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노와 노보루(箕輪登미노와 노보루일본어)는 1924년 3월 5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태어나 2006년 5월 14일 사망한 일본의 정치인이자 외과 전문의이다. 그는 일본 중의원 의원을 8선 역임했으며,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우정대신을 지내는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의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는 초기에는 자유민주당 내 보수 파벌에 속했지만, 말년에는 일본국 헌법 제9조 수호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자위대 파병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전직 방위 정무차관으로서 자위대 이라크 파병 저지 소송의 원고로 참여하고 이라크 일본인 인질 사건 당시 인질들의 '자기 책임론'에 반박하며 인권 보호를 강조한 그의 행동은 사회적 신념과 실천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초반 및 배경
미노와 노보루는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학업과 의사로서의 초기 경력을 쌓았다.
2.1. 출생과 성장
미노와 노보루는 1924년 3월 5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타루시 중학교(현 홋카이도 오타루 쇼료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2.2. 학력 및 초기 경력
그는 홋카이도 제국대학 의학전문부를 졸업하며 의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3월에는 육군 군의 견습사관으로 임관했으나, 그 해 8월 전쟁이 종결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부터 일본 의료단 슷쓰 병원(현 슷쓰정립 슷쓰 진료소)의 외과 의장을 역임하며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는 슷쓰정에 미노와 외과 의원을 직접 개업했으며, 1952년에는 고향인 오타루시로 돌아와 이나호 지역에 다시 미노와 외과 의원을 개업하여 의료 활동을 이어갔다. 정치 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1962년부터는 당시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이었던 사토 에이사쿠의 비서 겸 주치의를 맡으며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3. 정치 경력
미노와 노보루는 의사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일본 중의원에서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1. 정계 입문 및 중의원 활동
미노와 노보루는 1960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홋카이도 제1구 (정수 5명)에서 보수계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으나, 입후보자 9명 중 7위에 그쳐 낙선했다. 당시 구 홋카이도 제1구에서는 일본 사회당의 요코미치 세쓰오, 자유민주당의 시이쿠마 사부로 (전 일본 중의원 부의장), 다카다 도미요 (전 삿포로시장) 등 유력 후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67년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구 홋카이도 제1구에 다시 출마하여 득표수 4위로 처음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8선 의원으로 활동하며 일본 중의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당선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가 이끌던 사토파(주산회)에 입회했다. 1972년 사토파가 분열된 이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 계파인 목요클럽(다나카파)에 소속되었다. 그의 동기로는 야마시타 모토히토, 마스오카 히로유키, 가토 로쿠자에몬, 시오카와 마사주로, 고노 요헤이, 나카오 에이이치, 후지나미 다카오, 무토 가분, 사카모토 산주지, 시오야 가즈오, 야마구치 도시오, 미즈노 기요시 등이 있었다.
3.2. 각료 및 주요 직책
미노와 노보루는 의원 활동 중 여러 주요 직책을 맡았다. 1972년에는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방위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중의원 운수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또한 중의원 안전보장특별위원장도 지냈다. 1981년에는 스즈키 젠코 개조내각에서 우정대신으로 임명되어 첫 입각을 달성했다. 우정대신으로서 그는 1981년 11월 30일부터 1982년 11월 27일까지 재임했다.
3.3. 정치적 좌절과 은퇴
미노와 노보루는 1987년 홋카이도 지사 선거에서 농림수산성 관료 출신인 마쓰우라 아키라를 지지하며 선거 운동을 이끌었으나, 마쓰우라는 현직 요코미치 다카히로 지사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에 자유민주당 홋카이도 지부 연합회장이었던 미노와는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다나카파가 분열될 때에는 게이세이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그는 꾸준한 재활치료를 통해 언어장애를 극복하고, 고향인 오타루시에서 사립병원의 고문을 맡으며 여생을 보냈다.
4. 주요 활동 및 사상
미노와 노보루는 정치 활동 외에도 다양한 대인 관계와 사회적 관심사를 보였다. 특히 그의 말년에 이루어진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운동은 그의 사회적 신념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4.1. 인물 및 기타 활동
미노와 노보루는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기 전부터 홋카이도 중앙 버스의 2대 사장이었던 마쓰카와 기타로와 언론인이자 만화가, 홋카이도 중앙 버스 고문을 지낸 유이세 히데히코 등 홋카이도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홋카이도 신칸센 계획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지역 발전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미노와는 가네마루 신 (전 자유민주당 부총재)이 주재했던 "일본전략연구센터"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창정회(創政会) 결성 당시 멤버로 이름을 올렸음에도, 나중에 가네마루의 이름을 들먹이며 가입을 철회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다케시타 노보루의 후견인이었던 가네마루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이사장 직위에서 해임당하고 센터 출입이 금지되는 논란을 겪었다.
4.2. 이라크 자위대 파병 반대 운동
미노와 노보루는 전직 방위 정무차관으로서 안전 보장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자위대 파병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국가를 상대로 삿포로 지방법원에 '자위대 이라크 파병 저지 홋카이도 소송'을 제기했다.
2005년 3월 28일에는 제2차 소송이 제기되었는데, 이 소송에는 일본 사회당 출신 중의원 의원이었던 다케무라 야스코, 일본 공산당 출신 중의원 의원이었던 고다마 겐지, 시민 운동가 하나사키 고헤이 등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인물들이 원고로 참여했다. 미노와 노보루 자신도 소송에 대한 지지자를 모으기 위해 전국 각지를 직접 방문하여 강연과 집필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이라크 일본인 인질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는 자신이 인질들의 몸값이 되어 인질들을 해방시켜 줄 것을 범인들에게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인도주의적 입장을 명확히 했다. 또한 당시 내각관방장관이었던 후쿠다 야스오 등이 주장한 '자기 책임론'에 대해 강력히 반박하며 인질로 잡힌 일본인 3명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는 그의 사회적 신념과 인권 보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미노와 노보루가 사망한 이후인 2007년 11월 19일, 삿포로 지방법원은 원고들의 주장을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으나, 원고 측은 삿포로 고등법원에 항소하며 법정 다툼을 이어갔다.
5. 저서
미노와 노보루는 여러 서적의 공동 집필에 참여하며 자신의 사상과 경험을 공유했다.
- 공동 집필
- (내다 마사토시) 『憲法9条と専守防衛켄포 구조토 센슈보에이일본어』 (梨の木舎나시노키샤일본어, 2005년)
- (고이케 기요히코, 다케오카 가쓰미) 『我、自衛隊を愛す 故に、憲法9条を守る-防衛省元幹部3人の志와레, 지에이타이오 아이스 유에니, 켄포 구죠오 마모루 - 보에이쇼 겐칸부 산닌노 코코로자시일본어』 (かもがわ出版가모가와 슈판일본어, 2007년)
6. 사망
미노와 노보루는 2006년 5월 14일, 폐렴으로 인해 삿포로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7. 평가 및 유산
미노와 노보루의 일생은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경력과 만년에 보여준 평화주의적 행동이 교차하며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7.1. 역사적 평가
미노와 노보루는 8선 중의원 의원이자 우정대신을 역임하며 일본 정치에 기여했다. 특히 홋카이도 신칸센 계획 추진에 대한 열정은 지역 발전에 대한 그의 기여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의 말년에 보여준 일본국 헌법 제9조 수호 운동과 이라크 전쟁 자위대 파병 반대 운동은 그가 단순히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의 근본적인 평화주의 원칙과 인권 보호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정치적 유산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그는 일본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일등 서보장을 수훈했다.
7.2. 비판과 논란
미노와 노보루의 경력에는 일부 비판과 논란도 존재한다. 1987년 홋카이도 지사 선거에서의 패배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가네마루 신이 주재한 "일본전략연구센터" 이사장 재임 중 발생한 가입 철회 및 가네마루와의 마찰은 그의 인물 관계와 정치적 처신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의 사회적 참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들었다.
8. 같이 보기
- 일본의 정치
- 일본국 헌법 제9조
- 자위대
- 이라크 전쟁
- 자유민주당 (일본)
- 우정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