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리 딕슨은 1964년 3월 17일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로이 딕슨은 맨체스터 시티의 골키퍼로 활동했으며, 딕슨은 어린 시절 메인 로드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맨체스터 시티의 열렬한 팬으로 성장했다.
1.1. Childhood and youth career
딕슨은 1980년 학교를 졸업한 후 번리에 수습생으로 입단하며 축구 선수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1982년에 번리에서 프로 계약을 체결하며 정식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2. Club career
리 딕슨은 아스널에서의 전설적인 시기 이전에 여러 하위 리그 클럽에서 경력을 쌓았다.
2.1. Early career
프로 데뷔 후 딕슨은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번리에서 4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존 본드 감독에 의해 체스터 시티로 이적하여 1년 반 동안 활약했다. 체스터 시티 시절인 1983-84 시즌에는 소속 팀이 풋볼 리그 전체 최하위를 기록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체스터 시티에서 총 57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체스터 시티를 떠난 후 베리로 이적하여 1985-86 시즌 동안 45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86년, 딕슨은 5.00 만 GBP의 이적료로 스토크 시티에 입단했다. 스토크 시티에서 그는 즉시 강한 인상을 남겼고, 스티브 보울드와 훌륭한 수비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빅토리아 그라운드에서 오른쪽 수비수로서 인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1986-87 시즌에는 50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으며, 1987-88 시즌에는 38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추가했다. 1987년 11월, 아스널이 리그컵 4라운드에서 스토크를 3-0으로 꺾었을 때, 조지 그레이엄 아스널 감독은 딕슨과 보울드의 잠재력과 경기력에 주목했다. 두 달 후인 1988년 1월, 아스널은 딕슨을 37.50 만 GBP에 영입했으며, 보울드 또한 5개월 뒤에 아스널에 합류했다.
2.2. Arsenal

리 딕슨은 1988년 1월 29일,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오른쪽 수비수 비브 앤더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떠난 후 그의 후임으로 하이베리에 입성했다. 딕슨이 아스널에서 1군 자리를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케니 샘섬이 왼쪽 수비수로, 왼발을 주로 사용하는 나이절 윈터번이 익숙하지 않은 오른쪽 수비수 자리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딕슨은 1988년 2월 13일 루턴 타운을 상대로 아스널 데뷔전을 치렀는데, 이는 딕슨이 1부 리그에서 처음으로 뛰는 경기였다.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 총 6경기에 출전했으며, 이적 전 컵 대회에 출전한 경력으로 인해 1988년 리그컵 결승전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새 시즌부터 윈터번이 원래의 왼쪽 수비수 자리로 이동하면서, 딕슨은 등번호 2번을 물려받아 10년 넘게 아스널의 주전 오른쪽 수비수로 활약했다. 자리를 잃은 샘섬은 이듬해 겨울 아스널을 떠났다.
딕슨은 훗날 The Independent디 인디펜던트영어 칼럼에서 자신이 뛰었던 아스널 수비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꽤 괜찮은 수비진에서 뛸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은 아니었다는 것을 지나치게 겸손하게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나의 모든 약점은 토니 아담스, 나이절 윈터번, 마틴 키언, 스티브 보울드에 의해 보완되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중 한 명이 잘하지 못하면 다른 선수들이 그 공백을 메웠다."
딕슨과 윈터번은 다음 10여 년간 풀백 자리를 독차지했으며, 주장 토니 아담스와 오랜 기간 활약한 데이비드 올리어리가 중앙 수비에서 활동했다. 1988년 말에는 조지 그레이엄 감독에 의해 스토크 시티에서 딕슨과 함께 뛰었던 스티브 보울드도 아스널에 합류했다. 이 다섯 명의 수비수들은 (종종 기존의 포백 대신 파이브백으로 함께 뛰며) 조지 그레이엄 감독이 1986년 5월 부임한 이래로 1988-89 시즌 1부 리그 우승에 진지하게 도전하는 아스널의 핵심 역할을 했다. 아스널은 1971년 이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딕슨, 윈터번, 아담스, 보울드의 4백은 '페이머스 4'(Famous Four)로 불리며 '철벽 수비'의 대명사가 되었다.
딕슨은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공격형 오른쪽 수비수'였으며, 데이비드 로캐슬과 같은 윙어를 지원하는 데 항상 적극적이었다. 그의 주된 역할은 수비였지만, 공격적인 기술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잠시 클럽의 페널티킥 전담 키커를 맡기도 했다. 아스널은 시즌 마지막 날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를 치렀다. 아스널은 2골 차 승리가 필요했고, 경기는 90분 막바지에 1-0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딕슨은 자기 진영에서 공을 받아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오른쪽 채널로 달려 들어가는 앨런 스미스를 발견한 딕슨은 그의 가슴으로 정확한 롱볼을 배달했다. 스미스의 움직임에 리버풀 수비수가 끌려나가면서 아스널의 미드필더 마이클 토머스가 그 틈으로 침투하여 스미스의 옆 패스를 받아 브루스 그로벨라 골키퍼를 제치고 득점했다. 리버풀이 경기를 다시 시작할 시간조차 거의 없었고, 아스널은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딕슨이 수많은 우승 중 첫 번째 영광을 누린 순간이었다.
이듬해 아스널은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헤이젤 참사 이후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 대회 출전 금지 조치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러피언컵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1990-91 시즌에 아스널의 수비진(이제 데이비드 시먼이 골문 뒤에서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은 더욱 견고해졌고, 단 한 번의 패배만 기록하며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92년 여름 이후, 다시 몸 상태가 좋아진 딕슨은 익숙한 아스널 수비진 안에서 리그 타이틀을 지켜냈다. 올리어리의 은퇴가 임박함에 따라, 그레이엄 감독은 에버턴에서 마틴 키언을 영입하여 중앙 수비에 추가적인 커버를 제공했다. 공교롭게도 키언은 유로 92에서 딕슨과 스티븐스 모두 출전 불가능해진 후 오른쪽 수비수로 뛰었던 선수였다. 딕슨은 토트넘 홋스퍼와의 FA컵 준결승전에서 퇴장당해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고, 1993년 리그컵 결승전에서는 올리어리가 딕슨 대신 오른쪽 수비수로 나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딕슨은 다시 셰필드 웬즈데이와 맞붙은 FA컵 결승전에 복귀했는데, 아스널은 재경기 끝에 같은 점수(2-1)로 승리했다.
1994년, 딕슨은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 팀 파르마의 토마스 브롤린, 잔프랑코 졸라, 파우스티노 아스프리야를 막아내며 유럽 대회 우승 메달을 추가했다. 아스널은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기록했고, 이 한 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딕슨은 1995년에 아스널이 국내 리그에서는 부진했지만 다시 한번 컵 위너스컵 결승에 진출했을 때도 등번호 2번을 달고 있었다. 파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수비진은 레알 사라고사에게 뚫렸지만, 아스널은 동점골을 넣어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연장전 마지막 순간, 나임 (전 스퍼스 선수)이 데이비드 시먼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40 yd 지점에서의 로빙 슛을 성공시키며 우승 트로피는 아스널을 떠났다.
1996년 10월 1일, 아르센 벵거 감독이 하이베리에 부임하여 아스널 선수단에 식단 및 생활 습관 변화를 포함한 새로운 정책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벵거 감독은 훗날 자신이 물려받은 수비수들을 비교적 빠르게 교체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인정했다. 딕슨과 그의 수비 동료들은 벵거 감독이 자신들의 선수 경력을 연장시켜주었다고 평가했다. 아스널은 1998년에 구단 역사상 두 번째 '더블' (프리미어리그와 FA컵 우승)을 달성했고, 딕슨은 아스널에서의 10번째 시즌에 접어들면서 이듬해 은퇴 기념 경기를 가졌다.
딕슨은 2000년 UEFA컵 캠페인에 참여하여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이 결승전은 6년 전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했던 코펜하겐의 같은 경기장에서 열렸지만, 이번에는 갈라타사라이에게 승부차기에서 패배했다. 그 시즌 초반에는 레스터 시티와의 FA컵 경기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여 아스널이 탈락하기도 했다. 이듬해 아스널은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카디프의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리버풀에게 2-1로 패했다. 당시 37세였던 딕슨은 결승골을 넣은 21세의 마이클 오언에게 속도에서 뒤처졌다. 딕슨은 한 시즌 더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아스널이 또 다른 역사적인 '더블' (구단 역사상 세 번째이자 벵거 감독 체제하 두 번째)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아스널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퍼드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 지었다. 이로써 딕슨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의 세 개의 다른 시대에서 리그 우승을 경험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딕슨은 2002년 더블 우승 후 38세의 나이로 토니 아담스와 함께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당시 아스널에서는 딕슨과 함께 수비진을 구성했던 선수들 중 시먼과 키언만이 남아 있었다 (올리어리는 1993년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했고, 보울드는 1999년에 팀을 떠났으며, 윈터번도 1년 뒤 하이베리를 떠났다). 딕슨은 아스널에서 리그 458경기에 출전하여 24골을 기록했고, 총 616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은퇴 당시 풋볼 리그의 92개 구장 중 풀럼의 크레이븐 코티지를 제외한 91개 구장에서 뛰어 본 경험이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오랜 기간 활약한 라이언 긱스는 2020년 4월 인터뷰에서 자신이 상대했던 가장 까다로운 오른쪽 수비수로 딕슨을 꼽기도 했다.
3. International career
딕슨은 1990년 4월 1990년 FIFA 월드컵 대비 친선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당시 개리 스티븐스와 폴 파커에 이어 최소 세 번째 순위였기 때문에 1990년 월드컵 스쿼드에 포함될 가능성은 낮았다. 두 선수 중 한 명이라도 부상을 당해야 딕슨에게 이탈리아로 갈 기회가 생겼을 테지만, 두 선수는 대회 내내 건강을 유지했다.
월드컵 후 새로 부임한 그레이엄 테일러 감독은 스티븐스와 파커 대신 딕슨을 즉시 기용했다. 딕슨은 6번째 국제 경기였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유로 92 예선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중요한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유일한 골을 기록했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1991년 말까지 딕슨은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 92 본선 진출에 성공한 모든 예선전을 포함하여 11번의 국제 경기에 출전했다. 본선 대회가 다가오자 딕슨은 부상을 당했고, 스쿼드 발표 마감일이 다가오면서 스티븐스가 다시 대표팀에 합류할 기회를 얻었다. 테일러 감독은 스티븐스 대신 딕슨을 예비 스쿼드에 포함시켰지만, 결국 두 선수 모두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딕슨은 집에서 발생한 사고로 부상을 당해 대표팀에서 하차했고, 스티븐스가 다시 소집되었으나 레인저스의 풀백인 그도 부상으로 결국 제외되었다. 잉글랜드는 결국 유로 92에서 공인된 오른쪽 수비수 없이 경기를 치렀고,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1993년은 국제적으로 좋지 않은 한 해였다. 잉글랜드는 1994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마지막 예선전인 산마리노와의 경기에서 7-1로 승리한 경기가 그의 21번째 A매치였는데, 이 경기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는 딕슨의 마지막 A매치가 될 것처럼 보였다. 테리 베너블스와 글렌 호들 등 테일러의 후임 감독들은 딕슨을 선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9년 1월 말, 잉글랜드 대표팀의 임시 감독이었던 하워드 윌킨슨은 딕슨을 마지막 A매치 출전 후 5년여 만에 다시 대표팀에 소집했다. 그는 2월 10일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출전했으나 2-0으로 패배했다. 딕슨은 이 경기를 끝으로 총 22번의 A매치 출전과 1골을 기록하며 국제 경력을 마쳤으나, 주요 국제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4. Post-playing career
리 딕슨은 프로 축구 선수 은퇴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4.1. Media career
딕슨은 은퇴 후 축구 전문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방송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BBC의 축구 프로그램인 Match of the Day매치 오브 더 데이영어, Football Focus풋볼 포커스영어, Match of the Day 2매치 오브 더 데이 2영어, Final Score파이널 스코어영어 등에 주로 출연했다. 2012년 7월에는 BBC를 떠나 ITV 스포츠에 합류하여, 동료 축구 전문가이자 전 선수인 로이 킨과 호흡을 맞췄다.
2013년부터는 NBC의 프리미어리그 중계에서 공동 메인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알로 화이트와 (2022년 여름까지), 이후에는 피터 드루리와 (2022년 여름부터) 함께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또한 NBC의 Premier League Download프리미어리그 다운로드영어 프로그램에도 기여했다.
딕슨은 EA 스포츠의 비디오 게임에서도 해설가로 참여했다. 그는 FIFA 19, FIFA 20, FIFA 21에서 데릭 레이와 함께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해설했으며, FIFA 20과 FIFA 21에서는 일반 경기(킥오프, 토너먼트, 커리어, 얼티밋 팀 모드) 해설도 담당했다. 그러나 FIFA 22에서는 스튜어트 롭슨으로 교체되었다.
4.2. Other interests and charitable work
선수 생활 은퇴 후 딕슨은 여러 사업에도 집중했다. 그는 친구인 헤스턴 블루멘탈과 함께 버크셔의 브레이에 있던 Riverside Brasserie리버사이드 브라세리영어 (현재는 Mediterranevm메디테라네움영어)를 포함한 여러 사업을 운영했다.
2010년에는 사이클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고 고백하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라이딩을 즐기게 되었다. 그는 로렌스 달랄리오의 설득으로 그해 2월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 기간 동안 '달랄리오 사이클 슬램'에 참가하여 스포츠 릴리프 자선 단체를 위해 98.60 만 GBP가 넘는 기부금을 모금했다.
딕슨은 2013년 이전에 미들즈브러의 커클리덤 올 센터에서 남부 부부크 올빼미 한 마리를 입양하여 "후티 맥아울페이스(Hooty McOwlface영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올빼미의 이름은 2013년에 바이럴viral영어이 되었고, 이후 국립해양학센터의 새로운 자율수중이동체에 '보티 맥보트페이스(Boaty McBoatface영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영향을 주었다.
5. Honours
리 딕슨은 선수 경력 동안 클럽과 개인적으로 다양한 영예를 얻었다.
5.1. Club honours
아스널 FC
- 풋볼 리그 1부: 1988-89, 1990-91
- 프리미어리그: 1997-98, 2001-02
- FA컵: 1992-93, 1997-98, 2001-02
- 리그컵: 1992-93
- 채리티 실드: 1991 (공동 우승), 1998, 1999
- UEFA 컵 위너스컵: 1993-94
5.2. Individual honours
- PFA 올해의 팀: 1986-87 풋볼 리그 2부, 1989-90 풋볼 리그 1부, 1990-91 풋볼 리그 1부
- 스토크 올해의 선수: 1987
6. Career statistics
리 딕슨은 프로 경력 동안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꾸준한 출전 기록과 득점을 기록했다.
6.1. Club statistics
클럽 | 시즌 | 리그 | FA컵 | 리그컵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번리 | 1982-83 | 세컨드 디비전 | 3 | 0 | 0 | 0 | 0 | 0 | 0 | 0 | 3 | 0 |
1983-84 | 서드 디비전 | 1 | 0 | 0 | 0 | 1 | 0 | 0 | 0 | 1 | 0 | |
합계 | 4 | 0 | 0 | 0 | 1 | 0 | 0 | 0 | 4 | 0 | ||
체스터 시티 | 1983-84 | 포스 디비전 | 16 | 1 | 0 | 0 | 0 | 0 | 2 | 0 | 18 | 1 |
1984-85 | 포스 디비전 | 41 | 0 | 1 | 0 | 2 | 0 | 1 | 0 | 45 | 0 | |
합계 | 57 | 1 | 2 | 0 | 2 | 0 | 3 | 0 | 63 | 1 | ||
베리 | 1985-86 | 서드 디비전 | 45 | 6 | 8 | 1 | 4 | 0 | 1 | 0 | 58 | 7 |
스토크 시티 | 1986-87 | 세컨드 디비전 | 42 | 3 | 5 | 0 | 2 | 0 | 1 | 0 | 50 | 3 |
1987-88 | 세컨드 디비전 | 29 | 2 | 2 | 0 | 4 | 0 | 3 | 0 | 38 | 2 | |
합계 | 71 | 5 | 7 | 0 | 6 | 0 | 4 | 0 | 88 | 5 | ||
아스널 | 1987-88 | 퍼스트 디비전 | 6 | 0 | 0 | 0 | 0 | 0 | 0 | 0 | 6 | 0 |
1988-89 | 퍼스트 디비전 | 33 | 1 | 1 | 0 | 5 | 0 | 2 | 0 | 41 | 1 | |
1989-90 | 퍼스트 디비전 | 38 | 5 | 3 | 0 | 4 | 0 | 1 | 0 | 46 | 5 | |
1990-91 | 퍼스트 디비전 | 38 | 5 | 8 | 1 | 4 | 0 | 0 | 0 | 50 | 6 | |
1991-92 | 퍼스트 디비전 | 38 | 4 | 1 | 0 | 3 | 0 | 5 | 0 | 47 | 4 | |
1992-93 | 프리미어리그 | 29 | 0 | 8 | 0 | 7 | 0 | 0 | 0 | 44 | 0 | |
1993-94 | 프리미어리그 | 33 | 0 | 3 | 0 | 4 | 0 | 9 | 0 | 49 | 0 | |
1994-95 | 프리미어리그 | 39 | 1 | 2 | 0 | 5 | 0 | 9 | 0 | 55 | 1 | |
1995-96 | 프리미어리그 | 38 | 2 | 2 | 0 | 6 | 0 | 0 | 0 | 46 | 2 | |
1996-97 | 프리미어리그 | 32 | 2 | 1 | 0 | 3 | 0 | 1 | 0 | 37 | 2 | |
1997-98 | 프리미어리그 | 28 | 0 | 7 | 0 | 3 | 0 | 2 | 0 | 40 | 0 | |
1998-99 | 프리미어리그 | 36 | 0 | 5 | 0 | 0 | 0 | 6 | 0 | 47 | 0 | |
1999-2000 | 프리미어리그 | 28 | 3 | 3 | 0 | 0 | 0 | 13 | 1 | 44 | 4 | |
2000-01 | 프리미어리그 | 29 | 1 | 6 | 0 | 0 | 0 | 11 | 1 | 46 | 2 | |
2001-02 | 프리미어리그 | 13 | 0 | 4 | 0 | 0 | 0 | 2 | 0 | 19 | 0 | |
합계 | 458 | 24 | 54 | 1 | 43 | 0 | 61 | 2 | 616 | 27 | ||
통산 합계 | 635 | 37 | 70 | 2 | 56 | 0 | 69 | 2 | 830 | 41 |
"기타"는 FA 커뮤니티 실드, UEFA 챔피언스리그, UEFA 슈퍼컵, 머캔타일 크레딧 100주년 트로피, 풀 멤버스컵, 풋볼 리그 트로피 출전 및 득점을 포함한다.
6.2. International statistics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잉글랜드 | 1990 | 4 | 0 |
1991 | 7 | 1 | |
1992 | 4 | 0 | |
1993 | 6 | 0 | |
1999 | 1 | 0 | |
합계 | 22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