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루이 5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조 군주로서 짧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의 유년기부터 아버지와의 공동 국왕 책봉, 정략결혼과 그로 인한 개인적 불화, 그리고 단독 통치 시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들이 그의 삶을 규정했습니다.
1.1. 유년기 및 공동 국왕 책봉
루이 5세는 966년 또는 967년에 서프랑크 왕국의 왕 로테르와 이탈리아의 왕 로타리오 2세의 딸인 엠마 왕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서프랑크 왕국의 초대 군주인 대머리 카를 2세의 5대손이자, 외가로는 신성 로마 제국 오토 1세의 누이인 게르베르가의 손자이기도 하여 오토 왕가와 복잡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척 관계에도 불구하고 서프랑크 왕국과 오토 왕가 사이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978년, 그의 아버지 로테르 왕은 아들 루이를 정부에 참여시켰고, 979년 6월 8일 컴피에뉴의 생 코르넬리에 수도원에서 랭스의 아달베롱 대주교의 집전으로 공동 국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비록 공동 국왕으로 책봉되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통치 하에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었습니다.
1.2. 결혼과 그 영향
982년, 15세의 어린 루이 5세는 오트루아르주의 비에유브리우드에서 당시 40세였던 아델라이드-블랑슈 당주와 결혼했습니다. 아델라이드-블랑슈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의 누이이자, 이전에 제보당 백작 스테판과 툴루즈 백작 레이몽 3세와 결혼했던 두 번의 미망인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획되었는데, 왕비 엠마와 조프루아 1세 백작의 조언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왕국의 남부 지역에서 카롤링거 왕실의 권력을 회복하고 로베르 가문과의 싸움에서 남부 영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로테르 왕은 아델라이드-블랑슈를 통해 왕국 남부의 가장 강력한 두 백작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위그 카페의 세력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혼 직후 루이와 아델라이드-블랑슈는 아델라이드의 오빠인 르퓌의 귀 주교에 의해 아키텐의 왕과 왕비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나이 차이가 상당하고 성격도 맞지 않았던 부부는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당대 연대기 작가 리케루스는 "그들은 거의 부부간의 사랑이 없었다. 루이는 이제 막 사춘기를 넘겼고 아델라이드는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오직 부적합과 불일치만이 있었다. 그들은 공동 침실을 쓰지 않았고, 여행할 때도 각자 다른 거처를 사용했으며, 어쩔 수 없이 대화해야 할 때는 야외에서 짧게 몇 마디만 주고받았다. 루이는 가정교사가 없었기에 어린 나이에 온갖 경박함에 빠졌다. 그들은 이렇게 2년을 보냈고, 결국 반대되는 성격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루이의 경박한 행동과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을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984년, 자녀 없이 2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낸 아델라이드는 루이를 속여 아키텐으로 함께 가자고 설득한 후, 그를 떠나 가족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곧 프로방스의 윌리엄 1세와 재혼했습니다. 당대 및 후대 여러 기록(리케루스, 로둘푸스 글라베르 등)에 이 결혼이 언급되었지만, 최근 역사가 칼리히하르트 브륄은 이 결혼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1.3. 단독 통치와 정치적 상황
986년 3월 2일 아버지 로테르 왕이 사망하자, 이미 공동 국왕이었던 루이 5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단독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크 궁정에는 두 가지 주요 파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랭스의 아달베롱 대주교와 엠마 왕비가 이끄는 파벌로, 엠마 왕비의 어머니인 아델라이드 황후의 강한 영향을 받아 오토 왕가와의 우호 관계를 갱신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파벌은 로테르의 정책을 이어가며 어린 오토 3세 황제의 약점을 이용해 동쪽으로의 확장과 로타링기아 회복 정책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또한 루이 5세는 아버지의 계보를 잇는 선출된 왕조(카롤링거)가 로베르 가문에 의해 두 번, 보소니드 가문에 의해 한 번 중단되었던 투쟁을 물려받았습니다. 로마의 수호자로서 오토 1세는 카롤링거 영토 내 성직자들을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그가 임명한 성직자들은 카롤링거 왕가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엠마 왕비가 상황을 주도했지만, 986년 여름 반-오토 왕가 파벌이 득세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엠마 왕비는 궁정을 떠나 위그 카페에게 피신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달베롱 대주교 또한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오토 1세에 의해 강력한 랭스 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자신의 주교좌를 떠나 오토 왕가의 영향권에 있던 뫼즈 강변의 요새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대주교의 도주는 루이 5세에 의해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그는 아달베롱에게 맹렬히 대항하며 랭스 포위를 위협했습니다. 이 문제는 결국 컴피에뉴에서 열릴 재판을 통해 해결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을 앞두고 루이 5세는 마음을 바꾸어 아달베롱과의 화해를 모색했습니다. 987년 봄에는 오토 3세를 대리하는 테오파누 황후와의 평화 회담을 계획했습니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이 해결되기도 전에 루이 5세는 987년 5월 21일 상리스 근처 알라트 숲에서 사냥 중 말에서 떨어지는 낙마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컴피에뉴의 생 코르넬리에 수도원에 안장되었습니다.
2. 죽음과 왕위 계승
루이 5세는 987년 5월 21일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 계승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적법한 후계자의 부재는 카롤링거 왕조의 종말과 새로운 카페 왕조의 시작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이어졌습니다.
루이 5세는 987년 5월 21일, 상리스 근교의 알라트 숲에서 사냥 도중 낙마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컴피에뉴의 생 코르넬리에 수도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공석이 되었고, 그의 삼촌인 하 로렌 공작 샤를이 이론적으로 왕위 계승 후보자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샤를은 로테르 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었습니다. 이에 아달베롱 대주교와 훗날 실베스테르 2세가 되는 제르베르를 포함한 성직자들은 군사력을 갖추고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던 카페 가문의 위그 카페를 왕으로 선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결국 위그 카페는 왕족 혈통은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과 군사적 역량을 통해 능력을 입증했기에 프랑크 왕좌에 선출되었습니다. 아달베롱 대주교는 루이 5세의 사망 후 두 달 이내에 위그 카페에게 왕관을 씌웠습니다. 이로써 751년 피핀 3세에 의해 시작된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는 막을 내리고 카페 왕조가 프랑스 왕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서프랑크 왕국은 이후 '프랑스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루이 5세의 친동생인 랭스 백작 외드는 그보다 앞선 986년에 사망했고, 또 다른 동생 리샤르 역시 991년경에 사망하여 대머리왕 카를 2세의 직계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3. 가족 관계
루이 5세의 직계 가족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조부:** 루이 4세(Louis IV, 920년 ~ 954년), 서프랑크 왕국의 왕
- 부모:**
- 아버지:** 로테르(Lothair, 940년 ~ 986년), 서프랑크 왕국의 왕
- 어머니:** 엠마(Emma, ? ~ 986년), 이탈리아의 왕 로타리오 2세의 딸
- 형제자매:**
- 남동생:** 외드(Eudes, 986년 사망), 랭스 백작
- 이복동생:** 아르눌프(Arnulf de Reims, 967년 ~ 1021년 3월 5일), 랭스 대주교
- 이복동생:** 리샤르(Richard, 991년경 사망)
- 배우자:**
- 아델라이드-블랑슈 당주**(Adelaide-Blanche of Anjou): 982년 결혼, 984년 이혼. 앙주 백작 풀크 2세의 딸이자 조프루아 1세의 누이. 결혼 당시 40세로, 이전 두 번의 결혼에서 미망인 신분.
- 외조부모:**
- 외할아버지:** 로타리오 2세(Lothario II, 920년경 ~ 950년), 이탈리아의 왕
- 외할머니:** 아델라이드(Adelaide),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의 딸. 그녀는 남편 로타리오 2세가 독살당하자 독일에 의탁했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와 재혼.
- 증조부모:**
- 친증조부:** 카를 3세(Charles the Simple)
- 친증조모:** 에드기푸(Eadgifu of England)
- 외증조부:** 하인리히 1세(Henry I of Saxony)
- 외증조모:** 마틸데(Mathilde)
- 고조부모:**
- 친고조부:** 루이 2세 (Louis II)
- 친고조모:** 파리의 아델라이드 (Adelaide of Paris)
- 외고조부 (에드기푸의 아버지):** 에드워드 장로 (Edward the Elder)
- 외고조모 (에드기푸의 어머니):** 엘플래드 (Ælfflæd)
- 외고조부 (하인리히 1세의 아버지):** 작센의 오토 1세 (Otto I of Saxony)
- 외고조모 (하인리히 1세의 어머니):** 프랑코니아의 헤드위가 (Hedwiga of Franconia)
- 외고조부 (마틸데의 아버지):** 링겔하임의 디트리히 (Dietrich of Ringelheim)
- 외고조모 (마틸데의 어머니):** 라인힐트 (Reinhild)
4. 평가와 유산
루이 5세는 짧고 무력했던 통치 기간으로 인해 '무위왕' 또는 '나태왕'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이 별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실질적인 권력이 주로 귀족들에게 있었고, 그 자신이 왕국의 주요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음을 반영합니다. 그의 개인적인 삶, 특히 연상의 아델라이드-블랑슈 당주와의 불행한 결혼과 이혼은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평판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그의 통치는 불과 1년여에 불과했지만,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서 그의 죽음은 서프랑크 왕국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적법한 후계자가 없었던 상황은 카롤링거 왕조의 대를 끊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는 프랑스 왕위 계승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삼촌인 하 로렌 공작 샤를이라는 카롤링거 혈통의 마지막 계승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와 귀족들은 샤를의 정치적 역량 부족과 귀족들 사이의 낮은 인기를 이유로 그를 배제하고 위그 카페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카롤링거 왕조를 종식시키고 카페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루이 5세의 짧고 무의미했던 통치는 결국 프랑스의 왕권이 혈통보다는 강력한 귀족 가문, 특히 군사적 역량과 정치적 수완을 갖춘 인물에게 넘어가는 과정을 가속화하는 역설적인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서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왕국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프랑스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5. 함께 보기
- 프랑스의 군주
- 아키텐의 군주
- 샤를
- 아르눌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