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년
발리앙 디블랭은 이블랭 가문의 일원으로, 초기 생애부터 예루살렘 왕국의 정치적 격동에 깊이 관여하며 성장했다.
1.1. 가족과 배경
발리앙은 바리장 디블랭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위그와 보두앵이라는 두 명의 형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바리장은 자파 백국의 기사였으며, 위그 2세 드 퓌제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이블랭 영지를 수여받았다. 바리장은 부유한 라믈라 영지의 상속녀인 엘비스 드 라믈라와 결혼했다. 발리앙의 원래 이름 또한 아버지와 같은 바리장이었으나, 1175년에서 1176년경에 옛 프랑스어식인 "발리앙"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는 때때로 "젊은 발리앙" 또는 "발리앙 2세"로 불리기도 했으며, 라믈라의 발리앙 또는 나블루스의 발리앙으로도 알려졌다. 라틴어 기록에서는 발리앙, 바리산, 바리사누스, 발리아누스, 발리산, 발리사누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아랍어 문헌에서는 그를 "바르잔의 아들 발리앙"이라는 뜻의 발리앙 이븐 바르잔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156년의 헌장에서는 미성년자로, 1158년의 기록에서는 성년(일반적으로 15세)으로 언급되어 있어 대략적인 출생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1169년경 발리앙의 장남 위그가 사망하자 이블랭 성은 차남 보두앵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보두앵은 라믈라 영주 자리를 선호했기에 이블랭 성을 발리앙에게 양보했다. 이로써 발리앙은 형인 라믈라 영주 보두앵의 봉신이 되었고, 보두앵이 예루살렘 국왕의 봉신이었으므로 발리앙은 간접적으로 국왕의 부봉신이 되었다.
1.2. 초기 활동과 공직 진출
발리앙은 1158년 처음으로 헌장에 이름이 등장한 이후 공적인 삶을 시작했다. 그는 이블랭의 영주가 되면서 예루살렘 왕국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2. 십자군 활동과 정치 경력
발리앙 디블랭은 예루살렘 왕국의 격동적인 시기에 주요한 정치적, 군사적 인물로 활약했다. 그는 왕위 계승 분쟁에 깊이 개입하고 주요 전투에서 병력을 이끌며 십자군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1. 왕위 계승 분쟁과 초기 군사 활동
1174년 보두앵 4세 국왕의 섭정 자리를 두고 레몽 3세 드 트리폴리 백작과 밀레 드 플랑시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발리앙의 형 보두앵은 레몽 3세를 지지했다. 1177년, 이블랭 형제는 몽기사르 전투에 참전하여 선봉에서 무슬림 전열을 성공적으로 돌파하며 살라딘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약 500명의 성전 기사단원들이 보두앵 4세와 함께 살라딘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같은 해, 발리앙은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 국왕의 미망인이자 비잔티움 제국 황족인 마리아 콤네네와 결혼함으로써 아모리 1세의 어린 딸인 이사벨라 1세의 의붓아버지가 되었다. 이 결혼을 통해 발리앙은 마리아가 아모리와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받은 나블루스 영지를 획득했으며, 이로써 레몽 3세 다음으로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봉신이 되었다. 1179년, 발리앙의 형 보두앵이 야곱 여울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히자 발리앙은 형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나섰고, 그의 처종조부인 마누엘 1세 콤네노스 비잔티움 황제가 몸값을 지불해 주었다.
1183년, 나병으로 죽어가던 보두앵 4세의 섭정인 기 드 뤼지냥과 레몽 3세 사이에 또 다른 분쟁이 일어났다. 이블랭 형제는 다시 레몽 3세를 지지했다. 보두앵 4세는 기가 시빌라의 남편으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5세 조카인 보두앵 5세를 생전에 공동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1185년 봄, 보두앵 4세는 사망 직전 성묘 교회에서 조카 보두앵 5세에게 정식 대관식을 치러주도록 명령했다. 이때 키가 컸던 발리앙이 어린 보두앵 5세를 어깨에 태우고 행렬을 이끌었다. 이는 이사벨라의 가족을 비롯한 레몽파가 보두앵 5세의 왕위를 지지하고 시빌라 부부에게 강력히 시위하는 행위였다.
보두앵 4세가 사망하면서 보두앵 5세가 단독 국왕이 되었으나, 이듬해인 1186년 그 역시 요절했다. 발리앙과 마리아 부부는 레몽 3세의 지지를 얻어 당시 14세였던 마리아의 딸 이사벨라를 여왕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사벨라의 남편 옹프로이 4세 드 토롱이 왕관을 거부하고 기 드 뤼지냥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발리앙은 마지못해 기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그의 형 보두앵은 이를 거부하고 안티오키아로 망명했으며, 자신의 아들 토마스와 라믈라 영지를 발리앙에게 맡겼다. 이후 발리앙은 기의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1186년 말, 기의 동맹인 우트르조르당 영주 르노 드 샤티용이 무슬림 대상(商隊)을 공격하자 이집트와 다마스쿠스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레몽 3세의 영지인 티베리아스 주둔군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기는 나사렛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티베리아스를 포위할 계획이었으나, 발리앙은 이에 반대하며 기가 살라딘의 대군과 무모하게 맞서기 전에 트리폴리의 레몽에게 사절을 보내 양측이 화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187년 부활절 이후, 발리앙, 성전 기사단 총장 제라르 드 리데포르, 구호 기사단 총장 로저 드 물랭, 시돈의 르노 그라니어, 티레 대주교 요시쿠스가 트리폴리로 가서 레몽을 설득하기 위한 새로운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4월 30일, 사절단이 예루살렘을 떠날 무렵 살라딘은 이미 전쟁을 선포한 상태였다. 4월 26일, 살라딘은 카라크 성에 세 번째 공격을 감행하며 성 외곽 지역을 장악했다. 공성 장비가 없어 성 자체에는 위협을 가하지 못했지만, 주변 지역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또한 살라딘은 아들 알아프달 이븐 살라흐 앗딘에게 아크레 주변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갈릴리를 통과하는 약탈대를 이끌도록 지시했다. 이 약탈은 5월 1일로 예정되었으며, 이는 대법원이 레몽 3세와 만나기로 합의한 날짜와 일치했다. 시돈의 르노는 티베리아스로 가는 별도의 경로를 택했고, 발리앙 디블랭은 4월 30일 밤을 나블루스에서 보냈다. 군사 기사단의 단장들과 티레 대주교는 나사렛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성전 기사단의 라 페베 성으로 향했다. 5월 1일, 크레송 전투에서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은 살라딘의 아들 알아프달에게 패배했다. 발리앙은 여전히 하루 늦게 움직였으며, 사마리아에 머무르며 축일을 기념했다. 그는 라 페베 성에 도착하여 그곳이 버려진 것을 발견했고, 곧 몇 안 되는 생존자들로부터 참혹한 전투 소식을 들었다. 레몽 또한 이 소식을 듣고 티베리아스에서 사절단을 만났으며,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동의했다.
2.2. 하틴 전투와 그 여파
알아프달의 군대가 레몽 3세와의 동맹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으로 진입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레몽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기 국왕과 화해했다. 기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 세포리아에 주둔했으나, 티베리아스를 구원하기 위해 건조하고 황량한 평원을 가로질러 진군할 것을 고집했다. 십자군 병사들은 물이 부족한 상태에서 살라딘의 군대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고, 결국 7월 초 티베리아스 외곽의 하틴 뿔에서 포위당했다. 7월 4일, 하틴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십자군은 동쪽에 선봉, 중앙에 본대, 서쪽에 후위라는 세 개의 사단으로 조직되었다. 살라딘의 군대는 십자군을 대략 V자 형태로 에워쌌으며, 북동쪽에 우익, 남쪽에 본대를 배치하고 불타는 덤불로 연기 장벽을 만들었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십자군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탈수에 시달리던 보병대는 대형을 이탈하여 하틴 뿔 쪽으로 후퇴하려 했다. 보병 없이 기병만으로 남게 된 십자군 기사들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무슬림 군대와 직접 교전했다.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첫 공격은 실패했고, 레몽 백작이 이끄는 두 번째 공격은 처음에는 돌파했지만 곧 살라딘의 병력에 의해 다시 봉쇄되어 레몽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병력은 파편화되었고, 기 국왕은 하틴 남쪽 뿔에 왕실 텐트를 설치하여 집결 지점을 만들었다.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보병과 투르코폴레(십자군 경기병) 사이에서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으며, 기사들은 거의 죽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말이 죽었다.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200명이 포로로 잡혀 그들의 맹렬함 때문에 처형당했다. 포로 중에는 기 국왕과 다른 귀족 지도자들이 있었고, 레몽 백작과 몇몇 다른 이들은 탈출에 성공했다. 발리앙은 레몽, 시돈의 르노, 하이파의 파이앵과 함께 티레로 탈출한 몇 안 되는 고위 귀족 중 한 명이었다. 레몽과 르노는 곧 각자의 영지를 방어하기 위해 떠났고, 티레는 하틴 전투 직후 도착한 몬페라토의 코라도의 지휘 아래 놓였다. 발리앙은 코라도의 가장 가까운 동맹 중 한 명이 되었다. 발리앙은 티레를 떠나면서 살라딘에게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트리폴리로 호위하기 위해 전선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살라딘은 발리앙이 예루살렘을 떠나고 다시는 자신에게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는 조건으로 이를 허락했다.
2.3. 예루살렘 방어와 항복

발리앙과 그의 소수의 기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도시 주민들은 그들에게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는 발리앙이 이교도에게 한 맹세보다 기독교 세계의 더 큰 필요성이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살라딘에 대한 그의 맹세를 면제해 주었다. 발리앙은 도시 방어를 지휘하도록 선임되었지만, 그곳에는 기사가 14명도 채 되지 않았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단 2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에 발리앙은 자유민들 중에서 60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즉석에서 기사로 서임했다. 시빌라 여왕은 방어에 거의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도시의 군민들은 발리앙을 주군으로 따르며 충성을 맹세했다. 발리앙은 헤라클리우스와 함께 식량과 자금을 비축하며 피할 수 없는 포위전에 대비했다. 살라딘은 이블랭, 나블루스, 라믈라, 아스칼론을 포함한 왕국의 거의 모든 영토를 점령한 후 1187년 9월 20일 예루살렘 공성전을 시작했다. 살라딘은 발리앙이 맹세를 어긴 것에 대해 악감정을 품지 않았으며, 마리아와 그들의 자녀들을 트리폴리까지 호위하도록 조치했다. 이븐 알아티르가 기록했듯이,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최고위 귀족이었던 발리앙은 무슬림들에게 "왕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인물로 여겨졌다.
살라딘은 성벽 일부를 허물었지만 도시 내부로 진입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발리앙은 살라딘과 만나 도시 방어자들이 무력으로 도시가 점령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서로를 죽이고 도시를 파괴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협상 끝에 도시는 평화롭게 넘겨주는 대신, 살라딘은 7천 명의 남성을 30,000 베잔트에 석방하고, 여성 2명 또는 어린이 10명은 남성 1명과 같은 가격으로 석방하기로 합의했다. 발리앙은 10월 2일 다윗의 탑(성채)의 열쇠를 살라딘에게 넘겼다. 살라딘은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와 같은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여 떠나는 것을 허용했다. 발리앙과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는 몸값을 내지 못한 나머지 프랑크인 시민들을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고 제안했지만 살라딘은 이를 거절했다. 몸값을 지불한 주민들은 세 개의 열로 나뉘어 도시를 떠났다. 발리앙과 헤라클리우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열을 이끌었으며, 이는 대략 11월 20일경에 도시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발리앙은 트리폴리 백국으로 가서 아내와 자녀들과 합류했다.
2.4. 제3차 십자군 참여와 후기 외교 활동
예루살렘의 함락과 1190년 아크레 공방전 도중 시빌라 여왕의 사망은 왕국의 왕위 계승 분쟁을 야기했다. 발리앙의 의붓딸 이사벨라가 이제 정당한 여왕이었지만, 기 국왕은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사벨라의 남편 옹프리도 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이사벨라가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려면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하고 군사적으로 유능한 남편이 필요했는데, 명백한 후보는 보두앵 5세의 친삼촌이기도 한 몬페라토의 코라도였다. 발리앙과 마리아는 이사벨라를 붙잡아 이혼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이전에도 아모리 1세와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결혼이 무효화된 전례가 있었고, 시빌라와 기를 이혼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실패했었다.
이사벨라의 결혼은 교황 특사인 피사 대주교 우발도 란프란치와 보베 주교 필리프 드 드뢰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이어서 보베 주교는 이사벨라를 코라도와 결혼시켰는데, 이는 코라도의 형이 이사벨라의 이복언니(시빌라)와 결혼했었고, 코라도가 비잔티움 출신 아내와 완전히 이혼했는지 불분명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왕위 계승 분쟁은 제3차 십자군으로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도착하면서 더욱 장기화되었다. 리처드는 자신의 푸아투 봉신인 기를 지지했고, 필리프는 자신의 아버지의 사촌인 코라도를 지지했다.
이사벨라의 이혼과 코라도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 발리앙과 마리아의 역할은 리처드와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극심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십자군에 대한 시적 기록을 남긴 암브루아즈는 발리앙을 "도깨비보다 더 거짓된 자"라고 부르며 "개 사냥처럼 쫓겨나야 할 자"라고 비난했다. 익명의 순례자들의 여정과 리처드 국왕의 위업의 저자는 발리앙이 코라도 주변의 "완전한 불의의 협의체"의 일원이며 코라도의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하며, 마리아와 발리앙 부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요람에서부터 그리스의 더러움에 물든 그녀는 자신과 같은 도덕성을 가진 남편을 두었다: 그는 잔인했고, 그녀는 신앙심이 없었으며; 그는 변덕스러웠고, 그녀는 유연했으며; 그는 불신했고, 그녀는 사기성이 있었다.
1192년 4월 28일, 코라도가 왕으로 선출된 지 불과 며칠 만에 티레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자 두 명 중 한 명은 코라도를 추적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티레에 있는 발리앙의 집에 하인으로 위장하여 잠입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한 명은 시돈의 르노나 코라도 자신의 집에 유사하게 침투했을 수도 있다. 리처드는 이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널리 받았다. 이사벨라는 첫 아이인 몬페라토의 마리아를 임신 중이었고, 불과 일주일 후 샹파뉴의 앙리 2세와 결혼했다.
발리앙은 앙리의 고문이 되었고, 그 해 말(티베리아스의 기욤과 함께) 자파 전투에서 리처드 군대의 후위를 지휘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와 살라딘 사이의 자파 조약 협상을 돕는 데 기여하며 사실상 십자군을 종결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이블랭은 살라딘의 통제 아래 남았지만, 십자군 기간 동안 재정복된 해안가의 많은 지역은 기독교인의 손에 남아있게 되었다. 리처드가 떠난 후, 살라딘은 발리앙에게 아크레 외곽의 카이몽 성과 그 주변의 다섯 곳을 보상으로 주었다.
3. 개인 생활과 가족
발리앙 디블랭은 마리아 콤네네와의 결혼을 통해 2남 2녀를 두었으며, 그의 자녀들은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엘비스 디블랭: 시돈의 르노 그라니어와 결혼했으며, 이후 기 드 몽포르와 재혼했다. 그녀의 아들 또한 발리앙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 장 디블랭: 베이루트 영주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사법관을 역임했으며, 조카인 몬페라토의 마리아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으로 활동했다. 그는 헬비스 드 네팽과 결혼한 후, 아르수프의 멜리상드와 재혼했다.
- 마르가리타: 트리폴리 레몽 3세의 의붓아들이자 티베리아스의 위그 2세와 결혼했으며, 이후 카이사레아의 발터 3세와 재혼했다.
- 필리프 디블랭: 키프로스의 섭정을 지냈으며, 알리스 드 몽벨리아르와 결혼하여 자파와 아스칼론 백작 장 디블랭을 낳았다.
4. 사망
발리앙 디블랭은 1193년, 5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유산과 평가
발리앙 디블랭은 예루살렘 왕국의 위기 속에서 그의 행동이 당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적 기록과 대중문화 속에서 다양하게 조명되고 있다.
5.1. 역사적 평가
발리앙 디블랭은 하틴 전투 이후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의 방어를 주도하고, 살라딘과의 협상을 통해 기독교인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낸 현명하고 실용적인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당시 발생했던 대학살을 방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인도주의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왕위 계승 분쟁의 한가운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제3차 십자군의 종결을 이끈 자파 조약 협상에도 참여하는 등 왕국 정치의 주요 인물로 인정받는다. 그의 능력과 외교적 수완은 이슬람 측 기록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5.2. 비판과 논란
발리앙의 행적 중에는 비판적 시각이나 논란을 야기한 사건들도 있었다. 특히 이사벨라 1세의 이혼과 몬페라토의 코라도와의 재혼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그와 마리아의 역할은 리처드 1세를 비롯한 일부 십자군 지도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십자군 원정을 시로 기록한 암브루아즈는 발리앙을 "도깨비보다 더 거짓된 자"라고 부르며 "개 사냥처럼 쫓겨나야 할 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익명의 순례자들의 여정과 리처드 국왕의 위업의 저자는 발리앙이 코라도 주변의 "완전한 불의의 협의체"의 일원이었으며, 코라도의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하며 발리앙과 마리아 부부를 "요람에서부터 그리스의 더러움에 물들었으며, 그 남편은 잔인하고 불신했고, 그녀는 신앙심이 없었고 사기성이 있었다"고 맹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주로 왕위 계승 문제에서 발리앙이 필리프 2세와 코라도의 편에 섰던 정치적 대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5.3. 후대에 미친 영향과 기록

발리앙의 종자였던 에르눌은 티레의 기욤의 라틴어 연대기를 옛 프랑스어로 이어 쓴 속편의 일부를 기록했다. 이 연대기 가족은 현재 에르눌의 이름으로 자주 불리지만, 그의 기록은 주로 1186년에서 1188년 사이의 부분에 한정되며, 이블랭 가문에 대해 강한 호의적인 편향을 보이고 있다. 13세기에는 "발리앙"이라는 이름이 이블랭 가문 내에서 흔한 이름이 되었다. 예를 들어, 발리앙의 손자인 베이루트의 발리앙은 1236년에 그의 아버지 장을 이어 베이루트 영주가 되었다. 또한 베이루트의 발리앙의 형제인 장 역시 발리앙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두었으며, 이 발리앙은 아르수프의 영주이자 안티오키아의 플레장스와 결혼했다. 발리앙의 딸 엘비스와 시돈의 르노 사이에서도 아들 발리앙이 태어나는 등, 이 이름은 시돈의 그레니에 가문으로도 이어졌다.
5.4. 대중문화 속의 발리앙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영국 배우 올랜도 블룸이 연기한 발리앙은 고도로 각색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 발리앙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그가 프랑스의 평범한 대장장이 출신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 속 발리앙은 예루살렘 왕국의 유서 깊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또한 영화는 그의 삶을 극적으로 재구성하여 일부 사건의 순서나 중요성을 실제와 다르게 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