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윌프레드 패트릭 돌런 "로지" 라이언(Wilfred Patrick Dolan "Rosy" Ryan, 1898년 3월 15일 ~ 1980년 12월 10일)은 미국의 프로 야구 투수이다. 그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10시즌 동안 뉴욕 자이언츠, 보스턴 브레이브스, 뉴욕 양키스,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활약했다. 라이언은 대학 시절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주목받았고, 프로에서는 특히 뉴욕 자이언츠에서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 선두와 최다 출장 기록을 세우며 전성기를 보냈다. 그는 두 차례의 월드 시리즈에서 선발승을 거두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월드 시리즈에서 홈런을 친 최초의 구원 투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선수 생활 은퇴 후에는 마이너리그 감독과 단장으로 활동하며 야구계에 계속 기여했다.
2. 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경력
라이언은 어린 시절부터 대학 야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장차 프로 선수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2.1. 출생 및 배경
라이언은 1898년 3월 15일 매사추세츠주 워체스터에서 태어났다.
2.2. 학력 및 아마추어 야구
그는 홀리크로스 칼리지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신입생 시절 투수로서 9승 2패의 뛰어난 승패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18년에는 피튼 필드에서 열린 다트머스 칼리지와의 경기에서 학교 역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4대0 승리를 이끌었다. 라이언은 1920년에 홀리크로스 칼리지를 졸업했다.
3. 프로 선수 경력
라이언은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활발한 선수 생활을 보냈다.
3.1. 프로 초기 (1919년-1920년)
1919년, 라이언은 국제 리그 소속의 버팔로 바이슨에서 15승 8패에 1.3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그해 시즌 막바지에 뉴욕 자이언츠에 의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콜업되었다. 1919년 9월 7일, 그는 폴로 그라운즈에서 열린 보스턴 브레이브스와의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나서며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는 보스턴의 래빗 마란빌과 자이언츠의 프랭키 프리시 등 두 명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 유격수로 출전했다. 라이언은 5이닝 동안 8피안타 3실점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고, 팀은 4대2로 패했다. 그는 그 시즌 자이언츠 소속으로 4경기에 출전했다. 1920년에는 다시 국제 리그의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에서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고, 같은 해 자이언츠 소속으로 3경기에 출전했다.
3.2. 전성기 및 월드 시리즈 출전 (1921년-1924년)
라이언의 메이저리그 전성기는 1922년과 1923년에 찾아왔다.

1921년, 라이언은 자이언츠의 주전 선수로 자리매김하여 36경기에 출전했고, 147.1이닝 동안 7승 10패에 3.7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특히 7월 4일부터 24일까지 3주 동안 4번의 완투승을 포함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이 중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로저스 혼스비를 상대로 10이닝 동안 4대3으로 승리한 경기도 있었다. 비록 정규 시즌 활약에도 불구하고, 자이언츠가 뉴욕 양키스의 강타자 베이브 루스를 꺾고 1921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라이언은 포스트시즌에 출전하지 못했다.
1922년, 라이언은 17승 12패를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에서 3.01의 평균자책점으로 리그 1위에 올랐다. 이 해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도 승리 투수가 되었다. 1922년 월드 시리즈에서 자이언츠는 다시 양키스를 상대했는데, 1차전 7회말까지 0대2로 뒤지고 있었다. 라이언은 마지막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8회에는 루스를 삼진으로 잡았다. 자이언츠는 8회에 양키스 선발 투수 불릿 조 부시를 상대로 3점을 올리며 역전했고, 라이언이 9회를 막아내며 3대2 승리를 거두었다. 자이언츠는 이후 양키스를 스윕하며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923년, 라이언은 16승 5패를 기록하며 45경기에 출전해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했다. 이 해에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1923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자이언츠 선발 투수 뮬 왓슨이 첫 2이닝 동안 양키스에 3점을 허용하자, 라이언이 구원 등판하여 남은 7이닝을 소화하며 단 1점만을 추가로 허용했고, 자이언츠는 5대4로 승리했다. 라이언은 4차전 패전 경기에서 잠시 등판했으며, 6차전에서는 선발 투수 아트 네프의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 7전 4선승제 시리즈에서 양키스가 3승 2패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네프와 자이언츠는 8회까지 4대1로 앞서고 있었다. 네프가 8회에 만루를 만들고 나서 2점째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자, 라이언은 1아웃 만루 상황에서 등판했다. 그는 이어서 조 두간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며 3점째를 내주었지만, 만루 상황에서 강타자 루스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러나 2아웃 후 양키스 타자 밥 뮤젤이 안타를 쳐 3명의 주자를 모두 불러들였고, 양키스는 6대4로 역전했다. 자이언츠는 8회말에 득점하지 못했고, 라이언은 9회초 양키스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냈지만, 자이언츠는 마지막 이닝에 역전하지 못했다. 라이언은 패전 투수가 되었고, 양키스는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24년, 라이언은 자이언츠 소속으로 37경기에 출전하여 7승 6패를 기록했다. 그는 워싱턴 세너터스에 7경기에서 패한 1924년 월드 시리즈에서 두 경기에 등판했다. 그는 3차전에서 4.2이닝 동안 중간 계투로 등판하여 2실점을 허용했지만, 타석에서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는 세너터스 투수 앨런 러셀을 상대로 우월 깊은 홈런을 터뜨렸다. 라이언은 월드 시리즈에서 홈런을 친 역대 두 번째 투수이자, 최초의 구원 투수였다.
3.3. 후기 선수 경력 (1925년-1938년)

라이언은 1925년 시즌을 앞두고 팀 맥나마라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했다. 그는 보스턴에서 37경기에 출전하여 2승 8패에 6.3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부진했다. 1926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보스턴 소속으로 7경기에 7.5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후 마이너리그 팀인 톨레도 머드 헨스로 보내졌고, 1928년 시즌까지 그곳에서 뛰었다. 그는 1928년 시즌 막바지에 뉴욕 양키스에 합류하여 3경기에 출전했지만, 6이닝 동안 11실점을 허용했다.
이후 4년간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다. 1929년과 1930년에는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1931년에는 다시 톨레도에서, 1932년에는 미니애폴리스 밀러스에서 뛰었다. 1933년,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30경기에 출전하며 다시 메이저리그 주전 선수로 복귀하여 4.5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는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다시 미니애폴리스에서 뛰었고, 더 이상 메이저리그에 출전하지 못했다.
1937년과 1938년에는 케이프코드 베이스볼 리그의 팰머스 코모도어스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1937년에는 단 한 경기에 출전했지만, 1938년에는 "넓게 휘어지는 커브"를 사용하여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끄는 데 정기적으로 기여했다.
4. 선수 은퇴 후 경력 및 말년
라이언은 선수 은퇴 후에도 야구와 인연을 이어가며 여러 역할을 수행했다.
4.1. 코칭 및 경영
라이언은 1941년과 1942년에 마이너리그 팀인 오클레어 베어스의 감독을 맡았고, 1944년부터 1946년까지는 미니애폴리스 밀러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이후에는 마이너리그의 단장으로 활동했다.
4.2. 명예 및 인정
1960년, 라이언은 홀리크로스 칼리지 체육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한 1961년에는 마이너리그 베이스볼에서 수여하는 킹 오브 베이스볼 상을 수상하며 야구계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았다.
5. 사망
로지 라이언은 1980년 12월 10일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