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Lucius Aemilius Paullus Macedonicus라틴어`, 기원전 229년경 - 기원전 160년)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저명한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명망 높은 `아이밀리우스 씨족` 파울루스 가문의 일원이었던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각 단계를 충실히 밟으며 `집정관`과 `감찰관`을 역임했다. 그의 군사적 경력의 정점은 기원전 168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을 정복하고 `피드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이 승리로 그는 '`Macedonicus마케도니쿠스라틴어`'라는 `칭호`를 얻으며 로마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그의 영광스러운 업적 뒤에는 `인권` 침해와 `제국주의`적 `폭력성`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특히 `이피로스 약탈` 과정에서 자행된 15만 명의 주민 `노예화`와 `마케도니아` `반대파`에 대한 `학살`은 그의 행적에 대한 `도덕`적 `비판`의 핵심으로 남아있다. 그는 개인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청렴한 `정치가`의 면모도 보여주었지만, `권력`과 `전쟁`이 초래한 `인간성` 말살의 `측면`을 분명히 드러낸 복합적인 인물이다. 이 문서는 그의 `생애`, `업적`, 그리고 그를 둘러싼 `논란`들을 깊이 있게 다룰 것이다.
2. 초기 생애와 배경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이는 그의 후기 경력과 가문 간의 복잡한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2.1. 가문과 유년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들이며, `아이밀리우스 씨족` 파울루스 가문의 수장이었다. 이 가문은 고대 로마의 유서 깊은 `파트리키` 계층으로, 그들의 막대한 재산과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과의 동맹으로 인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부친이 전사했을 때 파울루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폴리비오스`는 그의 친구였으며, 파울루스의 아들들을 가르치는 스승이기도 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은 결혼과 정치적 이해관계로 `스키피오 씨족`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부친 사후 그의 양육에 스키피오 가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3. 초기 경력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로마 공화정의 `명예로운 경력`을 통해 다양한 공직을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고,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전에도 여러 군사 작전에서 활약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3.1. 쿠르수스 호노룸
`cursus honorum쿠르수스 호노룸라틴어`은 로마 공화정의 공직 경력 경로를 의미하며, 파울루스는 이 경로를 따라 점진적으로 권력을 쌓아갔다. 그는 병역을 마친 후 `천부장 밀리툼`으로 선출되었으며, 기원전 195년 이전에는 `재무관`에 취임한 것으로 비문에서 확인된다. 기원전 194년에는 `식민시` 건설 3인 위원 중 한 명으로서 `크로톤`의 정착을 감독했다.
기원전 193년에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많은 가축 소유주로부터 벌금을 징수하고 그 돈으로 `유피테르` 신전에 봉헌했으며, `테베레강`의 치수를 관리하고 `Porta Trigemina트리게미나 문영어`과 `Porta Fontinalis폰티날리스 문영어`에 `아케이드`를 정비하는 등 공공 사업을 수행했다. `법무관`에 취임하기 전인 기원전 192년경에는 `새점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기원전 191년에 `법무관`으로 선출된 그는 이듬해 `프로콘술` 자격으로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를 담당하며 `루시타니아인`들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다. 그는 한 차례 패배했으나 이듬해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시리아 전쟁의 최종 국면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의 조약 체결을 위한 10인의 사절단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몇 년간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했다.
기원전 182년, 파울루스는 마침내 `그나이우스 바에비우스 탐필루스`와 함께 첫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리구리아`를 담당했다. 그곳에서 승리한 후 리구리아인들은 이웃 `갈리아`의 `마르셀루스`에게 항복을 요청했으나, `원로원`은 두 집정관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탐필루스는 선거 관리를 위해 `로마`로 돌아갔고, 파울루스는 `피사`에서 해를 넘겼다.
이듬해에도 그는 탐필루스와 함께 `프로콘술`로서 리구리아를 담당했다. 그들은 `Ingauni잉가우니족영어`과 조우하여 휴전 협정을 맺었으나, 기습 공격을 받아 진지로 밀려났다. 탐필루스와 마르셀루스는 다른 곳으로 군단을 이동 중이라 움직일 수 없었고, `법무관` `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 등이 긴급히 군대를 편성하여 지원을 나섰으며, `가이우스 마티에누스`와 `가이우스 루크레티우스 갈루스`가 해군 `2인관`으로 임명되어 구원에 나섰다. 구원이 늦어지자 파울루스는 스스로 공격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한니발`, `필리포스 5세`, `안티오코스 3세`와 같은 강적에 비하면 도망 다니는 강도 같은 적은 상대가 안 된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는 방심한 적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으며 해적도 진압했다. 로마에서는 3일간의 `감사제`가 열렸고, 파울루스의 군대는 해산이 허용되었다.
기원전 171년, `히스파니아` 속주민들이 담당 `정무관`들의 착취를 원로원에 호소했을 때, `대 카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등과 함께 그들의 편에 서서 변호에 나섰다. 이로 인해 일부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일부는 망명했다.
3.2. 초기 군사 활동
파울루스는 `법무관` 재임 시절인 기원전 191년부터 기원전 189년까지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루시타니아인`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첫 해에는 패배했으나 이듬해에는 승리를 거두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또한 기원전 182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후 `리구리아`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특히 기원전 181년 `잉가우니족`과의 전투에서 기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적을 격파하고 해적을 진압하는 등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과 지휘력을 발휘했다.
4.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전후 활동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피드나 전투`를 통해 로마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으며, 그 후 마케도니아와 `이피로스`의 잔인한 전후 처리 과정과 성대한 `개선식`을 거쳐 '`마케도니쿠스`' 칭호를 얻게 되었다.
기원전 171년,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군이 `푸블리니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칼리니쿠스 전투`에서 격파하면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양측 모두에게 결정적이지 않은 2년이 지난 후, 파울루스는 기원전 168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다시 선출되었다. 집정관으로서 그는 `원로원`에 의해 마케도니아 전쟁을 처리하도록 임명되었다.
4.1. 집정관 재임(기원전 168년) 및 피드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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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원전 168년 6월 22일, `피드나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왕조`의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페르세우스는 포로로 잡혔고, 이로써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종결되었으며 `안티고노스 왕조`는 멸망했다.
전투 중에는 흥미로운 일화들이 전해진다. 그는 `위장 퇴각`을 시도했지만 적이 속지 않자, `기병`들에게 `방패`를 들고 적의 `팔랑크스` 전면을 횡단하게 하여 지나가면서 적의 `장창`을 부러뜨려 전투 의지를 꺾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전투에서 탈영한 외국인 병사들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전례처럼 `코끼리`에게 짓밟히게 하여 본보기로 삼았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마시니사`의 아들 `미사게네스`도 이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후 고국으로 돌아가던 중 폭풍을 만나 생사의 기로에 놓였으나, 원로원은 그의 간호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휘하 기병들에게도 보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승리 직후 파울루스는 포로가 된 페르세우스를 예의를 갖춰 대하고 `그리스어`로 격려했다는 일화도 있다.
4.2. 전후 처리와 이피로스 약탈
기원전 167년,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에 공감한 것으로 의심받던 `이피로스` 왕국을 약탈한 후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궁의 보물들을 로마행 배에 실은 뒤 군대를 이끌고 이피로스로 향했다. 그의 본심과는 달리, 그는 70개의 마을을 약탈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15만 명의 주민들이 `노예`가 되는 비극적인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다. 이 약탈은 단 한 시간 만에 이루어졌으며, 병사들에게는 매우 적은 몫만이 허용되었다.
전쟁 후 파울루스는 `그리스`를 둘러보며 각 도시의 자치권을 회복시켰고, `델포이`에 서 있던 페르세우스 상을 자신의 것으로 교체시켰다. 그는 또한 `페이디아스`가 제작한 `올림피아의 제우스상`도 견학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에서 파견된 10인의 조정 위원회가 도착하자, 마케도니아의 자치권이 회복되었고, 기존 `조공`의 절반만 납부하도록 결정되었다. 이 시기에 파울루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성대한 `축제`를 주최했는데, 그의 세심한 배려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전투 지휘나 축제 준비나 모두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페르세우스가 모아두었던 막대한 보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국고에 넣으라고 지시했으며, 오직 서적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4.3. 로마 개선식과 '마케도니쿠스' 칭호 획득
파울루스의 로마 귀환은 영광스러웠다. 마케도니아와 이피로스에서 거둬들인 막대한 약탈품과 포로를 앞세워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이 개선식에는 포로로 잡힌 마케도니아의 왕 자신과 그의 아들들이 등장하여 `안티고노스 왕조`의 종말을 상징했다. 이 개선식에서 병사들은 전리품 분배에 불만을 품고 `군사 호민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중심으로 개선식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개선식 거행 여부는 `민회`의 투표에 부쳐졌고, 첫 투표 부족(트리부스)이 반대하자 사람들은 비탄에 잠겼다. 이에 `원로원 의원`들은 일제히 투표를 중지시키고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플레크스 게미누스`가 병사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개선식이 가결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화려했던 개선식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특히 페르세우스의 아이들이 행렬에 포함된 모습이 사람들의 연민을 자아냈다고 전한다. 페르세우스는 개선식에서 끌려다니는 것을 멈춰달라고 간청했지만, 파울루스는 냉담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항복 직후에는 페르세우스를 예의를 갖춰 대하고 그리스어로 격려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어 그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 시기 전후로 파울루스의 두 아들이 사망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페르세우스는 패했지만 자식이 남았고, 아이밀리우스는 승리했지만 자식을 잃었다"고 기록하며 그의 개인적인 비극을 언급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원로원`은 그에게 `agnomen아그노멘라틴어`인 '`Macedonicus마케도니쿠스라틴어`' 칭호를 수여했다. 이는 그의 경력의 정점이었다. 그의 승리로 로마 국고는 풍요로워졌고, 전쟁 특별세(`tributum트리부툼라틴어`) 징수는 폐지되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 세금이 기원전 43년까지 부과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놀랍게도 파울루스 자신의 사유 재산은 크게 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페르세우스와의 전투 전, 집에 돌아오자 딸 `테르티아`가 슬퍼하고 있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끼던 `애완견` 페르사가 죽었다고 답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는데, 이는 페르세우스를 무찌를 `징조`였다고 한다. 또한 이 승리는 `디오스쿠로이`가 흰 말에 탄 쌍둥이 신의 모습으로 `리에티`의 젊은이에게 전해졌고, 처음에는 믿지 않던 사람들이 승리가 확인된 후 이들을 시민으로 추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유래가 되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언급한다.
5. 후기 정치 경력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집정관` 재임 이후 `감찰관`으로서 중요한 행정 역할을 수행하며 로마 공화정의 내정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5.1. 감찰관 재임(기원전 164년)
기원전 164년, 파울루스는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감찰관`으로 선출되었다. `켄수스`는 무사히 완료되었고, 337,022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그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princeps senatus프린켑스 세나투스라틴어`로 재지명했다. 기원전 162년에는 `interrex인테르렉스라틴어`를 역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6. 개인 생애와 가족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사적인 삶은 두 번의 결혼과 자녀들의 입양,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는 로마 `귀족` 사회의 독특한 가족 계승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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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결혼과 자녀
파울루스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 집정관의 딸인 `Papiria Masonis파피리아 마소니스라틴어`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특별한 이유 없이 그녀와 `이혼`했다. 이 결혼에서 두 아들과 두 딸, 총 네 자녀를 얻었다. 로마 역사가들에 따르면 막내아들이 아직 아기일 때 이혼했으므로, 이혼은 대략 기원전 183년에서 182년 사이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원전 182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파울루스는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 부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결혼에서 그는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더 얻었다. 큰아들은 기원전 181년경에 태어났고, 작은아들은 기원전 176년경에 태어났다. 딸 `Aemilia Tertia아이밀리아 테르티아라틴어`는 그가 두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을 때 어린 소녀였다.
6.2. 아들들의 양자 입양
네 명의 아들을 모두 `쿠르수스 호노룸`을 통해 지원하기에는 너무 많다고 판단한 파울루스는 아마도 기원전 175년에서 170년 사이에 가장 나이 많은 두 아들을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다. 큰아들은 `파비우스 씨족`에 `입양`되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즉 로마의 `국가 영웅`의 가문에 합류하게 되었다. 작은아들(아마도 `Lucius루키우스라틴어`)은 그의 사촌이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입양`되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되었고, 이로써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왕조`의 `상속자`가 되었다.
6.3. 자녀들의 운명과 후손
가장 나이 많은 아들들이 로마의 가장 강력한 두 `파트리키` 가문에 안전하게 `입양`되었으므로, 파울루스는 두 어린 아들들이 자신의 이름을 이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두 아들은 파울루스가 `개선식`을 거행하던 시기와 동시에 젊은 나이에 연이어 사망했다. 큰아들은 14세, 작은아들은 9세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그의 정치적, 군사적 경력의 성공은 불행한 가족 생활과 함께했다. 그는 갑작스레 모든 아들을 잃었지만, 훗날의 연설에서 "나는 `신`들에게 로마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려거든, 대신 나에게 그 해를 달라고 빌었다. 이제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그의 정신에 감탄했다고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기록했다.
파울루스 사망 당시, `입양`되었지만 법적으로는 더 이상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의 일원이 아니었던 아들들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을 상속받았다. 스키피오는 자신이 받은 몫을 덜 부유했던 형에게 양보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이름 미상)은 파울루스 사망 후 그의 재산 일부를 매각하여 `지참금`을 돌려받았다.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는 모두 파울루스가 비교적 가난하게 죽었으며, 성공적인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개인적으로 거의 재산을 챙기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파울루스가 농장을 하나만 소유하며 가난하게 살았다는 기록을 남겨 그의 청렴함을 강조한다.
파울루스의 죽음과 함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은 비록 두 명의 살아있는 아들(양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가 끊겼다. 그의 장남인 파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결국 `집정관`이 되어 적어도 한 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이 아들은 기원전 121년에 `파비우스 알로브로기쿠스`로서 `집정관`이 되었다. 이 인물은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게 운명을 맡긴 `파비우스 씨족`의 조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작은아들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는 더 유명했지만, 알려진 후손 없이 사망했다.
파울루스의 첫 번째 부인이자 전 부인인 `Papiria Masonia파피리아 마소니아라틴어`는 전 남편보다 오래 살았으며,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녀의 동생이 사망한 후 그 재산을 아들 스키피오를 통해 넘겨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사망 시에는 재산이 아들들에게 분배되었으나, 스키피오는 그의 몫을 누이들에게 주었다.
파울루스의 딸들 중 한 명은 비교적 가난한 `플레브스` 가문 출신의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와 결혼하여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의 어머니가 되었다. 막내딸 `Aemilia Paulla Tertia아이밀리아 파울라 테르티아라틴어`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의 장남 `마르쿠스`와 결혼하여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집정관`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7. 사망
기원전 160년, 파울루스는 `감찰관` 임기 중 사망했다. 그는 병에 걸려 회복하는 듯했으나, 사흘 안에 재발하여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 당시, 마침 외교 목적으로 로마에 와 있던 마케도니아의 고위 관리가 그의 장례 마차 비용을 부담했다고 전해지는데, 관에는 마케도니아에 승리한 증표가 달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우를 받은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8. 유산과 평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로마 공화정에 막대한 군사적, 정치적 기여를 했으나, 동시에 그의 행적은 `잔혹성`과 `도덕`적 논란을 남기며 후대에 복합적인 평가를 받았다.
8.1. 역사적 중요성과 긍정적 평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로마 공화정`의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군사적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피드나 전투`에서의 승리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종말을 가져왔고, `그리스`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지휘력과 전략적 역량은 당대에도 높이 평가되었으며, 로마 국고를 풍요롭게 하고 전쟁 특별세(`tributum트리부툼라틴어`)를 폐지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개인적인 부를 탐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했다는 점에서 청렴함을 인정받기도 한다. 역사가 `로라 홀랜드`는 파울루스를 "철학자 `정치가`의 `모범`"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8.2. 비판과 논란
그러나 그의 행적에는 비판적인 시각과 논란의 여지가 많다. 특히 `이피로스 약탈`은 그를 `인권` 침해와 `잔혹성`의 상징으로 남게 했다. 그는 친 마케도니아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70여 개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15만 명의 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또한 `마케도니아` 내 `반대파` 500명을 학살하고 다수를 로마로 강제 연행하여 재산을 몰수하는 등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개선식`에서 포로로 잡힌 `페르세우스` 왕의 처절한 간청을 냉담하게 거절한 모습은 그의 `냉혹`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의 군사적 업적 뒤에 가려진 `제국주의`적 `폭력성`과 `인간성` 말살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병사들이 전리품 배분에 불만을 품고 그의 개선식에 반대했던 사실 또한 그의 전후 처리 방식에 대한 내부적 비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9. 같이 보기
- `아이밀리우스 씨족`
- `스키피오-파울루스-그라쿠스 가계도`
-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기념비`
- `마케도니아 전쟁`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 `안티고노스 왕조`
- `로마 공화정 집정관 목록`
- `로마 공화정 감찰관 목록`
- `로마 공화정 새점관 목록`
- `개선식의 파스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