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랑스의 시인 Georges-Maurice de Guérin du Cayla조르주 모리스 드 게랭 뒤 카일라프랑스어 (1810년 8월 4일 ~ 1839년 7월 19일)는 자연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강렬하고 이교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시에 담아낸 작가이다. 그는 생전에는 작품을 출판하지 못했으며, 많은 시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산문시인 《인마 (Le Centaure)》와 《바칸테 (La Bacchante)》, 그리고 일기인 '녹색 수첩'이 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한 로마 가톨릭 환경에서 교육받았으며, 일시적으로 급진적인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파리로 돌아와 문학 활동에 전념하다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사후 조르주 상드와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 그리고 여동생인 외제니 드 게랭의 노력으로 그의 작품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루이 베르트랑과 함께 "근대 산문시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며 프랑스 문학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조르주 모리스 드 게랭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삶은 종교적 배경과 문학적 열정, 그리고 젊은 나이에 찾아온 질병으로 특징지어진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조르주 모리스 드 게랭은 1810년 8월 4일 프랑스 타른주 앙딜락에 위치한 르 카일라 성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한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으며, 여동생 외제니 드 게랭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툴루즈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고, 이후 파리의 콜레주 스타니슬라스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 친구가 된 쥘 바르베 도르빌리를 만났다.
2.2. 종교적 참여와 초기 경력
1831년 콜레주 스타니슬라스를 졸업한 후, 게랭은 전통적인 종교 생활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브르타뉴로 건너가 위그 펠리시테 로베르 드 라므네가 설립한 급진적 기독교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그러나 1833년 라므네가 성좌와 갈등을 겪으면서 해당 단체는 해체되었고, 라므네와 게랭은 기독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이후 게랭은 파리로 이주하여 1834년부터 교직에 취임하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2.3. 말년과 질병
파리로 이주한 후 게랭은 《바칸테》와 《인마》 등 두 편의 주요 산문시를 창작했다. 그러나 1837년 그는 병에 걸렸고, 1838년에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같은 해 11월, 그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귀족 여성 카롤린 드 제르뱅과 중매결혼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병이 악화되었고, 1839년 7월 19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많은 시들을 파괴했으며, 그의 생전에는 단 한 편의 작품도 출판되지 못했다.
3. 문학 작품
모리스 드 게랭의 문학은 깊은 자연 사랑과 독특한 시적 스타일로 특징지어지며, 그의 사후에야 그 진가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3.1. 시적 스타일과 주제
모리스 드 게랭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강렬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이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수준에 달했다. 그의 시는 이교적 요소와 결합되어 더욱 풍부해졌다. 그는 자연과 풍경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보였고, 이는 그의 서정적인 작품들에서 잘 드러난다.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는 그에 대해 프랑스의 어떤 시인이나 화가도 게랭만큼 "자연에 대한 느낌, 사물의 기원과 생명의 주권적 원리에 대한 느낌"을 잘 표현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는 생전에 약 40여 편의 운문 습작과 여러 편의 산문 시를 남겼다.
3.2. 주요 저작
게랭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두 편의 산문시 《인마 (Le Centaure)》와 《바칸테 (La Bacchante)》이다. 이 외에도 그는 '녹색 수첩'으로 알려진 일기를 남겼는데, 이는 그의 내면세계와 문학적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쓴 많은 시들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현존하는 작품 수는 그리 많지 않다.
4. 사후 출판과 유산
모리스 드 게랭의 문학적 유산은 그의 사망 이후 가족과 지인들의 노력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4.1. 작품의 확산
게랭이 남긴 작품들은 그의 가족과 지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그의 일기는 독특한 여정을 겪었다. 그의 일기는 한 친구와 함께 미국 루이지애나주와 앨라배마주까지 건너갔다가 다시 프랑스 캉으로 돌아와 1944년의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아 보존될 수 있었다.
4.2. 주요 출판물
모리스 드 게랭의 작품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것은 그의 사망 이듬해인 1840년이었다. 조르주 상드는 《두 세계 평론 (Revue des deux Mondes)》에 게랭의 추모 기사를 발표하며, 그 안에 그의 산문 작품 한 편과 짧은 시 한 편 등 두 개의 단편을 수록했다. 20년 후인 1861년에는 G. S. 트레뷔티앵이 그의 일기와 다수의 서간 및 시를 포함한 《유작집 (Reliquiae)》을 편집하여 출판했다. 이 책에는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의 전기 및 비평적 서문이 함께 실렸다. 1862년에는 《일기, 서간집 및 시집 (Journal, lettres et poèmes)》이라는 새로운 판이 출판되었고, 이 책의 영어 번역본은 1867년 레이폴트 앤드 홀트에 의해 출간되었다. 그의 여동생인 외제니 드 게랭 또한 오빠의 사망 후 그의 작품 일부를 출판하는 데 기여했다.
4.3. 비평적 평가와 영향
모리스 드 게랭은 사후에야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특히 루이 베르트랑과 함께 "근대 산문시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서정적인 표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당시 프랑스 문학에서 보기 드문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후대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 산문시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놓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