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리처드 존 해들리 경(Sir Richard John Hadlee, MBE, Sir Richard John Hadlee, MBE리처드 존 해들리 경, MBE영어, 1951년 7월 3일 ~ )은 뉴질랜드의 전 크리켓 선수이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올라운더 중 한 명이자 최고의 속구 투수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해들리는 1980년 대영제국 훈장(MBE)을 수훈받았고, 1990년 크리켓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뉴질랜드 선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2년 12월 위스던 크리켓 연감에 의해 역대 두 번째로 위대한 테스트 크리켓 투수로 선정되었다. 2009년 3월에는 크라이스트처치 예술 센터 외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같은 해 4월 3일에는 국제 크리켓 평의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해들리는 크리켓 가족 중 가장 저명한 구성원 중 한 명이다.
2. 초기 생애 및 가족 관계
리처드 해들리는 뉴질랜드 크리켓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가족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유년기는 크리켓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2.1. 출생 및 유년기
리처드 해들리는 1951년 7월 3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세인트 올번스에서 태어났다.
2.2. 가족 구성원 및 크리켓과의 인연
리처드 해들리의 아버지인 월터 해들리와 그의 네 형제 중 두 명인 데일 해들리, 배리 해들리는 모두 뉴질랜드 크리켓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그의 전 부인인 카렌 해들리 또한 뉴질랜드 국가대표로 국제 크리켓 경기에 출전했다. 이처럼 해들리 가족은 대대로 크리켓에 헌신해 왔으며, 리처드 해들리는 이 크리켓 가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3. 크리켓 경력
리처드 해들리는 뉴질랜드와 국제 무대에서 탁월한 크리켓 경력을 쌓았으며, 특히 투수로서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3.1. 국제 테스트 및 ODI 경력
총 86경기의 테스트 크리켓에 출전하여 431개의 위켓을 획득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 기록이었으며 400위켓을 돌파한 최초의 투수였다. 그의 평균 투구 기록은 22.29였고, 타격에서는 27.16의 평균으로 총 3124점을 득점했으며, 여기에는 2개의 센추리와 15개의 하프 센추리가 포함된다.
3.1.1. 초기 경력 및 돌파
해들리는 1971/72 시즌 캔터베리 소속으로 퍼스트 클래스 크리켓에 데뷔했고, 1973년에는 테스트 크리켓에 데뷔했다. 데뷔 경기에서 그의 첫 투구는 모두 바운더리로 이어졌다. 초기 몇 년간 그는 테스트 수준에서 기복 있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1976년 인도와의 경기에서 11위켓을 획득하며 뉴질랜드의 승리에 기여했고, 이를 통해 팀 내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1978년에는 잉글랜드를 상대로 한 역사적인 첫 승리에 기여했는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137점을 추격하는 상황에서 64점으로 전원 아웃될 때, 해들리는 6위켓을 26점으로 막아내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3.1.2. 전성기 및 세계 기록
1979/80 시즌 뉴질랜드는 당시 막강한 세계적인 크리켓 강팀이었던 서인도 제도를 홈 테스트 시리즈에서 상대했다. 더니든에서 열린 첫 번째 테스트 경기에서 뉴질랜드는 해들리의 11위켓 활약에 힘입어 1위켓 차이로 깜짝 승리를 거두었다. 두 번째 테스트에서는 해들리가 자신의 첫 테스트 센추리를 기록하며 경기를 무승부로 이끌었고, 뉴질랜드는 시리즈를 1대 0으로 승리했다. 이 결과는 뉴질랜드가 테스트 시리즈에서 12년간 홈 무패 기록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들리는 1980년 영국 국왕 생일 훈작 목록에서 크리켓에 대한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의 멤버(MBE)로 임명되었다.
1983년 잉글랜드 원정에서는 헤딩리 크리켓 경기장에서 뉴질랜드가 잉글랜드 본토에서 첫 테스트 승리를 기록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이 경기에서 해들리는 0위켓 89실점이라는 특이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경력 중 뉴질랜드가 승리한 경기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잉글랜드가 최종적으로 4경기 시리즈를 3대 1로 승리했지만, 해들리는 이 시리즈에서 뉴질랜드의 타격 및 투구 평균 모두에서 최고를 기록했으며, 노팅엄에서 열린 마지막 테스트에서 200번째 테스트 위켓을 획득했다. 1984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리턴 테스트 시리즈에서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3일 만에 잉글랜드를 이닝스 승리로 압도했다 (하루는 비로 취소).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두 이닝 모두 100점 미만으로 전원 아웃되었으며, 해들리는 8위켓을 획득하고 99점을 빠르게 득점하는 뛰어난 올라운드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1984년 ICC 테스트 투수 랭킹 1위에 올랐으며, 이 순위를 1988년까지 4년간 유지했다.

1985/86 시즌은 해들리가 매우 훌륭한 속구 투수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투수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뉴질랜드 크리켓 국가대표팀의 1985-86 호주 원정에서 그는 브리즈번에서 열린 첫 테스트에서 개인 최고 기록인 9위켓 52실점이라는 뛰어난 올라운드 활약으로 호주 팀을 압도했다. 마틴 크로우의 188점에 더해 54점을 득점하고, 호주의 두 번째 이닝에서 6위켓을 추가로 획득하며 뉴질랜드는 압도적인 이닝스 승리를 거두었다. 해들리는 이어 두 번째 테스트 패배에서 7위켓을, 세 번째 테스트 승리에서 11위켓을 획득하며 뉴질랜드의 호주 본토 첫 시리즈 승리를 이끌었고, 개인적으로 3개 테스트에서 33위켓을 기록했다. 뉴질랜드에서 열린 리턴 시리즈의 첫 번째 테스트에서 해들리는 호주 주장 알란 보더를 레그 비포 위켓으로 잡아내며 300번째 테스트 위켓을 획득했다. 이 시리즈는 에덴 파크에서 열린 세 번째 테스트 승리로 뉴질랜드가 2대 1로 최종 우승했다.
1986년 해들리는 뉴질랜드가 잉글랜드 본토에서 첫 뉴질랜드 크리켓 국가대표팀의 1986 잉글랜드 원정 시리즈 승리(1대 0)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특히 그의 카운티 홈 구장인 노팅엄에서 열린 두 번째 테스트에서 10위켓을 획득하고 뉴질랜드의 첫 이닝에서 68점을 득점하는 뛰어난 개인 활약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에서 해들리는 때때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라는 평판에 더해, 잉글랜드의 위켓키퍼이자 노팅엄셔 동료였던 브루스 프렌치를 위험한 바운서로 맞춰 병원에 입원시키며 이러한 평판을 강화했다. 1987년 3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열린 뉴질랜드 대 서인도 제도 테스트 경기 중, 해들리와 주장 제레미 코니는 경기 전 라커룸에서 불화를 겪었으며, 이후 경기장에서는 존 라이트를 통해 소통할 정도로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1987년 4월, 뉴질랜드 크리켓 국가대표팀의 1986-87 스리랑카 원정에서 해들리는 자신의 두 번째 테스트 센추리를 기록했다. 첫 번째 테스트에서 그의 151점 노 아웃은 뉴질랜드가 무승부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지만, 콜롬보에 있는 뉴질랜드 팀 호텔 근처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으로 인해 투어는 조기에 중단되었다. 이 중앙 버스 정류장 폭탄 테러로 113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이 테러는 타밀 호랑이 분리주의 운동이 자행한 것으로, 뉴질랜드 크리켓 팀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예정된 3개 테스트 중 한 경기만 치르고 귀국하기로 압도적으로 결정했다.
1987/88 시즌 뉴질랜드 크리켓 국가대표팀의 1987-88 호주 원정에서 호주를 상대로 한 해들리의 승부욕은 다시 불타올랐다. 3경기 시리즈의 세 번째 테스트에서 그는 10위켓을 잡아내며 뉴질랜드가 시리즈 동점을 기록할 가능성을 거의 만들어냈다. 이 테스트는 호주의 11번 타자 마이클 휘트니가 지친 해들리의 마지막 오버를 버텨내며 끝났다. 그 오버에서 한 위켓만 더 얻었더라면 뉴질랜드는 승리하고 해들리는 이안 보텀의 기록을 깨고 세계 기록인 374번째 테스트 위켓을 획득했을 것이다. 다음 시즌 잉글랜드와의 홈 시리즈에서 뉴질랜드 국민들은 해들리가 단독으로 세계 기록을 경신할 위켓을 열렬히 기대했다. 그러나 해들리는 첫 번째 테스트 첫날 부상으로 쓰러져 남은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다. 시즌 말 시상식에서 호주 해설가 리치 베노는 목발을 짚고 무대에 절뚝거리며 올라오는 해들리를 보고 그가 "다시는 크리켓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러나 성공적인 재활 후, 해들리가 테스트 위켓 세계 기록을 경신할 다음 기회는 1988년 인도에서 열린 인도와의 경기였다. 1976년 인도 원정 이후 위장 문제로 고통받던 해들리는 다시는 그곳에서 크리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역사를 만들 기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는 시리즈 첫 번째 테스트에서 374번째 테스트 위켓을 획득하며 기록을 경신했다. 두 번째 테스트에서는 10위켓을 잡아내며 뉴질랜드가 인도에서 보기 드문 테스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지만, 시리즈는 최종적으로 2대 1로 패했다.
1989/90 시즌 인도 크리켓 국가대표팀의 1989-90 뉴질랜드 원정에서 열린 인도와의 홈 시리즈에서 해들리는 자신의 홈 구장인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산제이 만레카르를 잡아내며 역사상 최초로 400번째 테스트 위켓을 획득한 투수가 되었다. 그의 모교 졸업생들이 교가를 부르는 가운데 달성된 이 기록은 큰 의미를 가졌다. 웰링턴에서 호주를 상대로 또 다른 테스트 승리를 거두고 자신의 100번째 퍼스트 클래스 5위켓 홀을 기록한 직후, 해들리는 다가오는 잉글랜드 원정 이후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3.1.3. 은퇴 및 기사 작위
로드에서 열릴 예정인 잉글랜드 시리즈의 두 번째 테스트 직전, 1990년 영국 국왕 생일 훈작 목록이 발표되었고, 해들리는 크리켓에 대한 공로로 기사 학사 작위를 받았다. 해들리는 1990년 7월 10일 마지막 테스트 경기가 끝난 후인 1990년 10월 4일까지 기사 작위를 수여받지 못했지만, 훈작 목록 발표일 기준으로 '리처드 경'이 되었다. 현역 테스트 크리켓 선수로서 크리켓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은 유일한 다른 인물은 1936년의 마하라즈쿠마르 비자야난다 가자파티 라주뿐이었다. 그러나 해들리와 달리 비자야난다는 선수로서의 공로가 아닌 행정적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알래스테어 쿡은 2019년 여전히 풀타임 퍼스트 클래스 선수였지만 마지막 테스트 경기 직후 기사 작위를 받았다.) 대부분의 기사 작위 수훈 크리켓 선수들이 타자였기 때문에, 해들리는 자신이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이후 처음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투수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해들리는 이 업적을 기념하여 뉴질랜드의 첫 이닝에서 86점을 기록했으며, 경기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테스트에서 해들리는 마지막 투구에서 5위켓을 획득하며 테스트 경력을 마무리했고, 그의 테스트 경력 마지막 공으로 데본 말콤을 덕으로 잡아냈다.
2000년 위스던 크리켓 연감에서 그의 아버지 월터는 20세기 최고의 크리켓 선수 다섯 명을 뽑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리처드를 포함시켰고 "당황스럽지만...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사실만을 인용하겠다"고 고백했다. 그는 데니스 릴리도 고려했지만, 리처드의 테스트 경기 실적이 그를 근소하게 앞선다고 판단했다. 총 100명의 투표자 중 리처드 해들리는 13표를 받아 세기의 선수로 공동 10위에 올랐다.
3.2. 국내 리그 경력
리처드 해들리는 국제 무대뿐만 아니라 국내 리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3.2.1. 노팅엄셔 경력
그는 1978년부터 1987년까지 노팅엄셔 카운티 크리켓 클럽에서 활약했다. 부상과 테스트 경기 차출로 인해 세 시즌만 온전히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구 기록은 매우 뛰어났다.
- 1981년: 4252구, 231 메이든 오버, 1564실점, 105위켓 (평균 14.89점)
- 1984년: 4634구, 248 메이든 오버, 1645실점, 117위켓 (평균 14.05점)
- 1987년: 3408구, 186 메이든 오버, 1154실점, 97위켓 (평균 11.89점, 1969년 이후 최저 평균)
이 세 시즌 동안 그는 프로 크리켓 선수 협회 (PCA) 동료들로부터 'PCA 올해의 선수상'에 선정되었다. 또한 1982년, 1984년, 1986년, 1987년에는 크리켓 소사이어티의 '잉글랜드 퍼스트 클래스 크리켓 최고 올라운더를 위한 웨더럴 상'을 수상했다.
1984년 카운티 시즌에 해들리는 현대 시대에는 보기 드문 '더블'을 달성했다. 이는 한 시즌에 1,000점 이상 득점하고 100위켓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들리와 그의 후임인 프랭클린 스티븐슨은 1969년 카운티 경기 수가 감소한 이후 잉글랜드 카운티 크리켓에서 이 위업을 달성한 유일한 두 선수이다. 이 '더블' 달성에는 로드에서 미들섹스를 상대로 210점 노 아웃을 기록한 그의 최고 퍼스트 클래스 득점이 포함되었다. 1987년, 그의 마지막 시즌에는 노팅엄셔가 카운티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지만, 그는 아쉽게도 더블 달성을 놓쳤다. 해들리가 1981년과 1987년 챔피언십 우승을 포함하여 노팅엄셔의 여러 우승에 기여한 바는 매우 컸다.
3.2.2. 캔터베리 및 기타 스포츠 활동
해들리는 계절적 차이로 인해 뉴질랜드에서도 지방 크리켓을 뛰었으며, 고향 팀인 캔터베리를 대표했다. 현재는 철거된 지진 피해를 입은 AMI 스타디움의 북쪽 스탠드는 리처드 해들리와 캔터베리 및 뉴질랜드 크리켓에 기여한 해들리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을 기리기 위해 '해들리 스탠드'로 명명되었다. 뉴질랜드와 호주가 정기적으로 원데이 경기에서 경쟁하는 '채플-해들리 트로피'는 호주의 채플 가족과 뉴질랜드의 해들리 가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해들리는 또한 능숙한 축구 선수였으며, 크라이스트처치의 서던 리그 팀인 레인저스 A.F.C.에서 뛰기도 했다.
3.3. 플레이 스타일
리처드 해들리는 독특하고 효과적인 투구 및 타격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3.3.1. 투구 스타일
해들리는 우완 속구 투수였다. 젊은 시절에는 매우 빨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러닝업을 줄여 정확도를 높였고, 위켓과 공중에서 상당한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의 가장 강력한 투구는 아웃스윙이었는데, 이는 그의 경력 후반에 주된 무기가 되었다.

해들리가 투구 스타일을 개발하고 경력을 쌓는 동안 가장 큰 영향을 미 준 인물은 위대한 속구 투수 데니스 릴리였다. 해들리는 릴리를 속구 투수의 모범으로 여겼다. "그는 크고, 강하고, 건강하고, 자신감 있고, 공격적이며, 놀라운 기술과 훌륭한 테크닉을 가졌고, 순수한 존재감으로 타자들을 위협했으며, 물론 타자들을 아웃시켰다!" 그는 경기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릴리라면 어떻게 했을지 스스로에게 묻고 그의 투지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릴리 역시 자신의 저서 위협에서 해들리를 매우 능숙한 선수로 평가했으며, 테스트 경기에서 그가 본 첫 진정한 프로 선수였다고 언급했다. 릴리는 해들리가 오프 스텀프를 향해 연속적으로 아웃스윙을 구사하고, 때로는 인스윙이나 커터, 가끔 바운서, 그리고 아주 드물게 요커를 던졌다고 묘사했다.
해들리의 경제적인 투구 동작은 투구 끝에서 위켓에 매우 가깝게 접근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때로는 접근 중에 베일을 건드리기도 했다), 이러한 투구 라인은 그가 많은 타자들을 레그 비포 위켓으로 잡아낼 수 있게 했다. 그는 1988년 11월 12일 인도 뱅갈루루에서 374번째 위켓을 획득하며 테스트 위켓 획득 기록을 경신했다. 1990년 2월 4일에는 400번째 테스트 위켓을 획득했으며, 1990년 7월 9일 그의 마지막 테스트 투구에서는 데본 말콤을 덕으로 아웃시켰다.
3.3.2. 타격 스타일
해들리는 공격적인 좌완 미들 오더 타자였다. 그는 상위권 국제 투수들을 상대로는 기록이 강하지 않았지만, 약한 팀들을 상대로는 효과적으로 득점했다. 그는 경력을 마칠 때까지 15개의 테스트 하프 센추리와 2개의 테스트 센추리를 기록했으며, 1984년, 1986년, 1987년 노팅엄셔 소속으로는 평균 50점 이상을 기록했다. W.G. 그레이스와 조지 허버트 허스트만이 한 시즌에 타격 및 투구 평균 모두에서 최고를 기록한 데 있어 해들리와 비견될 정도로 근접한 선수들이다.
4. 사생활 및 건강
리처드 해들리는 선수 생활 이후 중요한 건강 문제에 직면했지만, 이를 극복하며 적극적인 삶을 이어나갔다.
4.1. 건강 문제 및 회복
은퇴 6개월 후, 해들리는 선천성 심장 질환인 울프-파킨슨-화이트 증후군을 앓고 있음을 발견했고, 1991년 7월 심장 수술을 받았다. 해들리는 이 증후군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경력 중에도 불규칙한 심장 박동과 같은 일부 영향을 느꼈다. 2018년 6월에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는 현재도 활발한 삶을 유지하며 뉴질랜드 심장 재단과 협력하고 있다.
5. 은퇴 후 활동
리처드 해들리는 은퇴 후에도 크리켓계와 사회에 지속적으로 기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5.1. 크리켓 관련 활동
은퇴 후, 해들리는 뉴질랜드 선발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크리켓 행정 및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5.2. 사회 공헌 활동
1990년 8월, 해들리는 '리처드 해들리 스포츠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어려움에 처한 스포츠인과 문화 예술인들이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성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재단의 지원 기준은 다음과 같다.
- 신청자는 25세 미만이어야 한다.
- 신청자는 뉴질랜드 캔터베리 지역 출신이어야 한다.
- 지원 요청은 스포츠 또는 문화적 목적에 한정되어야 한다.
- 신청자는 불우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스포츠 또는 문화 활동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되는 특별한 상황에 직면해 있어야 한다.
이 재단은 지역 사회의 관대함과 기업 후원자들의 지원에 의존하여 운영된다.
6. 수상 및 영예
리처드 해들리는 그의 뛰어난 경력을 통해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6.1. 주요 스포츠상 및 국가 영예
- 1980년 뉴질랜드 스포츠에 대한 공로로 대영제국 훈장 멤버(MBE)에 임명됨
- 1990년 크리켓에 대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수훈받음
- 윈저컵 13회 수상 (시즌 최고의 투구 실적에 대한 상, 12년 연속 포함)
- 뉴질랜드 올해의 스포츠인: 1980년, 1986년
- 위스던 올해의 크리켓 선수: 1982년
- 뉴질랜드 지난 25년간의 스포츠인: 1987년 (육상 선수 존 워커와 공동 수상)
- 뉴질랜드 10년간의 스포츠인: 1987년
- 버트 서트클리프 메달: 2008년
- 국제 크리켓 평의회 명예의 전당: 2009년 헌액
- 뉴질랜드 크리켓 명예의 전당: 2024년 '퍼스트 일레븐' 중 한 명으로 헌액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주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원데이 경기 역사상 최초로 1,000점 득점과 100위켓 획득의 '더블'을 달성한 선수
- 테스트 경기에서 25개의 5위켓 홀을 달성한 두 번째로 빠른 투수이자 (62경기), 가장 빠른 속구 투수이자, 이닝 수 기준으로는 세 번째로 빠른 투수
- 은퇴 당시 테스트 크리켓 기록이었던 36개의 테스트 경기 5위켓 홀과 5개의 원데이 경기 5위켓 홀을 포함하여 총 41개의 5위켓 홀을 기록
- 20세기 어떤 속구 투수보다도 뛰어난 단일 이닝 투구 기록 (1985년 가바에서 호주와의 첫 테스트 경기 첫 이닝에서 9위켓 52실점)
7. 유산 및 영향
리처드 해들리는 그의 뛰어난 기량과 리더십으로 크리켓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유산을 남겼으며, 뉴질랜드 크리켓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7.1. 크리켓계에 미친 영향
해들리는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새로운 공으로 투구하는 데 있어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는 (전통적인) 스윙의 대가였으며, '스윙의 술탄'으로 불린다. 그는 데니스 릴리, 임란 칸, 앤디 로버츠, 마이클 홀딩, 조엘 가너, 카필 데브, 이안 보텀, 와심 아크람, 말콤 마샬 등 당대 최고의 속구 투수들과 함께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속구 투수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는 임란 칸, 카필 데브, 이안 보텀과 함께 당대 4대 올라운더 중 한 명이었는데, 그들 중 가장 좋은 투구 평균을 기록했지만, 타격 평균은 가장 낮았다.
2002년 12월, 그는 위스던 크리켓 연감에 의해 역대 두 번째로 위대한 테스트 투수로 선정되었다. 릴리는 해들리가 매우 능숙하고, 연속적인 아웃스윙, 가끔 인스윙이나 커터, 가끔 바운서, 그리고 아주 드물게 요커를 던지는 등 자신이 테스트에서 본 첫 진정한 프로 선수였다고 생각했다.
7.2. 대중적 인정 및 추모
2009년 3월, 해들리는 '열두 명의 지역 영웅들' 중 한 명으로 기념되었고, 크라이스트처치 예술 센터 외부에 그의 동상이 공개되었다. 뉴질랜드와 호주가 정기적으로 원데이 경기에서 경쟁하는 '채플-해들리 트로피'는 호주의 채플 가족과 뉴질랜드의 해들리 가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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