 상륙했다. 이후 이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남동부 갈리아 각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라자로는 마르세유로 가서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마르세유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기간 동안, 그는 생 라자르 감옥 아래 동굴에 갇혀 참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나중에 오툉으로 이장되어 오툉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이 성당은 '성 라자로'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마르세유 주민들은 여전히 그의 머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숭배한다.
순례자들은 부르고뉴의 베즐레 수도원에도 라자로의 무덤으로 알려진 또 다른 장소를 방문한다. 또한 방돔의 삼위일체 수도원에는 라자로의 무덤에서 예수가 흘렸다고 전해지는 눈물이 성유물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3세기에 편찬된 황금 전설은 프로방스 전승을 기록하고 있으며, 라자로와 그의 자매들에게 상상된 호화로운 생활 방식을 묘사한다. (여기서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시된다.) 황금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마그달로 성에서 태어났으며 왕족 혈통의 고귀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은 키루스, 어머니의 이름은 에우카리스였다. 그녀는 오빠 라자로, 언니 마르타와 함께 나자렛에서 2마일 떨어진 마그달로 성과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 성, 그리고 예루살렘의 많은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나누어 가졌다. 마리아는 마그달로 성을 소유하여 막달레나라는 이름을 얻었고, 라자로는 예루살렘 시의 일부를, 마르타는 베다니를 소유했다. 마리아가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고 라자로는 기사도에 전념하는 동안, 현명한 마르타는 오빠와 여동생의 몫은 물론 자신의 몫까지 훌륭하게 관리하며 기사와 종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했다. 그러나 주님 승천 후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팔았다고 전해진다.
15세기 시인 조르주 샤틀랭은 웃지 않는 라자로의 전승에 기대어 "하나님이 그에게 그처럼 큰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둑, 마리아의 오빠는 그 후로 불행과 고통스러운 생각밖에 없었으며, 자신이 지나야 할 일을 두려워했다"고 묘사했다.
3.3. 기타 전승
라자로가 부활 후 30년 동안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전승은 키프로스 전승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죽음에서 돌아온 후, 지옥에서 보았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비참한 모습에 대한 기억 때문에 평생 동안 슬픔에 잠겨 살았다고 한다. 그가 웃음을 보인 유일한 기록된 순간은 누군가 도둑질하는 것을 보고 "진흙이 진흙을 훔치는구나"라고 말했을 때였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유한성과 물질의 무상함에 대한 그의 깊은 깨달음을 나타내는 은유로 해석된다.
4. 신학적 해석 및 비평
라자로의 부활은 기독교 신학에서 깊은 의미를 지니지만, 동시에 그 역사적 타당성에 대한 학술적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4.1. 신학적 의미
라자로의 부활 기적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표적" 중 정점을 이룬다. 이 사건은 성지주일에 예수를 따르는 군중의 배경을 설명하고, 대제사장 가야파와 산헤드린이 예수를 죽이기로 계획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학자 몰로니(Moloney)와 해링턴(Harrington)은 라자로의 부활을 "죽음으로 이어질 부활"로 보며, 이 사건이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이끄는 일련의 사건들을 시작하게 했다고 해석한다. 즉,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기적"이라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예수가 행한 라자로의 부활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딸을 살린 것과 같이 그들을 일상적인 지상 생활로 되돌린 것이며, 라자로와 다른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나중에 다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명시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시공을 초월한 다른 생명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필라렛 성인의 교리서는 예수의 기적 중 라자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린 것을 기록하고 있다. 남침례회의 2014년 결의문 "내세에 관한 성경의 충분성에 대하여"는 성경에 기록된 죽은 자의 부활 사례들(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라자로)에 대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적 지혜 속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그들의 개별적인 내세 경험에 대한 어떠한 보고도 주지 않으셨다"고 언급한다.
장 칼뱅은 "그리스도는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자신의 신성한 권능을 탁월하게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미래의 부활에 대한 생생한 이미지를 우리 눈앞에 두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개신교 목사 야코프 아바디는 예수가 의도적으로 베다니로 돌아가는 것을 "나흘 동안" 지연시킨 것은, 라자로가 "실제로 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했다.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라자로 부활 이야기가 "생명과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능을 보여주며, 참된 인간이자 참된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본성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또한 "예수께서 죽음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이러한 이별의 고통에 대해 진심 어린 연민을 보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매슈 풀을 비롯한 일부 해석자들은 라자로가 수의에 싸여 손발이 묶인 채로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을 두 번째 기적으로 보았지만, 찰스 엘리콧은 라자로의 장례복이 움직임을 제한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유스투스 크네히트는 이 기적의 목적이 "우리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때가 가까웠으며, 그분이 이 강력한 기적을 미리 행하신 것은 제자들, 특히 사도들의 믿음을 강화하고, 그들이 주님의 겸손한 시간에 그분을 보았을 때 믿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이 라자로를 일으키신 것처럼 그분 자신도 무덤에 놓였을 때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덧붙였다. 로저 백스터는 "그의 누이들이 주님께 '주님, 보소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전갈을 보냈다"는 구절에 대해 묵상하며, "그들은 주님께 무엇을 해 달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에게는 우리의 필요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의 기도, 특히 건강과 다른 일시적인 축복에 관한 기도는 이러한 성격을 띠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 우리의 구원에 무엇이 유익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4.2. 비평적 관점

신약학자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와 그 후 베다니의 마리아의 발 향유 사건(요한복음 11장 1절-12장 11절, 17절)이 더 오래된 공관복음서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의 텍스트 전통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밝히기 위해 서사 비평을 통해 설명하려 노력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여러 개의-겉보기에는 원래 무관한-이야기들의 요소를 하나의 서사로 결합했을 수 있다. 여기에는 베다니에서 이름 없는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 (마르코 복음서 14장, 마태오 복음서 26장), 갈릴리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사건 (루카 복음서 7장; 이 두 사건은 공통된 기원을 가질 수 있으며, 루카 복음의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가 갈릴리 이름 없는 마을의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한 사건 (루카 복음서 10장), 예수의 부자와 라자로 비유 (루카 복음서 16장), 그리고 예수의 기적적인 죽은 자 살림과 관련된 다른 이야기들(야이로의 딸의 부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의 부활)이 포함된다.
동시에 다른 요소들은 제거되거나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나병 환자 시몬/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를 위한 잔치의 주인으로서 라자로로 대체되었고, 유대의 베다니가 배경으로 선택되었지만, 요한복음 서사의 대부분 요소는 공관복음서가 갈릴리에서 설정한 전통과 일치한다. 학자들은 특히 요한복음 11장 2절(및 11장 1절)에 주목하는데, 이는 저자 또는 후대 교정자가 이 이야기들 사이의 연결을 강조하려는 시도일 수 있으며, 이러한 연결은 더 오래된 정경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실제 향유 사건은 12장 3절까지 서술되지 않을 것이며, 이 시점까지 요한복음에서 마리아, 마르타, 이 자매들의 마을, 또는 어떠한 향유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저자(또는 교정자)가 독자들이 이미 이 인물, 장소, 사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독자들에게 더 자세한 내용을 제공하기 훨씬 전에 이들이 연결되어 있었음을(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아직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알려주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엘슬러(Esler)와 파이퍼(Piper) (2006)는 요한복음 11장 2절이 요한복음 저자가 '그리스도 운동의 집단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여러 전통을 의도적으로 섞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일어난 일에 대한 역사적으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목적을 위해 다양한 기존 서사들을 결합하여 라자로,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타를 원형적인 기독교 가족으로 구성했으며, 그들의 본보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장겐베르크(Zangenberg) (2023)는 요한복음 11장이 다른 공관복음서 이야기들에 의존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보며 이 이론에 회의적이다. 그는 또한 요한복음이 고고학 및 고대 유대 문헌에 의해 입증된 당시 유대인 매장 풍습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초기 해설가로는 이신론자 라이샌더 스푸너가 1836년에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라자로의 부활 기적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이례적이라고 썼는데, 이는 예수의 기적적인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공관복음서는 라자로의 자매들의 활동에 대한 구절을 포함하지만, 그들의 오빠의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 스푸너는 이것이 요한복음 저자가 "실제로 부정직했거나, 어떤 종류의 사건이 발생하여 유포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믿고 기록했지만, 그것이 진실에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고 썼다. 1892년에 불가지론자 연설가 로버트 G. 잉거솔은 이 서사가 역사적으로 믿기 어렵다고 보며, 라자로가 실제로 죽어 잠재적으로 내세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부활했다면, 라자로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던 경험이 신약성경의 다른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을 것이며, 그의 생애 동안 라자로에게 광범위한 관심을 끌었을 것이고, 라자로가 두 번째로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경험을 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덜 두려워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썼다. 인터프리터 성경(1953)의 성서 주해는 라자로의 부활을 성경의 다른 부활들과 비교하며 "죽음 직후의 소생과 나흘 후의 부활 사이의 차이는 너무 커서 이 이야기의 역사성에 대한 의심을 제기한다. 특히 44절의 상상할 수 없는 세부 사항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사실성(verisimilitude)의 특징을 가진 요소들이 있다"고 언급한다. 다른 학자들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죽음에 이르는 사건들이 마르코 복음이 기록되기 전의 초기 기록에 근거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기록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여전히 살아있어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익명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요한복음의 동일한 사건 기록은 훨씬 나중에 기록되었고, 모든 인물들이 사망하여 더 이상 박해의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명이었던 인물들의 이름을 명시하고 라자로의 부활도 포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5. 전례적 기념
라자로는 성인을 기념하는 기독교 교회들에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지만, 지역 전통에 따라 다른 날에 기념된다. 기독교 장례식에서는 고인이 라자로가 부활했던 것처럼 주님에 의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이 종종 기도에 표현된다.
5.1. 동방 정교회
동방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교회는 라자로 토요일에 라자로를 기념한다. 라자로 토요일은 성지주일 전날이며, 이동 축일이다. 이 날은 성지주일과 함께 교회력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순절의 참회와 성주간의 애도 사이에서 기쁨과 승리의 날로 여겨진다. 이전 주 동안, 렌텐 트리오디온의 성가들은 라자로의 병과 죽음, 그리고 요르단강 너머에서 베다니로 향하는 그리스도의 여정을 따른다. 라자로 토요일의 성경 독서와 성가들은 라자로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고 일반 부활을 약속하는 것으로 초점을 맞춘다. 복음서 이야기는 성가들에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라고 묻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죽은 라자로에게 나오라고 명령하는 그의 신성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성지주일에는 생략되는 일반 주일 예배의 부활 성가 중 많은 부분이 라자로 토요일에 불린다. 성찬예배 동안, 삼성송 대신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었도다"라는 세례 성가가 불린다. 사순절 40일이 라자로 토요일 전날 끝나지만, 이 날은 여전히 금식일로 지켜지며, 다만 약간 완화된 형태이다. 러시아에서는 라자로 토요일에 캐비아를 먹는 것이 전통이다.
라자로는 동방 정교회의 전례력에서 3월 17일의 고정 축일로도 기념된다. 898년에 키프로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그의 성유물이 이장된 것은 10월 17일에 기념된다.
5.2. 로마 가톨릭과 기타 서방 교회
로마 전례력에서 라자로는 그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타와 함께 7월 29일에 기념된다. 이전의 로마 순교록에서는 12월 17일에 기념되었다.
쿠바에서는 12월 17일의 '산 라자로' 축제가 주요 행사이다. 이 날은 아바나 외곽 엘 링콘 마을의 성 라자로 상을 모신 경당으로 순례하는 것으로 기념되는데, 이 성 라자로 상은 쿠바에서 가장 신성한 성상 중 하나이다.
성공회의 일부 교구력에서는 라자로를 기념한다. 영국 성공회에서는 7월 29일에 마르타, 베다니의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 마르타, 라자로, 우리 주님의 동반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소규모 축일로 기념되며, 적절한 성경 독서와 본기도가 제공된다.
루터교의 성인력에서도 라자로는 7월 29일에 베다니의 마리아, 마르타와 함께 기념된다.
6. 다른 라자로와의 구분

'라자로'라는 이름은 루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비유인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루카 복음 16장 19절-31절)에도 등장한다. 이 비유는 이름 없는 부자와 라자로라는 이름의 가난한 거지 사이의 관계를 (삶과 죽음에서) 다룬다. 지옥에 있는 죽은 부자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 자신의 가족에게 그의 운명을 경고해 달라고 간청한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대답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에서는 비유에 나오는 거지 라자로(축일 6월 21일)와 베다니의 라자로가 때때로 혼동되어, 둘 다 궤양과 목발을 짚고 있는 모습으로 도상학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부르고뉴와 프로방스의 포털에 새겨진 로마네스크 미술 도상학은 이러한 혼동을 시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를의 생트로핌 교회 서쪽 포털에는 거지 라자로가 성 라자로로 즉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발롱 교회, 베즐레 수도원 중앙 포털, 오툉 대성당 포털 등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발견된다.
6.1. 성 라자로 기사단
성 라자로 기사단은 12세기에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이 설립한 나병 환자 병원에서 유래한 기사단이다. 나병 환자들은 비유에 나오는 거지 라자로(루카 복음 16장 19절-31절)를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겼고, 보통 자신들의 호스피스를 그에게 헌정했다. 이 기사단은 베다니의 라자로가 아닌 거지 라자로와 연관되어 있다.
7. 다른 종교에서의 라자로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적 전통에서도 라자로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탐구할 수 있다.
7.1. 이슬람교
라자로는 중세 이슬람 전승에도 등장하며, 그곳에서 그는 예수의 경건한 동반자로 공경받았다. 쿠란에는 라자로라는 이름의 인물이 언급되지 않지만, 예수가 행한 기적 중에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리는 것이 포함된다(알이므란 [3장]:49). 무슬림 전설은 예수의 이러한 기적적인 이야기들을 자주 자세히 다루었지만, 라자로는 가끔씩만 언급되었다. 예를 들어, 알-타바리는 그의 타리크에서 이러한 기적들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알-사알라비는 요한복음을 면밀히 따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라자로 [알-아지르]가 죽었고, 그의 누이가 예수에게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예수는 그의 죽음 후 사흘(복음서에서는 나흘) 후에 왔고, 그의 누이와 함께 바위 무덤으로 가서 라자로를 일으켜 세웠으며, 그에게 자녀들이 태어났다." 비슷하게, 이븐 알아티르의 기록에서는 부활한 사람이 "아지르"라고 불리는데, 이는 "라자로"의 또 다른 아랍어 표기이다.
7.2. 산테리아
종교혼합주의를 통해 라자로(또는 더 정확히는 '라자로'라는 이름의 두 인물의 혼동)는 산테리아에서 요루바 신앙의 신 바발루 아이예로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기독교 루카 복음서의 거렁뱅이처럼, 바발루 아이예는 개들에게 핥긴 궤양으로 뒤덮인 모습이며 신성한 개입으로 치유되었다. 성 라자로의 목발이나 표준 로마 가톨릭교회 양식의 성 라자로 메달로 알려진 은제 부적은 질병, 특히 에이즈를 앓는 사람들의 의학적 고통에서 혼합된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부적으로 착용된다. 산테리아에서 성 라자로와 관련된 날짜는 12월 17일인데, 이는 거지 성인의 축일인 6월 21일과 관련된 도상학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8. 예술 속 묘사
라자로의 부활은 종교 예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이다. 가장 유명한 두 작품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라자로의 부활(1609년경)과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라자로의 부활(1516년)이다. 라자로를 묘사한 다른 저명한 작품들로는 렘브란트, 빈센트 반 고흐, 이보르 윌리엄스, 그리고 월터 시커트의 단식을 깨는 라자로 등이 있다.
라자로의 부활은 2세기 작품을 포함하여 로마 카타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술적 주제 중 하나이다.
초기 기독교 석관 부조: 사자 굴의 다니엘과 라자로의 부활 라자로의 부활, 비잔틴 성화, 14세기 말 - 15세기 초 (G. 가몬-구문 소장, 러시아 박물관) 라자로의 부활, 러시아 성화, 15세기, 노브고로드 학파 (러시아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라자로의 부활, 유화, 1517년-1519년경,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런던 내셔널 갤러리) 라자로의 부활, 유화, 1609년경,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메시나 주립 박물관, 메시나) 라자로의 부활, 1630년-1631년, 렘브란트 반 레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라자로의 부활, 1540년-1545년, 주세페 살비아티 라자로의 부활 (렘브란트 이후), 종이 유화, 1890년,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라자로의 부활, 1857년, 레옹 조제프 플로랭 보나 라자로의 부활 양피지 삽화, 1504년경 라자로의 부활, 동판 유화, 1875년,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 (호프 갤러리, 솔트레이크시티) 라자로의 부활, 1800년, 윌리엄 블레이크, 애버딘 미술관


9. 대중문화 속 영향
서구 문명에서 성경 이야기로 잘 알려진 두 인물인 베다니의 라자로와 부자와 라자로 비유 속 거지 라자로는 음악, 문학, 예술 분야에서 수없이 많이 등장해왔다. 이 중 대부분의 언급은 베다니의 라자로를 지칭한다. '라자로'라는 이름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명 회복과 관련하여 과학 및 대중문화 용어에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과학 용어인 라자로 분류군은 겉보기에는 멸종된 기간 후에 화석 기록에 다시 나타나는 유기체를 의미하며, 라자로 징후와 라자로 증후군도 있다.
9.1. 문학
1851년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서 주인공 이스마엘은 네 번째 유언장을 작성한 후 "이제 내가 살아갈 모든 날들은 라자로가 부활한 후에 살았던 날들과 같을 것이며, 상황에 따라 몇 달 또는 몇 주를 추가로 얻은 순수한 이득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1866년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연인 소냐에게 요한복음의 이 부분을 읽어달라고 요청한다.
마크 트웨인이 쓰고 1972년 사후 출판된 두 편의 단편소설에서, 한 변호사는 라자로의 상속인들이 부활한 라자로가 죽기 전에 소유했던 모든 재산에 대해 논란의 여지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극작가 유진 오닐은 1925년 라자로의 부활 이후 삶을 다룬 희곡 라자로 웃다를 썼는데, 이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출연진이 필요한 작품으로, 축소된 출연진 버전으로 여러 번 공연되었지만 전체 버전으로 공연된 것은 한 번뿐이었다.
20세기 문학 작품 중 라자로를 언급하는 작품이 많다.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 "밤의 나무" (1945년 밤의 나무와 다른 이야기들에 수록), 존 놀스의 소설 분리된 평화 (1959년) 등이 있다. 20세기 시에서는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장편 시 라자로 (1906년), T. S. 엘리엇의 시 "J. 앨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1915년), 에드윈 알링턴 로빈슨의 시 "라자로" (1920년), 그리고 실비아 플라스의 시 "레이디 라자로" (사후 출판된 시집 아리엘 1965년) 등에서 라자로를 언급한다. 라자로에 대한 언급은 휘태커 챔버스의 회고록 증인(1952년,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영향을 인정)에도 나타나는데, 이 책은 첫 장을 "1937년, 나는 라자로처럼 불가능한 귀환을 시작했다"로 시작한다.
공상 과학 소설에서 라자로를 언급하는 작품으로는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라자로 롱 소설 (1941년-1987년), 월터 M. 밀러 주니어의 라이보위츠를 위한 찬송 (1960년), 그리고 프랭크 허버트의 라자로 효과 (1983년) 등이 있다.
미국 철학 교수 캐슬린 히긴스와 로버트 C. 솔로몬이 쓴 2010년 저서 빅 퀘스천: 철학에 대한 짧은 입문은 5장 '진실 탐구'의 마지막에서 독자들에게 "과학자가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성경 이야기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리처드 비어드의 라자로 죽다(2011년)는 혁신적인 소설로, 요한복음의 한 가지 세부 사항, 즉 라자로가 예수의 친구였지만 예수는 제자들은 많았어도 친구는 많지 않았다는 점을 확대한다. 비어드는 이야기의 줄기를 예수와 라자로의 나자렛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후 두 친구의 길이 어떻게 갈라졌는지를 다룬다. 선데이 비즈니스 포스트는 이 소설을 "평범한 소설이 아니다. 서구 문학의 가장 오래되고 선정적인 이야기 중 하나를 재해석하고 전복시키는 탁월하고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존 더핵의 라자로의 뼈(2012년)는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자원이 풍부한 카리브해 섬에서 교차하는 삶을 추적하는 어둡고 유머러스하며 빠르게 진행되는 초자연 스릴러이다. 줄거리는 베다니의 라자로가 그리스도에 의해 부활한 후, 시간 속에서 악한 자들의 마음과 영혼을 찾는 심판의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전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브라이언 L. 볼리의 래리: 교회 회복 소설(2019년)은 짧은 소설로, '래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래리'는 두 명의 목사에게 교회를 개선하고 성장을 이끄는 방법에 대한 제안을 한다. 그러나 읽다 보면 '래리'가 실제로는 성경 속 베다니의 라자로, 즉 예수의 불멸의 복음 전파 종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리처드 짐러의 베스트셀러 소설 라자로에 따른 복음서(2019년 영어판)는 라자로 자신의 시점에서 쓰여졌다. 이 책은 예수 벤 요셉(예수의 히브리어 이름)을 초기 유대 신비주의자로 묘사하며, 라자로와 예수가 어린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허구적 설정을 통해 그들의 깊은 우정을 탐구한다. 이 책의 주제는 우리가 신앙의 상실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끔찍한 희생을 하는지, 예수의 사명의 초월적인 의미, 그리고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은 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포함한다. 옵서버의 서평은 이 소설을 "경쟁, 배신, 권력 쟁탈, 희생에 대한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 이 용감하고 매력적인 소설의 가장 놀라운 점은 짐러가 서구 문화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를 페이지 터너로 만들었다는 점이다"라고 요약했다.
9.2. 음악
음악에서는 라자로가 천국에 있다는 시점에서 성경 속 라자로 이야기를 다시 다룬 1984년 가스펠 스토리 송 카먼의 "라자로여, 나오라"가 인기를 얻었다. 이 이야기의 현대적 재해석은 호주 대안 음악 밴드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의 앨범 디그, 라자로, 디그!!!의 타이틀곡이다. 다른 여러 밴드들도 부활 이야기를 암시하는 "라자로"라는 제목의 노래를 작곡했다. 여기에는 포큐파인 트리, 코너 오버스트, 서카 서바이브, 키마이라, 모, 웨스 킹, 플라시보, 그리고 데이비드 보위가 포함되는데, 데이비드 보위의 곡은 그가 말기 암으로 투병 중에 쓰였다.
9.3. 기타 대중문화
라자로는 때때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권력으로 복귀하는 정치인들을 비유하는 데 사용된다. 존 하워드는 호주 자유당의 당수직을 잃었을 때, 재탈환 가능성을 "세 겹 우회 수술을 받은 라자로"에 비유했다. 하워드는 실제로 당수직을 되찾고 호주 총리가 되었다. 전 아이티 대통령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저널리스트 에이미 윌렌츠에 의해 "아이티의 라자로"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의 망명지에서의 귀환과 이 사건의 정치적 중요성을 묘사한 것이다.
배트맨 만화 시리즈에서는 라스 알 굴이 종종 라자로의 우물이라는 연못을 통해 생명을 되찾는다.
24세기를 배경으로 한 미래 지향적인 디스토피아 4부작 TV 시리즈 콜드 라자로는 데니스 포터가 말기 췌장암으로 투병 중에 썼다. 20세기 작가 다니엘 필드는 극저온 동결되었고, 줄거리는 그의 얼어붙은 머리에서 그의 생각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닥터 후 에피소드 "라자로 실험"에서는 리처드 라자로 교수가 자신을 더 젊게 만드는 실험을 시연하다가, 실수로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괴물로 변한다.
인디 게임인 로그라이크 비디오 게임 아이작의 번제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 중 하나가 라자로인데, 이 캐릭터는 게임 내에서 각 층에서 한 번씩 죽은 후 부활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인류의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계획의 이름이 '라자로 계획'으로 명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