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바리드 막 이마르의 생애는 여러 아일랜드 연대기를 통해 파편적으로 전해진다. 그의 초기 활동부터 더블린 왕위 계승, 그리고 주요 정적과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벌어진 주요 활동을 보여준다.
1.1. 초기 활동
바리드 막 이마르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에린의 단편적 연대기》에 포함된 사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867년으로 기록된 이 내용에 따르면, 바리드는 로흘란의 야를 하마르와 함께 코나크타인들의 습격을 받아 하마르가 사망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이 사건 이후 바리드가 하마르의 후임 야를로 취임했다고 전해진다. 872년 《단편적 연대기》의 또 다른 사가에서는 그가 리르그 벌판과 리호의 호중도들을 약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사가에 따르면 바리드는 북이넬의 최고 왕인 아드 핀들리어흐의 아들을 길러주었다고 한다. 사가 자체의 역사적 가치는 의심스러울 수 있으나, 이 특정 요소는 이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며, 훗날 아드 핀들리어흐의 후손들과 이바르 가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아일랜드에서는 자녀를 입양하여 길러주는 것이 다른 통치 가문들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바리드가 아일랜드의 토착 정치 엘리트들과 스스로를 융화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2. 더블린 왕위 계승과 통치
873년 《이니스팔렌의 연대기》는 바리드가 더블린에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항해하여 키어라거 루아크라 지역의 지하 동굴을 약탈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동굴 습격"으로 묘사된다. 이 습격은 부왕 이바르의 죽음 직후에 이루어졌으며, 바리드가 이바르의 뒤를 이어 더블린 왕위에 올랐음을 시사한다. 이바르 사후 그의 왕위를 계승한 바리드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이 습격을 단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가드 가이델 레 가일》(아일랜드어: Cogad Gáedel re Gallaib)에 따르면, 올라프 코눙그의 아들인 에위스테인 올라프손, 즉 바리드의 사촌이 이 습격 원정에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이바르가 죽은 뒤 바리드와 에위스테인이 더블린의 공동 왕으로서 통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3. 할프단과의 갈등
《울라 연대기》에 따르면 875년, 에위스테인 올라프손은 "알반"이라는 인물에게 "기만적으로" 살해당했다. 이 알반은 전설적인 바이킹 왕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인 할프단 라그나르손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할프단이 이바르의 형제라고 보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 갈등은 할프단이 더블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였을 수 있다.
할프단은 875년에 더블린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지만, 877년에 다시 더블린을 차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스트랭퍼드호 전투에서 "페어 포리너즈"(fair foreigners, 핑갈)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코가드 가이델 레 가일》은 바리드가 이 "페어 포리너즈"의 지도자였으며, 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이후 여생 동안 절름발이로 지냈다고 기록한다.
1.4. 죽음
바리드 막 이마르의 죽음은 881년에 울라 연대기, 《에린 왕국 연대기》, 《스코틀랜드 편년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둘리크를 습격한 직후 더블린에서 살해당하고 불에 태워졌다. 연대기들은 그의 죽음을 키어난 성인의 기적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 가족 관계
바리드 막 이마르의 아버지로 알려진 인물은 873년 사망할 때까지 더블린의 왕이었던 이바르이다. 《스코틀랜드 편년사》에 따르면 이바르는 "노스멘의 수장"으로 불렸다. 이 이바르는 때때로 전설적인 바이킹 왕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인 이바르 더 본리스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바리드의 알려진 형제로는 888년에 사망한 시그프뢰드 막 이마르와 896년에 사망한 시트리우크 막 이마르가 있다.
바리드 막 이마르의 자녀 중 한 명은 우아트마란(Uathmarán아일랜드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우아트마란은 아일랜드어 단어 "우아트마르"("굉장한" 또는 "경외로운"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아일랜드식 이름으로, 바리드가 아일랜드 정치 엘리트들과의 연관성을 모색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바리드는 또한 891년에 사망한 엘로이르 막 바리드(Eloir mac Báirid아일랜드어)의 아버지이자, 921년 활동했던 우아트마란 막 바리드의 알려지지 않은 아들(즉, 손자)의 할아버지로 추정되는데, 이 손자는 932년에 활동한 시그프뢰드 막 우아트마란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937년에 킬 클레티(Cill Clethi아일랜드어)를 약탈한 "바리드의 알려지지 않은 아들"과 바리드 막 이마르의 관계는 불확실하며, 이 인물은 937년에 사망한 아리크 막 바리드(Aric mac Báirith아일랜드어)와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924년에 활동한 콜라 막 바리드 또한 바리드 막 이마르의 아들인지 확실하지 않다. 위에 언급된 아리크, 콜라, 그리고 "바리드의 알려지지 않은 아들" 중 한 명 또는 전부가 바리드 막 이마르가 아닌 바리드 막 오이티르 (914년에 사망)의 아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3. 평가
바리드 막 이마르의 통치 기간은 9세기 아일랜드 내 바이킹 세력의 확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아버지 이바르의 뒤를 이어 더블린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며 바이킹 통치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이니스팔렌의 연대기》에 기록된 키어라거 루아크라 지역의 "동굴 습격"은 그의 권위를 강화하고 새로운 통치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긴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할프단 라그나르손과의 대립은 이바르 가 내부 및 다른 바이킹 지도자들 간의 복잡한 권력 다툼을 보여준다. 바리드가 스트랭퍼드호 전투에서 "핑갈"의 지도자로서 할프단에게 맞서 승리하고 더블린의 지배권을 수성한 것은 그의 군사적 리더십과 정치적 역량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비록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활약상을 더욱 부각시킨다.
또한, 그가 아일랜드 토착 귀족인 아드 핀들리어흐의 아들을 양육하거나, 자녀에게 아일랜드식 이름을 부여하려 한 시도(Uathmarán아일랜드어)는 바이킹 통치자들이 아일랜드 사회에 통합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이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힘으로 지배하는 것을 넘어, 현지 엘리트들과의 유대 형성을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안정화하려는 실용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연대기들이 그의 죽음을 키어난 성인의 기적과 연결시키는 점은 그가 아일랜드인들에게 단순한 이방인 침략자가 아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할 만큼 인상적인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전반적으로 바리드 막 이마르는 더블린에 바이킹 왕국을 공고히 하고, 아일랜드 내에서 바이킹 세력의 주요한 행위자로서 활동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통치는 아일랜드의 정치 지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바이킹과 아일랜드인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