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말리크 카푸르의 출신 배경과 그가 노예가 된 과정, 그리고 델리 술탄국에서의 초기 복무를 통해 그의 성장 과정을 살펴본다.
1.1. 출신 및 포로 생활
말리크 카푸르는 원래 구자라트 지방의 힌두교도 출신이었다. 14세기 연대기 작가 이사미에 따르면 그는 मराठा마라타마라티어 계통이었다고 전해진다. 젊은 시절 카푸르는 캄바트의 부유한 크와자 소유의 노예였다. 그는 뛰어난 신체적 아름다움을 지닌 환관 노예로, 본래 주인이 그를 1000 Dinar에 구매했다고 알려져 이로 인해 '하자르-디나리'(هزار دیناری천 디나르의 남자페르시아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븐 바투타 (1304-1369)는 카푸르를 '알-알피'(الألفي천의 남자아랍어)라는 아랍어 별명으로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그에게 지불된 가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1000 Dinar이 지불되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이는 카푸르에 대한 은유적인 칭찬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서 술탄인 알라웃딘이 직접 그를 구매했다고 언급된 부분도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카푸르는 1299년 알라웃딘의 구자라트 침공 당시 알라웃딘의 장군 누스라트 칸에게 캄바트 항구 도시에서 포로로 잡혔다.
1.2. 이슬람 개종 및 초기 복무
포로가 된 카푸르는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누스라트 칸은 그를 델리에 있는 알라웃딘에게 바쳤다. 알라웃딘 휘하에서의 카푸르의 초기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러나 이사미에 따르면 알라웃딘은 카푸르를 총애했는데, 그 이유로 "그의 조언이 항상 적절하고 상황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푸르는 현명한 조언자이자 군사령관으로서의 입증된 능력 덕분에 빠르게 승진했다.
1306년 무렵, 카푸르는 당시 시종관이자 군사령관을 겸하던 직위인 바르베그(باربگ바르베그페르시아어)의 지위에 올랐다. 1309년에서 1310년 무렵에는 라프리의 이크타(행정 구역)를 소유하게 되었다.
2. 군사 경력
말리크 카푸르는 델리 술탄국의 영향력을 인도 전역으로 확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뛰어난 군사령관이었다.
2.1. 몽골 침입 격퇴
1306년, 알라웃딘은 말리크 카푸르에게 펀자브로 군대를 이끌고 침입한 차가타이 칸국의 몽골군을 격퇴하도록 명령했다. 몽골군은 라비강까지 진격하며 도중에 영토를 약탈하고 있었다. 이 몽골군은 코펙, 이크발만드, 타이-부 등이 이끄는 세 개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푸르는 기야수딘 투글루크를 비롯한 다른 사령관들의 지원을 받아 몽골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이 시기에 카푸르는 '나이브-이 바르바크'(نائبِ باربک행사의 부총관페르시아어)로 알려졌는데, 이는 그의 이름 '말리크 나이브'의 기원이 될 수도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이름이 나중에 맡은 더 중요한 직위인 '나이브-이 술탄'(نائبِ سلطان술탄의 부왕페르시아어)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16세기 연대기 작가 압둘 카디르 바다우니는 카푸르가 1305년 암로하 전투에서 알라웃딘의 군대를 이끌었다고 기록했으나, 이는 말리크 나야크(Malik Nayak말리크 나야크영어)라는 다른 장교를 말리크 카푸르와 착각한 오류로 간주된다.
2.2. 데칸 및 남인도 원정
말리크 카푸르는 이후 데칸 고원으로 파견되어 그 지역에 무슬림 세력의 기반을 다지는 일련의 대규모 군사 작전들을 지휘했다. 이 원정들을 통해 델리 술탄국은 막대한 부를 획득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2.2.1. 데바기리 정복
1307년, 알라웃딘은 데칸의 야다바 왕국 데바기리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야다바 왕국의 왕 라마찬드라가 3, 4년간 델리에 대한 공물 납부를 중단했기 때문이었다. 알라웃딘은 원래 치토르의 총독이었던 말리크 샤힌을 이 침공의 지휘관으로 선택할 계획이었으나, 말리크 샤힌이 인접한 구자라트 지역의 바겔라 왕조의 재건을 두려워하여 도주했기 때문에, 대신 카푸르를 임명했다.
알라웃딘은 카푸르를 다른 모든 장교들보다 높이 대우했다. 왕실 천막과 왕실 정자는 카푸르와 함께 보내졌으며, 장교들은 매일 카푸르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도록 지시받았다. 카푸르는 야다바 왕국을 쉽게 제압했다. 카푸르는 풍부한 전리품과 함께 라마찬드라 왕을 델리로 데려왔고, 야다바 왕은 알라웃딘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2.2.2. 와랑갈 정복
1309년, 알라웃딘은 카카티야 왕국으로 원정을 떠나는 카푸르를 파견했다. 카푸르의 군대는 1310년 1월 카카티야 왕국의 수도 와랑갈에 도착했고, 한 달간의 공성전 끝에 외성을 돌파했다. 카카티야의 통치자 프라타파루드라 2세는 항복하고 공물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카푸르는 1310년 6월 패배한 왕으로부터 얻은 막대한 양의 부와 함께 델리로 돌아왔다. 이때 코이누르 다이아몬드가 전리품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알라웃딘은 카푸르에게 매우 만족하며 그에게 아낌없이 보상했다.
2.2.3. 호이살라 및 판디아 왕국 원정
와랑갈에서 카푸르는 인도 최남단 지역들 또한 매우 부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알라웃딘의 허락을 받아 그곳으로 원정을 이끌었다. 1310년 10월 19일 원정대가 출발하여 인도 반도의 끝까지 도달했다. 1311년 2월 25일, 카푸르는 10,000명의 병력으로 호이살라의 수도인 도라삼드라를 포위했다. 호이살라의 왕 비라 발랄라 3세는 휴전 협상의 일환으로 막대한 부를 넘겨주었으며, 델리 술탄국에 연간 공물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도라삼드라에서 카푸르는 판디아 왕국으로 진격하여 여러 곳을 습격하며 막대한 보물과 코끼리, 말을 획득했다. 특히 남인도의 마바르 (타밀 지역)를 지배하던 판디아 왕국에서는 이미 내분이 발생하고 있었는데,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아와 자타바르만 비라 판디아 두 왕자가 왕위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순다라 판디아는 1310년 부왕 마라바르만 쿨라셰카라 판디아를 살해하고 왕좌를 차지했으나, 비라 판디아에게 수도 마두라이에서 쫓겨났고, 순다라 판디아가 말리크 카푸르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말리크 카푸르는 비라 판디아가 호이살라의 발랄라 3세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 원조 요청에 응했다.
1311년 3월 (일부 기록에는 1310년 말), 말리크 카푸르는 마바르의 판디아 왕국을 공격하여 마두라이를 공격하고, 도처를 약탈했다. 그러나 판디아 왕국의 지배자들이 출격하여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지 못했으며, 매년 공물을 받기로 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아 군사적으로는 실패한 원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원정을 통해 그는 치담바람 사원을 약탈하는 등 막대한 재보를 획득했다. 그는 라메스와람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모스크를 건설하고 알라웃딘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의 쿠트바를 낭독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말리크 카푸르는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남인도에서 델리로 향했으며, 바라니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해 초에 델리로 귀환했다고 하지만, 실제 이동 거리를 고려할 때 1311년 10월경에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에 대해 바라니는 코끼리 612마리, 대량의 금과 보석류, 말 20,000마리였다고 기록했다. 말리크 카푸르의 남방 원정의 주된 목적은 재화 획득이었으며 영구적인 지배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종속국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영토 확장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여러 나라에 매년 공물을 납부하게 하려면 매년 남방 원정이 필요했다.
2.3. 데바기리 총독 재임
1313년, 아마도 자신의 요청에 따라, 카푸르는 데바기리로 또 다른 원정을 이끌었다. 라마찬드라의 후계자인 싱하나(또는 샨카라데바)가 공물 납부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카푸르는 그를 진압하고 데바기리를 델리 술탄국에 합병시켰다. 그는 새로 합병된 영토의 총독으로 2년간 데바기리에 머물렀으며, 알라웃딘의 건강이 악화되자 델리로 급히 소환되었다. 카푸르는 이 기간 동안 지역을 동정적이고 효율적으로 통치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말리크 카푸르가 델리로 돌아오자, 새로운 통치자 하라팔라데바는 다시 할지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3. 정치적 부상 및 영향력
말리크 카푸르는 알라웃딘 할지 통치 후반부에 술탄국의 고위직으로 승진하며 그의 영향력이 급증하는 과정을 겪었다.
3.1. 나이브(부왕) 임명
카푸르는 최종적으로 술탄국의 최고위직 중 하나인 나이브(نائب부왕아랍어)의 지위에 올랐는데, 이 직위에 임명된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1315년, 알라웃딘이 중병에 걸리자 카푸르는 데바기리에서 델리로 소환되었고, 데바기리의 통치권을 아인 알-물크 물타니에게 인계했다.
3.2. 알라웃딘 할지와의 관계
카푸르는 1299년 할지 왕조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힌 후 알라웃딘의 눈에 들어 깊은 정서적 유대 관계를 발전시켰다. 알라웃딘은 통치 기간 동안 (병에 걸리기 전부터) 카푸르에게 깊이 빠져 있었으며, 다른 모든 친구나 조력자들보다 그를 더 아꼈고, 카푸르는 술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알라웃딘이 병들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 연대기 작가 지아우딘 바라니 (1285-1357)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술탄이 기억과 감각을 잃어가던 4~5년간, 그는 말리크 나이브(카푸르)와 깊고 미친 듯이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 쓸모없고, 배은망덕하며, 불경스러운, 남색가에게 정부의 책임과 하인들의 통제를 맡겼다."
바라니의 이러한 묘사를 바탕으로 루스 바니타와 살림 키드와이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알라웃딘과 카푸르가 동성애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가 바나르시 프라사드 삭세나는 알라웃딘이 통치 말년에 카푸르에게 매료된 것은 사실이나, 둘 사이의 관계가 성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는 다른 장교들과 달리 카푸르에게 가족이나 추종자가 없었기 때문에 술탄이 그를 더 신뢰했다고 주장한다. 이사미에 따르면 알라웃딘 통치 말기에는 카푸르가 아무도 술탄을 만나지 못하게 했으며, 사실상 술탄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고 한다.
3.3. 정치적 책략 및 경쟁자 제거
카푸르의 권력 장악은 알라웃딘의 사위이자 구자라트의 총독이었던 알프 칸과 같은 영향력 있는 귀족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알프 칸의 두 딸은 알라웃딘의 아들들인 후계자 히즐 칸과 샤디 칸과 결혼한 상태였다. 카푸르는 알라웃딘을 설득하여 알프 칸을 왕궁에서 살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는 또한 히즐 칸을 법정에서 암로하로 추방한 다음 괄리오르에 투옥시켰고, 히즐 칸의 이복형제인 샤디 칸도 투옥시켰다.
페르시아까지 퍼져나간 이야기에 따르면, 히즐 칸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알프 칸이 알라웃딘을 독살하여 히즐 칸이 새로운 술탄이 되도록 모의했으나, 알라웃딘이 죽기 전에 그들 모두를 처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븐 바투타에 의해 어느 정도 확인되기도 했으나, 이는 카푸르의 선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카푸르는 알라웃딘의 병상에서 중요한 장교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알라웃딘의 여섯 살 된 아들 시하부딘 오마르가 새로운 후계자로 선언되었고, 알라웃딘 사후 카푸르가 그의 섭정으로 활동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사미에 따르면 알라웃딘은 회의 중에 너무 약해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의 침묵은 동의로 간주되었다. 카푸르를 지지하는 장교들 중에는 카말 알-딘 구르그와 같이 카불 출신 가족을 둔 이들도 있었다. 카푸르와 다른 비-튀르크족 출신 장교들이 술탄국의 할지 계층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한 것으로 보인다.
4. 섭정 및 몰락
알라웃딘 할지 사후 말리크 카푸르는 섭정으로서 권력을 행사했으나, 그의 짧은 섭정 기간은 결국 비극적인 최후로 막을 내렸다.
4.1. 섭정직 수행
알라웃딘은 1316년 1월 4일 밤에 사망했으며, 카푸르는 그의 시신을 시리 포트 궁전에서 가져와 알라웃딘이 생전에 건설한 영묘에 안장했다. 바라니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카푸르가 알라웃딘을 살해했다고 기록했다.
알라웃딘이 죽은 다음 날, 카푸르는 궁전에서 중요한 장교들과 귀족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고(故) 술탄의 유언장을 낭독했는데, 그 유언장에는 히즐 칸을 폐위하고 시하부딘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카푸르는 이어서 시하부딘을 새 술탄으로 왕좌에 앉혔다. 섭정으로서 카푸르는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유지했는데, 바라니에 따르면 35일 동안, 이사미에 따르면 1개월 동안, 16세기 역사가 피리슈타에 따르면 25일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시리 포트의 하자르 수툰 궁전에서 매일 아침 의례적인 조회를 열었다. 짧은 의례 후 카푸르는 시하부딘을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고 조정 대신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는 1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장교들을 만나 여러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재무, 사무, 전쟁, 상업 부처에 알라웃딘이 확립한 법과 규정을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각 부처의 장교들은 모든 정책 문제에 대해 카푸르와 상의하도록 지시받았다.
4.2. 섭정으로서의 행적
카푸르는 왕좌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알라웃딘을 매장하기 전에 그는 술탄의 손가락에서 왕실 반지를 빼냈다. 그는 이 반지를 자신의 장군 숨불에게 주며, 반지를 왕실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하여 괄리오르로 진격하여 요새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숨불에게 요새의 총독을 델리로 보내고, 괄리오르에 투옥되어 있던 히즐 칸을 실명시킨 후 델리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숨불은 이 명령을 수행했고, 그 보상으로 '아미르-이 히잡'(أمير الحاجب신앙인의 사령관아랍어)으로 임명되었다. 섭정이 된 첫날, 카푸르는 또한 자신의 이발사에게 히즐 칸의 이복형제 샤디 칸의 눈을 멀게 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은 튀르크 귀족들 사이에서 카푸르에 대한 반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카푸르는 알라웃딘의 고위 왕비이자 '말리카-이 자한'(ملکہ جہاں세계의 여왕페르시아어) 칭호를 지녔던 술탄의 본처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나중에 그녀를 괄리오르 요새에 투옥했다. 그는 또한 알라웃딘의 또 다른 성인 아들인 무바라크 샤도 투옥했다. 피리슈타에 따르면, 카푸르는 시하부딘의 어머니이자 알라웃딘의 과부였던 자탸팔리(Jhatyapalli자탸팔리영어)와 결혼했다. 새 술탄의 의붓아버지가 됨으로써 카푸르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알프 칸의 살해는 구자라트에서 반란을 야기했고, 카푸르는 카말 알-딘 구르그를 보내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한편, 카푸르는 데바기리 총독인 아인 알-물크 물타니를 모든 병력과 함께 델리로 소환했다. 물타니가 오는 도중에 카말 알-딘은 구자라트에서 살해당했다. 카푸르는 이후 물타니를 구자라트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곳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반란은 카푸르가 죽은 후에야 진압될 수 있었다.
4.3. 암살
알라웃딘의 전 경호원들(파이크스)은 죽은 주인의 가족에 대한 카푸르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바시르, 바시르, 살레, 무니르가 이끄는 이 경호원들은 카푸르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카푸르가 자신을 향한 음모를 의심하게 되자, 그는 무바시르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알라웃딘 시절부터 왕실 내에서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무바시르는 칼로 카푸르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의 동료들은 이어서 방으로 들어와 카푸르를 참수했으며, 그를 보호하려던 2, 3명의 문지기도 살해했다. 이 사건은 1316년 2월경에 발생했다.

16세기 연대기 작가 피리슈타가 인용한 기록에 따르면, 카푸르가 일부 파이크스들을 보내 무바라크 샤의 눈을 멀게 하려 했으나, 포로가 된 왕자는 그들에게 자신의 보석 목걸이를 주며 대신 카푸르를 죽이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카푸르의 죽음을 그의 어머니가 신비주의자 샤이크자다 잠에게 올린 기도 덕분이라고 돌린다. 이러한 기록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다. 바라니의 거의 동시대적 기록에 따르면, 파이크스들은 그들 스스로의 주도하에 카푸르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카푸르의 암살자들은 무바라크 샤를 풀어주었고, 그는 새로운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몇 달 후, 무바라크 샤는 시하부딘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권력을 찬탈했다. 카푸르의 암살자들은 자신들이 왕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왕궁에서 높은 직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바라크 샤는 그들을 처형했다.
5. 유산 및 평가
말리크 카푸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반된다. 그의 행동과 유산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5.1. 역사적 평가
연대기 작가 바라니는 카푸르에 대해 심각하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카푸르를 "사악한 자"라고 묘사하며 그의 모든 행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역사가 에이브러햄 이랄리는 바라니의 카푸르에 대한 비판이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랄리는 바라니가 카푸르의 비-튀르크족 출신, 힌두교도 혈통, 그리고 환관이라는 지위 때문에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크 카푸르의 인도 남부 원정에서의 군사적 공헌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된다. 그의 원정으로 무슬림 군대가 처음으로 마두라이까지 도달했으며, 막대한 부를 델리로 가져왔다. 알라웃딘 할지 역시 그를 칭찬했으며, 이 원정으로 얻어진 막대한 전리품은 델리 술탄국의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장군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인도인 개종자 출신으로 출세하여 정권을 잡은 인물은 말리크 카푸르 이전에도 있었다. 노예 왕조의 귀족 이마드 우드 딘 라이한은 한때 기야수딘 발반을 실각시키고 섭정직에 오른 바 있다.
5.2. 무덤
말리크 카푸르의 무덤 위치는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영묘는 14세기에도 존재했으며, 술탄 피루즈 샤 투글루크 (재위 1351-1388)에 의해 보수되었다. 피루즈 샤의 자서전 푸투하트-이-피루즈샤히(فُتُوحَاتِ فِیْرُوْزْشَاہیFutuhat-i-Firuzshahi페르시아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술탄 알라웃딘의 위대한 재상 말리크 타지-울-물크 카푸르의 무덤. 그는 가장 현명하고 지적인 재상이었으며, 이전 군주들의 말이 발굽을 딛지 못했던 많은 국가들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술탄 알라웃딘의 쿠트바를 낭독하게 했다. 그는 52,000명의 기병을 거느렸다. 그의 무덤은 땅에 평평하게 되었고, 그의 묘비는 낮아져 있었다. 나는 그의 무덤을 완전히 보수하게 했는데, 그는 헌신적이고 충실한 신하였다."
6. 대중 문화
6.1. 영화에서의 묘사
2018년 볼리우드 영화 파드마바트에서 말리크 카푸르 역은 배우 짐 사르브가 맡아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