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매슈 론 키오는 1955년 캘리포니아주 포모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학업을 거쳐 1973년 코로나 델 마르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야구 선수로서의 초기 단계를 밟았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내야수로 입단했으나, 마이너리그에서 투수로 전향하며 197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애슬레틱스 시절인 1978년 올스타전에 선정되었고, 1979년에는 2승 17패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다 연속 선발 무승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나, 1980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컴백상을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뉴욕 양키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카고 컵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 여러 팀을 거쳐 1987년 일본 프로 야구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 4시즌 동안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1992년 시범 경기 중 파울볼에 맞아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으며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 스카우트, 구단 임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야구계에 기여했다. 그의 사생활에서는 음주운전 관련 법적 문제와 건강 문제가 있었으며, 이는 뇌 부상과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키오는 2020년 5월 1일 64세의 나이로 폐색전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야구 선수로서의 성과와 더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생활을 통해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2. 선수 경력 초기
매트 키오의 출생과 성장 배경, 그리고 야구 선수로서의 초기 단계를 다룬다.
2.1. 유년기와 교육
키오는 1955년 7월 3일 캘리포니아주 포모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3년 캘리포니아주 뉴포트비치에 있는 코로나 델 마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 마티 키오와 삼촌 조 키오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프로 야구 선수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마티 키오는 1968년 NPB에서도 뛰었던 경험이 있다.
2.2. 초기 프로 경력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1973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7라운드에서 키오를 지명했다. 그는 원래 내야수로 오클랜드에 입단했으며, 팀을 떠난 살 반도를 대신하여 3루수를 맡을 예정이었다. 1975년 마이너리그 모데스토에서 뛰며 캘리포니아 리그 타격 선두를 기록했지만, 1976년 더블 A에서 실망스러운 0.210의 타율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76년 투수로 전향하게 되었고, 이듬해 오클랜드에 합류하며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다.
3.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MLB) 경력
매트 키오의 메이저리그 활동 기간, 소속 팀, 주요 성적 및 특이 사항들을 다룬다.
3.1.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대
키오는 197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1970년대 초반 월드 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던 애슬레틱스는 자유 계약 제도 도입 이후 레지 잭슨 등 황금기를 이끌었던 스타 선수들이 대거 이적하면서 팀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키오는 신인 시즌인 1978년 올스타전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8승 15패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자책 평균자책점 3.24를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1979년 시즌에는 개막 후 14연패를 당하는 등 2승 17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는 9월 5일에야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 전년도부터 이어진 28경기 연속 선발 무승이라는 메이저리그 기록을 세웠다. 이는 1916년 잭 네이버스와 톰 시핸이 기록했던 0.048, 0.059의 승률 이후 15패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최악의 승률인 0.105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 연속 무승 기록은 이후 클리프 커티스 (1910~1911)와 조조 레예스 (2008~2011)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키오는 1980년 시즌에 16승 13패를 기록하며 극적으로 부활했고, 아메리칸 리그 컴백상을 수상했다. 1981년 파업으로 단축된 시즌에는 10승 6패를 기록하며 오클랜드가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에서는 뉴욕 양키스에게 0대4로 패했지만, 8과 1/3이닝 동안 1자책점만을 내주는 호투를 펼쳤다.
키오는 1982년 다시 부진에 빠져 11승 18패로 아메리칸 리그 최다 패를 기록했다. 그는 또한 볼넷 허용(101개)이 삼진 (75개)보다 많았고, 홈런 허용(38개)과 자책점(133점)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일부 야구 역사가와 통계학자들은 1981년 시즌의 빌리 마틴 감독이 키오를 포함한 당시 로테이션 투수들을 과도하게 기용했다고 지적한다. 2006년 롭 네이어는 1981년 키오가 완투당 약 131개의 투구를 했다고 추정했는데, 이는 당시에도 젊은 투수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3.2. 이후 메이저리그 팀

1983년 시즌 중반, 애슬레틱스는 키오를 마셜 브랜트와 벤 캘러핸을 받는 조건으로 뉴욕 양키스에 트레이드시켰다. 부상으로 인해 팔 상태가 좋지 않았던 그는 두 시즌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시간을 보냈고, 1985년 늦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복귀했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트리플 A, 휴스턴 애스트로스, 시카고 컵스를 오가며 활약했다. 키오의 메이저리그 마지막 등판은 1986년 10월 2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이었다. 당시 마지막으로 상대한 타자는 이듬해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할 리처드 랜스였으며, 그를 1루 땅볼로 처리했다. 이때 키오의 팀 동료로 랜스의 타구를 처리한 1루수는 나중에 한신 타이거스에서 뛰게 되는 글렌 데이비스였고, 2루 주자는 자이언츠의 대주자로 2루 도루에 성공했던 댄 글래든이었다.
4. 일본 프로 야구 (NPB) 경력
매트 키오는 1987년 일본 프로 야구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1990년까지 활약했다. 약화된 한신 투수진 속에서 오픈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입단 1년 만에 곧바로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다.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입단 첫해에 개막전 선발을 맡은 외국인 투수는 키오가 처음이었다 (한신에서는 1965년 진 바키 이후 두 번째).
키오는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한신 재적 기간 동안 2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4번째 부자 홈런 달성자 기록이기도 하다. 두 번째 홈런은 1989년 5월 23일 후쿠이 현영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 스기모토 마사시로부터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그는 직구와 커브를 주무기로 4년 동안 한신에 몸담으며, 당시 타선 지원이 부족했던 팀 상황에서도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특히 1989년에는 15승)를 포함하여 총 45승을 거두었다. 이는 1985년 우승 이후 최하위로 떨어지는 등 침체기에 있던 한신 투수진에게 몇 안 되는 희망적인 요소였다.
1990년에도 큰 기대를 받았지만, 오픈전 등판 중 다리 부상을 입어 출전이 늦어졌고, 결국 7승에 그치면서 자유 계약 신분이 되었다. 당시 나카무라 카쓰히로 감독은 키오의 실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카무라 감독은 1990년 감독 부임 초기부터 키오를 방출할 생각이었으나, 한 시즌 15승을 올리는 투수를 자를 수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오카다 아키노부는 함께 뛰었던 외국인 투수 중 가장 인상 깊은 선수로 키오를 꼽으며, 특히 그의 커브가 일품이어서 키오가 등판하면 "오늘 경기는 이길 수 있겠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키오는 아버지 마티 키오가 난카이 호크스에서 뛰던 시절 일본에 머물렀던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ちょっとマット・キーオ(待っときいよ)조토 맛토 키오 (맛토키이요)일본어"(잠깐 기다려라)와 같은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일본에 있을 때 어린이 프로그램인 『ひょっこりひょうたん島횻코리 효탄지마일본어』(어리둥절 표주박섬)를 즐겨 보았으며, 특히 돈 가바초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올스타전 휴가 기간에는 가족들과 함께 미야자키 여행을 갔는데, 이 기간 동안 단 한마디의 영어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5. 경력 종료 부상
1991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소속으로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메이저리그 복귀를 시도했지만, 로스터에 들지 못했다. 1992년 3월, 그는 다시 에인절스와 계약하여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합류했으나, 시범경기 중 더그아웃에 앉아 다음 등판을 기다리던 중 충격적인 사고를 당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존 패터슨이 친 파울볼에 오른쪽 관자놀이를 직접 맞았다. 이 사고로 키오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머리에서 혈액 응고를 제거하는 긴급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부상으로 인해 그의 선수 경력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이 부상 이후 그는 트리플 A 에드먼턴 트래퍼스에서 뛰었다.
6. 은퇴 후 경력
선수 경력을 마감한 후 키오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순회 투수 코치와 구단 임원으로 일했다. 이후 그는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의 스카우트로 활동했으며, 다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임원으로 복귀했다.
2005년에는 애슬레틱스의 GM 보좌로 활동했으며 (당시 감독은 주니치 드래곤즈 출신 켄 모카였다), 그는 일본 야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2004년 오프 시즌 FA를 선언한 야부 게이이치 투수의 영입을 애슬레틱스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입단시켰다.
키오는 간혹 스핏볼을 던지기도 했다。 한 번은 그의 스핏볼이 역효과를 냈다. 키오가 던진 스핏볼을 보스턴 레드삭스 2루수 제리 레미가 완전히 놓쳐 삼진으로 보였다. 하지만 심판은 공의 엄청난 변화를 보고 레미가 파울을 쳤다고 판단하여 그는 두 스트라이크 상태로 타석에 남아 있었다. 다음 공에서 레미는 홈런을 쳤는데, 이는 그의 경력 마지막 홈런이었다.
마이클 루이스가 애슬레틱스를 배경으로 집필한 『머니볼』에는 팀 편성 회의 장면에서 키오의 이름이 한 번 언급되어 있다.
7. 개인 생활
매트 키오의 사적인 영역, 가족 관계, 법적 문제 및 건강 상태를 다룬다.
7.1. 가족 및 관계
키오는 1984년 배우이자 1980년 11월 『플레이보이』 이달의 플레이메이트였던 지나 토마시노와 결혼했다. 이들은 1990년대에 비공식적으로 별거를 시작했고, 2004년 법적으로 별거했으며, 2019년에 이혼했다. 키오와 그의 전 부인 지나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더 리얼 하우스와이프스 오브 오렌지 카운티』에 출연하기도 했다.
부부에게는 셰인, 카라, 콜튼 세 자녀가 있었다. 장남 셰인은 3대째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클래스 A 산하 팀인 스톡턴 포츠까지 진출했으나 2010년 방출되었다. 딸 카라는 미식축구 선수인 카일 보스워스와 결혼했다.
7.2. 법적 문제 및 건강
키오는 음주운전 관련 법적 문제로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다. 2005년에는 음주운전으로 인해 18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그는 빨간불에 정차해 있던 차량을 들이받고 도주하여 체포되었다. 2008년 12월에는 음주로 인한 보호관찰 위반으로 다시 18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10년에는 또다시 음주운전으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음주 경향은 1992년 시범 경기 중 파울볼에 맞아 발생한 머리 부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8. 사망
매트 키오는 2020년 5월 1일 64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사망했다. 5월 3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구단은 공식 트위터를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처음에는 사망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의 전 부인인 지나 키오가 폐색전증이 사망 원인이라고 밝혔다.
9. 유산과 평가
매트 키오의 야구 선수로서의 업적과 사회적 영향, 그리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종합적으로 제시한다.
9.1. 업적 및 긍정적 평가
매트 키오는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모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978년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80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컴백상을 수상하며 재기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1980년에는 개인 최다인 16승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일본 프로 야구 한신 타이거스에서는 1987년부터 1990년까지 4시즌 동안 팀의 에이스로서 마운드를 지켰다. 그는 한신 역사상 외국인 투수로는 이례적으로 첫해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으며,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1989년 15승)를 기록하는 등 총 45승을 올리며 침체기였던 팀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강속구와 특히 뛰어난 커브는 그를 상대하는 타자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한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활약은 JCB·MEP상 우수 투수 부문 수상으로도 인정받았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구단 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의 성장에 기여했으며, 특히 야부 게이이치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입단을 주선하는 등 일본 야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국제적인 교류에도 영향을 미쳤다.
9.2. 논란 및 비판
매트 키오는 뛰어난 야구 실력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에서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여러 차례의 음주운전 적발과 그로 인한 법적 처벌은 그의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5년에는 음주운전 중 교통사고를 내고 도주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에도 보호관찰 위반과 추가 음주운전으로 여러 차례 수감되는 등 반복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의 음주 경향이 1992년 시범 경기 중 머리에 입었던 심각한 부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선수 경력과 별개로 개인적인 책임감과 행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9.3. 등번호
매트 키오가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사용했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27 (1977년 ~ 1983년 중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34 (1983년 중반 ~ 1983년, 뉴욕 양키스)
- 33 (1985년 ~ 1986년 중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카고 컵스)
- 48 (1986년 중반, 시카고 컵스)
- 46 (1986년 중반 ~ 1986년, 휴스턴 애스트로스)
- 4 (1987년 ~ 1990년, 한신 타이거스)
9.4. 통산 성적
년도 | 팀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사구 | 승리 | 패배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회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77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7 | 6 | 0 | 0 | 0 | 1 | 3 | 0 | -- | .250 | 183 | 42.2 | 39 | 4 | 22 | 0 | 1 | 23 | 0 | 0 | 25 | 23 | 4.85 | 1.43 |
1978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32 | 32 | 6 | 0 | 1 | 8 | 15 | 0 | -- | .348 | 837 | 197.1 | 178 | 9 | 85 | 2 | 4 | 108 | 12 | 3 | 90 | 71 | 3.24 | 1.33 |
1979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30 | 28 | 7 | 1 | 0 | 2 | 17 | 0 | -- | .105 | 800 | 176.2 | 220 | 18 | 78 | 2 | 7 | 95 | 13 | 0 | 115 | 99 | 5.04 | 1.69 |
1980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34 | 32 | 20 | 2 | 1 | 16 | 13 | 0 | -- | .552 | 1041 | 250.0 | 218 | 24 | 94 | 3 | 5 | 121 | 13 | 2 | 94 | 81 | 2.92 | 1.25 |
1981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19 | 19 | 10 | 2 | 0 | 10 | 6 | 0 | -- | .625 | 579 | 140.1 | 125 | 11 | 45 | 0 | 0 | 60 | 5 | 2 | 56 | 53 | 3.40 | 1.21 |
1982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34 | 34 | 10 | 2 | 0 | 11 | 18 | 0 | -- | .379 | 946 | 209.1 | 233 | 38 | 101 | 1 | 5 | 75 | 10 | 3 | 144 | 133 | 5.72 | 1.60 |
1983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뉴욕 양키스 | 26 | 16 | 0 | 0 | 0 | 5 | 7 | 0 | -- | .417 | 456 | 99.2 | 109 | 19 | 51 | 1 | 2 | 54 | 3 | 1 | 71 | 59 | 5.33 | 1.61 |
1985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4 | 1 | 0 | 0 | 0 | 0 | 1 | 0 | -- | .000 | 43 | 10.0 | 10 | 0 | 4 | 1 | 1 | 10 | 0 | 0 | 5 | 5 | 4.50 | 1.40 |
1986 | 시카고 컵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 29 | 7 | 0 | 0 | 0 | 5 | 4 | 0 | -- | .556 | 272 | 64.0 | 58 | 9 | 30 | 4 | 2 | 44 | 6 | 2 | 31 | 28 | 3.94 | 1.38 |
MLB 합계: 9년 | 215 | 175 | 53 | 7 | 2 | 58 | 84 | 0 | -- | .408 | 5157 | 1190.0 | 1190 | 132 | 510 | 14 | 27 | 590 | 62 | 13 | 631 | 552 | 4.17 | 1.43 | |
1987 | 한신 타이거스 | 27 | 27 | 6 | 2 | 3 | 11 | 14 | 0 | -- | .440 | 696 | 168.0 | 162 | 24 | 43 | 4 | 5 | 119 | 7 | 0 | 79 | 71 | 3.80 | 1.22 |
1988 | 한신 타이거스 | 28 | 26 | 7 | 1 | 4 | 12 | 12 | 0 | -- | .500 | 742 | 179.2 | 174 | 16 | 37 | 0 | 8 | 97 | 4 | 0 | 65 | 55 | 2.76 | 1.17 |
1989 | 한신 타이거스 | 28 | 28 | 8 | 1 | 4 | 15 | 9 | 0 | -- | .625 | 828 | 201.0 | 203 | 19 | 39 | 0 | 2 | 110 | 8 | 0 | 90 | 83 | 3.72 | 1.20 |
1990 | 한신 타이거스 | 24 | 23 | 1 | 0 | 0 | 7 | 9 | 0 | -- | .438 | 592 | 129.2 | 153 | 15 | 53 | 4 | 4 | 72 | 5 | 0 | 80 | 72 | 5.00 | 1.59 |
NPB 합계: 4년 | 107 | 104 | 22 | 4 | 11 | 45 | 44 | 0 | -- | .506 | 2858 | 678.1 | 692 | 74 | 172 | 8 | 19 | 398 | 24 | 0 | 314 | 281 | 3.73 | 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