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메이마라키스의 생애는 그의 유년기와 교육, 그리고 정치 활동의 초기 경력으로 나눌 수 있다.
1.1. 유년기 및 교육
메이마라키스는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며, 크레타섬 혈통이다. 그의 아버지는 ERE(국민급진연합) 소속으로 이라클리오를 대표하는 그리스 의회 의원이었다.
메이마라키스는 1974년 판테이온 대학교 재학 중 신민주주의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그는 신민주주의당 청년 조직(ONNED ΟΝΝΕΔ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을 설립하는 데 일조했다.
1.2. 초기 경력
메이마라키스는 1984년 ONNED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987년 3월에는 이 조직의 제1차 총회를 이끌었다. 그는 1986년 제2차 당 대회 이래로 신민주주의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1989년(6월과 11월) 총선에서 아테네 B 지역구 신민주주의당 소속 그리스 의회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이후 1990년, 1993년, 1996년, 2000년에 재선되었다.
메이마라키스는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신민주주의당의 의회 대표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스포츠 담당 차관을 역임했다. 2001년 3월, 신민주주의당 제5차 당 대회에서 그는 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으며, 이 직책을 맡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2004년 7월 비서로 재선되었고, 2006년 2월 15일 코스타스 카라만리스의 제1차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메이마라키스는 다양한 고위 공직을 거치며 그리스 정치에 큰 기여를 했다.
2.1. 국방부 장관
메이마라키스는 2006년 2월 15일부터 2009년까지 그리스 국방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국방 정책을 수립하고 군사 개혁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2. 그리스 의회 의장
2012년 6월 29일, 그는 그리스 의회 의장이 되었고, 2015년 1월 다음 의회가 선출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의회 의장으로서 그는 의회의 의사 진행을 감독하고 입법 과정의 효율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3. 신민주주의당 임시 대표
2015년 7월,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나온 후 안토니스 사마라스가 신민주주의당 대표직에서 사임하자 메이마라키스가 임시 대표직을 인계받았다. 그는 이 자격으로 2015년 9월 20일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당을 이끌었다. 이 선거에서 신민주주의당은 시리자에 의해 9개월 만에 두 번째로 패배했다.
메이마라키스는 이에도 불구하고 신민주주의당의 득표율을 27.8%에서 28.1%로 소폭 증가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의석수는 76석에서 75석으로 줄었다. 그는 9월 선거 이후에도 임시 대표직을 계속 수행하며 연말까지 신민주주의당 대표 선거가 열릴 것이며 자신이 후보로 나설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11월 24일, 메이마라키스는 신민주주의당 의회 그룹 비서인 이오안니스 플라키오타키스를 당 부대표로 임명한 후 사임했고, 이로 인해 플라키오타키스가 새로운 임시 대표가 되었다. 그는 2015-16년 신민주주의당 대표 선거의 결선 투표에서 패배했다.
2.4. 유럽의회 의원
메이마라키스는 2019년 유럽의회 선거를 통해 유럽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는 이후 유럽의회 외교위원회와 산하 유럽의회 안보국방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2021년부터는 유럽의 미래 회의에 대한 의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중도 우파 유럽 국민당 그룹(EPP) 내에서 메이마라키스는 만프레드 베버 의장의 대리인 중 한 명이다.
3. 개인사
메이마라키스는 그리스 여배우 니차 마루다의 딸인 이오안나 콜로코타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고 있다. 그는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한다.
4. 평가 및 영향
메이마라키스는 소탈한 성격으로 평가받는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바실리스 모나스티리오티스는 그가 "광범위한 유권자층, 즉 자신을 민중의 사람으로 보는 노동계층 유권자와 치프라스에게 비수를 꽂을 수 있는 교활한 인물로 보는 전통적인 고소득 신민주주의 지지층 모두에게 어필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그가 다양한 유권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폭넓은 매력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임시 대표 시절 당의 총선 득표율을 소폭이나마 끌어올린 것은 그의 리더십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