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키노 시로(牧野 四郎마키노 시로일본어, 1893년 4월 18일 ~ 1945년 8월 10일)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필리핀 레이테섬에 주둔한 제16사단의 사단장을 역임했다. 1944년 3월 사단장으로 부임한 이래, 레이테 전투에서 미군에 맞서 격렬한 저항을 펼쳤다. 전투가 일본군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사단이 사실상 괴멸되자, 그는 남은 병사 620여 명을 이끌고 자결을 택하며 전투의 책임을 졌다.
2. 생애 및 교육
마키노 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고위 장교로 성장하기 위한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마키노 시로는 1893년 4월 18일, 일본 가고시마현 히오키군 히가시이치키초(東市来町히가시이치키초일본어) 유노모토(湯之元유노모토일본어)에서 태어났다.
2.2. 군사 교육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길을 걸으며 여러 주요 군사 교육 기관을 거쳤다. 1910년 7월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학교를 제11기로 졸업했으며, 1912년 5월에는 도쿄 육군 중앙 유년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14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하고, 같은 해 12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18년 12월에는 일본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11월 제34기로 졸업하며 엘리트 군인의 길을 닦았다.
3. 군 경력
마키노 시로는 보병 장교로 임관한 이래 다양한 보직을 거치며 승진을 거듭했고, 참모 및 교육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초기 복무 및 승진
1914년 12월 보병 소위로 임관한 마키노 시로는 구마모토의 보병 제13연대에 배속되었다. 1918년 7월 보병 중위로 진급했으며, 1923년 8월에는 보병 대위로 승진했다. 대위 시절인 1923년 12월에는 교육총감부에 배속되어 초기 군무를 수행했다.
3.2. 참모 및 교육 관련 경력
마키노 시로는 여러 참모 및 교육 관련 직책을 맡으며 군사 행정 및 인재 양성에 기여했다. 1925년 7월에는 대만의 펑후섬 요새 참모와 마코 경비대 참모를 겸임했다. 1928년 7월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1930년 8월 보병 소령으로 진급한 뒤에도 1932년 12월 다시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했다. 1933년 8월 보병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육군대학교 병학 강사로 임명되어 군사 전략 및 전술 교육에 참여했다.
1935년 12월에는 제20사단의 고급 참모로 서울(京城게이조일본어)에 부임하여 중요한 참모 업무를 수행했다. 1937년 12월 보병 대령으로 진급하며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을 맡았고, 1939년 8월에는 근위사단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1940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5군 참모장을 역임하며 고위 참모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1941년 5월에는 육군 예과사관학교의 교수부장으로, 이어서 학교 간사로 근무했으며, 1942년 12월에는 육군 예과사관학교장으로 취임하여 군사 교육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3년 6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최종 진급했다.
3.3. 지휘관 경력
마키노 시로는 참모 및 교육 직책 외에도 실제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931년 12월 근위 보병 제4연대의 대대장을 맡아 부대 지휘 경험을 쌓았으며, 1938년 8월에는 보병 제29연대장으로 무단장시(牡丹江省무단장성일본어) 예허(掖河예허일본어)에 부임하여 연대 전체를 지휘했다.
3.4. 제16사단장
1944년 3월, 마키노 시로는 육군 예과사관학교장에서 이임한 직후 제16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임식에서 "꽃도, 열매도, 피도 눈물도 있는 무인이 되어라"라는 훈사를 남겼다. 제16사단은 필리핀 레이테섬에 배치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 중 하나인 레이테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4. 레이테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던 레이테 전투는 1944년 10월부터 12월까지 필리핀 레이테섬에서 벌어진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대규모 상륙 및 지상전이다. 마키노 시로가 지휘하는 제16사단은 이 전투에서 미군의 상륙에 맞서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레이테섬에 상륙한 미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을 몰아붙였다. 제16사단은 섬의 방어를 책임지는 주요 부대 중 하나였으나, 보급 부족과 미군의 맹공에 시달리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마키노 시로 중장은 사단장으로서 병사들에게 "내가 적탄에 쓰러지면,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셔 양식으로 삼고, 마지막 한 병사까지 레이테섬을 사수하여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훈사를 내리며 결사항전을 독려했다. 그러나 미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고, 사단은 점차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전투가 끝날 무렵, 제16사단은 620여 명의 병사만이 살아남을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5. 사망
레이테 전투에서 제16사단이 사실상 괴멸되자, 마키노 시로 중장은 사단장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택했다. 그의 사망은 1945년 8월 10일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황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병사들에게 마지막까지 레이테섬을 사수할 것을 독려하는 훈사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6. 평가 및 유산
마키노 시로의 군 경력과 레이테 전투에서의 행동은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일본 제국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능력 있는 장교로 평가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군의 비합리적인 항전 지시와 그로 인한 막대한 인명 피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특히 레이테 전투에서 그가 지휘한 제16사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군의 무모한 전략과 지휘관의 책임 문제를 상징하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의 어록은 그의 군인 정신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1944년 3월 육군 예과사관학교장 이임식에서는 "꽃도, 열매도, 피도 눈물도 있는 무인이 되어라"라는 훈사를 통해 인간적인 면모와 강인함을 동시에 강조했다. 또한 레이테 전투 중에는 병사들에게 "내가 적탄에 쓰러지면,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셔 양식으로 삼고, 마지막 한 병사까지 레이테섬을 사수하여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극단적인 내용의 사수 훈사를 내리며 당시 일본군의 광기 어린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그의 정확한 사망 날짜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일본의 군사 역사 기록인 『전사총서 레이테 결전』에서는 마키노 중장이 8월 10일경 자결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의 아들인 마키노 히로미치(牧野弘道마키노 히로미치일본어) 전 산케이 신문 편집위원은 이 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마키노 히로미치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의 전사 공보(公報) 상 사망일은 여러 정보를 종합하여 7월 15일로 기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의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과 개인적 증언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