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메리 루이스 부스(Mary Louise Booth, 1831년 4월 19일~1889년 3월 5일)는 19세기 미국 문학과 출판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향력 있는 편집자, 번역가, 작가이다. 1831년에 태어난 그녀는 1867년 창간부터 1889년 사망할 때까지 여성 패션 잡지 『하퍼스 바자』의 초대 여성 편집장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경력은 놀라운 독학, 방대한 번역 작업, 그리고 남성 중심적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선구자적인 정신으로 특징지어진다. 미국 남북전쟁 기간 동안 그녀는 친연방 프랑스 문학을 빠르고 영향력 있게 번역함으로써 연방의 대의를 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과 찰스 섬너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으로서 그녀의 리더십은 잡지를 매우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간행물로 변화시켰고, 한 세대의 가정생활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녀를 당시 미국에서 가장 높은 급여를 받는 여성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메리 루이스 부스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으며, 그녀의 가족 배경은 그녀의 학문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메리 루이스 부스는 1831년 4월 19일 뉴욕주 야팽크(당시 밀빌)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매우 조숙한 아이로 평가받았는데, 프랑스어나 영어를 읽는 법을 배운 기억이 말하는 법을 배운 기억보다 더 없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책을 읽어달라고 졸랐고,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성경을 완독했다. 어린 나이에 플루타르코스를 읽었으며, 일곱 살에는 장 라신의 원문을 익힌 후 아버지와 함께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놀이보다는 책에 몰두하는 지칠 줄 모르는 독서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고, 부스는 열한 살이 되기 전 데이비드 흄, 에드워드 기번, 아치볼드 앨리슨 등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섭렵했다.

부스는 학교에 다녔지만, 스스로 학습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적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 우연히 프랑스어 입문서를 접하며 프랑스어를 독학으로 익혔고, 프랑스어 단어와 영어 단어를 비교하며 공부를 이어갔다. 나중에는 같은 방식으로 독일어도 독학으로 습득했다. 이처럼 독학으로 언어를 익혔기 때문에 직접 해당 언어를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나중에는 프랑스어나 독일어 서적을 거의 모두 영어로 소리 내어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그녀는 언어와 자연과학에 매우 능숙했으며 다른 학문보다 이 분야에 더 관심을 가졌다.
2.2. 가족 배경
메리 루이스 부스의 부모는 윌리엄 채트필드 부스(William Chatfield Booth)와 낸시 몬스웰(Nancy Monswell)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프랑스 혁명 난민의 손녀로 프랑스계 혈통이었으며, 80세까지 장수했다. 아버지는 1649년 미국에 정착한 초기 정착민인 존 부스(John Booth)의 후손으로, 조지 부스 경과 친척 관계였다. 1652년, 존 부스는 쉘터 아일랜드를 아메리카 원주민으로부터 91 m (300 ft)의 칼리코에 구입했다. 이 가족은 적어도 200년 동안 그 지역 근처에 머물렀다. 윌리엄 채트필드 부스는 한동안 뉴욕의 여러 대형 상가에 야간 감시원을 제공했으며, 오후 9시부터 아침 7시까지 직접 이들을 감독했다.
메리 루이스 부스 외에 한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아들은 훗날 군대에서 20년간 복무한 찰스 A. 부스 대령이었다. 윌리엄 채트필드 부스는 딸의 지적 능력과 교육에 깊이 관여했으며, 훗날 그녀가 경제적 자립을 이룬 후에도 그녀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항상 관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3세경, 가족은 야팽크에서 뉴욕 브루클린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브루클린 최초의 공립학교를 설립했으며, 메리도 아버지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도왔다.
3. 교육 및 초기 경력 준비
메리 루이스 부스는 정규 교육을 넘어선 독학을 통해 자신만의 직업적 길을 개척하며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3.1. 뉴욕 이주와 자립
메리 루이스 부스는 18세에 문학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겠다는 강한 결심을 가지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4남매 중 장녀였던 그녀는 다른 형제들에게도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공평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녀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의 주요 목표를 스스로 결정했다.
뉴욕으로의 이주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조끼 제조업을 하는 친구로부터 기술을 배웠다. 그녀는 뉴욕 시에 작은 방을 얻어 살았고, 당시 윌리엄스버그와 뉴욕 간의 통신이 매우 느려 왕복하는 데 세 시간 이상이 걸렸기 때문에 일요일에만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은 그녀의 문학 활동에 큰 공감을 보이지 않았지만, 부모님 집에는 항상 그녀를 위한 방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소박하게나마 뉴욕에서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는 아버지의 도움 없이 자립하는 첫걸음이었다.
3.2. 초기 문학 활동
뉴욕으로 이주한 후, 메리 루이스 부스는 저녁 시간을 공부와 글쓰기에 바쳤다. 그녀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 이야기와 스케치를 기고했지만, 이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은 받지 못했다. 대신 교육 및 문학 저널에 대한 보도와 서평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때도 돈 대신 가끔 책으로 보상을 받는 것을 행복해했다. 그녀는 "이것은 나의 대학이고, 나는 보수를 요구하기 전에 내가 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문학 활동에 매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점점 더 많은 문학적 의뢰를 받았고,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는 친구들의 폭이 넓어졌다. 30세가 되던 해, 그녀는 현대 산부인과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이 마리온 심스 박사의 amanuensis아마누엔시스영어(글을 받아쓰거나 옮기는 직책) 자리를 수락했는데, 이는 그녀가 꾸준한 급여를 받은 첫 직업이었다. 이로써 그녀는 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뉴욕에서 자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4. 문학 경력 및 번역 활동
메리 루이스 부스는 다양한 저술 및 번역 활동을 통해 전문 작가이자 번역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4.1. 초기 저술 및 번역
메리 루이스 부스는 프랑스어 서적 번역으로 초기 문학 경력을 시작했다。 1856년에는 프랑스어 원본을 번역한 『대리석 작업자 매뉴얼』(The Marble-Worker's Manual)과 『시계 및 시계 제작자 매뉴얼』(The Clock and Watch Maker's Manual)을 뉴욕에서 출판했다. 또한 『에머슨 잡지』(Emerson's Magazine)에 조제프 메리의 『앙드레 셰니에』(André Chénier)와 에드몽 프랑수아 발렝탕 아부의 『산의 왕』(The King of the Mountains)을 번역하여 기고했으며, 자신의 독창적인 기사도 게재했다. 1859년에는 빅토르 쿠쟁의 『프랑스 궁정의 비밀 역사: 또는 마담 드 셰브뢰즈의 삶과 시대』(Secret History of the French Court: or, Life and Times of Madame de Chevreuse)를 번역했다. 이듬해에는 올랜도 윌리엄스 와이트를 도와 프랑스 고전 번역 시리즈를 작업했으며, 아부의 『제르멘』(Germaine)을 보스턴에서 번역 출판했다.

같은 해,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인 『뉴욕시의 역사』(History of the City of New York) 초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방대한 연구의 결과물이었으며,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소유물이었다. 한 친구가 뉴욕시의 완전한 역사가 아직 쓰이지 않았고 학교용으로 적합한 역사서를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한 것이 이 책의 집필 계기가 되었다. 부스는 이 작업을 시작하며 수년간 준비에 몰두했고,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더욱 중요한 작품으로 발전시켰다. 그녀는 식민지와 국사의 많은 감동적인 사건들이 뉴욕의 역사와 연관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이 작업에 임했다. 집필 과정에서 부스는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워싱턴 어빙은 그녀에게 진심 어린 격려 편지를 보냈고, D. T. 발렌타인, 헨리 B. 도슨, 윌리엄 존 데이비스, 에드먼드 베일리 오캘러핸 등 수많은 인사가 문서와 도움을 제공했다. 역사가 벤슨 존 로싱은 그녀의 책에 대해 "뉴욕 시민들은 이 위대한 대도시의 삶에 대한 대중적인 이야기에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녀의 책은 역사에서 너무나 많은 중요한 사실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고 극찬했다. 『뉴욕시의 역사』는 한 권의 두꺼운 책으로 출판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상당한 금전적 보상도 안겨주었다. 출판사는 그녀에게 런던, 파리, 베를린, 빈 등 유럽 주요 수도들의 대중적 역사를 쓰기 위해 해외로 나갈 것을 제안할 정도로 그 성공에 만족했다.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의 발발과 기타 상황들로 인해 그녀의 해외 여행 계획은 무산되었다. 1867년에 『뉴욕시의 역사』 제2판이 출판되었고, 1880년에는 개정된 제3판이 나왔다. 이 작품의 대형 판본은 저명한 서적 수집가들이 소장했으며, 수천 장의 지도, 편지 및 기타 삽화로 9권까지 확장된 사본은 뉴욕시에 소유되어 있다. 부스 자신도 2천 개 이상의 삽화가 추가된 사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4.2. 남북전쟁 시기 역할
『뉴욕시의 역사』 초판 출간 직후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메리 루이스 부스는 항상 노예제도 반대론자이자 진보 운동의 지지자였으며, 연방의 대의를 돕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군 병원에서 간호사로 활동하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전쟁에 기여할 방법을 모색했다.
1861년, 그녀는 아제노르 드 가스파랭 백작의 프랑스어 저서 『위대한 인민의 봉기』(Un Grand Peuple Qui Se Releve위대한 인민의 봉기프랑스어, Uprising of a Great People)의 견본을 입수하자마자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즉시 찰스 스크리브너에게 번역본 출판을 제안했고, 스크리브너는 번역이 일주일 안에 완성된다면 기꺼이 출판하겠다고 답했다. 부스는 집에 돌아와 하루 20시간씩 일하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책 전체를 번역했고, 보름 만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북부 연방 지지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찰스 섬너 상원의원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섬너는 그녀의 작업이 "인간의 자유를 위해 한 모든 단체를 가치 있게 한 것"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작업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거의 받지 못했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부스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여러 프랑스어 서적들을 영어로 번역했다. 한때는 워싱턴 D.C.로 소환되어 정치가들을 위해 글을 쓰는 일을 돕기도 했으며, 이때는 호텔 숙식만 제공받았다. 이 시기에 그녀는 아버지에게 뉴욕 세관의 서기 자리를 마련해주어, 아버지가 해왔던 고된 야간 근무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4.3. 주요 번역 작품
남북전쟁 시기, 메리 루이스 부스는 연방의 대의에 유리한 프랑스 저명 작가들의 저서들을 활발히 번역했다. 그녀의 주요 번역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아제노르 드 가스파랭의 『유럽 이전의 아메리카』(America before Europe, 뉴욕, 1861년)
- 오귀스탱 코친의 『해방의 결과』(Results of Emancipation)와 『노예제의 결과』(Results of Slavery)(보스턴, 1862년). 이 번역으로 그녀는 링컨 대통령, 섬너 상원의원 등으로부터 찬사와 격려를 받았다. 코친의 작품은 가스파랭의 작품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에두아르 르네 드 라불라예의 『미국의 파리』(Paris in America, 뉴욕, 1865년)
- 가스파랭 백작 부인의 『저녁 기도』(Vesper), 『카미유』(Camille), 『인간의 슬픔』(Human Sorrows)
- 가스파랭 백작의 『행복』(Happiness)
- 앙리 마르탱의 『프랑스 역사』(Histoire de France). 특히 루이 14세 시대를 다룬 두 권은 1864년에, 원작 17권 중 마지막 두 권은 1866년에 『프랑스 군주제의 쇠퇴』(The Decline of the French Monarchy)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마르탱의 『프랑스 역사』 요약본 번역은 1880년에 출판되었다.
- 라불라예의 『요정의 책』(Fairy Book)
- 장 마세의 『요정 이야기』(Fairy Tales)
- 블레즈 파스칼의 『시골 벗에게 부치는 편지』(Lettres provinciales)
전쟁 내내 그녀는 코친, 가스파랭, 라불라예, 앙리 마르탱, 샤를 포르베 르네 드 몽탈렝베르 등 연방에 동조하는 유럽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프랑스 친구들이 그녀에게 보낸 문서들은 번역되어 유니언 리그 클럽에서 발행하는 팸플릿이나 뉴욕 저널에 게재되었다. 그녀의 번역 작품은 거의 40권에 달했다. 그녀는 조르주 상드의 방대한 『나의 삶의 역사』(Histoire de ma vie)를 요약 번역할 계획도 있었으나, 이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녀는 헨리 윈터 데이비스, 제임스 루드 둘리틀 상원의원, 갈루샤 A. 그로우, 프랜시스 리버 박사, 미국 위생 위원회 회장 벨 박사, 캐시어스 M. 클레이, 제임스 스피드 법무장관 등 수많은 정치가들로부터 수백 통의 감사 편지를 받았다. 특히 섬너 상원의원은 코친의 업적이 "한니발에게 누미디아 기병대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하며, 그녀의 번역이 가져온 영향력을 높이 샀다.
5. 하퍼스 바자
메리 루이스 부스는 『하퍼스 바자』의 초대 편집장으로서 잡지의 성공과 영향력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1. 창간 및 편집장으로서의 리더십
1867년, 메리 루이스 부스는 가정의 즐거움과 향상에 초점을 맞춘 주간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직을 맡으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는 그녀의 번역 및 저술 활동과는 성격이 달랐지만, 그녀의 경력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는 『하퍼스 바자』를 창간한 하퍼 형제들(James, John, Joseph, Fletcher Harper)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퍼 형제는 자신들의 이름을 딴 출판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해왔으며, 여성 패션 잡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했을 때 즉시 부스에게 편집장직을 제안했다. 부스는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확신이 없었으나, 결국 그 책임을 수락했고, 잡지가 그토록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주로 그녀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5.2. 영향력과 성공
메리 루이스 부스의 편집 관리 하에 『하퍼스 바자』는 기록적인 저널리즘적 성공을 거두며 수십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했다. 다른 신문사들은 처음에는 그녀의 능력을 저평가했지만, 잡지는 빠르게 성장했다. 그녀는 각 부서에 조수들을 두었지만, 전체 편집진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하퍼스 바자』는 순수성, 자존감, 높은 수준, 그리고 문학적 우수성 면에서 다른 정기 간행물들을 능가했다. 미국이나 영국의 시인, 이야기 작가, 소설가 중 이 잡지에 기고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잡지가 미국 가정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하퍼스 바자』는 항상 유익하고 즐거운 내용들을 다루었으며, 여성과 가족의 행복, 그리고 미덕을 최우선으로 삼아 건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부스는 거의 16년 동안 이 잡지의 칼럼을 통해 수많은 가정에 영향을 미쳤고, 한 세대의 가정생활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높은 급여를 받는 여성 중 한 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퍼스 바자』는 가정지로서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영향력과 발행 부수를 꾸준히 늘려갔으며, 부스의 성공은 그녀가 편집한 잡지의 성공과 함께 이루어졌다.

6. 사생활
메리 루이스 부스는 뉴욕에서 지식인 살롱을 운영하며 활발한 사교 생활을 했고, 오랜 동반자와 함께 삶을 공유했다.
6.1. 거주지와 사교계
메리 루이스 부스는 뉴욕시 센트럴 파크 근처에 자신이 소유한 집에서 거주했다. 그녀의 집은 손님 접대에 매우 적합했으며, 항상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매주 토요일 밤에는 그녀의 살롱에서 저명한 작가, 가수, 연주자, 음악가, 정치가, 여행가, 출판사 관계자, 언론인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이 모여 교류했다. 부스는 민감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섬세한 성격으로 묘사되었고, 변함없는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타인에게 봉사하거나 종속되지 않고 그들의 행복에서 만족을 찾았다.
6.2. 동반자
메리 루이스 부스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깊은 우정을 평생 동안 이어온 오랜 동반자 앤 W. 라이트 부인과 함께 거주했다.
7. 사망
메리 루이스 부스는 짧은 투병 끝에 1889년 3월 5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8. 업적 및 평가
메리 루이스 부스는 번역가, 작가, 그리고 편집장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남성 중심적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8.1. 주요 인물들의 찬사
메리 루이스 부스는 그녀의 탁월한 번역 및 편집 활동으로 당대 여러 주요 인물들로부터 폭넓은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미국 남북전쟁 시기, 그녀가 번역한 아제노르 드 가스파랭의 『위대한 인민의 봉기』는 찰스 섬너 상원의원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직접적인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섬너는 그녀의 번역이 "인간의 자유를 위해 한 모든 단체를 가치 있게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역사가 벤슨 존 로싱은 그녀의 저서 『뉴욕시의 역사』에 대해 "뉴욕 시민들은 이 위대한 대도시의 삶에 대한 대중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에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녀의 책은 역사에서 너무나 많은 중요한 사실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고 극찬했다.
또한, 오귀스탱 코친의 작품 번역으로도 링컨 대통령과 섬너 상원의원을 비롯한 여러 정치가들로부터 찬사와 격려를 받았다. 그녀는 헨리 윈터 데이비스, 제임스 루드 둘리틀 상원의원, 갈루샤 A. 그로우, 프랜시스 리버 박사, 미국 위생 위원회 회장 벨 박사, 캐시어스 M. 클레이, 제임스 스피드 법무장관 등 수많은 정치가들로부터 수백 통의 감사 편지를 받았다. 특히 섬너 상원의원은 코친의 업적이 "한니발에게 누미디아 기병대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녀의 번역이 전쟁의 대의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강조했다.
8.2. 여성 선구자로서의 위상
메리 루이스 부스는 19세기 중반 남성 중심적이었던 저널리즘 및 출판계에서 여성으로서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선구자였다. 그녀는 정규 교육보다는 독학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언어와 문학적 역량을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번역가, 작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퍼스 바자』의 첫 여성 편집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특히 『하퍼스 바자』 편집장으로서의 성공은 그녀를 당시 미국에서 가장 높은 급여를 받는 여성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잡지를 통해 한 세대의 가정생활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단순한 직업적 성공을 넘어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능력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부스는 자신의 재능과 헌신으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전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며 후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