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교육
1.1. 유년기 및 학업
갈도스는 1843년 5월 10일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의 라스 팔마스 데 그란 카나리아에 위치한 `Calle Cano카예 카노스페인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현재 `Casa-Museo Pérez Galdós카사-무세오 페레스 갈도스스페인어`(페레스 갈도스 생가 박물관)로 보존되어 있다. 그는 육군 중령 돈 세바스티안 페레스와 도냐 돌로레스 갈도스의 열 번째이자 막내아들이었다. 태어난 지 이틀 후, 그는 산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성당에서 `Benito María de los Dolores베니토 마리아 데 로스 돌로레스스페인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갈도스는 계몽주의 원리에 따라 교육받은 교사들이 가르치는 산 아구스틴 학교에서 공부했다. 1862년에 중등 과정을 마친 후, 그는 테네리페로 가서 예술 `bachillerato바치예라토스페인어`(학사 학위) 증명서를 취득했다. 같은 해, 그는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법학 학위를 시작했으나, 학업을 마치지는 못했다. 대학 재학 중, 갈도스는 아테네오 데 마드리드와 다른 지식인 및 예술가 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그는 마드리드 생활을 익히고 당시의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을 목격했으며, 이는 그의 저널리즘 작품과 초기 소설인 `La Fontana de oro라 폰타나 데 오로스페인어`(1870)와 `El audaz엘 아우다스스페인어`(1871)에 반영되었다.
1.2. 작가로서의 초기 활동
갈도스는 편안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처음에는 두 누이와 함께 살다가 나중에는 조카 호세 우르타도 데 멘도사의 집에서 지냈다. 그는 해가 뜰 무렵 일어나 오전 10시까지 꾸준히 글을 썼는데, 펜을 사용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여 연필로 글을 썼다. 글쓰기를 마친 후에는 마드리드 거리를 산책하며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소설을 위한 세부 사항을 수집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잎담배 시가를 끊임없이 피웠다. 오후에는 스페인어,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독서를 했으며, 셰익스피어, 디킨스, 세르반테스, 로페 데 베가, 에우리피데스 등 고전 작가들을 선호했다. 말년에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콘서트가 없는 한 다시 산책을 나섰고,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며 극장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라몬 페레스 데 아얄라에 따르면, 갈도스는 소박한 옷차림을 즐겨 입었으며,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어두운 색조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 겨울에는 목에 흰색 양모 스카프를 두르고, 손에는 반쯤 피운 시가를 들고, 앉을 때는 옆에 저먼 셰퍼드 개를 두었다. 그는 머리를 짧게 깎는 습관이 있었고, 심한 편두통을 앓았다고 한다.
1865년 무렵부터 그는 `La Nación라 나시온스페인어` 지에 문학, 예술, 음악, 정치에 관한 기사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1861년에서 1867년 사이에 세 편의 희곡을 완성했지만,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다. 1868년에는 갈도스의 디킨스의 `Pickwick Papers피크윅 페이퍼스영어` 번역이 스페인 대중에게 디킨스 작품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0년, 갈도스는 `La Revista de España라 레비스타 데 에스파냐스페인어`의 편집자로 임명되었고, 역사와 문화에서부터 정치와 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1867년과 1868년 사이에 그는 1820년~1823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인 첫 작품 `La Fontana de Oro라 폰타나 데 오로스페인어`를 집필했다. 그의 처제의 재정적 도움으로 1870년에 비공개로 출판되었으며, 이 작품은 스페인 소설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2. 주요 문학 활동 및 작품 세계
2.1. 소설
갈도스는 잦은 여행을 통해 스페인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소설에 담아냈다. 예를 들어, `Angel Guerra앙헬 게라스페인어`에서는 톨레도 시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등장한다. 그는 여러 차례 영국을 방문했으며, 첫 방문은 1883년이었다. 특히 `Fortunata y Jacinta포르투나타 이 하신타스페인어`에서 마드리드의 다양한 지역과 하층민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디킨스와 발자크와 같은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접근 방식과 유사하다. 갈도스는 또한 기술과 공예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예를 들어, `La desheredada라 데세레다다스페인어`에서는 밧줄 제작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La de Bringas라 데 브링가스스페인어`(1884)에서는 주인공이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수놓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등장한다.
갈도스는 에밀 졸라와 자연주의에서도 영감을 받았는데, 이는 작가들이 유전, 환경, 사회적 조건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인물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려 노력했던 경향과 일치한다. 이러한 영향은 아마도 `Lo prohibido로 프로이비도스페인어`(1884-85)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며, 이 소설은 작품 진행 중 사망하는 신뢰할 수 없는 1인칭 화자를 사용하여 서술된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앙드레 지드의 `L'immoraliste리모랄리스트프랑스어`와 같은 유사한 실험보다 앞선 것이다.

갈도스는 또한 스페인 교육자 프란시스코 히네르 데 로스 리오스를 통해 스페인에서 유명해진 철학자 카를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크라우제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의 한 예는 그의 소설 `El Amigo Manso엘 아미고 만소스페인어`(1882)에서 볼 수 있지만, `krausismo크라우시스모스페인어`(크라우제주의)의 신비주의적 경향이 그가 미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때때로 나타나는 지혜에 대한 관심을 이끌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는 `Fortunata y Jacinta포르투나타 이 하신타스페인어` 이후 갈도스 작품의 중요한 주제이며, 예를 들어 `Miau미아우스페인어`(1888)와 그의 마지막 소설 `La razón de la sinrazón라 라손 데 라 신라손스페인어`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문학 경력 내내 갈도스는 가톨릭 언론의 비난을 샀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나 기독교 자체보다는 확고하고 독단적인 종교 권력의 남용이라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비판했다. 사실, 신앙의 필요성은 그의 많은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며, 사제와 수녀에 대한 동정적인 묘사도 많다.
2.1.1. 국민 일화집
갈도스는 다음으로 대규모 프로젝트인 `Episodios Nacionales에피소디오스 나시오날레스스페인어`(국민 일화집)의 개요를 개발했다. 이는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부터 시작하여 스페인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다룬 역사 소설 시리즈이다. 멕시코-스페인 작가 막스 아우브는 이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 시대(19세기)의 모든 역사적 자료가 소실되고 갈도스의 작품만 남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작가의 손길이 닿았던 100년 동안의 국가의 삶이 완전하고, 살아 숨 쉬며, 현실적으로 담겨 있다. 수백, 수천 명의 역사적 인물과 상상 속 인물들이 영원히 존재하며, 그들 모두가 실제 인물처럼 생생하다. 세계의 위대한 작가들만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수만이 이 정도를 성취했다. 게다가 더 나아가, 나는 그를 톨스토이와 함께 그 시대 소설의 영광에 나란히 세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투쟁, 영광, 불행을 통해 조국의 정신을 드러낼 줄 알았기 때문이다. 갈도스는 스페인인들이 스페인을 이해하는 데 모든 역사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기여를 했다."
첫 번째 권은 `Trafalgar트라팔가르스페인어`로 명명되었으며 1873년에 출판되었다. 이후의 권들은 불규칙적으로 출간되다가, 46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인 `Cánovas카노바스스페인어`는 1912년에 출판되었다. 이 역사 소설들은 잘 팔렸으며, 갈도스의 당시 명성과 수입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쓰기 위해 세심한 조사를 활용했으며, 균형과 더 넓은 관점을 얻기 위해 실제 사건의 생존자와 목격자를 자주 찾아 나섰다. 예를 들어, `Trafalgar트라팔가르스페인어`에서는 실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호의 선실 소년이었던 노인을 만나 책의 중심인물로 삼기도 했다. 갈도스는 자신이 묘사하는 사건들의 공식적인 버전에 대해 종종 비판적이었으며, 당시 스페인 문화계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던 가톨릭교회와 자주 마찰을 빚었다.
2.1.2. 주요 현대 소설 및 후기 소설
문학 비평가 호세 몬테시노스는 갈도스의 다른 소설들을 다음과 같은 그룹으로 분류했다.
- `La Fontana de Oro라 폰타나 데 오로스페인어`부터 `La familia de León Roch라 파밀리아 데 레온 로치스페인어`(1878)까지의 초기 작품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Doña Perfecta도냐 페르펙타스페인어`(1876)로, 답답한 성직자 중심의 도시에 급진적인 젊은이가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영향을 묘사한다. `Marianela마리아넬라스페인어`(1878)에서는 평생을 맹인으로 살았던 젊은 남자가 시력을 되찾은 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마리아넬라의 못생긴 외모 때문에 그녀를 거부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 `La desheredada라 데세레다다스페인어`(1881)부터 `Angel Guerra앙헬 게라스페인어`(1891)까지의 `novelas españolas contemporáneas노벨라스 에스파뇰라스 콘템포라네아스스페인어`(스페인 현대 소설)는 느슨하게 연결된 22편의 시리즈로, 작가의 주요 문학적 명성을 확립한 작품들이다. 그중에는 그의 대표작인 `Fortunata y Jacinta포르투나타 이 하신타스페인어`(1886-87)가 포함된다. 이 소설들은 발자크의 `La Comédie humaine라 코메디 위멘프랑스어`에서 차용한 반복되는 인물들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Fortunata y Jacinta포르투나타 이 하신타스페인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거의 같은 길이이다. 이 작품은 한량 젊은이, 그의 아내, 그의 하층 계급 정부,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라는 네 인물의 운명을 다룬다. 포르투나타라는 인물은 갈도스가 마드리드의 한 빈민가 건물에서 날달걀을 마시고 있던 실제 소녀를 처음 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는 소설 속 인물들이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한국어 독자들은 이 작품에서 사실주의 소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세밀한 묘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르바리타 아르나이스는 산 크리스토발 거리 모퉁이에 이어져 있는 포스타스 거리에 즐비한 작은 상자나 인형 집처럼 생긴 짓눌린 건물 중의 한 곳에서 태어났다. 천장들은 손이 닿을 만큼 낮았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올라가야 할 정도로 좁은 계단들과 범죄 모의를 위해 마련한 듯한 방들이 있었다." 이러한 묘사는 단순히 공간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와 대화, 행동 모두를 아우른다. 이 작품은 포르투나타와 하신타라는 여성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각 인물이 당시의 사회 계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포르투나타는 서민 계층을, 그리고 하신타는 부르주아 계층을 대표한다. 1868년 스페인은 온건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이사벨 2세를 폐위하고 입헌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이 혁명의 한계는 주도 세력을 밀어줄 수 있는 광범위한 지지 기반이 없었던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갈도스는 68혁명에 대한 환멸을 이 소설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혁명의 주도 세력이었던 후아니토로 대표되는 온건 부르주아 계층은 이 혁명의 튼튼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 포르투나타로 대표되는 서민 또는 민중 계층과 함께하지 못하고 결별했기 때문에 이 혁명은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Miau미아우스페인어`(1888)에서는 반쯤 늙은 공무원 아버지가 정부 변화로 직장을 잃은 후 생계를 잃은 오만한 가족이 결국 자살에 이르는 이야기를 다룬다.
- 심리적 탐구를 다룬 후기 소설들 중 상당수는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2.2. 희곡

갈도스의 첫 번째 성숙한 희곡은 대화체로 쓰여진 자신의 소설을 각색한 `Realidad레알리다드스페인어`였다. 갈도스는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 그들의 반응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 1892년 2월에 연습이 시작되었고, 개막일에는 극장이 만원이었으며 희곡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 연극계의 규범과 맞지 않는 대화의 사실성, 그리고 한 `courtesan쿠르티잔프랑스어`(고급 창부)의 침실에서 장면이 설정된 점, 그리고 아내의 간통에 대한 비스페인적인 태도 때문에 보편적인 비평적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가톨릭 언론은 작가를 타락하고 사악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비난했다. 이 연극은 스무 밤 동안 공연되었다.
1901년, 그의 희곡 `Electra엘렉트라스페인어`는 격렬한 분노와 마찬가지로 과장된 열광의 폭풍을 일으켰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처럼, 갈도스는 성직자주의와 그에 수반될 수 있는 비인간적인 광신과 미신을 겨냥했다. 공연은 관객들의 반응으로 여러 차례 중단되었고, 작가는 여러 번 커튼콜을 받아야 했다. 셋째 날 밤 이후, 보수파와 성직자 정당들은 극장 밖에서 시위를 조직했다. 경찰이 개입하여 시위에 반대한 노동자 조직원 두 명을 체포했다. 충돌의 결과로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고, 다음 날 신문들은 연극에 대한 자유주의적 지지와 가톨릭/보수적 비난으로 양분되었다. 마드리드에서만 100회 이상의 공연이 있었고, 지방에서도 공연되었다. 33년 후인 1934년, 마드리드에서 재공연되었을 때도 비슷한 정도의 소란과 분노를 일으켰다.
3. 사상 및 정치적 활동
3.1. 정치적 견해 및 참여
갈도스는 보수 세력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데는 약한 관심을 보였다. 1886년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 총리는 그를 푸에르토리코의 과야마 시와 지역의 부재 의원(`deputy데퓨티스페인어`)으로 마드리드 의회에 임명했다. 그는 그곳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지만, 대리인을 통해 지역 상황을 보고받았고, 주민들을 적절히 대표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이 임명은 5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주로 그에게 정치 행위를 직접 관찰할 기회를 주어 그의 소설에 여러 장면으로 반영되었다.
이후 갈도스는 1907년 의회에서 대표로 선출되었다. 1909년에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와 함께 `Conjunción Republicano Socialista콘훈시온 레푸블리카노 소시알리스타스페인어`(공화사회주의 연합)를 이끌었으나, "자신을 정치가라고 느끼지 않던" 갈도스는 곧 "사소한 일과 허세"를 위한 투쟁에서 물러나 이미 쇠약해진 에너지를 소설과 연극에 쏟았다.
1914년 갈도스는 라스 팔마스 데 그란 카나리아의 공화당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1914년 3월 정부 수장 에두아르도 다토, 은행가 구스타보 바우어(로스차일드의 스페인 대표), 개혁주의자 수장 멜키아데스 알바레스, 알바 공작과 더불어 하신토 베나벤테, 마리아노 데 카비아, 호세 에체가라이 등 작가들로 구성된 갈도스를 위한 국가 위원회 헌정의 추진과 맞물렸다. 안토니오 마우라나 알레한드로 레루와 같은 정치인이나 교회, 사회주의자 대표는 이 위원회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1912년부터 실명 상태였고, 재정난과 질병으로 점점 더 고통받고 있었다. 1918년에는 미겔 데 우나무노 및 마리아노 데 카비아와 함께 군주제에서 오는 검열과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문학적 측면에서 그의 톨스토이 작품에 대한 경외심은 그의 마지막 저술에서 어떤 영성주의로 반영되었으며, 같은 러시아 문학의 흐름에서 그는 스페인의 운명에 대한 어떤 비관주의를 감출 수 없었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Episodios Nacionales에피소디오스 나시오날레스스페인어` 중 하나인 `Cánovas카노바스스페인어`(1912)에서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당시 스페인 정치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평화롭게 권력을 번갈아 차지하기로 합의한 두 정당은 예산을 뜯어먹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이상이 없고, 숭고한 목표가 그들을 움직이지 않으며, 이 불행하고 가난하며 문맹인 민족의 삶의 조건을 조금도 개선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과 모든 것을 똑같이 내버려 둔 채 차례로 지나갈 것이며, 스페인을 확실히 죽음에 이르게 할 소모 상태로 이끌 것이다. 그들은 종교 문제도, 경제 문제도, 교육 문제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순수한 관료주의, 카시키스모, 친구들을 위한 추천과 특혜의 무의미한 작업, 실질적인 효과 없는 입법만을 할 것이고, 그렇게 작은 등불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3.2. 반성직자주의 및 사회 비판
갈도스는 그의 문학 경력 내내 가톨릭 언론의 분노를 샀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나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뿌리 깊고 독단적인 종교 권력의 남용이라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비판했다. 사실, 신앙의 필요성은 그의 많은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며, 사제와 수녀에 대한 동정적인 묘사도 많다. 이러한 그의 비판적 시각은 당시 스페인 사회의 보수적 종교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스페인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는 `반성직자주의`에 대한 반대 때문에 보수적인 스페인 사회와 전통적인 가톨릭교도들로부터 보이콧을 당했고, 이는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4. 생애 후반 및 사망
갈도스는 1912년부터 실명 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실명 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계속해서 책을 구술하여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재정적인 어려움과 점점 더 심해지는 질병에 시달렸다. 그는 1912년부터 1916년까지 5년 동안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끝내 수상에는 실패했다. 1904년 수상자 호세 에체가라이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갈도스를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성직자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스페인 사회의 보수층과 전통주의 가톨릭 교도들이 그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보이콧했기 때문이다.
1914년 3월, 갈도스를 위한 국가 헌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당시 정부 수반인 에두아르도 다토, 은행가 구스타보 바우어(로스차일드의 스페인 대표), 개혁주의자 수장 멜키아데스 알바레스, 알바 공작, 그리고 하신토 베나벤테, 마리아노 데 카비아, 호세 에체가라이와 같은 작가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안토니오 마우라나 알레한드로 레루 같은 정치인들, 그리고 교회나 사회주의자 대표들은 위원회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위원회는 갈도스의 재정적 어려움을 돕기 위해 기금을 모으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로마노네스 총리와 스페인 국왕이 첫 후원자로 참여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1916년 이 계획은 중단되었고, 모금된 금액은 그의 빚을 갚는 데 필요한 금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공공 교육부는 그에게 세르반테스 탄생 300주년 기념 행사 준비를 맡기면서 매달 `1000 ESP`의 급여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 행사는 실제로 열리지 않았지만, 급여는 갈도스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지급되었다.
1897년 갈도스는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에 선출되었다. 그는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 마드리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원인 부엔 레티로 공원에 그의 명예를 기리는 동상이 제막되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대중의 기부금으로 조성되었다. 이 제막식에 갈도스도 참여했다. 당시 실명 상태였던 그는 조각가이자 절친한 친구인 마초가 만든 동상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고는 "훌륭하다, 내 친구 마초여, 정말 나와 똑같구나!"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5. 유산 및 평가
5.1. 긍정적 평가 및 영향
갈도스는 19세기 스페인의 주요 문학인물이며, 일부 비평가들은 그를 세르반테스 다음가는 스페인 소설가로 평가한다. 그는 `galdosistas갈도시스타스스페인어`라고 불리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디킨스, 발자크, 톨스토이와 동등한 위상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스페인 사실주의 문학의 정점을 이루며, 후대 작가 및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탁월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오래전에 본 장면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이를 작품에 생생하게 묘사하여 19세기 스페인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5.2. 비판 및 논란
한국 문학계에서는 그의 "좌익 사상적 편향성"이 이러한 논란에 기여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영어권 국가에서는 스페인 내에서의 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점차 그의 작품이 번역되면서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다.
6. 미디어 각색
갈도스의 소설은 여러 차례 영화로 각색되었다.
- `Doña Perfecta도냐 페르펙타스페인어`를 원작으로 한 `Beauty in Chains뷰티 인 체인스영어`는 엘시 제인 윌슨이 1918년에 감독했다.
-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비리디아나`(1961)는 `Halma알마스페인어`를 기반으로 한다. 부뉴엘은 또한 `나사린`(1959)과 `트리스타나`(1970)를 영화화했는데, 이 역시 갈도스의 작품에 기반을 두고 있다.
- `La Duda라 두다스페인어`는 라파엘 길이 1972년에 영화로 만들었다.
- `엘 아부엘로`(`El Abuelo엘 아부엘로스페인어`, 1998)는 호세 루이스 가르시가 감독했으며, 1년 뒤 국제적으로 개봉되었다. 이 작품은 이전에 1954년 아르헨티나 영화 `엘 아부엘로`로도 각색된 바 있다.
- 2018년 스리랑카 감독 베넷 래스나이케는 `Nela넬라영어`를 영화로 각색했다.
7. 기념 및 추모
q=마드리드 부엔 레티로 공원|position=left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를 기리기 위한 여러 기념물과 활동들이 존재한다.
라스 팔마스 데 그란 카나리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Triana트리아나스페인어` 지역에는 `Casa-Museo Pérez Galdós카사-무세오 페레스 갈도스스페인어`(페레스 갈도스 생가 박물관)가 있다. 갈도스가 태어난 이 집은 1954년 그란 카나리아 섬의 정부 기관인 `cabildo카빌도스페인어`가 매입했으며, 1960년 7월 9일 작가의 딸인 마리아 페레스 갈도스 코비안에 의해 개관되었다. 박물관 방문객들은 작가가 자란 집을 둘러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와 그의 가족에게 속했던 문서, 가구, 악기, 그림, 사진 등을 전시물로 관람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은 갈도스의 유산을 보존하고 연구하며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박물관 운영진은 국제 학술대회, 컨퍼런스, 전시회를 지원하고 있으며, 출판 활동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다양한 언어로 된 갈도스 작품과 작가의 완벽한 소장본을 갖춘 도서관도 마련되어 있다.
마드리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원인 부엔 레티로 공원에는 그의 명예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은 순전히 대중의 기부금으로 조성되었으며, 그의 사망 직전인 1920년에 제막되었다. 박물관에는 호아킨 소로야가 1894년에 그린 갈도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1982년부터 발행되었던 스페인의 1,000 `1000 ESP` 지폐에도 갈도스의 초상이 사용되어 그를 기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