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유년 시절 및 가족
미소라 히바리는 1937년 5월 29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이소고구에서 본명 가토 가즈에(加藤 和枝, Katō Kazue)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생선 가게 '우오마스'를 운영하던 가토 마스키치(加藤 増吉, 1912년 ~ 1963년)였고, 어머니는 가토 기미에(加藤 喜美枝)였다. 마스키치는 도치기현 출신이었고, 기미에는 도쿄도 산야 출신이었다. 여동생으로는 사토 세쓰코, 남동생으로는 가토 데쓰야와 가야마 다케히코가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집에 있던 축음기로 가요곡과 유행가를 들으며 노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1943년 6월,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버지가 해군으로 출정하게 되자, 6세의 가즈에는 아버지의 송별회에서 '구단의 어머니'를 불렀다. 송별회에 모인 사람들이 가즈에의 노래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어머니 기미에는 딸의 가창력에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요코하마 근교에서 위문 활동을 시작했다.
1.2. 교육
가즈에는 요코하마시립 다키가시라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세이카 학원 여자 중학교 및 고등학교를 다녔다. 1946년, 9세의 나이에 NHK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 '아마추어 노래 자랑(素人のど自慢)'에 참가하여 예선에서 '사과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성숙하고 아이가 어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합격 종을 울리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요코하마의 아테나 극장에서 첫 무대에 섰다. 이듬해 봄, 요코하마에서 열린 '아마추어 노래 자랑'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고가 마사오가 가토 모녀의 간곡한 부탁으로 가즈에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가즈에가 고가 마사오의 곡 '슬픈 피리'를 아카펠라로 부르자, 고가는 아이답지 않은 가창력, 담력, 곡에 대한 이해력에 감탄하며 "너는 이미 '아마추어 노래 자랑' 단계를 넘어섰다. 이미 훌륭한 가수가 되어 있다"고 격려했다.
1.3. 초기 경력
1947년, 미소라 히바리는 요코하마의 스기타 극장에서 만담가 이구치 세이하와 속요 가수 오토마루의 오프닝 가수로 출연하며 지방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고치현에서 순회공연 중이던 1947년 4월 28일, 그녀와 어머니가 탄 버스가 절벽으로 추락할 뻔한 사고를 겪었으나, 다행히 벚나무에 걸려 멈춰 섰다. 이 사고로 가즈에는 왼쪽 손목을 다치고 기절했으나, 마을 의사의 도움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이후 아버지는 노래를 그만두라고 했지만, 가즈에는 "노래를 그만두면 죽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1948년 2월, 고베 쇼치쿠 극장 출연을 앞두고 당시 고베 흥행에 영향력이 있던 야마구치구미 3대 두목 다오카 가즈오에게 인사를 드려 호감을 얻었다. 같은 해 5월, 당시 인기 절정이던 보드빌 배우 가와다 하루히사(본명 가와다 요시오)는 11세의 무명 소녀 히바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를 요코하마 국제극장 공연에 발탁했다. 가와다는 히바리를 아꼈고, 히바리 또한 그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히바리는 가와다에게 큰 영향을 받아 그의 창법을 배웠으며, 훗날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아버지와 가와다 선생님뿐"이라고 말했다.
가와다 극단에서 히바리는 당시 최고 스타 가수였던 가사기 시즈코의 모창으로 '베이비 가사기'라는 별명을 얻으며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이가 어른의 연애 노래를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시인이자 작사가인 사토 하치로는 당시 히바리에 대해 "요즘 어른 흉내를 내는 저급한 소녀 가수가 있는 것 같다"고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다.
1948년 10월, 희극 배우 반 준자부로의 극단 '신푸 쇼'에 합류하여 요코하마 국제극장과 준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때 어머니가 연출가 오카다 게이키치에게 예명을 부탁하여 '미소라 히바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요코하마 국제극장의 지배인이었던 후쿠시마 미치히토는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고 매니저가 되어 '히바리 영화'를 기획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1949년 1월, 니치게키의 리뷰 '러브 퍼레이드'에 출연하여 '세코한 무스메', '도쿄 부기우기' 등을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이 인기를 얻었다. 같은 해 3월에는 도요코 영화의 《노도지망쿄지다이》에 출연하여 영화에 데뷔했다. 8월에는 쇼치쿠 영화 《춤추는 용궁성》에 출연했으며, 주제가 '갓파 부기우기'로 일본 컬럼비아를 통해 11세에 정식 음반 데뷔를 했다. 이어서 12세에 주연을 맡은 영화 《슬픈 휘파람》이 대히트했으며, 동명의 주제가도 45만 장(당시 역대 최고 기록)이 팔리며 국민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이때 턱시도에 실크햇을 쓴 히바리의 모습은 어린 시절 그녀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1950년 6월, 히바리는 전후 일본 연예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주에서 공연했다. 귀국 후 가와다 하루히사와 함께 영화 《도쿄 키드》에 출연했으며, 동명의 주제가 또한 큰 히트를 기록했다. 1951년에는 쇼치쿠 영화 《그 언덕을 넘어》에서 인기 절정이던 쓰루타 고지를 짝사랑하는 역을 맡았는데, 실제 생활에서도 쓰루타를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다. 같은 해 5월, 신게이주쓰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후쿠시마 미치히토가 사장으로, 히바리, 가와다 하루히사, 사이토 도라지로가 임원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아라시 간주로 주연의 쇼치쿠 영화 《구라마 덴구: 가쿠베에지시》에 스기사쿠 소년 역으로 출연하며 이후 이 배역을 전담하게 되었다.
1952년, 영화 《사과밭 소녀》의 동명 주제가와 삽입곡 '링고 오이와케'가 당시 역대 최고 기록인 7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히트했다. 1953년에는 영화 《아가씨 사장》에 주연으로 출연한 이후, 어머니 기미에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히바리를 '아가씨(お嬢)'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4. 가수 경력
미소라 히바리는 생애 동안 총 1,500곡의 노래를 녹음했으며, 그중 517곡이 오리지널 곡이었다. 그녀의 음반 판매량은 1989년 사망 당시 6,800만 장이었으나, 사후 수요가 급증하여 2001년까지 8,000만 장, 2019년 5월 1일 기준으로는 약 1억 1,700만 장에 달했다. 이는 아날로그 레코드 싱글 4,850만 장, 앨범 2,150만 장, 카세트 테이프 2,650만 장, 8트랙 테이프 900만 장, CD 1,150만 장을 포함하는 수치로, 인터넷 스트리밍 판매는 제외된 것이다.
그녀의 주요 히트곡과 판매량은 다음과 같다.
- '갓파 부기우기' (1949년): 45만 장
- '슬픈 휘파람' (1949년): 50만 장 (이후 110만 장)
- '도쿄 키드' (1950년): 120만 장
- '링고 오이와케' (1952년): 70만 장 (이후 130만 장, 2019년 기준 140만 장)
- '항구 마을 13번지' (1957년): 120만 장
- '애수 부두' (1960년): 제2회 일본 레코드 대상 가창상 수상.
- '야와라' (1964년): 180만 장 (2019년 기준 195만 장). 제7회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곡.
- '슬픈 술' (1966년): 145만 장 (2019년 기준 155만 장).
- '새빨간 태양' (1967년): 140만 장 (2019년 기준 150만 장). 재키 요시카와 앤 블루 코메츠와의 협업으로 미니스커트 의상이 화제가 되었다.
- '인생 일로' (1970년)
- '사랑은 찬란히' (1986년)
- '흐트러진 머리' (1987년): 125만 장.
- '흐르는 강물처럼' (1989년): 150만 장 (2019년 기준 205만 장). 제31회 일본 레코드 대상 특별영예가수상 수상곡.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큰 히트곡이 없었지만, 이 시기에는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며 수많은 TV 프로그램과 음반을 통해 가수로 재평가받았다. 오카바야시 노부야스('달밤의 야간열차', 1975년), 기스기 다카오('웃어줘 문라이트', 1983년), 이루카('꿈 하나', 1985년), 오구라 게이('사랑은 찬란히', 1986년) 등 당대 유명 아티스트 및 크리에이터들과 자주 협업했다. 또한, 신곡 홍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80년에 발표한 '너에게 반했어'는 꾸준한 활동 덕분에 오랜만에 히트곡이 되었다. 1982년에는 '뒷골목 술집'도 장기 히트를 기록했다.
1.5. 배우 경력
미소라 히바리는 1949년부터 1971년까지 총 16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 대부분이 주연작이었다. 특히 영화 제목에 '히바리'가 들어간 작품은 47편으로 일본 영화사상 최다 기록이다. 그녀의 영화 출연은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영화계의 은막 스타로서 인기를 얻는 데 기여했다.
주요 출연 영화는 다음과 같다.
- 《노도지망쿄지다이》 (1949년): 데뷔작.
- 《슬픈 휘파람》 (1949년): 주연작.
- 《도쿄 키드》 (1950년): 마리코 역. 전후 일본의 고난과 낙관주의를 상징하는 작품.
- 《구라마 덴구: 가쿠베에지시》 (1951년): 스기사쿠 역.
- 《사과밭 소녀》 (1952년): 마루미 역.
- 《이즈의 무희》 (1954년): 무희 가오루 역.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 《가위바위보 아가씨》 (1955년): 아사미 루리 역. 에리 치에미, 유키무라 이즈미와 함께 '삼인 아가씨(三人娘)'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 《로맨스 아가씨》 (1956년): 루미코 역.
- 《대히트 삼색 아가씨》 (1957년): 네무로 에리코 역.
- 《기온 마쓰리》 (1968년): 마을 사람들 역.
- 《히바리의 모든 것》 (1971년): 연예 생활 2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영화.
- 《여자의 꽃길》 (1971년): 오키미 역.
1954년 7월, 히바리는 정식 계약을 맺지 않았던 쇼치쿠를 떠나 도에이와 영화 출연 전속 계약을 맺었다. 3편의 영화에 1,000만 엔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 계약에는 다오카 가즈오가 동석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도에이 사장이었던 오카다 시게루는 어린 히바리의 기개와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의 영화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이 시기 히바리는 나카무라 긴노스케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며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으나, 다오카의 중재로 헤어졌다.
히바리는 1954년부터 1963년까지 10년간 도에이 전속 배우로 활동하며 102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히바리 포물장' 시리즈, '베란메에 게이샤' 시리즈 등 다수의 히트 영화를 통해 시대극과 검극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오카다 시게루는 "미소라 히바리는 도에이 여배우 중 회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긴노스케와 함께 도에이의 토대를 만든 위대한 스타"라고 평가했다. 비록 그녀의 영화 작품 중 예술성이나 영화상을 받은 작품은 많지 않지만, 그녀는 평생을 오락 영화에 헌신했고 팬들은 이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1962년에는 블루리본상 대중상을 수상하며 "13년간 영화 주연으로 대중에게 사랑받고 친숙해진 공로"를 인정받았다.
1.6. 개인사
1956년, 미소라 히바리는 재즈 밴드 오노 미쓰루와 스윙 비버스의 오노 미쓰루와 약혼했으나, 결혼을 위해 가수 활동을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파혼했다.
1957년 1월 13일, 아사쿠사 국제극장에서 공연 중 동갑내기 극성팬에게 염산 테러를 당해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남지 않았고, 3주간의 치료 후 1월 29일 무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히바리는 다오카 가즈오에게 보디가드를 요청했으며, 흥행권은 고베 예능사에 위임했다.
1962년, 히바리는 당시 인기 배우였던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으나, 어머니 가토 기미에와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고바야시는 히바리의 어머니가 부동산 문제로 혼인신고를 계속 거부하여 법적으로는 미혼 상태였다고 훗날 밝혔다. 히바리 또한 가수 활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일을 재개했고, 고바야시가 바랐던 현모양처의 삶을 살지 못했다. 결혼 이듬해인 1963년에는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가 폐결핵으로 52세에 사망했다.
결국 1964년, 2년여 만에 고바야시와 이혼했다. 고바야시는 자서전에서 다오카 가즈오가 이혼을 종용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은 따로 진행되었는데, 고바야시는 "본인들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가즈에(히바리의 본명)가 나와 결혼하는 것보다 예술과 결혼하는 것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겠다"며 '이해 이혼'이라는 말을 사용해 당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히바리 또한 다오카의 입회하에 기자회견을 열고 "이유를 말하면 서로 상처를 줄 것"이라며 "내가 행복해지는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또한 "예술을 버릴 수 없었고, 어머니를 버릴 수 없었다"며 앞으로는 무대 활동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이혼 직후 발표한 '야와라'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맞물려 이듬해인 1965년 대히트했다. 180만 장(이후 195만 장)이라는 히바리 개인 최고 판매량을 기록하며 제7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1966년 '슬픈 술', 1967년 '예도 일대', '새빨간 태양' 등 대표작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1973년, 남동생 가토 데쓰야가 폭력단 관련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서 가토 가문과 야마구치구미 및 다오카 가즈오와의 관계가 문제시되었다. 이로 인해 전국 공회당과 시민회관에서 "폭력단 조직원인 동생을 출연시키면 공연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보이콧이 발생했고, 언론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히바리 모녀는 가족의 유대를 중요하게 여겨 데쓰야를 배제하지 않았다. 이 결과, 1973년 말, 17회 출전하여 1963년부터 10년 연속 홍백가합전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그녀는 결국 NHK 홍백가합전 출전을 사퇴했다(사실상 낙선). 이 시기 NHK에는 '히바리를 출연시키지 말라'는 민원이 쇄도했고, 몇 년간 히트곡이 부족했던 점도 작용하여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후 몇 년간 히바리는 NHK의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1977년 NHK 인기 프로그램 '빅 쇼'에 4년 만에 출연하며 관계를 회복했다. 1979년 제30회 NHK 홍백가합전에는 특별 출연 형식으로 복귀했으나, 정식 출전 가수로는 다시 참여하지 않았다.
1978년, 히바리는 남동생 데쓰야의 아들인 7세의 조카 가토 가즈야를 양자로 입양했다.
2. 건강 문제와 말년
1980년대는 미소라 히바리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1981년에는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 기미에가 뇌종양으로 68세에 사망했다. 같은 해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연예 생활 35주년 기념 리사이틀은 어머니가 위독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이어서 1982년에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가수였던 에리 치에미가 45세에 급사했고, 1983년에는 남동생 데쓰야, 1986년에는 가야마 다케히코가 모두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이어졌다. 히바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연달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평소에도 즐기던 술과 담배의 양을 더욱 늘렸고, 이는 점차 그녀의 건강을 해치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히바리는 후쿠오카시에서 공연 중 갑자기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녀는 만성 간염으로 인한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 진단을 받았다. 의료진은 팬들과 관계자들의 우려를 덜기 위해 그녀가 간경변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즉시 입원 치료를 받았고, 8월에는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10월에는 신곡 '흐트러진 머리' 녹음을 시작했으며, 1988년 4월 11일에는 도쿄 돔에서 복귀 콘서트 '불사조/미소라 히바리 인 도쿄 돔: 새로운 하늘을 향해 날다!!'를 개최했다. 당시 관객들은 그녀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히바리는 무대 뒤에서 산소통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고, 다리의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총 39곡을 열창했다. 마지막 곡을 마친 후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쓰러져 대기 중이던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언론은 그녀의 '완전 부활'을 보도했지만, 히바리에게는 목숨을 건 전설적인 무대였다.
히바리의 건강 호전은 일시적이었고, 수십 년간의 과음으로 약해진 간 기능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팬들에게 건강 상태를 숨긴 채 계속해서 라이브 공연을 이어갔다. 1989년 2월 7일(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 히바리는 기타큐슈시 고쿠라에서 생애 마지막 콘서트를 열었다. 이는 전국 투어의 시작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인해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3월 21일, 그녀는 닛폰 방송의 10시간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미소라 히바리 감동의 이 한 곡'을 마지막으로 약 45년간의 가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이후 도쿄 준텐도 대학 병원에 간질성 폐렴으로 입원했다.
3. 죽음과 사회적 반응
1989년 6월 24일 오전 0시 28분, 미소라 히바리는 간질성 폐렴 악화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양아들 가즈야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일본 전역에서 크게 애도되었으며, 많은 이들은 그녀의 죽음이 쇼와 시대의 진정한 종말을 상징한다고 느꼈다. 주요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그날 저녁 정규 방송을 취소하고 그녀의 죽음을 보도하며 다양한 추모 방송을 내보냈다.
6월 25일에는 빈소가, 26일에는 장례식이 히바리 자택에서 치러졌으며, 연예계, 스포츠계, 정계 등 각계각층의 수많은 조문객이 찾아왔다. 히바리의 관을 실은 영구차가 자택을 떠날 때, 수많은 팬들이 길가에 모여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7월 22일 아오야마 장의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당시 최고 기록인 4만 2천 명이 방문했다. 양아들 가즈야가 상주를 맡았으며, 장례식에서는 만야 긴노스케, 모리 시게히사, 나카무라 메이코, 오 사다하루, 와다 아키코, 톤네루즈의 이시바시 다카아키가 조사를 낭독했다. 기타지마 사부로, 유키무라 이즈미, 모리 마사코, 후지이 후미야, 곤도 마사히코 등 히바리를 따르던 가수 동료들이 '흐르는 강물처럼'을 부르며 그녀의 영전에 바쳤다. 법호는 자창원미공일화청대사(慈唱院美空日和清大姉)이며, 묘소는 요코하마시립 히노 공원 묘지에 있다.
4. 유산과 평가
4.1. 문화적 영향력
미소라 히바리는 '쇼와 시대의 여왕', '가요계의 여왕',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며 일본 대중음악과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마지막 곡인 '흐르는 강물처럼'은 1997년 NHK의 전국 여론조사에서 1,000만 명 이상이 참여하여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로 선정되었다. 이 곡은 그녀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쓰리 테너스, 테레사 텅, 마리아치 바르가스 데 테칼리틀란, 열두 나한 밴드 등 수많은 아티스트와 오케스트라에 의해 공연되고 있다. 매년 일본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는 그녀의 노래를 다루는 특별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2012년 11월 11일에는 도쿄 돔에서 그녀를 추모하는 콘서트가 열렸으며, 아이, 고다 구미, 히라이 겐, 히카와 기요시, 에그자일, AKB48,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등 수많은 음악가들이 그녀의 가장 유명한 곡들을 부르며 헌정했다.
1989년 히바리 사망 후 같은 해 TBS에서 기시모토 가요코 주연의 텔레비전 드라마 스페셜 '미소라 히바리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2005년에는 역시 TBS에서 우에토 아야가 히바리 역을 맡은 '미소라 히바리 탄생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2019년 9월에는 NHK 스페셜에서 과거의 방대한 영상과 음원을 바탕으로 최신 AI 기술을 활용하여 그녀의 노래 목소리를 재현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야마하가 개발한 딥러닝 기반의 음성 합성 기술 'VOCALOID:AI'를 통해 새로 제작된 곡 '그로부터'를 부르는 모습이 4K 3D 홀로그램으로 구현되었다. 이 AI 라이브는 2019년 NHK 홍백가합전에서도 선보여 큰 화제를 모았다.
4.2. 수상 및 영예
미소라 히바리는 생전과 사후에 걸쳐 일본 대중음악계에 기여한 공로로 수많은 상과 영예를 안았다.
- 1960년: 제2회 일본 레코드 대상 가창상
- 1962년: 제12회 블루리본상 대중상
- 1965년: 제7회 일본 레코드 대상 대상
- 1969년: 일본 적십자사 금색 유공장, 곤쥬 훈장
- 1971년: 제2회 일본 가요 대상 방송음악특별상
- 1973년: 제15회 일본 레코드 대상 15주년 기념 특별상
- 1976년: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 특별상
- 1977년: 모리타 다마 파이오니어상
- 1989년:
- 국민영예상: 사후 수상. 여성 최초.
- 제31회 일본 레코드 대상 특별영예가수상
- 제20회 일본 가요 대상 특별영예상
- 제22회 일본 작사 대상 특별상
- FNS 가요제 특별상
- 2000년: 제2회 아오모리 사과 훈장
4.3. 비판 및 논란
미소라 히바리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 흉내를 내는 저급한 소녀 가수'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시인이자 작사가인 사토 하치로는 그녀의 성숙한 목소리와 성인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다.
1973년, 그녀의 남동생 가토 데쓰야가 폭력단 관련 사건에 연루되면서 미소라 히바리와 야마구치구미 간의 관계가 문제시되었다. 이로 인해 전국 공회당과 시민회관에서 그녀의 공연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언론의 대대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히바리는 1963년부터 10년 연속 마지막을 장식했던 NHK 홍백가합전에서 사실상 낙선하게 되었고, 이후 몇 년간 NHK 프로그램 출연을 거부했다。1977년 '빅 쇼'를 통해 NHK와 관계를 회복하고 1979년 홍백가합전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지만, 정식 출전 가수로는 다시 참여하지 않았다.
사후에는 고바야시 노부히코와 같은 평론가들이 그녀의 죽음 이후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진 '총체적 애도' 분위기를 비판하며, 히바리의 재능이 일본적인 '엔카'라는 틀에 갇히게 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재능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시각은 드물었다.
5. 추모와 기념
미소라 히바리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물과 행사가 일본 곳곳에 존재한다.
1993년, 고치현 오토요정의 스기노 오스기 근처에 히바리의 초상화와 시가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1947년 10세의 히바리가 버스 사고를 당한 후 회복하면서 '일본 최고의 가수가 되겠다'고 소원을 빌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1994년에는 교토시 아라시야마에 '미소라 히바리관'이 개관하여 그녀의 소장품과 멀티미디어 전시를 선보였다. 이 박물관은 5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유치했으나, 방문객 감소로 2006년 11월 30일 문을 닫았다. 이후 건물 리모델링을 거쳐 2008년 4월 26일 '교토 아라시야마 미소라 히바리자'로 재개관했으나, 2013년 5월 31일 다시 폐관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2일 교토 도에이 우즈마사 영화촌 내에 '교토 우즈마사 미소라 히바리자'가 재개관하여 무대 의상, 대본 등 약 500점의 유품과 도쿄 돔 '불사조 콘서트'에서 입었던 드레스, 데뷔작 이후 93편의 영화 복원 포스터 등이 전시되었다. 이 영화촌 입구에 있던 히바리의 동상은 2024년 10월 17일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시오야사키에 있는 '히바리노엔'으로 이전되었다.

이와키시 시오야사키에는 1988년 10월 2일 '흐트러진 머리' 노래비가 세워졌고, 1990년 5월 26일 '미소라 히바리 유영비'가 건립되었다. 주변 도로 420미터 구간은 '히바리 가도'로 정비되어 1998년 완공되었으며, 2002년 5월 25일에는 '영원의 히바리 상'이 건립되었다.
2002년에는 요코하마에 그녀의 데뷔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연간 약 30만 명이 방문하고 있다.
2014년 5월에는 도쿄도 메구로구에 있는 그녀의 자택 일부를 개조하여 '도쿄 메구로 미소라 히바리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2019년 9월, NHK 스페셜은 최신 AI 기술을 활용하여 히바리의 목소리를 재현하고 3D 홀로그램으로 그녀의 모습을 구현하여 신곡 '그로부터'를 선보이는 시도를 했다。이 AI 라이브는 2019년 NHK 홍백가합전에서도 특별 기획으로 공연되었다.
6. 음반 목록
미소라 히바리는 총 1,500곡 이상의 노래를 녹음했으며, 517곡이 오리지널 곡이다. 그녀의 음반 판매량은 2019년 5월 기준 약 1억 1,700만 장에 달한다.
순위 | 곡명 | 발매 연도 | 판매량 (2000년 5월 기준) | 판매량 (2019년 3월 기준) |
---|---|---|---|---|
1 | 야와라 | 1964 | 190만 장 | 195만 장 |
2 | 흐르는 강물처럼 | 1989 | 150만 장 | 205만 장 |
3 | 슬픈 술 | 1966 | 145만 장 | 155만 장 |
4 | 새빨간 태양 | 1967 | 140만 장 | 150만 장 |
5 | 링고 오이와케 | 1952 | 130만 장 | 140만 장 |
6 | 흐트러진 머리 | 1987 | - | 125만 장 |
7 | 항구 마을 13번지 | 1957 | - | 120만 장 |
8 | 도쿄 키드 | 1950 | - | 120만 장 |
9 | 슬픈 휘파람 | 1949 | 50만 장 | 110만 장 |
10 | 파도여, 아버지 | 1956 | - | 110만 장 |
주요 싱글 외에도 다수의 EP, 오리지널 앨범, 커버 앨범, 라이브 앨범, 베스트 앨범, 기획 앨범 등을 발매했다. 1983년에는 최신 디지털 기술로 재녹음한 '에버그린 히바리'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1,001곡을 수록한 CD 56장과 DVD 2장으로 구성된 '히바리 천야일야' 세트를 발매하여 단일 가수로는 최대 규모의 음반 박스 세트 기록을 세웠다.
7. 영화 목록
미소라 히바리는 1949년부터 1971년까지 총 16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 대부분이 주연작이었다. 특히 영화 제목에 '히바리'가 들어간 작품은 47편으로 일본 영화사상 최다 기록이다.

- 《노도지망쿄지다이》 (1949년, 다이에이) - 데뷔작.
- 《춤추는 용궁성》 (1949년, 쇼치쿠)
- 《슬픈 휘파람》 (1949년, 쇼치쿠)
- 《도쿄 키드》 (1950년, 쇼치쿠) - 마리코 역.
- 《구라마 덴구: 가쿠베에지시》 (1951년, 쇼치쿠) - 스기사쿠 역.
-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1951년, 쇼치쿠) - 야요이 역.
- 《그 언덕을 넘어》 (1951년, 쇼치쿠) - 시라하마 마리코 역.
- 《사과밭 소녀》 (1952년, 쇼치쿠) - 마루미 역.
- 《가위바위보 아가씨》 (1955년, 도호) - 아사미 루리 역.
- 《로맨스 아가씨》 (1956년, 도호) - 루미코 역.
- 《대히트 삼색 아가씨》 (1957년, 도호) - 네무로 에리코 역.
- 《항구 마을 13번지》 (1957년, 도에이) - 오유키 역.
- 《베란메에 게이샤》 (1959년, 도에이) - 고하루 역.
- 《히바리의 사도 정화》 (1962년, 도에이) - 사토 기미에 역.
- 《기온 마쓰리》 (1968년, 쇼치쿠) - 마을 사람들 역.
- 《히바리의 모든 것》 (1971년, 도호/일본 컬럼비아) - 연예 생활 2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 《여자의 꽃길》 (1971년, 도호) - 오키미 역.
8. 관련 항목
- 가토 가즈야: 미소라 히바리의 양아들이자 히바리 프로덕션 대표이사 사장.
- 고바야시 아키라: 미소라 히바리의 전 남편.
- 국민영예상: 미소라 히바리가 사후 수상한 일본 정부의 최고 영예.
- 다오카 가즈오: 야마구치구미 3대 두목이자 미소라 히바리의 후원자.
- 도쿄 돔: 미소라 히바리가 복귀 콘서트를 개최한 장소.
- 링고 오이와케: 미소라 히바리의 대표곡 중 하나.
- 미소라 히바리 (배우): 쇼와 시대 전기에 활동한 동명이인 여배우.
- 새빨간 태양: 미소라 히바리와 재키 요시카와 앤 블루 코메츠가 협업한 히트곡.
- 쇼와 시대: 미소라 히바리가 활동하며 '쇼와 시대의 여왕'으로 불린 시기.
- 슬픈 휘파람: 미소라 히바리의 초기 히트곡이자 주연 영화.
- 야와라: 미소라 히바리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
- 에리 치에미: 미소라 히바리와 '삼인 아가씨'로 활동했던 친구.
- 유키무라 이즈미: 미소라 히바리와 '삼인 아가씨'로 활동했던 친구.
- 일본 레코드 대상: 미소라 히바리가 여러 차례 수상한 음악상.
- NHK: 미소라 히바리가 출연 정지 논란을 겪었던 방송사.
- 흐르는 강물처럼: 미소라 히바리의 마지막 곡이자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로 평가받는 곡.
9. 외부 링크
- [http://www.misorahibari.com 미소라 히바리 공식 웹사이트] (미소라 히바리의 모든 출연작과 음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https://web.archive.org/web/20070312080539/http://www.pref.fukushima.jp/kanko/data_m/26001.html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미소라 히바리 '흐트러진 머리' 노래비, 유영비, 시설 소개]
- [http://cafe.daum.net/hibariza 미소라 히바리 팬카페] (노래, 영상 등 각종 자료를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