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모리스 블랑쇼프랑스어)는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철학자, 문학 이론가이자 문학 비평가이다. 1907년 9월 22일 손에루아르의 캥 마을에서 태어나 2003년 2월 20일 이블린 르메닐생드니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평생을 문학에 헌신했으며,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고유한 침묵의 특성을 유지했다.
블랑쇼의 작업은 죽음의 철학과 의미 및 감각에 대한 시학적 이론을 탐구하며,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뤽 낭시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특히 '얼굴 없는 작가'로 불리며, 작가와 글쓰기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천착했다.
그의 초기 정치적 행보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좌파적 입장으로 전환하여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121인 선언'에 서명하고 68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정치적 관여를 보였다. 블랑쇼의 사상과 저술은 1950년대와 1960년대 프랑스 문화 전반에 걸쳐 이른바 '프랑스 이론'을 대표하는 인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현대 사상에서 그의 복합적인 위치를 보여준다.
2. 생애
모리스 블랑쇼의 생애는 학문적 탐구와 문학적 몰두, 그리고 격동적인 정치적 전환의 연속이었다. 그는 은둔적인 삶을 지향했으나, 중요한 사회적 사건들에는 깊이 관여하며 자신의 사상과 행적을 통해 시대를 반영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모리스 블랑쇼는 1907년 9월 22일 프랑스 손에루아르의 드브루즈 코뮌에 위치한 캥 마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5년부터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액시옹 프랑세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은으로 된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등 왕정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블랑쇼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계 유대인 현상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블랑쇼는 레비나스를 "유일한 친구이자 멀리 떨어진 친구"라 칭하며, 그와의 관계가 단순한 어린 시절의 친분이 아니라 숙고 끝에 내린 깨지지 않을 약속임을 강조했다. 1928년,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도움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 책은 그에게 "진정한 지적 충격"을 주어 그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1929년 파리에서 프랑스 고등 교육 학위를 받은 블랑쇼는 1930년 소르본에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을 바탕으로 한 "고대 회의론자들의 독단주의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는 생트안 병원에서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수련하며 의학 분야에도 발을 들였다.
2.2. 초기 정치 활동 (1945년 이전)
1930년대 초, 블랑쇼는 파리에서 정치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주류 보수 일간지 『Journal des débats』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1933년에는 맹렬한 반독일 일간지 『르 랑파르 (Le rempart르 랑파르프랑스어)』의 편집자로, 폴 레비의 반나치 주간지 『오제쿠트 (Aux écoutes오제쿠트프랑스어)』의 편집자로도 활동했다.
또한 1930년대 초반에는 일련의 급진적인 국가주의 잡지에도 기고했다. 1936년과 1937년에는 극우 월간지 『콩바 (Combat콩바프랑스어)』와 국가주의자적 생디칼리슴 일간지 『랭쉬르제 (L'Insurgé랭쉬르제프랑스어)』에 기고했다. 『랭쉬르제』는 일부 기고가들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폐간되었는데, 이는 블랑쇼의 개입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블랑쇼는 당시 정부와 국제 연맹의 정치에 대한 신뢰를 맹렬히 비판하는 일련의 논쟁적 기사들을 작성했으며, 나치 독일이 유럽의 평화에 가하는 위협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했다.
그는 극우 기관지 『콩바』의 우익 이데올로그로서 문필 활동을 시작했으며, 급진적인 극우 논진을 펼쳤다. 피에르 앙드뢰의 피에르 도리유 라 로셸 전기(1979)에 따르면, 블랑쇼는 1930년대에 후에 대독 협력파 파시스트 작가가 되는 도리유 라 로셸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블랑쇼는 부르주아 사회와 의회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물질적 편향성을 비판하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행동을 통해 현 체제를 타도하고 프랑스의 정신적 가치를 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한 '거부'의 정신과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일반적인 우익 사상과는 차이를 보였으며, 니시타니 오사무는 이러한 차이가 블랑쇼가 후에 우익적 입장에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謎の男トマ』를 비롯한 블랑쇼의 초기 작품들은 이 시기에 이미 쓰여지기 시작했다.
2.3. 제2차 세계대전과 사상적 전환
1930년대 후반, 블랑쇼는 정치적 활동에서 벗어나 문학 활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40년 12월, 그는 1930년대에 강력한 반파시스트 기사를 썼던 조르주 바타유를 만났고, 바타유는 1962년 사망할 때까지 블랑쇼의 절친한 친구로 남았다.
블랑쇼는 나치 점령기 동안 파리에서 활동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주르날 데 데바』에서 서평가로 계속 일하며, 필리프 페탱이 이끄는 비시 프랑스의 독자층을 대상으로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바타유, 앙리 미쇼, 스테판 말라르메,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같은 인물들에 대해 글을 썼다. 이 서평들에서 그는 언어의 수사학적 모호한 본질과 쓰인 단어가 진실 또는 허위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탐구하며 후대 프랑스 비판적 사고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장 폴한이 고안한 정교한 계략의 일환으로 제안되었던 친독 협력주의 잡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의 편집장 자리를 거부했다. 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했으며, 친나치 협력 운동의 주요 지도자였던 파시스트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의 맹렬한 반대자로 남았다.
1944년 6월, 블랑쇼는 나치 총살형 위기에 처했는데, 이 경험은 그의 저서 『나의 죽음의 순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처형 직전 사면 경험에 비견되기도 하는 이 사건은 후일 블랑쇼의 삶과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소설 『백일의 광기』에 반영되었고, 마지막 소설 『나의 죽음의 순간』에서는 이 경험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블랑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의 친척을 유대인 학살로부터 숨겨주었으며, 바타유의 주요 저서 『내적 체험』의 집필 과정에도 참여했다. 전쟁 전부터 바타유가 나치즘의 프리드리히 니체 남용을 비판하고 정신분석 이론을 활용하여 나치즘의 정치적 역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점을 고려할 때, 블랑쇼의 정치적 입장은 이미 전쟁 중에 전환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피에르 앙드뢰는 블랑쇼의 전환에 대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블랑쇼의 전환 후 입장을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우익적 입장에서 좌익적 입장으로 변모한 것은 분명하다. 초기 극우 시절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반유대주의를 연구한 제프리 메일먼의 『거장들의 성흔』이 존재하지만, 그의 '전환' 이후의 정치적 태도는 일관적이었으며, 자신의 전환에 대한 생각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치즘의 발흥과 침략,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블랑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홀로코스트는 블랑쇼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으며, 그는 나중에 이 대량 학살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통탄스러운 마음은 예를 들어 『묻는 지식인』이라는 글의 말미에서 르네 샤르의 단편을 인용하며 표현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사상적 충격과 정치적 입장 변화 과정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4. 전후 생활과 은둔
전쟁 이후 블랑쇼는 소설가이자 문학 비평가로서의 활동에 전념했다. 1947년, 그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외딴 마을 에즈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10여 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장폴 사르트르와 다른 프랑스 지식인들처럼, 블랑쇼는 생계 수단으로서 학계에 의존하는 것을 피하고 오로지 글쓰기에 의지했다. 1953년부터 1968년까지 그는 『누벨 르뷔 프랑세즈』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동시에 그는 상대적으로 은둔적인 생활 방식을 시작하여, 가까운 친구들(예: 레비나스)조차 몇 년 동안 만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계속해서 보냈다. 그의 자발적인 고립의 한 가지 이유는 (부분적인 이유일 뿐 그의 고립은 글쓰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났다) 평생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고립은 그에게 '얼굴 없는 작가', '부재의 작가'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블랑쇼는 얼굴 사진 한 장 공개하지 않고, 오직 책으로 쓰인 텍스트만을 제시했는데, 이는 "쓰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쓰는 그 자리에서, 그리고 쓰인 것 속에서는 쓰는 이는 부재하게 된다"는 그의 깨달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2.5. 후기 정치 참여
전후 블랑쇼의 정치적 활동은 좌파로 전환되었다. 그는 알제리 전쟁에서 식민지 병역 거부권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중요한 '121인 선언'의 주요 작성자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선언의 서명자에는 장폴 사르트르, 로베르 앙텔름, 알랭 로브그리예, 마르그리트 뒤라스, 르네 샤르, 앙리 르페브르, 알랭 레네, 시몬 시뇨레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선언은 전쟁에 대한 지식인들의 대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블랑쇼는 에밀 졸라나 장폴 사르트르처럼 대중 앞에 나서서 의견을 표명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사회를 움직이려는 방식의 정치 참여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치 활동을 모색했다.
1968년 5월, 블랑쇼는 학생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인적인 은둔에서 벗어났다. 이는 전쟁 후 그의 유일한 공개 석상이었다. 그는 뒤라스, 디오니스 마스콜로 등과 함께 '작가-학생 행동 위원회'를 조직하고 거리 시위에 참여했으며, 무기명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블랑쇼는 뒤라스에 대해 작가로서 높은 평가를 내리며, 그녀의 작품 중 일부를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사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뒤라스 또한 소설 『유대인의 집』을 블랑쇼에게 헌정했다. 68운동은 블랑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 중 하나였고, 장 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 영감을 받아 쓰여진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는 그 자신의 공동체 사상과 레비나스의 타자론이 섞여 68년 5월이 회고되고 있다.
그는 반세기 동안 프랑스 문학에서 근대 문학과 그 전통의 꾸준한 옹호자로 남았다. 그의 말년에는 파시즘에 대한 지적 매력에 반대하는 글을 거듭 썼으며, 특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전후 침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2.6. 말년과 죽음
블랑쇼는 30편 이상의 소설, 문학 비평, 철학 작품을 저술했다. 1970년대까지 그는 일반적으로 다른 '장르'나 '경향'으로 인식되는 것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썼으며, 그의 후기 작품 대부분은 서술과 철학적 탐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1983년,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를 출판했다. 이 작품은 1986년 출판된 장 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 영감을 주었으며, 낭시는 이를 통해 공동체를 비종교적, 비공리주의적, 비정치적 해석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만년에 이르러 그의 저작 발표가 뜸해졌지만, 그는 계속해서 글을 썼다. 1994년에는 자신이 총살될 뻔했던 경험을 간결하고 신중한 문체로 기록한 짧은 소설 『나의 죽음의 순간』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자크 데리다의 『체류』는 이 소설에 영감을 받아 데리다 자신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블랑쇼는 2003년 2월 20일 프랑스 이블린 르메닐생드니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프랑스에서는 여러 신문들이 그의 사망 소식을 크게 다루었으며, 데리다는 블랑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했다. 그의 사망 발표 나흘 뒤 르 몽드지에 실린 미국의 이라크 전쟁 반대 시민 운동 '우리 이름으로 안 돼 (Not in our name우리 이름으로 안 돼영어)'의 호소문에도 블랑쇼의 서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3. 문학 및 철학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적 사유와 철학적 개념은 그가 기존의 장르 경계를 허물고 글쓰기 행위 자체와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깊이 천착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사상은 특히 죽음, 중성적인 것, 그리고 책임의 문제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식을 통해 현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문학론
블랑쇼의 문학적 사유는 스테판 말라르메와 프란츠 카프카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말라르메는 일상적인 언어(사물이나 정보를 도구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언어)가 아닌 본질적인 언어로서 문학적 언어를 보았다. 또한 본질적인 언어로 창조된 순수한 작품에서는 화자이자 작가가 소멸하고 '언어에 주도권을 넘긴다'는 말라르메의 생각은 블랑쇼의 창작과 문학 사상 모두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블랑쇼에게 "문학은 문학이 질문이 되는 순간 시작된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글쓰기 행위 자체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했다.
마찬가지로 카프카가 일기나 노트에 기록한 다양한 글, 예를 들어 죽음이나 비인칭적인 것과 글쓰기 간의 밀접한 관계를 기록한 부분이나, '나'에서 '그'로의 이행을 통해 문학의 풍요로움을 경험했다고 기록한 부분에서도 블랑쇼는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블랑쇼는 이 두 인물의 영향을 계승하고, 친구들 및 다른 문학가,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소설과 비평 양면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했다.
블랑쇼는 일상적인 언어 사용이 추상적인 개념을 위해 사물의 물리적 실재를 부정하거나 넘어선다고 보았다. 문학은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여 언어를 이러한 실용주의로부터 해방시키며, 언어가 물리적 사물이 아니라 오직 그것의 개념만을 지칭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블랑쇼는 문학이 이러한 부재의 현존에 매료되어 있으며, 단어의 음색과 리듬을 통해 언어의 물질성에 주의가 집중된다고 썼다. 문학 언어는 항상 반현실적이며, 일상 경험과 너무나 구별되어 현실에 대한 문학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문학이 아니라 글쓰기 행위의 특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역설에 관한 문학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블랑쇼의 문학 이론은 헤겔의 철학과 유사하게 실제 현실이 항상 개념적 현실을 앞선다고 주장한다.
전후 블랑쇼는 글쓰기 활동에 전념하며 창작과 사색을 심화시켰다. 그는 조르주 바타유가 1946년 창간한 잡지 『크리틱』의 편집에 협력하면서,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고, 말라르메와 카프카의 글쓰기에서 발견한 쓰는 이의 부재나 죽음의 경험을, 또한 무위나 망각과 같은 일들을 글쓰기 자체와 연결시켰다. 블랑쇼는 '쓰는 그 자리에서, 그리고 쓰인 것 속에서는 쓰는 이는 부재하게 된다'는 깨달음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얼굴 사진 한 장 공개하지 않고 오직 쓰인 텍스트만을 책으로 제시했는데, 이 때문에 '얼굴 없는 작가', '부재의 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블랑쇼는 문학 활동을 일상의 활동적인 '영위'에서 벗어난 '무위'로 파악했다. 그 무위의 한가운데서 작가는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고, 죽음 앞에서 자신을 지배하고 계속해서 현현하는 비인칭적인 것 속을 헤쳐 나가며, 바로 '문학 공간'을 방랑한다. 그는 이 행위를 오르페우스의 명계 하강에 비유한다. 신비신학과 유대 사상과도 공명하면서 제시된 블랑쇼의 문학 사상은 기존의 '창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와 함께 현대 사상에서 '에크리튀르' 문제의 전경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3.2. 주요 철학적 개념
블랑쇼는 하이데거와 함께 문학과 죽음이 익명적인 수동성으로 경험되는 방식, 즉 블랑쇼가 '중성적인 것 (le neutre중성적인 것프랑스어)'이라고 다양하게 지칭하는 경험의 문제를 다룬다. 하이데거와 달리, 블랑쇼는 죽음의 개념적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진정한 관계의 가능성을 거부한다. 그는 죽음을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 보며,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절대적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죽음을 본 것과는 달리 그 입장을 뒤집는다. 블랑쇼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의 경험', '불가능한 경험'으로 논한 초기 세대에 속한다. 이는 죽음 속에서 '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나'가 죽는 능력을 잃는다는 그의 생각과 연결된다.
블랑쇼는 또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책임 문제에 관해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개인이 죽음을 이해하고 정당하게 돌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개념적 가능성을 거부한다. 그는 『문학 공간』 이후 나치즘에 가담했던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우정』 등에서의 우정에 대한 논고,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의 공동체 및 공동성에 대한 사색 또한 중요하다. 현대 사상에서 주체 비판과 그 이후의 사상이 나아갈 방향을 각 사상가가 논한 평론집 『주체 이후에 누가 오는가?』에도 참여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중요한 논점을 제시했는데,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양가적인 태도를 취했다. 다니엘 벤사이드는 『우정』에서 블랑쇼가 카를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과거의 많은 주석이나 명제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칭찬했다. 자크 데리다 또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블랑쇼가 제기한 문제를 논했다. 말년에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 및 유대 사상에 대한 경도를 강화하여, 미셸 푸코가 『자기 돌봄』 등의 저작과 강의에서 고대 그리스를 다룬 것에 대해, 그것이 히브리일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고 기록했다.
3.3. 글쓰기 방식과 장르 해체
블랑쇼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 전통적인 소설과 철학적 탐구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다. 그의 초기 소설 『토마 알 수 없는 자』, 『아미나다브』, 『지극히 높은 자』 등에서는 장 지로두와 카프카의 영향이 엿보이며, 일견 소설적 형식을 따르면서도 이미 기존 사실주의로부터의 일탈과 전복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이들 작품에서 주인공이 겪는 방랑과 우여곡절은 블랑쇼의 문학 비평에서 말하는 '글쓰는 이의 방랑'이나 '죽음을 통과하는 것'과 상응한다고 보는 평자들도 있다.
『죽음의 선고』 이후에는 전통적인 사실주의로부터의 이탈이 더욱 심화되고, 작품의 간결화 및 간명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점차 등장인물의 고유명이 명시되지 않는 경향이 강해진다. 1950년에 간행된 『토마 알 수 없는 자』 개정판에서는 상당한 분량의 삭제와 단축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작풍의 변화가 전형적으로 나타난다고 평가된다. 이름 모를 1인칭 화자에 의한 회상 형식의 작품들이 이어지면서 작품의 심화는 더욱 진행되어, 『기다림 망각』에서는 이야기 자체가 단편화, 단장화되고 그 안에서 이름 없는 남녀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형태를 취한다. 말년의 마지막 작품인 『나의 죽음의 순간』에서는 화자 자신의 물음을 담은 간결한 필치로 한 남자가 총살당할 뻔한 경험(블랑쇼 자신의 실제 경험)이 기록되었다.
블랑쇼는 1970년대까지 글쓰기에서 일반적으로 다른 '장르'나 '경향'으로 인식되는 것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그의 후기 작품 대부분은 서술과 철학적 탐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독자적인 장르 해체적 글쓰기를 선보였다.
4. 주요 저서
모리스 블랑쇼는 소설, 이야기, 철학 및 이론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저작 활동을 펼쳤다. 다음은 그의 주요 작품들이다.
4.1. 소설 및 이야기
블랑쇼의 소설들은 전통적인 서사 방식을 벗어나, 언어와 존재의 심연을 탐구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준다.
연도 | 제목 | 원제 (프랑스어) | 특징 |
---|---|---|---|
1941 | 토마 알 수 없는 자 | Thomas l'Obscur토마 알 수 없는 자프랑스어 | 독서와 상실의 경험에 대한 불안정한 이야기. 1950년 개정판에서 크게 수정됨. |
1942 | 아미나다브 | Aminadab아미나다브프랑스어 | |
1948 | 죽음의 선고 | L'Arrêt de mort죽음의 선고프랑스어 | |
1949 | 지극히 높은 자 | Le Très-Haut지극히 높은 자프랑스어 | |
1951 | 희망할 때 | Au moment voulu오 모망 불뤼프랑스어 | |
1951 | 영원한 되풀이 | Le ressassement éternel르 르사스망 에테르넬프랑스어 | |
1953 | 나를 동반하지 않은 자 | Celui qui ne m'accompagnait pas셀뤼 키 느 마콩파녜 파프랑스어 | |
1957 | 마지막 사람 | Le Dernier Homme르 데르니에르 옴프랑스어 | |
1962 | 기다림 망각 | L'Attente, l'oubli라탕트, 루블리프랑스어 | 이야기 자체가 단편화되고 단장화된 형식을 취하며 이름 없는 남녀의 대화가 진행됨. |
1973 | 백일의 광기 | La Folie du jour라 폴리 뒤 주르프랑스어 |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작품. |
1983 | 사후적으로 | Après Coup, précédé par Le ressassement éternel아프레 쿠프, 프레세데 파르 르 르사스망 에테르넬프랑스어 | |
1994 | 나의 죽음의 순간 | L'Instant de ma mort랭스탕 드 마 모르프랑스어 | 자신이 총살당할 뻔했던 경험을 간결하고 신중한 문체로 기록한 단편. |
4.2. 철학 및 이론서
블랑쇼의 철학 및 이론서들은 문학, 죽음, 책임, 공동체 등 다양한 철학적 개념을 탐구하며 현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연도 | 제목 | 원제 (프랑스어) | 주요 내용 및 특징 |
---|---|---|---|
1942 |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 Comment la littérature est-elle possible ?코망 라 리테라튀르 에텔 파시블 ?프랑스어 | |
1943 | 헛걸음 | Faux Pas포 파프랑스어 | |
1949 | 불의 몫 | La Part du feu라 파르 뒤 푸프랑스어 | '문학과 죽음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 주요 이론적 작품. |
1949 | 로트레아몽과 사드 | Lautréamont et Sade로트레아몽 에 사드프랑스어 | |
1955 | 문학 공간 | L'Espace littéraire레스파스 리테레르프랑스어 | 글쓰기, 에크리튀르, 죽음, '비인칭적 죽음', '문학 공간' 등을 논하며 현대 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
1958 | 라스코의 짐승 | La Bête de Lascaux라 베트 드 라스코프랑스어 | |
1959 | 다가올 책 | Le Livre à venir르 리브르 아 브니르프랑스어 | |
1969 | 무한한 대화 | L'entretien infini랑트르티앙 앵피니프랑스어 | |
1971 | 우정 | L'amitié라미티에프랑스어 | |
1973 | 저 너머로의 발걸음 | Le pas au-delà르 파 오 들라프랑스어 | |
1980 | 재앙의 글쓰기 | L'écriture du désastre레크리튀르 뒤 데자스트르프랑스어 | |
1981 |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 De Kafka à Kafka드 카프카 아 카프카프랑스어 | |
1983 |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La communauté inavouable라 코뮈노테 이나부아블프랑스어 | 장 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 영감을 주었음. |
1984 | 마지막으로 말하는 사람 | Le dernier à parler르 데르니에르 아 파를레프랑스어 | |
1986 | 미셸 푸코, 내가 상상하는 대로 | Michel Foucault tel que je l'imagine미셸 푸코 텔 크 주 르 리마진프랑스어 | |
1987 | 조에 부스케 | Joë Bousquet조에 부스케프랑스어 | |
1992 | 다른 곳에서 온 목소리 | Une voix venue d'ailleurs - Sur les poèmes de LR des Forêts윈 부아 브뉘 다이외르 - 쉬르 레 포엠 드 엘 에르 데 포레프랑스어 | 2002년에 신판 출간. |
1996 | 우정을 위하여 | Pour l'amitié푸르 라미티에프랑스어 | |
1996 | 묻는 지식인 | Les intellectuels en question레 장텔렉튀엘 앙 케스통프랑스어 | '어떤 성찰의 각서'라는 부제가 붙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사유. |
1999 | 앙리 미쇼 혹은 갇힘의 거부 | Henri Michaux ou le refus de l'enfermement앙리 미쇼 우 르 르퓌 뒤 랑페르므망프랑스어 | |
2003 | 정치 평론 1958-1993 | Ecrits politiques (1958-1993)에크리 폴리티크 (1958-1993)프랑스어 | 전후 좌파적 정치 활동에 대한 그의 글들을 묶은 것. |
2007 | 주르날 데 데바의 문학 연대기 | Chroniques littéraires du "Journal des Débats"크로니크 리테레르 뒤 주르날 데 데바프랑스어 | |
2009 | 바딤 코조보이에게 보내는 편지 (1976-1998) | Lettres à Vadim Kozovoï (1976-1998)"레트르 아 바딤 코조보이 (1976-1998)프랑스어 | |
2010 | 비판적 조건. 기사, 1945-1998 | La Condition critique. Articles, 1945-1998"라 콩디시옹 크리티크. 아르티클, 1945-1998프랑스어 | |
2007 | 책의 부재 | L'absence de livre랍상스 드 리브르프랑스어 |
5. 평가와 영향
모리스 블랑쇼는 20세기 프랑스 사상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과 철학적 개념들은 후대 사상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정치적 견해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5.1. 현대 사상에 대한 영향
블랑쇼의 작업은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뤽 낭시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미셸 푸코는 청년 시절을 회고하며 "나는 블랑쇼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으며, 『외부의 사유』 등의 저작에서 블랑쇼를 언급했다. 질 들뢰즈는 "블랑쇼야말로 죽음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자크 데리다 또한 문체에서부터 블랑쇼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체류』나 『경계들』 등의 저작에서 블랑쇼에 대해 언급했다. 특히 데리다의 『체류』는 블랑쇼의 『나의 죽음의 순간』에 영감을 받아 그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또한, 장 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는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
블랑쇼의 친구였던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블랑쇼에 관한 논고(『모리스 블랑쇼』로 출판)를 발표하며 그의 사상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일본의 철학자 다나베 하지메 또한 말년에 '말라르메론'을 집필할 때, 그 전 해에 출판된 블랑쇼의 『문학 공간』을 입수하여 정독했다.
블랑쇼의 글쓰기 행위는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와 함께 현대 사상에서 '에크리튀르' 문제의 전경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의 문학 비평은 누벨 로망 논쟁에서 알랭 로브그리예를 옹호하는 등 20세기 후반 문학의 새로운 전개와 그 평가 확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블랑쇼의 영어 번역가들, 예를 들어 리디아 데이비스, 폴 오스터, 피에르 조리스 등은 그들 스스로도 명망 있는 산문 작가이자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5.2. 비판과 논란
모리스 블랑쇼와 그의 초기 반유대주의, 극우파와의 관계는 여러 차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30년대에 그가 선택한 정치적 노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특히 프랑스 해방 시기에 그가 보여준 태도, 그리고 이후 공산주의 및 극좌파에 참여한 행보로 인해 상쇄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피에르 앙드뢰는 블랑쇼가 대독 협력파 피에르 도리유 라 로셸의 비서로 일했던 점을 들어 그의 '전향'에 대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블랑쇼의 초기 극우 저널리즘과 반유대주의적 입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계속해서 존재하며, 제프리 메일먼의 『거장들의 성흔』과 같은 연구들은 그의 초기 행적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블랑쇼는 자신의 초기 정치적 견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지적 매력을 비판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침묵을 문제 삼는 등 과거와 단절된 비판적 입장을 명확히 했다.
5.3. 유산
모리스 블랑쇼의 사상과 작품은 1950년대와 1960년대 프랑스 문화 전반에 걸쳐 이른바 '프랑스 이론'의 대표 인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특히 언어의 본질, 죽음의 현상학, 그리고 글쓰기의 주체성 상실이라는 개념을 통해 문학과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일생에 걸친 현대 문학 전통에 대한 꾸준한 옹호와 알제리 전쟁 및 68운동 참여는 그의 사회적 참여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으며, 특히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에게는 사유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