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1781년 2월 14일 누에바 갈리시아의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과 교육은 그가 멕시코의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 되는 데 기반이 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1781년 2월 14일 할리스코의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같은 도시의 왕립 과달라하라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학업 중 프랑스어를 익혔고, 당시 누에바 에스파냐 전역에 비밀리에 유포되던 계몽주의 사상을 접하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그의 졸업 논문은 계몽주의 작가들의 강한 영향을 받아 멕시코 종교재판소의 주목을 받았으나, 법적 조치 없이 과달라하라에서 성공적인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1817년 10월 17일, 그는 아과스칼리엔테스에서 이사벨 로페스와 결혼했다.
1.2. 초기 활동
1821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지도 아래 이괄라 계획을 통해 멕시코는 독립을 쟁취하고 군주국으로 출범했다. 헌법 제정을 위한 의회가 소집되었고,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 의회에 선출되었다. 스페인 왕실의 왕위 제안이 거부되자, 이투르비데의 지지자들은 의회에 그를 황제로 선출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고메스 파리아스 또한 이투르비데를 지지했으며, 의회가 이투르비데를 황제로 선출할 권리와 합법성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투르비데는 이후 제1차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자유주의자였던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투르비데가 입헌 군주가 되리라 기대했지만, 이투르비데는 점차 독재적인 성향을 보이며 자신을 의회보다 우위에 두었고, 결국 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투르비데에게 등을 돌렸다.
1823년 멕시코 제국이 몰락한 후, 고메스 파리아스는 결국 초대 멕시코 대통령으로 취임한 과달루페 빅토리아의 성공적인 대통령 출마를 지지했다. 자유주의자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 재임 시기에 로렌소 데 사발라 재무부 장관이 멕시코주 주지사를 겸임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임하자, 고메스 파리아스는 후임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832년 보수주의자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대통령에 대항하여 산타 안나가 베라크루스 계획을 선포했을 때, 고메스 파리아스는 사카테카스의 가르시아 주지사가 반군 편에 서도록 설득하는 데 일조했다. 이 반란은 그 해 대부분 동안 격렬하게 이어졌고 결국 대통령이 전복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부스타만테의 몰락 이후, 고메스 파리아스는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의 대통령 출마를 지지했다. 고메스 페드라사는 다음 정기 선거가 있는 3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도록 초청되었고, 그는 고메스 파리아스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2. 이념 및 철학
고메스 파리아스는 멕시코의 주요 자유주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그의 이념은 멕시코의 근대 국가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자유주의와 개혁 의제
고메스 파리아스의 핵심 이념은 자유주의였으며, 이는 그의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추진된 급진적인 개혁 의제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독립 초기의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특히 그는 멕시코 가톨릭 교회와 군대의 특권과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교회와 군대에 부여된 특별한 사법권인 '푸에로스(fueros)'를 폐지하여, 이들이 별도의 법정에서 재판받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그는 교육을 성직자의 손에서 벗어나 세속화하고, 교회의 경제적 권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 이러한 개혁은 멕시코를 보다 세속적이고 현대적인 국가로 만들려는 그의 비전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개혁을 변방 지역인 알타 캘리포니아까지 확대하려 했으며, 프란치스코회 선교를 해체하고 히하르-파드레스 식민지를 조직하여 비선교 활동을 강화하고 포트 로스의 러시아 식민지 야망으로부터 알타 캘리포니아를 보호하고자 했다.
3. 첫 번째 대통령 임기 (1833-1834)
1833년 3월 선거에서 고메스 파리아스는 대통령으로, 산타 안나는 부통령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은 직위를 번갈아 가며 수행했는데, 고메스 페드라사의 법적 임기가 4월 1일에 끝나자, 산타 안나가 수도에 부재중이었으므로 실제 권력은 고메스 파리아스에게 이양되었다. 이는 산타 안나가 고메스 파리아스가 가톨릭 교회와 군대에 대해 의도한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여론을 파악하려는 계략이었다는 추측도 있다.
3.1. 반성직 캠페인

고메스 파리아스가 집권하자 언론은 점점 더 반성직자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은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위선자로 비난받았고, 성경은 무지한 시대의 불합리와 허위로 가득 차 있다고 공격받았다. 교황의 권위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멕시코의 독립이 스페인뿐만 아니라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이기도 하다고 선언하며, 성직자들이 외세의 지배를 받는다고 공격했다. 가톨릭 사제들은 인신공양을 받던 우이칠로포치틀리의 사제, 바리새인, 귀족으로 모욕받았다. 반성직자 작가들은 자신들의 대의를 위해 프랑스 혁명기의 국민제헌의회 연설을 인용하기도 했다.
사제들은 정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 장관은 교황 교서나 다른 교황 선언문이 정부의 승인 없이는 멕시코에서 출판될 수 없다고 명령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1833년 부활절 주간에 의회가 휴회하지 않아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으나,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로렌소 데 사발라가 통치하던 멕시코주는 십일조 납부 의무를 법적으로 해제했다. 베라크루스 의회와 다른 주 입법부들은 종교 공동체의 재산을 압류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베라크루스주는 모든 수도원을 폐쇄했다. 이는 정부가 모든 종교를 탄압하려 한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고메스 파리아스는 그러한 의도가 없음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발표해야 했다.
1833년 10월 27일, 십일조 납부 의무를 전국적으로 해제하는 조치가 통과되었다. 하원 위원회는 모든 교회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권고했으나, 이는 법으로 통과되지 않았다. 1833년 11월 6일, 수도회 서약 이행 의무가 해제되었다. 1833년 12월 17일, 멕시코 정부에 교회 위계직 임명 권한, 즉 이른바 '파트로네토(patronato)'를 부여하는 조치가 통과되었다. 정부 승인 없이 이루어진 기존의 모든 임명은 무효화되었다. 개혁가들은 십일조 납부 의무를 없앰으로써 교회의 재정난을 야기할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십일조를 납부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수도승과 수녀들은 법적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공동체에 남았다.
10월에는 성직자들이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고, 교회에서 운영하던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가 폐쇄되었다. 대학의 예배당은 양조장으로 바뀌었다. 1834년에는 반성직자 캠페인의 강도가 최고조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종교 축제와 관련 행사가 억압되었고, 성직자들은 정부 허가 없이는 종교 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도원과 교회가 압류되었고, 몇몇 교회는 극장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3.2. 법령 및 반발


고메스 파리아스가 처음 집권했을 때,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의 모든 전직 장관들은 숨었으며, 전 재무부 장관 Rafael Mangino y Mendívil라파엘 망기노 이 멘디빌스페인어만이 예외였다. 부스타만테 행정부의 전직 구성원들을 심판하기 위한 재판소가 구성되었다. 1833년 6월 23일, 전국적으로 봉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의회는 이른바 '레히 델 카소(Ley del Caso)'라는 법을 통과시켜 전 대통령 부스타만테, 호세 마리아노 미첼레나, Zenon Fernandez세논 페르난데스스페인어, 프란시스코 몰리노스 델 캄포, 호세 마리아 구티에레스 데 에스트라다, Miguel Santa María미겔 산타 마리아스페인어 등 정부의 적으로 간주되는 51명을 체포하고 6년간 추방하는 것을 승인했다. 산타 마리아는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로 감옥을 채웠다고 비판하는 소책자를 발행했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반대자들에게 더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싶어 했으며 정치적 범죄에 대한 사형에도 반대했기에 '레히 델 카소'의 통과에 반대했다.
정부는 또한 원치 않는 장군들을 군대에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 조치는 고메스 페드라자 시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임의적인 것으로 비난받으며 군대 내에서 정부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3.3. 실패한 반란 및 축출
5월 26일, 모렐리아에서 이그나시오 에스칼라다 대령이 정부에 반대하며 산타 안나에게 고메스 파리아스를 전복시키는 데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산타 안나는 이에 응하지 않고 전국에서 일어나는 다른 봉기들에 맞서 무장했다. 에스칼라다는 발렌시아 장군에게 패배했다.
이 시점에서 6월 6일 산타 안나 자신의 병사들이 슈치에서 그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는 야우테펙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독재자로 선포하고 반군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반란은 수도로 확산되어 6월 7일 병사들과 경찰이 반란을 일으켜 멕시코 국립 궁전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패배했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6천 명의 병력을 조직하고 수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산타 안나의 탈출을 돕는 이들에게 보상을 약속했다. 한편 산타 안나는 수도에서의 봉기 실패를 감지한 후 반군으로부터 탈출하여 정부로 돌아왔다. 7월 10일, 산타 안나는 2천4백 명의 병력과 6문의 포를 이끌고 수도를 떠났다. 그는 처음에는 반군에 합류하도록 산타 안나를 초청했던 반군 장군 마리아노 아리스타를 과나후아토로 몰아넣었고, 아리스타는 10월 8일 항복했다. 이로써 잠시 동안 나라는 평온을 되찾았다.
산타 안나는 이미 고메스 파리아스를 전복시키는 데 동참하라는 여러 제안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1834년, 반성직자 캠페인에 대한 반발이 증가하고 망가 델 클라보에 있는 그의 사유지에 고메스 파리아스와 의회를 제지해 달라는 전국 각지의 탄원이 쇄도하며 고메스 파리아스의 진보적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심화되자, 산타 안나는 마침내 4월에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의회는 해산되었고, 파트로네토는 무효화되었으며, 숨어 있던 주교들은 다시 교구로 돌아왔다. 부스타만테 행정부의 전 구성원들을 심판하던 재판소는 폐지되었고, 멕시코 대학교는 복원되었으며, 추방되었던 이들은 귀국이 허용되었다.
4. 대통령직 사이의 시기
첫 번째 대통령 임기 이후 고메스 파리아스는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망명 생활을 했으나, 곧 멕시코로 복귀하여 연방주의 체제 복원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4.1. 망명 및 복귀
고메스 파리아스는 멕시코를 떠나 자신의 저축으로 생활하던 뉴올리언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는 1838년에 멕시코로 돌아왔고, 베라크루스에서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가 수도에 입성했을 때, 일부 시민들은 옛 대통령에게 환호를 보냈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법적으로 멕시코에 체류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그가 받은 환호에 대해 알게 된 내각은 그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자신이 1832년에 전복시키는 데 일조했던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대통령과 만나 정부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를 선동 혐의로 체포했고, 고메스 파리아스는 판사에게 자신의 집에서 정치적 모임을 가졌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연방주의에 동정적이었던 부스타만테의 단기 내각 중 하나에 의해 곧 석방되었다.
4.2. 1840년 연방주의 혁명

한편, 1838년 이미 부스타만테를 전복시키려 했던 연방주의 장군 호세 데 우레아에 의해 음모가 조직되고 있었다. 그는 투옥되었지만, 연방주의 동료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1840년 7월 15일 감옥에서 탈출했다. 우레아는 수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국립 궁전에 침입하여 잠자는 궁전 경비대를 몰래 지나치고 부스타만테의 개인 경호원들을 제압한 뒤, 침실에 있던 대통령을 놀라게 했다. 부스타만테가 칼을 잡으려 하자 우레아가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대통령은 모욕적인 말로 응수했다. 병사들은 부스타만테에게 총을 겨눴지만, 장교가 부스타만테가 한때 이투르비데의 부관이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제지했다. 대통령은 그의 신변이 존중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제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한편, 알몬테 전쟁 장관은 탈출하여 구출 작전을 조직했다.
반군은 이제 혁명의 지휘권을 고메스 파리아스에게 제안했고, 그는 이를 수락했다. 정부군과 연방주의군은 수도로 집결했다. 연방주의자들은 국립 궁전 주변 전체를 점령했고, 정부군은 공격을 위한 진지를 구축했다. 오후 내내 포격을 포함한 소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한 포탄이 포로가 된 대통령이 저녁 식사를 하던 식당을 강타하여 식탁을 파편으로 뒤덮었다.
갈등은 교착 상태에 이르는 듯했고, 대통령은 협상을 시도하기 위해 석방되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수도는 12일간의 전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재산 피해, 민간인 사망, 그리고 도시를 떠나는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다. 이제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의 지휘 아래 정부 증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도를 파괴할 장기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휴전과 반군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지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5. 멕시코-미국 전쟁 및 두 번째 대통령 임기 (1846-1847)
멕시코-미국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고메스 파리아스는 다시 한번 멕시코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자신의 오랜 개혁 의제를 재추진하려 시도했다.
5.1. 망명 후 복귀와 재집권
고메스 파리아스는 숨어 지내다가 9월 2일 베라크루스로 떠났다. 그는 뉴욕으로 갔다가, 당시 독립을 선언하고 연방주의 체제 복귀를 주장하던 유카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살다가 뉴올리언스로 다시 이주했으며, 산타 안나의 전복 이후인 1845년에 마침내 멕시코로 돌아왔다.
그는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대통령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고, 텍사스 재탈환 노력을 중단하려는 에레라의 정책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텍사스에 대한 에레라의 화해 노력 때문에 에레라를 전복시킨 마리아노 파레데스 행정부의 어떠한 역할도 거부했다.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자,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러한 위기 동안 멕시코를 단결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옛 적 산타 안나를 다시 초청하는 것을 지지했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호세 마리아노 살라스의 짧은 대통령 임기 동안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국내 관세 폐지, 권위주의적 법률 개혁, 그리고 모든 멕시코인의 단결을 기반으로 한 전쟁 지속이라는 조건으로 직책을 수락했다. 그는 한 달 남짓 재무부에 머물렀는데, 이 기간 동안 산타 안나가 그의 마차에 고메스 파리아스와 함께 1824년 멕시코 헌법을 들고 수도에 재입성했다.
5.2. 교회 재산 국유화


정부는 전쟁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재무부의 부패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재산 소유주 감사 제안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 1847년 1월 7일, 재무부 위원회 5명 중 4명이 서명한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는데, 이는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고 매각하여 교회로부터 1500.00 만 MXN를 압류하는 것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고메스 파리아스의 반대자들이 그가 1833년의 반성직자 캠페인을 되살리려 한다고 우려하게 만들었다.
이 법령은 의회 의장 페드로 마리아 데 아나야에 의해 서명되었고, 고메스 파리아스는 재무장관 수비에타의 지지를 받아 이를 승인했다. 수비에타는 이 조치의 효력을 방해할 수 있는 사기나 재산 은닉을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교회 토지의 세입자들은 교회 대신 정부 요원에게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을 경우 벌금을 물도록 했다. 외교부 장관 호세 페르난도 라미레스는 교회 내에서의 정치적 선동에 대비하여 관련 인디언 법률을 적용할 것을 권고했다. 전쟁 장관 발렌틴 카날리소는 공공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해 최대한 엄격하게 법을 집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 법령에 대한 지역적 반대는 더욱 두드러졌다. 케레타로, 푸에블라, 과나후아토 주의회는 의회에 이 법령을 무효화해 줄 것을 청원했고, 두랑고 주는 이를 집행하기를 거부했으며, 케레타로 주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한 대안 계획을 제안했다. 교회 토지에 거주하는 세입자들도 이 법령의 집행에 저항했다. 자유주의 신문 El Monitor Republicano엘 모니토르 레푸블리카노스페인어는 모든 가능한 자금 조달 옵션 중에서 정부가 전쟁 중에 여론을 살피지 않고 교회 토지를 국유화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고메스 파리아스가 1833년에 교회 토지 국유화를 시도했을 때 자유주의 정부의 전복으로 끝났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
외교부 장관 라미레스는 내각과의 충돌, 특히 교회 토지 구매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은 후 사임했다. 1월 26일, 고메스 파리아스 대통령은 교회 토지 판매를 담당하는 위원회를 지명했다. 법률 비서관인 쿠에바스와 멘데스는 참여를 원치 않아 벌금을 물었다. 전반적인 부패를 줄이기 위해 재무부를 감사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관련 공무원들은 교회 토지 판매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4일마다 제출하고 지연 요인을 설명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수도에서는 1월 15일부터 시위가 있었으나, 정부는 교회 토지 국유화 정책을 고집스럽게 추진했다. 2월 21일에는 오아하카 주둔군이 정부에 반대하며 봉기했다. 마사틀란도 뒤를 이었고, 고메스 파리아스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때 반란이 있었던 것처럼, 반군들은 고메스 파리아스와 권력을 공유하던 산타 안나에게 정부를 장악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국유화 법에 대한 평화적 반대는 계속되었다. 자유주의 하원 의원 마리아노 오테로는 이 조치에 항의했고, 새 재무장관 호세 루이스 우이시도 서명을 거부했다.
5.3. 폴코스 혁명과 축출
수도의 새로 조직된 국가방위군(내셔널 가드) 대원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것을 감지한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이들을 정부에 위협이 되지 않을 곳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그는 국립 궁전 옆에 위치한 대학교에서 인디펜던시아 대대(Independence Battalion)를 이동시킬 계획이었다. 2월 24일, 그는 자신의 아들이 이끄는 병력을 보내 임시 병영에 있던 인디펜던시아 대대를 축출했다. 이 대대는 중산층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병대였으며, 이들의 도시 축출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협했다. 이는 항의와 분노를 불러왔고, 이어서 인디펜던시아 대대 일부 대원들의 체포로 이어졌다.
2월 27일, 여러 국가방위군 대대가 정부에 반대하며 봉기를 선포했다. 이들은 전쟁 노력에 국가적 합의를 통해 군 자금을 조달하는 대신, 분열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정부를 강력히 비난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폴코스 혁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수도 전역에 주둔하던 민병대를 구성하는 젊은 중산층 남성들이 폴카 춤을 즐겨 추었기 때문이었다. 이 반군에는 이미 마리아노 파레데스 대통령을 전복시키는 데 역할을 했던 호세 마리아노 살라스 장군도 합류했다. 반군의 수장인 Matías de la Peña Barragán마티아스 데 라 페냐 바라간스페인어 장군은 2월 28일 발렌틴 카날리소와 만나 협상을 벌였는데, 페냐는 고메스 파리아스의 해임을 주장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반란은 계속되었다.
한편, 2월 22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부에나 비스타 전투에서 산타 안나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도착했지만, 실제로는 무승부였다. 산타 안나는 윈필드 스콧의 군대가 베라크루스에 막 상륙한 상황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멕시코시티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앙고스투라에서 산 루이스 포토시로 향하던 마테우알라 마을에서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정부에 대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3월 10일 산 루이스 포토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고메스 파리아스와 페냐 바라간에게 각각 서한을 보내 양측에 적대 행위를 중단할 것을 명령했고, 양측은 산타 안나의 도착과 중재를 기다리며 이를 이행했다. 수도로 향하던 중 그는 자신들의 대의를 지지해 달라는 갈등 양측의 대표들을 만났다. 3월 21일, Mariano Otero마리아노 오테로스페인어, 호세 마리아 라프라구아 등 헌법 의회 대표들은 산타 안나에게 대통령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계속해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대표들을 만났고, 부에나 비스타에서의 '승리'에 대한 축하를 받았다. Ignacio Trigueros이그나시오 트리게로스스페인어는 연방 지구의 새 주지사로, 페드로 마리아 데 아나야는 새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사임했고, 반란은 끝났으며, 병력은 각자의 주둔지로 돌아갔고, 대통령직은 산타 안나에게 넘어갔다.
6. 말년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사임했지만 정치 활동을 계속하며 국회의원으로 재직했고, 미국과의 협상을 원하는 세력에 맞서 싸웠다.
1850년, 그는 엘 트리부노(El Tribuno) 신문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멕시코시티 시의회 선거에서도 자유주의 후보였다. 그는 옛 동료이자 적이었던 산타 안나가 1852년에 독재를 재확립하는 것을 목격했지만, 1855년 자유주의 아유틀라 계획의 승리를 통해 산타 안나가 실각하는 것도 지켜보았다. 아유틀라 계획이 승리하자 그는 쿠에르나바카로 가서 1855년 10월 4일 도시 극장에 설치된 대표자 회의에 참여했다. 그는 회의의 의장으로 지명되었으며, 부의장으로는 급진주의자 멜초르 오캄포가, 비서 중 한 명으로는 훗날 멕시코 대통령이 될 베니토 후아레스가 선출되었다. 후안 알바레스 대통령 재임 시기에는 우정국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할리스코 대표로서 그는 1857년 헌법을 초안한 제헌의회의 일원이었으며, 이 헌법에는 그가 1833년부터 옹호해 온 그의 자유주의 이상과 반성직자 개혁이 반영되었다. 1857년 2월 5일, 그는 새로운 헌법에 충성을 맹세한 첫 번째 대표였다.
고메스 파리아스는 1858년 7월 5일, 개혁 전쟁이 시작된 지 몇 달 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미국 공사 존 포사이스 주니어가 참석했으며, 고메스 파리아스는 믹스코악에 묻혔다.
7. 평가 및 영향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는 멕시코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개혁은 멕시코 사회에 장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7.1. 긍정적 평가
고메스 파리아스는 멕시코 자유주의 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민주주의 발전, 사회 정의 증진, 그리고 세속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반성직자 개혁은 멕시코의 교회-국가 관계를 재정립하고, 교회의 과도한 특권과 재정적 권력을 제한하여 근대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초석을 놓았다. 군대 개혁 시도 또한 국가 권력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비록 그의 재임 중 추진된 정책들이 많은 반발을 샀지만, 그가 추구했던 자유주의적 이상과 개혁 정신은 1857년 멕시코 헌법에 반영되어 라 레포르마 시기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적 기여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7.2. 비판 및 논란
고메스 파리아스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 특히 반성직자 정책과 정부 반대자들을 탄압했던 '레히 델 카소(Ley del Caso)'와 같은 조치들은 많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정책은 당시 보수 세력과 카톨릭 교회의 격렬한 저항을 초래했으며, 이는 여러 차례의 반란과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레히 델 카소'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추방하는 조치로, 고메스 파리아스 본인은 사형에 반대하고 더 온건한 접근을 원했지만, 이 법령은 그의 행정부의 강압적인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와의 복잡한 관계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산타 안나는 고메스 파리아스와 함께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급진적 개혁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이용하여 두 차례나 그를 축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고메스 파리아스의 정치적 입지가 얼마나 취약했으며, 그의 개혁이 사회적 합의를 얻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 시도는 멕시코의 근대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진통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