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대학 경력
바이슨 델리의 출생 배경, 가족 관계, 그리고 학창 시절 농구 경력이 메릴랜드 대학교와 애리조나 대학교에서의 대학 농구 활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룬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윌리엄스는 1969년 4월 6일 부활절 일요일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수 유진 윌리엄스 주니어와 패트리샤 필립스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는 나중에 이혼했고, 어머니 패트리샤 필립스는 재혼하여 브라이언이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프레즈노에서 두 아들을 키웠다. 윌리엄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혈통이었으며, 체로키족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도 가지고 있었다.
1.2. 학창 시절 및 대학 농구
고등학교 시절, 그는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비숍 고먼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키가 급격히 자라면서 농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평균 17.3득점, 12.7리바운드, 2.1어시스트, 2.5스틸, 9.1블록을 기록했으며, 야투 성공률은 57.7%에 달했다. 졸업반 때는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의 세인트 모니카 가톨릭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으며, 그의 등번호는 이 학교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육상 선수로도 활동했다.
대학 농구 경력은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시작하여 1년간 활약한 뒤 애리조나 대학교로 편입하여 2년간 더 뛰었다. 1987년에는 FIBA U19 월드 챔피언십에서 미국 대표팀 소속으로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2. 프로 농구 경력
바이슨 델리의 NBA 입문 과정과 초기 활동, 시카고 불스에서의 챔피언십 우승과 디트로이트 피스턴스 활동, 그리고 개인적인 이름 변경에 대해 상세히 다룬다.
2.1. NBA 입문 및 초기 활동
애리조나 대학교에서 두 시즌을 보낸 후, 윌리엄스는 1991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0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되어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올랜도에서는 두 시즌 동안 제한적인 출전 시간을 기록했다.
이후 덴버 너기츠로 이적하여 두 시즌을 뛰었다. 1993-94 NBA 시즌에는 개인 최다인 80경기에 출전하여 경기당 평균 8.0득점을 기록했다. 그 다음 해에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서 한 시즌을 뛰며 출전 시간이 늘어나 경기당 평균 15.8득점을 올렸다.
2.2. 시카고 불스 우승 및 디트로이트 피스턴스 활동
계약 분쟁과 높은 몸값 요구로 인해 1996-97 NBA 시즌 초반에는 팀을 찾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즌을 결장했다. 그러나 시즌 종료 9경기 전 시카고 불스와 계약을 맺었고, 불스의 5번째 NBA 챔피언십 우승에 중요한 백업 선수로 기여했다. 윌리엄스는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에서 두 시즌을 보내며 경력을 마무리했다. 1997-98 NBA 시즌에는 개인 최고 기록인 경기당 평균 16.2득점과 8.9리바운드를 달성했다. 그의 NBA 통산 기록은 4,536득점(평균 11.0점), 2,564리바운드(평균 6.2개), 355블록(평균 0.9개)이다.
2.3. 이름 변경
1998년, 그는 자신의 미국의 원주민 (체로키족)과 아프리카 혈통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브라이언 윌리엄스에서 바이슨 델리로 변경했으며, 마지막 시즌을 그 이름으로 뛰었다.
3. 은퇴
델리는 1999-2000 NBA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30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NBA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그는 전성기에 있었으며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하지만 구단과의 관계가 틀어졌고, 트레이드되는 대신 계약에 남아있는 5년과 3645.00 만 USD의 잔여 연봉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농구에 대해 특별한 열정을 가진 적이 없었으며, 이미 충분한 돈을 벌었기 때문에 프로 선수 생활에서 벗어나 여행과 모험을 즐기기 위해 은퇴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4. 개인 생활
델리는 선수 생활 중 가수 마돈나와 교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색소폰, 바이올린, 트럼펫을 연주했으며, 모험 여행을 즐기고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 은퇴 후에는 레바논, 지중해, 오스트레일리아 오지를 오랫동안 여행했으며, 이후 항해술을 배워 쌍동선을 구입했다.
5. 실종 및 사망 사건
바이슨 델리의 실종 경위,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그의 형 마일스 다보드의 연루 정황, 그리고 다보드의 사망으로 사건이 종결되기까지의 전말을 다룬다.
5.1. 실종 경위
2002년 7월 6일, 델리는 여자친구 세레나 칼란, 그의 형 마일스 다보드(본명 케빈 윌리엄스), 선장 베르트랑 살도와 함께 자신의 쌍동선 '후쿠나 마타타'(Hukuna Matata후쿠나 마타타영어, 스와힐리어 '하쿠나 마타타'의 오타)를 타고 타히티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이 항해에서 마일스 다보드를 제외한 다른 동승자들의 마지막 소식은 7월 8일 마지막 위성 전화 통화였다. 델리와 칼란은 이전에는 은행과 가족들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7월 20일, 마일스 다보드는 보트 홀로 타히티로 돌아왔다.
5.2. 수사 과정 및 마일스 다보드의 연루
2002년 9월 6일, 경찰은 델리의 가족과 친구들이 조직한 함정 수사를 통해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다보드를 구금했다. 다보드는 델리의 서명을 위조하여 우편함을 열고, 델리의 여권을 신분증으로 사용하여 15.20 만 USD 상당의 금괴를 구입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멕시코 경찰은 다보드가 멕시코 티후아나의 한 호텔에 머물렀음을 확인했다. 그로부터 이틀 전, 타히티에 다른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던 '후쿠나 마타타'호는 타히티 해안에서 발견되었는데, 배의 이름판이 제거되었고 일부 총알 자국으로 추정되는 구멍들이 패치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 다보드는 어머니 패트리샤 필립스에게 전화하여 자신은 델리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으며 감옥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FBI와 프랑스 당국이 수사에 착수했으며, 다보드가 시신을 무겁게 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200 USD 상당의 추를 구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사 당국은 델리, 칼란, 살도가 다보드에게 살해된 후 바다에 던져진 것으로 결론 내렸다. 발견된 추와 다른 증거들은 다보드가 살인을 계획했음을 시사했으며, 시신이 태평양 한가운데에 버려졌기 때문에 이들을 찾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되었다. 형제는 평소에도 자주 다투는 사이였으며, 이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승무원이 항해 도중 하선하기도 했다.
5.3. 마일스 다보드의 죽음과 사건 종결
사건에 대한 유일한 직접적인 정보원인 마일스 다보드는 의도적으로 인슐린을 과다 복용하여 혼수상태에 빠졌다. 2002년 9월 27일, 다보드는 캘리포니아주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다보드의 증언에 따르면, 그와 그의 형제 델리 사이에 싸움이 있었고, 칼란이 우연히 배의 일부에 머리를 부딪혀 사망했다. 살도가 그녀의 죽음을 신고하려 하자, 당황한 델리가 살도를 죽였고, 다보드는 정당방위로 형제를 총으로 쏴 죽인 후 시신들을 바다에 버리고 미국으로 도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 담당 FBI 수사관 존 스타이너는 보트를 조사한 법의학팀이 다보드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으며, "그렇게 일어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다보드의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주장은 그가 추를 구입한 이유, 세 시신을 모두 바다에 던진 이유, 보트의 총알 자국과 일치하는 패치된 구멍, 형제의 신분을 도용한 이유, 그리고 왜 당국에 설명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인슐린을 과다 복용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다보드의 사망 이후,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해 더 이상 많은 것을 밝혀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후 델리와 다보드를 기리기 위한 추도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