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문장규의 삶은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가라테에 대한 깊은 헌신, 그리고 극진회관의 복잡한 후계 구도 속에서 펼쳐진 격동의 시간으로 특징지어진다.
1.1. 출생 및 초기 삶
문장규는 1963년 1월 15일 일본 도쿄도분쿄구의 도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났다. 그의 족보에 따르면 그는 남평 문씨 38세손에 해당한다. 이후 아버지의 전근으로 지바현가시와시로 이주했다. 1975년 6월 가시와 시립 가시와 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소년 매거진(少年マガジン쇼넨 매거진일본어)에 연재되던 만화 『가라테 바보 일대』를 읽고 최배달에게 깊이 감명받았다. 이를 계기로 이전에 수련하던 소림사 권법을 그만두고 13세의 나이에 가토 시게오(加藤重夫가토 시게오일본어)가 지도하는 나가레야마시의 극진회관 지바현 북지부(데즈카 도장)에 입문하며 가라테 수련을 시작했다. 입문한 지 1년여 만에 1단 흑띠를 획득하여 당시 극진회관 역사상 최연소 흑띠 취득자가 되었다. 그는 본부 도장에도 출장 훈련을 다니며 야마자키 데루토모(山崎照朝야마자키 데루토모일본어)의 눈에 띄어 개인 지도를 받았고, 야마자키의 지시로 전성기 나카무라 마코토(中村誠나카무라 마코토일본어)와 함께 겨루기 훈련을 하기도 했다.
1.2. 학업 및 무도 입문
1981년 4월 도요 대학게이호쿠 고등학교를 거쳐 주오 대학 상학부경영학과에 지정교 추천으로 입학하여 후에 졸업했다. 주오 대학 입학과 동시에 극진회관의 내제자가 되어 와카지시료에 입주했다. 그러나 고참 문하생들의 부당한 폭력에 시달리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가와바타 코이치(川畑幸一가와바타 코이치일본어)의 소개로 나가타 가즈히코(永田一彦나가타 가즈히코일본어)의 체육관에 거주하며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와타나베 시게루(渡邊茂와타나베 시게루일본어)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또한 주 1회 로야마 하쓰오(盧山初雄로야마 하쓰오일본어)가 운영하는 극진회관 로야마 도장에 드나들며 가라테도 겐도카이의 나카무라 히데오(中村日出夫나카무라 히데오일본어)가 고안한 훈련을 받았다. 1981년 11월, 제13회 전일본 가라테도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나가타의 소개로 전직 프로 복서인 요시도메 가즈오(吉留一夫요시도메 가즈오일본어)로부터 풋워크와 펀치 기술을 배우며 약점이었던 찌르기 기술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2. 가라테 선수 경력
문장규는 극진 가라테 선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수많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의 선수 경력은 극진회관의 황금기를 장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1. 초기 대회 성적
그는 선수 생활 초기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1980년 11월 제12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 첫 출전하여 4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1981년과 1982년에 연이어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며 꾸준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1983년 제15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8위를 기록했으나, 이 대회에서 미쓰카와 마사루(光川勝미쓰카와 마사루일본어)와의 경기 중 갈비뼈 2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1984년에는 제3회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며 세계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
2.2. 세계 대회 우승 및 100인 구미테
1985년 11월, 제17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 구로사와 히로키(黒澤浩樹구로사와 히로키일본어)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인 1986년 5월에는 백인 구미테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그는 4단이었다. 같은 해 11월 제18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 마스다 아키라(増田章마스다 아키라일본어)를 꺾고 2연패를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극진 가라테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어서 개최될 제4회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의 일본 선수단 주장으로 선발되었다. 이후 오야마 시게루(大山茂오야마 시게루일본어)가 운영하는 USA 오야마 가라테로 출장 훈련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또한 미야하타 유타카(宮畑豊미야하타 유타카일본어)의 소개로 스모 명문인 다카사고 방과 고코노에 방에서 시코, 텟포, 스리아시, 부쓰카리 게이코 등 스모의 기본 훈련을 배우며 기술을 연마했다.
1987년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린 제4회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스위스의 앤디 후그(Andy Hug앤디 후그독일어)를 꺾고 우승하며 역대 최연소 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56전 50승 6패라는 통산 성적을 기록했다.
2.3. 국적 및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장규의 재일 한국인이라는 국적과 정체성은 그의 선수 활동과 미디어 노출에 복잡한 영향을 미쳤다. 1984년경, 그는 재일 한국 학생 동맹(한학동)에 가입하며 의도적으로 일본 국적 취득의 길을 택하지 않게 되었다. 1987년 제4회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을 당시, 그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진회관(마쓰이 파)은 1999년 제7회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프란시스코 필리오(Francisco Filho프란시스코 필리오포르투갈어)를 최초의 외국인 왕좌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문장규가 일본 대표 선수단의 주장을 맡았다는 점과 최배달 총재의 출신 배경을 언론이 언급하지 않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처럼, 문장규에 대해서도 재일 한국인이라는 점이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장규는 자서전 『일격의 권』에서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에는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고 싶었지만, 오야마 총재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 그러나 미디어에 대해서는 "남이나 북이라는 정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의 입장에서는 일본 도장 대표이다"라고 진술하며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3. 극진회관 관장 활동
선수 은퇴 후 문장규는 극진회관의 관장으로서 조직 운영의 전면에 나서며 수많은 변화와 도전을 겪었다.
3.1. 오야마 총재의 후계 및 조직 분열
문장규는 현역 선수에서 은퇴한 후 로야마 하쓰오(盧山初雄로야마 하쓰오일본어)의 소개로 권도회 총수 나카무라 히데오(中村日出夫나카무라 히데오일본어)를 알게 되었다. 이어서 극진회관 관서 본부 회장이자 코스모 타이거 코퍼레이션 중용회(CTC) 회장을 맡고 있던 허영중(허영중Heo Yeong-jung한국어)의 소개로, 화가이자 자유민주당의 막후 실력자인 후쿠모토 쿠니오(福本邦雄후쿠모토 쿠니오일본어)의 문하생이 되었다. 후쿠모토 쿠니오 밑에서 연구서 집필을 돕는 조수로 국회 도서관과 서점 등을 다니며, 후쿠모토의 사무실을 드나드는 국회의원, 관료, 경영자들을 접대하는 일을 했다.
1991년 극진회관에 복귀하여 아사쿠사에 본부 직할 아사쿠사 도장을 개설했으며, 가미오 노부유키(神尾伸幸가미오 노부유키일본어), 무라코시 가즈요시(村越一由무라코시 가즈요시일본어)가 지도원으로 활동했다. 1993년에는 극진회관 제2차 신회관 건설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94년 4월 26일 최배달 총재가 폐암으로 사망하자, 우메다 요시아키(梅田嘉明우메다 요시아키일본어),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구로사와 아키라일본어), 오니시 야스히토(大西靖人오니시 야스히토일본어), 요네쓰 히토시(米津等史요네쓰 히토시일본어), 요네쓰 히데오(米津稜威雄요네쓰 히데오일본어) 등 5명이 세이로카 국제 병원에서 작성한 최배달의 "위급시 유언"에 의해 문장규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최배달의 유족은 유언에 의문을 제기하며 유언장의 유효성 여부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고,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유언장은 무효"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이 소동을 계기로 극진회관은 분열되기 시작했고, "극진 가라테"를 표방하는 단체들이 난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문장규는 "국제 가라테 연맹 극진회관"이라는 명칭을 재단 법인을 설립하여 그 법인 명의로 하는 대신, 자신(문장규)의 명의로 상표 등록하고 "주식회사 국제 가라테 연맹 극진회관"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상표 등록은 분열된 다른 극진 파벌들과의 재판 끝에 2009년부터 2010년 사이에 최배달 가문의 상표로 등록되었다.
1995년 4월 5일, 산페이 케이지(三瓶啓二산페이 케이지일본어)를 필두로 한 지부장 협의회 파벌이 전국 지부장 회의에서 관장 해임 동의를 제출하면서 극진회관은 다시 분열되었다. 새로운 운영 체제로서 통합 본부를 설치하고 본부장에는 야마다 마사토시(山田雅稔야마다 마사토시일본어), 부본부장에는 하마이 노리야스(浜井識安하마이 노리야스일본어)가 취임했다. 최고 고문으로는 고다 유조(郷田勇三고다 유조일본어)가 취임했으며, 로야마 하쓰오(盧山初雄로야마 하쓰오일본어)가 그를 보좌했다.
3.2. 조직 운영 및 주요 활동
문장규는 관장으로서 극진회관을 이끌어오며 조직의 재정비와 대외 활동에 힘썼다. 1996년, 후지 TV의 이데우마 미치오(出馬迪男이데우마 미치오일본어)와 세이도카이칸의 이시이 가즈요시(石井和義이시이 가즈요시일본어)와 함께 K-1 참여에 대해 협의하고 극진회관 소속 선수인 프란시스코 필리오(Francisco Filho프란시스코 필리오포르투갈어)를 참전시키는 데 합의했다. 1998년에는 다이토류 아이키 주술에 정식으로 입문했다. 입문 계기는 기무라 다쓰오(木村達雄기무라 다쓰오일본어)의 저서였다. 2004년에는 다이토류 아이키 주술 2단을 사사받았다.
2005년 10월, 도쿄도에비스에 "이치게키 플라자"를 개설했으나, 약 10년간 운영 후 종료했다. 2015년 8월에는 "이치게키 플라자"를 새롭게 "플럭스 컨디셔닝스"로 다이칸야마초에 리뉴얼 오픈했다. 현재 문장규는 8단이며, 고다 유조(郷田勇三고다 유조일본어), 바비 로우(Bobby Lowe바비 로우영어), 피터 총(Peter Chong피터 총영어), 이소베 세이지(磯部清次이소베 세이지일본어) 등의 지지를 받으며 국제 가라테 연맹 극진회관의 한 파벌을 이끌고 있다. 루크 홀랜더(Loek Hollander루크 홀랜더네덜란드어)는 이전에 문장규를 지지했으나 2010년 8월 지지를 철회했다. 이후 피터 총(Peter Chong피터 총영어) 또한 2018년 문장규와 결별하고 자신의 단체를 설립했다.
3.3. 다른 단체와의 교류 및 협력
2015년 4월 16일, 도쿄도고토구의 일본 가라테도 회관에서 공익재단법인 전일본가라테도연맹과 일반재단법인 국제 가라테도 연맹 극진회관 사이에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의 가라테 종목 정식 채택을 위한 양해각서를 교환하고 우호 단체 관계를 맺었다. 같은 해 9월 25일, 극진회관은 풀 컨택트 가라테 6개 단체와 우호 관계를 맺고, 전일본가라테도연맹이 추진하는 가라테의 도쿄 올림픽 공식 경기화 활동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3.4. 이름 변경
2016년 1월 15일, 문장규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활동명으로 사용하던 한자 이름 '松井 章圭'의 '圭'자 위에 오야마 총재의 '大'자 한자를 넣어 '松井 章奎'(松井 章奎마쓰이 쇼케이일본어)로 개명했다.
3.5. 재정 및 법적 문제
문장규의 관장 활동 중 재정 및 법적 문제와 관련된 논란들이 제기되었다. 2011년 11월 10일 일본 경제 신문은 "인재 파견 대기업 구 굿윌 그룹(GWG)의 회사 인수에 얽혀 가라테 단체 '국제 가라테도 연맹 극진회관'(도쿄)의 마쓰이 쇼케이 관장이 도쿄국세국으로부터 인수 성공 보수 신고 구분의 오류를 지적받아 과소 신고 가산세를 포함하여 약 300.00 억 JPY를 추징 과세당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2023년 5월에는 그가 경영하는 체육관에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휴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휴업한 것처럼 허위 신청 서류를 작성하여 고용조정지원금 및 긴급 고용 안정 지원금을 부정 수급했다"는 이유로 도쿄 노동국 직업 안정부 직업 대책과로부터 부정 수급 사업주로 공표되었다. 부정 수급액은 고용 조정 지원금이 3145.80 만 JPY, 긴급 고용 안정 지원금이 27.80 만 JPY이었으나, 이미 전액 반환된 상태이다.
4. 사상 및 철학
문장규는 무도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독자적인 철학과 신념을 구축해 왔다. 그는 단순히 기술적인 숙련을 넘어, 정신적인 수양과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장훈(장훈Jang Hun한국어)은 "현역 시절 내내 당당히 민족을 밝히고 활약했으며, 현재는 극진회관 관장으로서 일본인들이 잃어가고 있는 예의와 효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는 사회적 의미가 크다"고 문장규를 평가했다. 이는 그가 무도를 통해 단순한 기술 연마를 넘어 인성 교육과 사회적 가치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역 시절 그는 맞받아치기, 상단 돌려차기, 뒤돌려차기 등을 특기로 삼았으며, 최배달 총재는 그를 "30년, 50년, 반세기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한 인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5. 저서
문장규는 자신의 무도 철학과 경험을 담은 여러 저서를 집필했다.
- 『극진 가라테 나의 연소의 순간(때)』 (極真カラテ 我が燃焼の瞬間(とき)일본어, 이케다 쇼텐(池田書店이케다 쇼텐일본어), 1991년 12월)
- 『동체 자세』 (動体姿勢일본어, 야마네 사토루(山根悟야마네 사토루일본어) 공저, 베이스볼 매거진사(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베이스볼 매거진사일본어), 1997년 4월)
- 『극진 새로운 발걸음』 (極真新たなる歩み일본어, 피플사, 1998년 12월)
- 『일격의 권 마쓰이 쇼케이』 (一撃の拳 松井章圭일본어, 기타노쿠치 후토시(北之口太기타노쿠치 후토시일본어) 저, 고단샤(講談社고단샤일본어), 2005년 4월 1일)
6. 평가 및 유산
문장규는 극진 가라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여러 비판 및 논란의 중심에 서 왔다.
6.1. 긍정적 평가
최배달 총재는 문장규를 "지상 최강의 가라테 결집편"에서 "30년, 50년, 반세기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한 인물"이라 칭하며 그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현역 시절은 독보적이었으며, 외국인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무도인으로서의 업적을 명확히 보여준다.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무도 활동에 전념한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또한, 그는 극진회관 관장으로서 조직을 재건하고 K-1 등 대외 활동을 통해 극진 가라테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일본가라테도연맹과의 협력을 통해 풀 컨택트 가라테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을 추진하는 등 무도계 전체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가 이름 '松井 章奎'를 변경하며 최배달 총재의 정신을 잇고자 한 것도 그의 헌신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6.2. 비판 및 논란
문장규에 대한 비판과 논란은 주로 최배달 총재 사후의 극진회관 조직 운영과 관련된 문제들에서 비롯된다. 최배달 총재의 유언장 진위 여부를 둘러싼 분쟁은 극진회관의 대규모 분열을 초래했으며, 이 과정에서 문장규가 "국제 가라테도 연맹 극진회관"이라는 명칭을 본인 명의로 상표 등록하고 주식회사를 설립한 행위는 다른 파벌들과의 법적 다툼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 상표권은 오야마 가문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또한 굿윌 그룹 관련 추징 과세 사건과 고용조정지원금 부정수급 사건은 그의 재정 관리 및 도덕성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후자의 경우, 휴업하지 않았음에도 허위로 신청하여 지원금을 수령한 사실이 도쿄 노동국에 의해 공표되면서 그의 명예에 큰 손상을 입혔다. 이러한 논란들은 문장규가 극진회관의 수장으로서 조직의 안정과 명예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7. 대회 성적 일람
다음은 문장규의 주요 가라테 대회 출전 기록 및 최종 성적이다.
연도 | 대회명 | 성적 |
---|---|---|
1980년 | 제12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 4위 |
1981년 | 제13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 3위 |
1982년 | 제14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 3위 |
1983년 | 제15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 8위 |
1984년 | 제3회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 | 3위 |
1985년 | 제17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 우승 |
1986년 | 제18회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 대회 | 우승 |
1987년 | 제4회 세계 공수도 선수권 대회 | 우승 |
8. 같이 보기
- 최배달
- 극진회관
- 가라테 바보 일대
- 주오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