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삶과 배경
마이클 프랜시스 매코믹은 1938년 9월 29일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알함브라에 위치한 마크 케펠 고등학교(Mark Keppel High School영어)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 그는 아메리칸 리전 베이스볼(American Legion Baseball영어)에서 활동하며 53경기에 등판하여 49승을 거두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고, 네 차례의 노히터를 달성했으며, 한 경기에서는 26개의 삼진을 잡아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매코믹은 1956년 8월 2일 캐럴린 쾰러(Carolyn Koehler영어)와 결혼했다. 몇 주 뒤인 8월 31일, 뉴욕 자이언츠는 그를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로 영입했다. 매코믹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자이언츠는 그에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팀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5.00 만 USD의 계약금을 제안했다. 당시 시행되던 '보너스 룰'로 인해 그는 계약 후 2년 동안 마이너리그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 결과 그는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하게 되었고, 계약 다음 날부터 곧바로 1군 팀과 훈련을 시작했다.
2. Professional career
매코믹은 뉴욕/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볼티모어 오리올스, 워싱턴 세너터스, 뉴욕 양키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 여러 팀에서 활동하며 16시즌 동안 꾸준한 활약을 선보였다.
2.1. Early career and debut
매코믹은 1956년 9월 3일, 17세의 나이로 뉴욕 자이언츠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루벤 고메스(Rubén Gómez영어)의 뒤를 이어 9회에 구원 등판하여 상대 세 타자를 모두 아웃시키며 성공적인 첫선을 보였으나, 팀은 5대1로 패배했다. 그해 시즌 남은 기간 동안 두 차례 선발 등판을 가졌으며, 최종적으로 0승 1패의 기록과 9.45의 평균자책점을 남겼다. 1958년에는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수를 달성했으며, 1960년에는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선정되었고, 그 해 내셔널 리그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2.2. Key achievements and awards
매코믹은 1967년 시즌에 개인 경력 최고의 해를 맞았다. 그는 내셔널 리그에서 22승을 기록하며 다승왕에 올랐고, 그 해 자이언츠를 제외한 모든 내셔널 리그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시즌 종료 후 매코믹은 사이 영 상을 수상했는데, 20표 중 18표의 1위표를 포함하여 9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로써 그는 자이언츠 투수 최초로 사이 영 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2008년 팀 린스컴이 수상하기 전까지 41년간 유일한 자이언츠 사이 영 상 수상자로 남아 있었다. 또한 그는 1967년 컴백상도 수상하며 성공적인 재기를 인정받았다.
1959년 6월 12일, 매코믹은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5이닝 노히터를 기록했다. 이 경기는 비로 인해 단축되었으며, 그는 단 1개의 볼넷만 허용했다. 6회말 필리스가 1안타 1득점을 올리고 만루 상황에서 4대1로 뒤진 채 경기가 중단되었으나, 비로 인해 경기가 그대로 종료되면서 최종 기록은 5이닝으로 소급 적용되어 노히터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1991년 통계 규칙 변경으로 노히터가 최소 9이닝 이상 지속되어야만 인정되게 되면서, 이 경기는 (다른 35경기와 함께) 더 이상 공식적인 노히터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매코믹은 행크 애런의 통산 500번째 홈런을 허용한 투수로도 유명하다. 이 역사적인 홈런을 내준 투수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차량 번호판을 "Mr. 500"으로 개인화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메이저리그 투수로서 500번째 홈런을 친 선수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당시 야구 백과사전이 없던 시대에 정확한 계산 방식은 불분명하며 이는 상당히 과소평가된 수치로 보인다.
2.3. Team changes and later career
매코믹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다. 1962년 12월 15일, 그는 잭 피셔(Jack Fisher영어), 빌리 호프트(Billy Hoeft영어), 지미 코커(Jimmie Coker영어)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스튜 밀러(Stu Miller영어) 및 존 오르시노(John Orsino영어)와 함께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 오리올스에서 두 시즌(1963-1964)을 보낸 후, 1966년 시즌 종료 시점에는 캡 피터슨(Cap Peterson영어)과 밥 프리디(Bob Priddy영어)가 워싱턴 세너터스로 가는 트레이드를 통해 다시 자이언츠로 돌아왔다.
1967년부터 1970년 시즌 중반까지 다시 자이언츠에서 뛰었으며, 1970년 시즌 중반에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양키스에서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방출된 후, 그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했다. 매코믹은 1971년 5월 22일 로열스에서 마지막 메이저리그 경기를 치렀고, 그 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다음은 마이크 매코믹의 메이저리그 투수 성적이다.
연도 | 팀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승 | 패 | 승률 | 방어율 | 투구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삼진 | WHIP |
---|---|---|---|---|---|---|---|---|---|---|---|---|---|---|---|
1956 | NYG | 3 | 2 | 0 | 0 | 0 | 1 | .000 | 9.45 | 6.2 | 7 | 1 | 10 | 4 | 2.55 |
1957 | NYG | 24 | 5 | 1 | 0 | 3 | 1 | .750 | 4.10 | 74.2 | 79 | 7 | 32 | 50 | 1.49 |
1958 | SFG | 42 | 28 | 8 | 2 | 11 | 8 | .579 | 4.59 | 178.1 | 192 | 20 | 60 | 82 | 1.41 |
1959 | SFG | 47 | 31 | 7 | 3 | 12 | 16 | .429 | 3.99 | 225.2 | 213 | 24 | 86 | 151 | 1.33 |
1960 | SFG | 40 | 34 | 15 | 4 | 15 | 12 | .556 | 2.70 | 253.0 | 228 | 15 | 65 | 154 | 1.16 |
1961 | SFG | 40 | 35 | 13 | 3 | 13 | 16 | .448 | 3.20 | 250.0 | 235 | 33 | 75 | 163 | 1.24 |
1962 | SFG | 28 | 15 | 1 | 0 | 5 | 5 | .500 | 5.38 | 98.2 | 112 | 18 | 45 | 42 | 1.59 |
1963 | BAL | 25 | 21 | 2 | 0 | 6 | 8 | .429 | 4.30 | 136.0 | 132 | 18 | 66 | 75 | 1.46 |
1964 | BAL | 4 | 2 | 0 | 0 | 0 | 2 | .000 | 5.19 | 17.1 | 21 | 1 | 8 | 13 | 1.67 |
1965 | WSA | 44 | 21 | 3 | 1 | 8 | 8 | .500 | 3.36 | 158.0 | 158 | 17 | 36 | 88 | 1.23 |
1966 | WSA | 41 | 32 | 8 | 3 | 11 | 14 | .440 | 3.46 | 216.0 | 193 | 23 | 51 | 101 | 1.13 |
1967 | SFG | 40 | 35 | 14 | 5 | 22 | 10 | .688 | 2.85 | 262.1 | 220 | 25 | 81 | 150 | 1.15 |
1968 | SFG | 38 | 28 | 9 | 2 | 12 | 14 | .462 | 3.58 | 198.1 | 196 | 17 | 49 | 121 | 1.24 |
1969 | SFG | 32 | 28 | 9 | 0 | 11 | 9 | .550 | 3.34 | 196.2 | 175 | 20 | 77 | 76 | 1.28 |
1970 | SFG | 23 | 11 | 1 | 0 | 3 | 4 | .429 | 6.20 | 78.1 | 80 | 15 | 36 | 37 | 1.48 |
1970 | NYY | 9 | 4 | 0 | 0 | 2 | 0 | 1.000 | 6.10 | 20.2 | 26 | 2 | 13 | 12 | 1.89 |
1971 | KCR | 4 | 1 | 0 | 0 | 0 | 0 | ---- | 9.31 | 9.2 | 14 | 0 | 5 | 2 | 1.97 |
통산: 16년 | 484 | 333 | 91 | 23 | 134 | 128 | .511 | 3.73 | 2380.1 | 2281 | 256 | 795 | 1321 | 1.29 |
3. 은퇴 후 삶과 활동
야구에서 은퇴한 후 매코믹은 증권업에 종사했는데, 이는 여러 메이저리그 오프시즌 동안 그 자신이 직접 설립한 사업이었다. 3년간 증권업에 몸담은 후, 그는 사무기기와 복사기 판매업으로 전환하여 리코에서 일했고, 이후 단카(Danka영어)로 옮겨 2002년 은퇴했다.
매코믹은 은퇴 후에도 야구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는 매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객원 강사로 활동했다. 또한 팀의 판타지 캠프(fantasy camps영어)를 진행하고, 때때로 자이언츠 경기 해설을 맡기도 했다.
매코믹의 사이 영 상 명판은 1989년 로마프리타 지진 당시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있는 그의 콘도미니엄 벽에서 떨어져 손상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뒷면의 균열을 수리할 생각이었으나, "이제 더 개성 있어졌다"며 수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그는 이 명판을 자신의 경력에서 얻은 다른 기념품들과 함께 특별한 방에 보관했다.
4. 개인 삶과 가족
매코믹은 첫 부인 캐럴린과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두 번째 부인 디어드리(Dierdre영어)와 34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갔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딸 타라(Tara영어)가 있었다.
단카에서 은퇴한 후, 그들은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서던 파인즈에 위치한 오닐 스쿨(O'Neal School영어)에서 매코믹은 학교 야구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었으며, 자신의 야구 기념품들을 학교에 기부하여 경매를 돕기도 했다.
5. 사망
매코믹은 2020년 6월 13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자택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6. 유산과 영예
마이크 매코믹은 그의 뛰어난 야구 경력으로 많은 유산을 남겼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 사이 영 상 (1967년)
- 내셔널 리그 다승왕 (1967년)
- 내셔널 리그 최우수 방어율 (1960년)
- 올스타 게임 선정 (1960년, 1961년)
- 컴백상 (1967년)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명예의 전당 헌액 (2006년)
그는 2006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구단 역사상 빛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