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프로 입단
뤄시허는 어린 시절부터 바둑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일찍이 프로 기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 기량을 갈고닦았으며, 중국 바둑계의 기대주로 성장했다.
1.1. 유년기 및 바둑 교육
뤄시허는 1977년 11월 23일 후난성 헝양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 처음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베이징으로 상경하여 국가대표팀 코치인 뤄젠원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10세에는 국가소년바둑팀에 합류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특히 그는 녜웨이핑 9단의 집에서 내제자와 같은 생활을 하며 바둑에 몰두했고, 1984년에는 후지사와 히데유키 9단의 방중 시 7점 접바둑 지도를 받는 등 어린 나이부터 당대 최고 기사들과 교류하며 성장했다.
1.2. 프로 데뷔와 초기 활동
1989년, 뤄시허는 12세의 나이로 프로 초단에 입단하며 정식 바둑 기사가 되었다. 2002년에는 최고 단수인 9단으로 승단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중국 바둑 협회는 젊은 프로 기사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뤄시허는 창하오, 저우허양, 샤오웨이강, 왕레이 등 동료 기사들 중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일찍이 그의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프로 데뷔 초부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1990년 전국청소년바둑대회 B조에서 2위를 차지했고, 1993년에는 세계청소년바둑선수권대회 청년조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1994년 16세의 나이로 명인전과 십강전 리그에 진입했으며, 명인전에서는 당대 강자인 마샤오춘 명인에게 도전했지만 2-3으로 아쉽게 패했다. 같은 해 신수배에서 우승하며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1998년에도 다시 명인전 도전자가 되었으나, 마샤오춘에게 1-3으로 패하며 두 번의 도전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1997년에는 전국개인전에서 5위를 기록했으며, 2000년에는 드디어 전국개인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내 정상급 기사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에는 NEC배에서 우승하며 일중 슈퍼 바둑에 출전했지만, 조치훈 9단에게 0-2로 패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뤄시허의 프로 경력에서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2000년대 중반으로, 특히 국제 대회에서의 놀라운 성과로 세계 바둑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2.1. 명성 확보 및 주요 대회 승리
뤄시허는 여러 주요 대회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며 명성을 쌓았다. 특히 2002년에는 LG배에서 8강에 올랐고, 같은 해 제7회 삼성화재배에서도 8강에 진출했다. 이 대회는 제7회 삼성화재배로, 당시 우승자였던 조훈현 9단과의 8강전은 훗날 '조훈현을 잡았다 풀어줬다'는 별명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경기를 펼쳤다. 농심 신라면배에서는 2002년에 3연승을 기록하며 주목받았으며, 2003년에는 춘란배에서 3위를 차지했다.
2.1.1. 제10회 삼성화재배 우승
뤄시허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2006년 제10회 삼성화재배 우승이다. 그는 예선 라운드를 거쳐 본선 32강에 진출했으며, 본선 첫 두 라운드에서는 조한승 9단과 송태곤 9단을 연이어 격파했다. 뤄시허는 조한승과의 대국이 가장 어려웠다고 회상했으며, 송태곤과의 대국에서는 교묘한 함정을 파 송태곤을 방심하게 만들며 승리를 거두었다.
8강전에서는 당시 국제 대회에서 29승 2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키던 디펜딩 챔피언 이세돌 9단을 만났다. 이 대국에서 뤄시허는 초반에 우세를 잡았으며, 이세돌이 여러 차례 결정적인 실착을 범하면서 뤄시허가 점차 판 전체에서 앞서나갔다. 결국 좌상귀 패 싸움에서 이세돌이 크게 손해를 보자, 이세돌은 집 부족을 이유로 기권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이세돌이 바둑판의 두 개의 큰 대마 중 하나를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이 대국 이후, 뤄시허는 생애 처음으로 국제 대회 준결승에 진출했다. 동시에 후야오위도 준결승에 올랐고, 최철한은 조훈현을 꺾었다. 준결승에서 뤄시허는 후야오위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결승 3번기에서는 당시 국제 대회 결승전에서 외국 기사에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이창호 9단을 상대로 2대1의 스코어로 승리하며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은 뤄시허 개인에게 첫 세계 타이틀이자, 삼성화재배 역사상 중국 기사 최초의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이창호 9단의 불패 기록을 깬 첫 외국 기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바둑계는 이를 "중국 바둑계 20년 역사 이래 가장 빛나는 사건"으로 보도하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2.2. 기타 주요 대회 참여 및 성과
뤄시허는 10회 삼성화재배 우승 외에도 다양한 국제 및 국내 대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인상 깊은 성과를 거두었다.
- 1999년: 기성전 육단전 우승.
- 2002년: LG배 세계기왕전 8강, 삼성화재배 8강.
- 2003년: 춘란배 3위.
- 2000년: 전국개인전 우승.
- 2001년: NEC배 우승.
- 2005년: 명인전 도전 결정전 진출.
- 2006년: CCTV배 우승.
- 2007년: 다샹린배 중국 바둑 슈퍼 쟁패전 우승.
- 2007년: 육대차산배전 우승.
- 2010년: 리코배 바둑 혼성전 우승 (장쉬안 8단과 짝을 이룸).
- 2009년: 전국지능운동회 남자 단체전 3위 (베이징 팀), 남자 개인 속기전 3위.
또한, 뤄시허는 중국 바둑 갑조리그에서도 꾸준히 활동하며 다수의 승리를 기록했다. 그의 기사 랭킹은 1999년에 4위, 2006년에는 9위를 기록하는 등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다.
3. 기풍 및 특징
뤄시허는 깊은 수읽기와 날카로운 공격력을 바탕으로 한 전투적인 기풍을 지녔다. 그의 바둑은 상대방을 꿰뚫는 듯한 통찰력과 과감한 수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별명인 "쾌도"(快刀콰이다오중국어)는 그가 빠른 판단과 날카로운 수를 두는 기풍 때문에 붙여졌다. 또한, 그의 풍채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작은 돼지"(小猪샤오주중국어)로 불리기도 했으나, 2006년 삼성화재배에서 극적인 우승을 차지한 후에는 그의 실력과 함께 "날아다니는 돼지"(飛猪페이주중국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으며 강자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이러한 별명들은 그의 특징적인 기풍과 함께 그의 바둑 인생을 상징하는 단어들로 자리 잡았다.
4. 개인 생활
뤄시허는 2003년 중국의 프로 바둑 기사인 량야디 2단과 결혼했다.
5. 타이틀 및 수상 경력
뤄시허는 프로 경력 동안 다양한 국제 및 국내 대회에서 우승 및 준우승을 기록하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다음은 그의 주요 타이틀과 기록이다.
5.1. 국제 타이틀
타이틀 | 우승 연도 |
---|---|
삼성화재배 | 2006 |
5.2. 국내 타이틀
타이틀 | 우승 연도 |
---|---|
신수 국화배전 | 1994 |
상화배 전국 바둑 초청전 | 1995 |
성설융배 바둑왕전 | 1998 |
전국개인전 | 2000 |
NEC배 | 2001 |
CCTV배 | 2006 |
다샹린배 중국 바둑 슈퍼 쟁패전 | 2007 |
육대차산배전 | 2007 |
리코배 바둑 혼성전 | 2010 |
5.3. 준우승 및 기타 기록
대회 | 기록 |
---|---|
세계청소년바둑선수권대회 | 1993년 청년조 준우승 |
명인전 | 1994, 1997년 도전자로 준우승 |
신인왕전 | 1998년 준우승 |
CCTV배 | 2000년 준우승 |
춘란배 | 2003년 3위 |
아한동산배 | 2006년 준우승 |
구하오배 바둑 국수 초청전 | 2010년 준우승 |
전국지능운동회 | 2009년 남자 단체전 3위 (베이징 팀), 남자 개인 속기전 3위 |
농심 신라면배 | 2002년 3연승 기록 |
LG배 | 2002년 8강 |
삼성화재배 | 2002년 8강, 2004년 16강, 2011년 16강 |
일중 바둑 결전 | 1992년 타카오 신지에게 1-2 패 |
진로배 SBS 세계 바둑 최강전 | 1996년 최규병에게 0-1 패 |
강원랜드배 한중 바둑 대항전 | 2006년 안조영에게 0-1 패 |
6. 평가 및 영향
뤄시허는 중국 바둑의 황금기를 이끈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삼성화재배 우승은 그가 세계 바둑계에 미친 영향을 상징한다.
6.1. 역사적 의의
뤄시허의 삼성화재배 우승은 중국 바둑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우승은 중국 기사 최초로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며, 특히 당시 국제 대회 결승전에서 외국 기사에게 무패를 자랑하던 이창호 9단을 꺾은 첫 사례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이는 한동안 대한민국 바둑이 지배하던 세계 바둑계에 중국 바둑의 부상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중국 바둑 팬들에게는 엄청난 자부심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뤄시허의 승리는 중국 바둑의 전반적인 수준 향상과 젊은 기사들의 성장에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그는 창하오 등과 함께 중국 바둑의 칠소룡으로 불리며 중국 바둑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6.2. 대중문화 속의 언급
뤄시허는 한국의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주인공 최택의 라이벌로 언급되며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드라마 속에서 최택과 뤄시허의 대국이 묘사된 시점은 1988년으로 설정되었는데, 이는 뤄시허가 실제로 프로에 입단하기 이전 시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문화적 언급은 뤄시허라는 인물이 한국 바둑 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강력한 상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