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리엄 브레이디는 더블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축구 선수 가문 출신이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브레이디는 세인트 에이던스 C.B.S.에 다녔으나, 학교 축구 국제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학교 게일릭 풋볼 경기에 불참하여 퇴학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이를 부인했다. 그의 어린 시절 별명은 "치피(Chippy)"였는데, 이는 그가 공을 차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피시 앤드 칩스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1.2. 가족 배경
그의 증조부 프랭크 브레이디 시니어와 형 레이 브레이디 모두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경력이 있는 축구 선수였다. 다른 형제 중 프랭크 브레이디 주니어는 1968년 샴록 로버스에서 FAI 컵 우승을 차지했고, UEFA 컵위너스컵에 두 차례 출전했다. 또 다른 형 팻 브레이디는 밀월과 퀸즈 파크 레인저스에서 뛰었다.
2. 선수 경력
브레이디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2.1. 아스널 FC
브레이디는 1971년 15세의 나이로 아스널에 스쿨보이 계약으로 입단하며 런던으로 이주했다. 1973년 17세 생일에 프로 계약을 맺었고, 같은 해 10월 6일 버밍엄 시티와의 경기에서 제프 블록클리의 교체 선수로 출전하며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그는 안정적인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다음 경기인 북런던 더비에서 토트넘 홋스퍼를 상대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아스널 감독 버티 미는 그를 당분간 신중하게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브레이디는 1973-74 시즌을 13경기 출전(4경기 교체)으로 마무리했다.
1974-75 시즌부터 브레이디는 아스널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1970년대 중반 몇 시즌 동안 강등권 근처를 맴돌던 팀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테리 닐이 감독으로 부임하고 돈 하우가 코치로 복귀하면서 브레이디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의 패스는 맬컴 맥도널드와 프랭크 스테이플턴과 같은 아스널 공격수들에게 득점 기회를 제공했으며, 아스널은 1978년부터 1980년까지 3년 연속 FA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아스널은 이 중 197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결승전에서만 우승을 차지했는데, 브레이디는 앨런 선덜랜드의 유명한 막판 결승골의 시발점이 되는 플레이를 시작했다.
이 시기 브레이디는 아스널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으며, 1978년 12월 23일 토트넘 홋스퍼와의 5대0 승리 경기에서 피터 테일러로부터 공을 빼앗은 후 페널티 지역 가장자리에서 골문 상단 구석으로 감아차는 환상적인 골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세 차례 선정되었고, 1979년에는 P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이 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인 선수였다.
그는 당시 풋볼 리그 1부 우승과 같은 영예를 꾸준히 노리던 유망한 아스널 팀에서 가장 재능 있는 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80 시즌에는 브레이디가 새로운 도전을 찾아 팀을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 시즌 아스널은 UEFA 컵위너스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발렌시아에 승부차기로 패했다. 준결승에서는 유벤투스를 두 경기 합계 2대1로 꺾었다. 이 경기에서 브레이디의 활약은 이탈리아 거인 유벤투스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1980년 시즌이 끝난 후 유벤투스는 그를 50.00 만 GBP가 조금 넘는 이적료로 영입했다. 그는 1980년 이탈리아 국경이 외국인 선수 이적을 위해 재개방된 이후 유벤투스에 입단한 최초의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그는 아스널의 역대 최고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아스널에서 307경기에 출전하여 59골을 기록하고 수많은 득점을 도왔다.
2.2. 유벤투스 FC
브레이디는 유벤투스에서 두 시즌을 보냈으며, 등번호 10번을 달고 1981년과 1982년에 두 차례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82년 우승을 결정지은 카탄차로와의 경기에서 유일한 골(페널티킥)을 넣어 1대0 승리를 이끌었다. 1982년 여름 미셸 플라티니가 영입되면서 브레이디는 삼프도리아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등번호 10번을 달고 트레버 프랜시스와 함께 뛰게 되었다.
2.3. 기타 이탈리아 클럽
삼프도리아에서 두 시즌 동안 6위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한 후 브레이디는 1984년 인테르 밀란으로 이적하여 1986년까지 뛰었다. 산 시로에서 브레이디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함께 뛰며 1984-85 UEFA컵 준결승에 진출하고 국내 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주요 우승컵은 들어 올리지 못했다. 1986년 브레이디는 아스콜리에 입단했으나, 구단주 코스탄티노 로치와의 임금 체불 문제로 한 해 동안 논쟁을 벌이며 그의 이탈리아 경력은 좋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2.4.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31세의 나이였던 브레이디는 1987년 3월, 10.00 만 GBP의 이적료로 런던으로 돌아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뛰었으며, 모든 대회를 통틀어 119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다. 그는 1989년 1부 리그에서 강등된 팀의 일원이었고, 1990년 선수로서 최종 은퇴하기 전까지 2부 리그에서 한 시즌을 더 뛰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90년 5월 5일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의 홈 경기에서 4대0으로 승리한 경기였으며, 이 경기에서 그는 득점도 기록했다.
3. 국가대표 경력
브레이디는 1974년 10월 30일 달리마운트 파크에서 열린 UEFA 유로 1976 예선 소련과의 경기에서 3대0으로 승리하며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1987년 브라질을 상대로 기록한 골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국제 경기 골로 꼽았다.
UEFA 유로 1988을 앞두고는 징계로 인해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90 예선 도중 브레이디는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아일랜드가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자 그는 다시 출전 의사를 밝혔으나, 잭 찰턴 감독은 예선에 참가한 선수들만 이탈리아로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아일랜드 공화국 국가대표팀에서 72경기에 출전하여(70경기 선발 출전) 9골을 기록했다.
4. 감독 및 코치 경력
선수 은퇴 후 브레이디는 감독 및 코치로서 다양한 팀에서 활동하며 유소년 개발에도 기여했다.
4.1. 클럽 감독
브레이디는 1990년 선수 은퇴 후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셀틱을, 이어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브라이튼 앤 호브 앨비언의 감독을 맡았다. 두 팀에서의 감독 생활은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두 클럽 모두 재정 문제로 인해 브레이디의 임기는 빛을 보지 못했다. 셀틱에서는 2년간 단 한 개의 트로피도 얻지 못했고, 1991-92 UEFA컵에서는 뇌샤텔 크사막스에게 합계 2대5로 패배하는 굴욕을 겪었다. 브라이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구단 운영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팀을 떠났다. 이후 그는 컨소시엄을 이끌고 구단 인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4.2. 유소년 개발 및 국가대표팀 코칭
브레이디는 1996년 7월 아스널에 유소년 개발 책임자 및 아카데미 디렉터로 재합류했다. 브루스 리오치 감독의 사임 후 감독직에 연결되기도 했으나, 그는 그 역할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고 결국 아르센 벵거가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브레이디의 지도 아래 아스널 유소년 팀은 1998년 FA 프리미어 유스 리그, 2000년 FA 프리미어 아카데미 리그 U17, 2002년 FA 프리미어 아카데미 리그 U19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2009년과 2010년 FA 프리미어 아카데미 리그 U18 타이틀과 함께 2000년, 2001년, 2009년 FA 유스컵을 들어 올렸다.
2007년 스티브 스턴턴이 아일랜드 공화국 감독직에서 경질된 후, 브레이디는 2008년 조반니 트라파토니 신임 감독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으며, 전 유벤투스 팀 동료인 마르코 타르델리와 함께 일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스널 유소년 아카데미 디렉터 직책을 계속 유지했다. 2010년 4월 계약이 만료되면서 아일랜드 공화국 대표팀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아스널에서의 업무가 아니었다면 아일랜드 대표팀에 기꺼이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1월 30일, 아스널은 브레이디가 2014년 5월에 아스널 유소년 아카데미 디렉터 역할을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7년부터 브레이디는 아스널 재단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5. 미디어 경력

브레이디는 1990년과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BBC의 해설가로 처음 활동했으며, 1998년 월드컵부터는 RTÉ 스포츠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동료 해설가 조니 자일스, 이몬 던피 그리고 진행자 빌 오헐리와 함께 오랫동안 스튜디오 팀을 이루었다. 이들은 아프레 매치 스케치에서 배리 머피에 의해 패러디되기도 했다. 브레이디는 2018년, UEFA 유로 2020, 2022년 월드컵 중계에서도 RTÉ TV 분석가로 계속 출연했다.
1990년대 초반, 브레이디는 "마약에 부츠를 신겨라(give drugs the boot)"라는 아일랜드 마약 퇴치 캠페인에 참여하여 젊은이들에게 건강한 여가 활동으로 스포츠를 즐기도록 장려했다. 2023년 2월에는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리엄 브레이디: 해외의 아일랜드인(Liam Brady: The Irishman Abroad영어)이 RTÉ One에서 방영되었다.
2023년 6월 19일, 브레이디는 25년간의 RTÉ 스포츠 해설 활동을 마무리한다고 발표했다. 그의 마지막 분석가 활동 경기는 지브롤터와의 3대0 승리 경기였다.
6. 선수 스타일 및 평가
리엄 브레이디는 왼발을 주로 사용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우아하고 기술적이었다. 그는 높은 수준의 패스 능력, 넓은 시야, 그리고 정교한 볼 컨트롤을 바탕으로 경기를 조율하는 뛰어난 플레이메이커였다. 이러한 기술적 특성 덕분에 그는 동료들에게 수많은 득점 기회를 제공하며 팀 공격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스널 시절에는 팀의 공격을 이끌며 구단 올해의 선수로 세 차례 선정되었고, 1979년에는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P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도 유벤투스에서 두 차례 우승을 이끌며 그의 기량을 입증했다.
7. 수상 경력 및 영예
리엄 브레이디는 선수 및 지도자로서 다음과 같은 주요 수상 경력과 영예를 얻었다.
- 아스널
- FA컵: 1978-79
- UEFA 컵위너스컵 준우승: 1979-80
- 유벤투스
- 세리에 A: 1980-81, 1981-82
- 아일랜드 공화국
- 아이슬란드 삼각 토너먼트: 1986
- 개인
- PFA 올해의 선수: 1978-79
- PFA 올해의 팀: 1977-78, 1978-79, 1979-80
- 발롱도르 후보: 1979, 1980, 1981, 1983
- 옹즈 도르: 1980
- 세리에 A 올해의 팀: 1983
- 풋볼 리그 100 레전드: 1998
- FAI 명예의 전당: 2001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6
- 아스널 올해의 선수: 1975-76, 1977-78, 1978-79
- 아이리시 포스트: 뛰어난 스포츠인
- 감독
- 영거스 타르탄 스페셜 이달의 감독: 1992년 8월
- 이달의 감독: 1994년 9월
8. 통계
8.1. 선수 통계
리엄 브레이디의 클럽 및 국가대표 선수 통계는 다음과 같다.
클럽 | 기간 | 출전 | 득점 |
---|---|---|---|
아스널 | 1973-1980 | 235 | 43 |
유벤투스 | 1980-1982 | 76 | 15 |
삼프도리아 | 1982-1984 | 57 | 6 |
인테르 밀란 | 1984-1986 | 58 | 5 |
아스콜리 | 1986-1987 | 17 | 0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1987-1990 | 89 | 9 |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아일랜드 공화국 | 1974 | 2 | 0 |
1975 | 5 | 0 | |
1976 | 5 | 1 | |
1977 | 4 | 1 | |
1978 | 3 | 0 | |
1979 | 5 | 0 | |
1980 | 6 | 0 | |
1981 | 3 | 0 | |
1982 | 6 | 1 | |
1983 | 4 | 3 | |
1984 | 5 | 0 | |
1985 | 8 | 1 | |
1986 | 4 | 1 | |
1987 | 7 | 1 | |
1988 | 0 | 0 | |
1989 | 4 | 0 | |
1990 | 1 | 0 | |
합계 | 72 | 9 |
아일랜드 공화국의 득점은 먼저 표기되며, 득점 열은 브레이디의 각 골 이후의 점수를 나타낸다.
번호 | 캡 | 날짜 | 장소 | 상대팀 | 결과 | 대회 |
---|---|---|---|---|---|---|
1 | 8 | 1976년 3월 24일 | 달리마운트 파크, 더블린, 아일랜드 공화국 | 노르웨이 | 3-0 | 친선 경기 |
2 | 14 | 1977년 3월 30일 | 랜즈다운 로드, 더블린, 아일랜드 공화국 | 프랑스 | 1-0 |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
3 | 36 | 1982년 5월 30일 | 아리마 시립 경기장, 아리마, 트리니다드 토바고 | 트리니다드 토바고 | 1-2 | 친선 경기 |
4 | 42 | 1983년 10월 12일 | 달리마운트 파크, 더블린, 아일랜드 공화국 | 네덜란드 | 2-3 | UEFA 유로 1984 예선 |
5 | 43 | 1983년 11월 16일 | 달리마운트 파크, 더블린, 아일랜드 공화국 | 몰타 | 8-0 | UEFA 유로 1984 예선 |
6 | ||||||
7 | 50 | 1985년 3월 26일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 | 잉글랜드 | 2-1 | 친선 경기 |
8 | 58 | 1986년 9월 10일 | 헤이젤 스타디움, 브뤼셀, 벨기에 | 벨기에 | 2-2 | UEFA 유로 1984 예선 |
9 | 64 | 1987년 5월 23일 | 랜즈다운 로드, 더블린, 아일랜드 공화국 | 브라질 | 1-0 | 친선 경기 |
8.2. 감독 통계
리엄 브레이디의 감독 경력 통계는 다음과 같다.
팀 | 시작 | 종료 | 기록 | ||||
---|---|---|---|---|---|---|---|
경기 수 | 승 | 무 | 패 | 승률 | |||
셀틱 | 1991년 6월 19일 | 1993년 10월 7일 | 116 | 66 | 26 | 24 | 56.9% |
브라이튼 앤 호브 앨비언 | 1993년 12월 15일 | 1995년 11월 20일 | 100 | 33 | 30 | 37 | 33.0% |
합계 | 216 | 99 | 56 | 61 | 45.8% |
9. 영향력 및 유산
리엄 브레이디는 아스널의 역대 최고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그의 뛰어난 기술과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1970년대 후반 아스널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P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인 선수였으며, 이는 그의 기량이 잉글랜드 축구계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또한 이탈리아 유벤투스에서 두 차례 세리에 A 우승을 이끌며 국제적인 명성을 확고히 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아스널 유소년 아카데미 디렉터로서 수많은 유망주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며 구단의 미래를 책임졌다. 그의 지도 아래 아스널 유소년 팀은 여러 차례 리그와 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그가 단순히 뛰어난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유소년 축구 개발에도 깊은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미디어 분야에서도 오랜 기간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팬들에게 축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했고, 그의 솔직하고 날카로운 해설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브레이디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과 FAI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