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마크 잉글리스는 1959년 9월 27일 뉴질랜드 제럴딘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와 교육은 훗날 그의 다양한 경력의 기반을 다졌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잉글리스는 링컨 대학교에서 인간생화학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대학 졸업 후에는 백혈병 연구를 수행하는 등 과학 분야에서 그의 배경을 활용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1.2. 초기 산악 활동
1979년부터 잉글리스는 전문 산악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아오라키/마운트 쿡 국립공원에서 수색 및 구조 산악인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의 산악 기술과 위기 대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1982년 아오라키/마운트 쿡 사고
1982년 11월, 마크 잉글리스는 동료 산악인 필립 둘(Philip Doole필립 둘영어)과 함께 아오라키/마운트 쿡 등반 중 심각한 산악 사고를 겪었다. 격렬한 눈보라로 인해 두 사람은 13일에서 14일 동안 설동(눈 동굴)에 갇히게 되었다.
이들의 구조 작업은 뉴질랜드의 주요 언론 사건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잉글리스와 둘 모두 다리에 심한 동상을 입었다. 구조된 후 잉글리스는 양쪽 다리를 무릎 아래 14 cm 지점에서 절단해야 했다. 이 사건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그의 경력과 업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절단 후 경력 및 업적
두 다리 절단이라는 심각한 장애를 극복한 마크 잉글리스는 놀라운 회복력과 다양한 재능을 바탕으로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달성했다.
3.1. 패럴림픽 사이클 경력
잉글리스는 절단 수술 후 패럴림픽 스포츠에 입문하여 사이클 선수로서 활동했다。 그는 2000년 시드니 패럴림픽에 참가하여 사이클 트랙 1km 독주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는 그의 뛰어난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과였다.
3.2. 산악 활동 복귀
패럴림픽에서의 성공 이후, 잉글리스는 산악 활동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의족을 착용하고도 높은 봉우리들을 성공적으로 등반하며 그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2.1. 아오라키/마운트 쿡 재등정
2002년 1월 7일, 마크 잉글리스는 1982년 사고가 발생했던 아오라키/마운트 쿡에 의족을 착용한 채 다시 도전하여 성공적으로 정상에 올랐다. 이전 시도는 다리 문제로 좌절되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에 성공했다. 이 등정 과정은 "노 민 피트: 마크 잉글리스 이야기"(No Mean Feat: The Mark Inglis Story노 민 피트: 마크 잉글리스 이야기영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어 공개되었다.
3.2.2. 초오유 등정
2004년 9월 27일, 잉글리스는 세 명의 다른 등반가와 함께 초오유 등정에 성공했다. 이로써 그는 8000 m 이상의 봉우리를 등정한 역사상 두 번째 양 다리 절단자가 되었다. 이 등정은 그가 고산 환경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3.2.3.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

2006년 5월 15일, 40일간의 등반 끝에 마크 잉글리스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도달하며, 두 다리를 모두 절단한 최초의 인물로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등반 중 6400 m 지점에서 고소 적응 훈련을 하던 중, 고정 로프의 앵커가 파손되어 잉글리스는 넘어져 그의 탄소 섬유 의족 중 하나가 반으로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다. 그는 부러진 의족을 덕트 테이프로 임시 수리했으며, 예비 의족은 베이스 캠프에서 조달받았다. 잉글리스의 에베레스트 원정은 디스커버리 채널의 시리즈 "에베레스트: 한계를 넘어서"(Everest: Beyond the Limit에베레스트: 한계를 넘어서영어)에서 방영되었다.
4. 데이비드 샤프 논란
마크 잉글리스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역사적인 업적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인 등반가 데이비드 샤프의 사망을 둘러싼 심각한 논란으로 인해 그의 명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4.1. 에베레스트에서의 사건
에베레스트 등반 중 잉글리스와 18명의 다른 등반가로 구성된 팀은 조난당한 등반가 데이비드 샤프를 마주쳤다. 그러나 그들은 샤프를 돕지 않고 정상을 향해 등반을 계속했으며, 결과적으로 샤프는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잉글리스는 샤프의 사망에 대한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 결정이 베이스 캠프에 있던 원정대장 러셀 브라이스(Russell Brice러셀 브라이스영어)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비판을 일축했다. 잉글리스는 또한 "8,500m 상공에서는 자신을 살리는 것조차 극도로 어렵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은 더 그렇다"고 주장했다. 일부 다른 등반가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며, 정상 부근에서 심하게 아픈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타고 대학교의 산악인이자 과학자인 필 아인슬리(Phil Ainslie필 아인슬리영어)는 산소통을 사용하여 샤프를 소생시키고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하며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2006년 6월 10일, 원정대장 러셀 브라이스는 AP 통신에 보낸 이메일 성명을 통해 잉글리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브라이스는 자신의 팀이 하산 중 무전으로 연락했을 때 비로소 데이비드 샤프가 조난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브라이스는 그날 밤 수많은 무전 메시지를 받았으며, 이는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마크 잉글리스로부터의 어떤 전화 기록도 없었다는 점은 디스커버리 채널 촬영팀이 기록한 당시의 완전한 영상 기록으로도 뒷받침되었다. 잉글리스의 그룹은 등정 중 데이비드 샤프가 살아있음을 알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정상으로 향했다. 샤프는 당시 심각한 상태였다. 몇 시간 후 하산하면서 다시 설동을 지나던 중, 잉글리스의 그룹은 샤프가 죽음에 가까워진 것을 발견했다. 잉글리스의 동료 등반가 막심 차야(Maxime Chaya막심 차야영어)와 그의 셰르파 산악 파트너는 데이비드 샤프를 돕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잉글리스는 하산 중에도 샤프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4.2. 대중 및 전문가 반응
이 사건은 광범위한 비판과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저명한 산악인이자 에베레스트 초등정자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잉글리스의 결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그는 동료 등반가를 돕기 위해 정상 등정 시도를 포기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비판은 산악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고산 등반 시의 윤리적 책임과 동료애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5. 기타 활동 및 대중적 역할
마크 잉글리스는 산악 활동과 스포츠 외에도 다양한 전문적인 역할과 자선 활동에 참여하며 그의 영향력을 넓혔다.
5.1. 연구 및 와인 제조
그의 생화학 분야 배경을 바탕으로 백혈병 연구를 지속했다. 또한, 잉글리스는 와인 제조 사업에도 진출하여 와인 양조가로서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의 다재다능함과 학문적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5.2. 동기 부여 강연 및 자선 활동
잉글리스는 동기 부여 강연자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그의 경험과 회복력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그의 삶의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공유하며 청중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그는 에베레스트 구조 신탁의 친선대사로 활동했으며, 두 다리 절단 환자들을 위한 자선 단체인 Limbs4All을 설립했다. 이는 그가 개인적인 성취를 넘어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6. 저서
마크 잉글리스는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담은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 "노 민 피트"(No Mean Feat노 민 피트영어) (2002): 아오라키/마운트 쿡에서의 조난과 구조, 2002년 아오라키/마운트 쿡 재등정의 성공, 그리고 그의 패럴림픽 활동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 "투 더 맥스: 노 민 피트의 십대 독자 버전"(To the Max: a Teen Reader's Version of No Mean Feat투 더 맥스: 노 민 피트의 십대 독자 버전영어) (2003)
- "오프 더 프론트 풋"(Off the Front Foot오프 더 프론트 풋영어) (2003): 삶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제시한다.
- "에베레스트에 다리 없이"(No Legs on Everest에베레스트에 다리 없이영어) (2006): 초오유 등정을 포함한 그의 에베레스트 등정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7. 개인 생활
잉글리스는 현재 뉴질랜드 핸머 스프링스에 그의 아내 앤(Anne앤영어)과 세 자녀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2007년에는 TVNZ의 프로그램 "이것이 당신의 인생이다"(This Is Your Life이것이 당신의 인생이다영어)에서 그의 삶이 조명되기도 했다. 2024년에는 뉴질랜드 패널 쇼 "7 데이즈"(7 Days7 데이즈영어)에 출연했다.
8. 명예와 수상
마크 잉글리스는 그의 뛰어난 업적과 기여를 인정받아 여러 중요한 명예와 상을 수상했다.
- 2002년 뉴질랜드 공로 훈장(Queen's Birthday and Golden Jubilee Honours)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에 기여한 공로로 뉴질랜드 공로 훈장 장교(ONZM)에 임명되었다.
- 2009년에는 링컨 대학교로부터 명예 천연자원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9. 유산과 대중적 인식
마크 잉글리스의 유산은 그의 영감을 주는 업적과 동시에 그를 둘러싼 윤리적 논쟁으로 인해 복합적으로 평가된다.
9.1. 산악 업적과 영감
잉글리스의 주요 산악 업적은 인간 의지의 승리와 장애 극복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그는 두 다리 절단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세계 최고봉들을 등정하며 많은 이들에게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특히 장애인들에게 그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개척 정신은 산악계와 일반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9.2. 윤리적 논쟁과 역사적 평가
그러나 데이비드 샤프 사망 사건은 마크 잉글리스의 대중적 이미지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산악계 내부에서 고산 등반의 윤리적 책임과 동료애, 그리고 생명 존중의 가치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그의 업적은 분명 빛나는 부분이지만, 이 논란은 그의 삶과 경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윤리적 고려 사항으로 남아있다. 그의 행동과 그에 대한 비판은 역사가들이 그의 유산을 다각적으로 평가하도록 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10. 둘러보기 / 관련 항목
- 산악인
- 의족
- 에베레스트 산
- 아오라키/마운트 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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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럴림픽
- 데이비드 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