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로베르토 푸포 모레노(Roberto Pupo Moreno로베르토 푸포 모레노포르투갈어)는 1959년 2월 11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난 브라질의 전 자동차 경주 선수이다. 그는 포뮬러 원(F1), 챔프카, 국제 포뮬러 3000 등 다양한 국제 모터스포츠 시리즈에 참가하며 긴 경력을 쌓았다. 특히 1988년 국제 포뮬러 3000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F1에서는 약소팀을 전전하며 '슈퍼 서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별명은 그가 부상당한 드라이버의 빈자리를 여러 차례 메우며 보여준 뛰어난 적응력과 끈기를 상징한다. 모레노는 75번의 F1 그랑프리에 참가하여 한 번의 포디움에 올랐고, 총 15점의 챔피언십 포인트를 획득했다. 스포츠 외적으로는 경비행기 제작을 취미로 삼고 있다. 그의 경력은 끊임없는 도전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끈기를 잃지 않는 한 스포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2. 어린 시절과 경력 시작
로베르토 모레노는 카트 레이싱으로 레이싱 경력을 시작했다. 1976년 브라질 125cc 카트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그는 유럽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2.1. 초기 카트 및 주니어 포뮬러
모레노는 1979년 영국에 도착하여 첫 포뮬러 포드 시즌에 참가했다. 당시 로얄 팀의 워크스 드라이버였던 마크 스미스와 함께 경주에 나섰는데, 모레노는 자신의 로얄 자동차의 드라이버이자 정비사 역할까지 겸했다. 랄트의 소유주이자 디자이너인 론 토라낙은 모레노에게 오래된 작업장을 빌려주어 그가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모레노는 몇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이는 밴 디멘의 랄프 퍼먼 시니어의 관심을 끌어 1980년 시즌 밴 디멘 워크스 드라이버로 계약하게 되었다.
밴 디멘 소속으로 활동하며 그는 타운젠드 소레슨 영국 포뮬러 포드 타이틀을 획득했고, 이 과정에서 8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동시에 유럽에서는 같은 차량으로 3번 더 우승하며 EFDA 타운젠드 소레슨 유로시리즈 포뮬러 포드 1600 챔피언십에서 2위를 기록했다. 그는 또한 RAC 영국 시리즈에서 4위, P&O 페리스 시리즈에서 6위를 차지했다. 시즌의 마지막을 포뮬러 포드 페스티벌 우승으로 장식하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모레노는 2021년 페스티벌 50주년 기념 행사에도 같은 차량으로 다시 참가하여 경주했다.
모레노의 성공은 F1 팀 로터스의 성공적인 소유주이자 창립자인 콜린 채프먼의 주목을 받았다. 모레노는 채프먼이 F1 테스트 계약과 경주를 계속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1981년에야 유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자금으로 그는 포뮬러 3 경주에 참가했지만, 자금은 늘 빠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런 레이싱과 협력하여 2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다음 시즌에는 대서양 건너에서 더욱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다. 1982년 미국 서부 그랑프리의 지원 경주인 CASC 북미 포뮬러 애틀랜틱 챔피언십에서 알 운저 주니어를 꺾고 우승했다. 1982년 후반에는 트루아리비에르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다시 한번 큰 인상을 남겼다. 이 승리 이전에 모레노는 아이븐스 루마 레이싱 소속으로 영국 포뮬러 3 챔피언십의 절반 시즌을 치르며 3번의 우승을 거두었다. 이후 로터스 팀에서 1982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 출전할 기회를 얻었으나, 예선 탈락했다.
2.2. 호주 및 마카오 그랑프리 우승

이 시기에 모레노는 그의 친구인 넬슨 피케처럼 호주인 그렉 "피 위" 시들이 매니지먼트를 맡았는데, F1 월드 챔피언십 레이스가 되기 전인 1981년, 1983년, 1984년에 호주 그랑프리에서 세 번이나 우승하며 인기 있는 드라이버였다. 이 우승들은 멜버른의 1.6 km 칼더 파크 레이스웨이에서 포뮬러 몬디알 레이스로 개최되던 시절에 이뤄졌다. 그는 종종 넬슨 피케, 앨런 존스, 니키 라우다, 케케 로스베르그와 같은 현직 또는 전직 월드 챔피언들을 꺾고 호주 그랑프리에서 우승했으며, 자크 라피트, 안드레아 데 체사리스, 프랑수아 에스노와 같은 다른 F1 드라이버들도 물리쳤다. 이 기간 동안 참가했지만 우승하지 못한 유일한 호주 그랑프리(1982년)에서는 미래의 4회 월드 챔피언 알랭 프로스트와 리지에 F1 드라이버 라피트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했다. F1 이전의 모든 호주 그랑프리에서 모레노는 1.6리터 포드 BDA 엔진을 장착한 포뮬러 퍼시픽 또는 포뮬러 몬디알 랄트 RT4를 운전했다.
1982년 모레노는 마카오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그의 재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 우승은 그가 주니어 포뮬러 경력에서 거둔 중요한 성과 중 하나였다.
3. 포뮬러 원 이전의 프로 경력
모레노는 포뮬러 원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 다양한 국제 레이싱 시리즈에서 경험을 쌓으며 실력을 입증했다.
3.1. 유럽 포뮬러 2 및 일본 포뮬러 2
1984년, 로베르토는 F3 경주를 위해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웨스트 서리 레이싱과의 프리시즌 테스트 중, 론 토라낙으로부터 워크스 랄트 포뮬러 2 팀에 합류해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모레노는 마이크 새크웰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두 선수는 1984년 유럽 포뮬러 2 챔피언십에서 랄트 혼다를 몰며 최종 챔피언십을 지배했다. 그는 호켄하임링과 도닝턴 파크 레이스에서 우승을 맛보았다.
1985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노바 엔지니어링에 합류하여 전일본 F2 챔피언십에 시즌 중반부터 참가했다. 이 해 그는 스즈카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며 총 21점으로 종합 11위를 기록했다.
3.2. 국제 포뮬러 3000 챔피언

토라낙은 모레노가 1985년 국제 포뮬러 3000 시즌에 남아주기를 원했지만, 모레노는 1984년 말부터 톨먼 팀에서 세나의 차량으로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팀과 함께 드라이버로 활동할 예정이었으나, 타이어 문제로 계약이 무산되었다. 다음으로 모레노는 릭 갈레스의 갈레스 레이싱과 함께 인디카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 계약은 로베르토가 로드 레이스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1986년 전체 시즌에 초청받았지만, 차량 문제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풀타임 인디카 드라이버 자리를 찾지 못하자, 그는 랄트와 함께 F3000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그 시즌 동안 그는 지중해 그랑프리에서 우승했으며, 꾸준한 성적으로 종합 3위를 차지한 후 AGS에 합류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1988년, FIA 국제 포뮬러 3000 챔피언십에서 무명의 레이나드 88D로 우승한 것이 큰 팀에 영입될 만큼의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페라리와 테스트 계약을 맺었고, 페라리는 그가 야심찬 콜로니 팀과 레이싱 계약을 맺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모레노는 1988년 국제 F3000 챔피언십에서 4승을 거두며 단독 선두로 시즌 챔피언을 차지했다. 시리즈 2위는 올리비에 그루이야르였다. 이 우승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3.3. 초기 CART 활동 및 페라리 테스트 드라이버
모레노는 1984년 브라밤 F1 팀에 합류할 뻔했다. 그의 친구이자 브라밤의 리드 드라이버였던 넬슨 피케의 제안으로 브라밤 팀 소유주 버니 에클스턴은 젊은 브라질인 드라이버를 팀의 2번 차량에 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브라밤의 이탈리아 스폰서인 파르말라트가 피케의 팀 동료로 이탈리아인 드라이버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모레노의 기회는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에클스턴은 테오 파비와 코라도 파비 형제를 계약하여 차량을 공유하게 되는 특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테오는 주 드라이버였지만, 그는 이미 미국 기반의 CART/PPG 월드 시리즈에서 포사이드 레이싱과 계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F1과 CART 일정이 겹치는 3개 레이스에서는 1983년에 오셀라에서 운전했던 코라도가 그를 대신하여 출전했다.
모레노는 미국의 CART 시리즈에 처음 참여하여 1985년 갈레스 레이싱 소속으로 5개 레이스에 출전하며 10점을 획득했고, 1986년에는 16개 레이스에 출전하여 30점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페라리의 테스트 드라이버로 활동하며 1989년 도입될 3.5리터 자연흡기 엔진 규정에 대비한 선행 개발 차량인 페라리 639 개발을 담당했다. 존 버나드가 설계한 이 차량은 1990년대 이후 F1의 표준이 된 세미 오토매틱 변속기(패들 시프트)를 장착하는 등 여러 신기술이 적용되었다. 모레노는 이 차량의 개발을 진행하면서도 언론에 일절 언급하지 않고 기밀을 유지하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여 버나드의 신뢰를 얻었다.
4. 포뮬러 원 경력
로베르토 모레노의 포뮬러 원 경력은 '슈퍼 서브'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여러 팀을 오가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4.1. 초기 시도 및 데뷔 (1982, 1987)
콜린 채프먼은 1982년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나이젤 만셀이 손목 골절을 당하자, 그를 대신하여 1982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팀 로터스의 차량을 운전할 기회를 모레노에게 주었다. 그 이전에 테오도르 레이싱의 얀 람메르스가 1982년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 엄지손가락을 다치자 팀 소유주 테디 입은 모레노를 영입하려 했으나, 채프먼이 그의 이적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 기회는 악몽으로 변했다. 로터스 91은 다루기 매우 어려운 차량이었고, 모레노는 이 차량을 거의 운전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규 드라이버인 만셀과 엘리오 데 안젤리스가 대부분의 테스트를 수행했고, 모레노는 구형 로터스 87B와 로터스 88 모델로 제한되어 있었다. 모레노는 로터스 91에 적응하지 못했고, 그의 최고 예선 랩 타임은 그리드에 진입하기 위한 기록보다 2초 이상 느렸다. 1982년 말, 로터스는 그를 테스트 드라이버 직위에서 해고했고, 이 부진한 성적은 그의 명성 회복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했다. 공식 기록상으로는 F1 데뷔에 실패했다.
이 네덜란드 레이스는 그에게 몇 년 동안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AGS 팀의 파스칼 파브르를 대신하여 다시 F1에 출전할 기회를 얻었다. 로터스에서의 실패 5년 후, 모레노는 F1 데뷔를 할 예정이었으나, 이번에도 가장 느린 기록으로 예선 통과에 실패했다. 하지만 윌리엄스 드라이버 나이젤 만셀이 연습 주행 중 부상을 입어 팀이 출전을 철회하면서 모레노가 기적적으로 F1 데뷔를 하게 되었다. 다음 레이스인 1987년 호주 그랑프리에서 그는 다루기 어려운 AGS JH22를 타고 애들레이드 시가지 서킷의 벽 사이를 질주하여 7위로 멋지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다른 드라이버들이 벽에 부딪히거나 차량을 파손시키는 와중이었다. 경기 후 검사에서 아일톤 세나의 로터스 99T가 브레이크 덕트 크기 초과로 2위에서 실격 처리되면서 모레노는 6위로 승격되어, 그와 팀의 첫 F1 포인트를 획득했다.
4.2. 본격적인 활동 및 도약 (1989-1991)
AGS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모레노는 F1 정규 시트를 얻지 못했다. 그는 F3000의 브롬리 모터스포츠로 돌아갔다. 론 솔트가 소유한 이 팀은 모레노가 갈레스에서 함께 일했던 게리 앤더슨이 기술 이사를 맡고 있었다. 레이나드 모터스포츠의 도움으로 그들은 사실상 자금 없이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레노는 스폰서 없는 레이나드 코스워스 88D를 몰고 폴 그랑프리, 실버스톤 서킷, 몬차 서킷에서 3연승을 거두며 타이틀을 획득했고, 이는 짜릿한 복수였다. 네 번째 우승은 버밍엄 슈퍼프리에서 나왔다.
1989년 시즌은 F3000 챔피언십 우승에도 불구하고 빅 팀의 영입 제안을 받지 못했다. 대신 그는 페라리와 테스트 계약을 맺었고, 페라리는 그가 야심 찬 콜로니 팀과 레이싱 드라이버 계약을 맺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콜로니의 차량은 경쟁력이 전혀 없었고, 모레노는 16번의 시도 중 단 4번만 예선을 통과했다. 완주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1990년은 더욱 희망이 없는 듯했다。 모레노는 하락세를 걷던 유로브룬 팀과 계약하여 시즌 첫 14개 레이스 중 단 2번만 예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팀이 시즌 마지막 두 라운드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직후, 베네통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1990년 스페인 그랑프리 이후 헬리콥터 사고로 손을 심하게 다친 알레산드로 나니니의 공석을 메워 달라는 것이었다. 모레노는 스즈카에서 열린 1990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베네통 데뷔전에서 8위로 예선을 통과한 후, 팀 동료인 피케의 뒤를 바싹 따라 2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이 결과는 다른 상위권 차량들이 대부분 탈락하면서 도움을 받았다. 알랭 프로스트와 아일톤 세나는 첫 코너에서 충돌했고, 그들의 팀 동료인 나이젤 만셀(페라리)과 게르하르트 베르거(맥라렌)도 모두 리타이어했다.
일본 그랑프리 결승 직후 기자회견에서 모레노는 3위로 시상대에 오른 스즈키 아구리가 전년도 예비 예선 탈락의 어려움을 언급하자, 자신도 약소팀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점을 공감하며 "I know this feeling!" (나도 그 심정 알아!)이라고 외쳐 기자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장면은 일본 F1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어 애들레이드에서 열린 1990년 호주 그랑프리에서도 다시 8위로 예선을 통과한 후 7위를 차지(피케는 다시 우승)하면서 모레노는 1991년 시즌 베네통과 정규 드라이버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피렐리 타이어를 장착한 베네통 B191은 예상만큼 경쟁적이지 못했다. 모레노의 최고 성적은 1991년 모나코 그랑프리와 1991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기록한 4위였다. 특히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패스티스트 랩을 기록했지만, F1 데뷔전을 치른 미하엘 슈마허(조던 팀 소속)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이 레이스는 모레노가 베네통에서 치른 마지막 레이스가 되었다. 논란 속에 슈마허를 위해 베네통에서 방출되었기 때문이다. 슈마허는 7위로 예선을 통과한 후 출발 직후 5위까지 올라섰으나 클러치 고장으로 리타이어했다.
톰 워킨쇼와 팀 매니저 플라비오 브리아토레가 이끄는 베네통 경영진은 팀을 재건할 드라이버를 찾고 있었고, 노쇠한 피케나 모레노가 그 드라이버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브리아토레와 워킨쇼는 고위급 협상을 통해 조던에서 슈마허를 빼돌렸고, 모레노는 즉시 해고되었다. 모레노가 피케를 앞서지 않기 위해 시즌 내내 일부러 실력 발휘를 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현재까지도 돌고 있다 (피케는 2012년 브라질 TV에서 1987년 이몰라에서 예선 사고로 인해 시야의 약 80%를 잃은 후 "돈 때문에" F1에 남아 있었다고 인정했다).
어쨌든 모레노는 199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공석이 된 조던 드라이버 자리를 제안받아 매우 인상적인 9위로 예선을 통과했다(안드레아 데 체사리스보다 앞섰다). 불행히도 그는 두 번째 랩에서 스핀하며 리타이어했다. 그는 다음 포르투갈 레이스에 참가했고, 그해 마지막 레이스인 애들레이드에서는 잔니 모르비델리를 대신하여 미나르디에서 운전했지만, F1은 그를 지나쳐 간 듯했다.
4.3. 어려움과 마지막 시즌 (1992, 1995)

1992년 시즌에 모레노는 다시 안드레아 모다와 계약하며 약소팀으로 돌아왔다. 이 팀은 스쿠데리아 콜로니의 잔해 속에서 솟아났으며, 알렉스 카피와 엔리코 베르타지아와의 두 번의 비출전 레이스 후, 모레노와 페리 매카시 (나중에 BBC 자동차 프로그램 탑 기어의 원조 더 스티그로 유명해졌다)와 함께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모레노와 매카시는 경쟁력 없는 팀으로 대부분의 레이스에조차 참가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힘든 싸움에 직면했다. 모레노는 충분히 테스트되지 않고 자금도 부족한 차량으로 1992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단 한 번 예선을 통과했지만 (경주에서는 리타이어했다), 1992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팀 소유주 안드레아 사세티가 체포된 후 팀은 결국 해체되었다.
안드레아 모다 사태 이후, 그는 다음 두 시즌 동안 이탈리아 수퍼투리스모 챔피언십과 프랑스 수퍼투어링 챔피언십에 참가했으며, 1994년에는 인디애나폴리스 500 예선 통과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95년에는 야심찬 포르티 팀과 함께 잠시 F1에 복귀했다。 모레노의 브라질 혈통은 그가 드라이버 자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포르티의 차량은 상대적으로 느렸고, 모레노의 최고 성적은 1995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기록한 14위였다. 그는 1995년 호주 그랑프리에서 피트 레인 벽에 충돌하며 F1 경력을 마감했다.
이 해 일본 그랑프리와 퍼시픽 그랑프리에는 스폰서를 가진 노다 히데키가 스팟 출전하기로 결정되어 모레노가 시트를 비워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FIA가 노다에게 슈퍼 라이선스 발급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목요일 정오에 모레노가 급히 다시 소환되어 홍콩에 있던 모레노는 항공편을 구해 오카야마로 급행하기도 했다.
5. 포뮬러 원 이후 경력
포뮬러 원 은퇴 이후 모레노는 CART 및 인디카 시리즈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슈퍼 서브'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5.1. CART/챔프카 복귀
1996년 모레노는 페이튼 코인 레이싱의 롤라-포드 차량으로 챔프카 경력을 재개하여 미시간 국제 스피드웨이에서 3위를 차지했다. 1997년 초, 그는 페이튼 코인의 헌신 부족을 이유로 팀을 떠났다. 그는 1997년 시즌 동안 세 팀에서 운전하며 "슈퍼 서브"라는 별명을 얻었고, 디트로이트 인디 그랑프리에서 뉴먼 하스 팀의 스위프트-포드 차량으로 5위를 기록하며 최고의 성적을 냈다. 이때 그는 부상당한 크리스티안 피티팔디를 대신했다. 그는 여러 차례 팀 리더인 마이클 안드레티보다 좋은 예선 성적을 냈지만, 1998년에도 경쟁력 있는 정규 드라이버 자리를 얻지 못하고 대신 팀 펜스케의 테스트 드라이버 역할을 수락했다.
1998년은 더욱 힘든 해였으며, 단 세 번의 경주에만 출전했다. 다음 시즌에도 그는 두 대의 다른 차량(뉴먼 하스와 팩웨스트 레이싱)을 운전하며 두 번의 4위를 기록했다. 1999년 그는 또한 피닉스 국제 레이스웨이에서 첫 인디 레이싱 리그 경주를 시작하여 6위를 기록했고, 13년 만에 인디애나폴리스 500에 복귀하여 트루스체리 팀 레이싱 소속으로 20위를 차지했다.
2000년에 이르러서야 전 시즌에 패트릭 레이싱에서 대리 출전했던 로베르토는 이 팀의 레이나드-포드 차량 중 하나에 풀타임 시트를 배정받았다. 그는 시즌 내내 시리즈 선두를 달렸으나, 후반부에 부진을 겪으며 질 드 페란에게 선두를 내주고 최종적으로 종합 3위를 기록했다。 모레노는 클리블랜드 그랑프리에서 첫 챔프카 우승을 차지했는데, 모터스포츠에서 보기 드문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는 12년 전 포뮬러 3000 우승 이후 그의 첫 레이스 우승이었다. 그는 이듬해 몰슨 인디 밴쿠버에서 패트릭 레이싱 소속으로 다시 우승했지만, 꾸준함이 부족하여 순위가 13위로 하락했다.
2003년에는 허데즈 컴페티션 소속으로 운전하며 그의 롤라-코스워스 차량을 마이애미에서 2위로 이끌었고, 그 해 말 모터스포츠 은퇴를 선언했다.
5.2. 인디카 및 내구 레이싱
2006년 4월, 자카레파과에서 브라질 스톡카에 단 한 번 출전한 후, 모레노는 2006년 혼다 그랑프리 오브 세인트피터스버그에서 비전 레이싱의 에드 카펜터를 대신하여 출전했다. 같은 해 8월, 모레노는 새로운 파노즈 챔프카를 테스트한 최초의 드라이버가 되었다. 전 시리즈 챔피언 폴 트레이시에 따르면, "모레노는 실수하거나 코스를 벗어나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들은 차량에 주행 거리를 늘리고 상당히 빠르게 주행해야 하는데, 그에게 완벽한 사람입니다."


파노즈 DP01 테스트 주행 수천 마일 후, 모레노는 퍼시픽 코스트 모터스포츠에서 부상당한 알렉스 피지를 대신하여 2007년 휴스턴 그랑프리에 출전할 기회를 얻었다. 로베르토는 2007년 인디애나폴리스 500에서 부상당한 스테판 그레고아르를 대신하여 채스테인 모터스포츠 소속으로 운전했다. 그는 경기 초반에 차량을 충돌시켜 최하위로 마쳤다.
그는 2005년과 2007년에 롤렉스 스포츠카 시리즈에 참가하며 내구 레이싱에서도 활동했다. 1984년에는 르망 24시 레이스에 스콜 밴디트 포르쉐 팀 소속으로 출전했으나 사고로 인해 리타이어했다. 2005년 데이토나 24시 레이스에서도 스피릿 오브 데이토나 레이싱 소속으로 참가했으나 냉각 시스템 문제로 완주하지 못했고, 2007년 같은 대회에서는 브루모스 레이싱 소속으로 4위를 기록했다. 또한 1987년에는 스파 프랑코르샹 24시 레이스에 슈니처 모터스포츠 소속으로 출전했으나 피스톤 문제로 리타이어했다.
6. 개인 생활 및 취미
레이싱 경력 외에 로베르토 모레노는 경비행기 제작을 취미로 즐긴다. 그의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드라이버 코치 및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역사적인 이벤트에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7. 평가 및 일화
로베르토 모레노는 그의 레이싱 경력 전반에 걸쳐 뛰어난 재능과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7.1. "슈퍼 서브" 및 끈기
모레노는 F1과 CART/챔프카 시리즈에서 부상당한 드라이버의 빈자리를 여러 차례 메우며 '슈퍼 서브'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역할은 그의 뛰어난 적응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특히 1990년 베네통 팀에서 알레산드로 나니니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대타 출전하여 일본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한 것은 그의 '슈퍼 서브'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는 약소팀에서의 수많은 좌절과 예선 탈락의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을 이어갔다. 이는 스포츠인으로서의 그의 끈기와 투지를 상징한다.
7.2. 주요 사건 및 성격
- 1987년, AGS 팀에서 F1에 출전하여 첫 포인트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으로부터 급여는 물론 호텔비나 세탁비조차 받지 못해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팀과의 소송으로 이어졌다.
- 1990년 일본 그랑프리 결승 직후 기자회견에서 스즈키 아구리가 전년도 예비 예선 탈락의 어려움을 토로하자, 모레노는 자신도 약소팀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점을 공감하며 "I know this feeling!" (나도 그 심정 알아!)이라고 말해 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일화는 그의 인간적이고 친근한 성격을 잘 드러낸다.
- 1990년 일본 그랑프리 직전, 알레산드로 나니니의 헬리콥터 사고로 베네통 시트가 비게 되자, 베네통은 처음에는 호시노 카즈요시에게 대타 오퍼를 넣었다. 그러나 금전적 조건이 맞지 않아 호시노가 고사하자, 베네통 사무실에 머물고 있던 모레노가 존 버나드의 추천으로 급히 대타 드라이버가 되었다.
- 1990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넬슨 피케와 함께 베네통의 1-2 피니시를 달성하며 일본 F1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약소팀 시절부터의 오랜 노력, 피케와의 관계, 그리고 함께 시상대에 오른 스즈키 아구리와의 '전우애'가 팬들의 큰 호응을 얻는 데 기여했다.
- 1995년 일본 그랑프리 예선 중 헤어핀 코너에서 차량이 멈추자, 관중들이 "로베르토!", "모레노!"라고 연호하며 응원했다. 모레노는 이에 손을 흔들며 화답하여 그의 팬 친화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 1999년, 모레노는 로비 고든과 함께 CART 매디슨 레이스와 이튿날 열린 IRL 인디 500에 동시 출전하는 강행군을 감행했다. 이는 2일 동안 약 1280 km의 레이스 거리를 소화해야 하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모레노는 약 970 km, 고든은 약 820 km를 주행했다.
- 2000년 CART 9차전 클리블랜드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후 인터뷰에서 "『달에 가고 싶다』고 말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더라도, 노력 끝에 마침내 달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여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발언은 현재까지도 모터스포츠계의 명언으로 회자된다.
- 2017년 스즈카 서킷에서 열린 '스즈카 사운드 오브 엔진 2017'에 게스트로 참석하여 카타야마 우쿄와 토크쇼에 출연하고, 과거 F1 머신으로 데모 주행을 선보였다. 스즈카 방문은 1995년 포르티 F1 시절 이후 22년 만이었다.
8. 헬멧 디자인
모레노의 헬멧은 전통적으로 노란색 바탕에 파란색, 빨간색, 흰색 날개 문양이 바이저, 옆면, 턱 부분에 장식되어 있다. 헬멧의 아랫부분에는 "Moreno"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후기 버전의 헬멧에는 날개 문양과 함께 파란색 원통형 디자인이 추가되었다. 그의 헬멧은 시드 모스카가 디자인했다.
9. 경력 통계
로베르토 모레노는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활동하며 다음과 같은 주요 성과를 기록했다.
시즌 | 시리즈 | 팀 | 출전 수 | 우승 | 폴 포지션 | 패스티스트 랩 | 포디움 | 포인트 | 순위 |
---|---|---|---|---|---|---|---|---|---|
1980 | 영국 포뮬러 포드 챔피언십 | 밴 디멘 | 14 | 8 | 8 | 8 | 12 | 220 | 1위 |
P&O 페리스 포뮬러 포드 1600 챔피언십 | 10 | 1 | ? | ? | ? | 26 | 6위 | ||
유로시리즈 포뮬러 포드 1600 | 9 | 3 | 3 | 1 | 4 | 104 | 2위 | ||
RAC 포뮬러 포드 1600 챔피언십 | 6 | 1 | ? | ? | ? | 47 | 4위 | ||
포뮬러 포드 페스티벌 | 1 | 1 | 0 | 1 | 1 | N/A | 1위 | ||
1981 | 말보로 영국 포뮬러 3 | 배런 레이싱 | 12 | 2 | 0 | 1 | 4 | 10 | 11위 |
유럽 포뮬러 3 | 1 | 1 | 1 | 0 | 1 | 9 | 10위 | ||
1982 | 말보로 영국 포뮬러 3 | 아이븐스 루마 레이싱 | 9 | 3 | 0 | 1 | 5 | 42 | 6위 |
뉴질랜드 포뮬러 퍼시픽 | 골드 모터스포츠 | 8 | 6 | 2 | 5 | 7 | N/A | 1위 | |
북미 포뮬러 애틀랜틱 | 3 | 1 | 2 | 2 | 2 | 61 | 9위 | ||
마카오 그랑프리 | 1 | 1 | ? | 0 | 1 | N/A | 1위 | ||
유럽 포뮬러 3 | 아이븐스 루마 레이싱 | 1 | 0 | 0 | 0 | 0 | 3 | 16위 | |
1983 | 포뮬러 몬디알 북미 | 테오도르 레이싱 | 8 | 4 | 4 | 3 | 5 | 151 | 2위 |
IMSA GTU 챔피언십 | 올 아메리칸 레이서스 | 4 | 0 | 0 | 1 | 1 | 14 | 41위 | |
IMSA 카멜 GTO 챔피언십 | 1 | 0 | 0 | 0 | 1 | 12 | 43위 | ||
유럽 내구 챔피언십 | 찰스 아이비 레이싱 | 1 | 0 | 0 | 0 | 0 | 0 | NC | |
1984 | 유럽 포뮬러 2 | 랄트 레이싱 | 11 | 2 | 3 | 2 | 7 | 44 | 2위 |
전일본 포뮬러 2 | 1 | 0 | 1 | 0 | 1 | 12 | 12위 | ||
르망 24시 | 스콜 밴디트 포르쉐 팀 | 1 | 0 | 0 | 0 | 0 | N/A | DNF | |
1985 | CART PPG 인디카 월드 시리즈 | 갈레스 레이싱 | 5 | 0 | 0 | 0 | 0 | 10 | 29위 |
전일본 포뮬러 2 | 어드밴 스포츠 노바 | 5 | 0 | 0 | 0 | 1 | 21 | 11위 | |
국제 포뮬러 3000 | 배런 레이싱 | 4 | 0 | 0 | 0 | 0 | 3 | 14위 | |
1986 | CART PPG 인디카 월드 시리즈 | 갈레스 레이싱 | 16 | 0 | 0 | 0 | 0 | 30 | 16위 |
국제 포뮬러 3000 | 브롬리 모터스포츠 | 1 | 0 | 0 | 0 | 0 | 0 | 31위 | |
1987 | 국제 포뮬러 3000 | 랄트 레이싱 | 11 | 1 | 4 | 3 | 5 | 30 | 3위 |
포뮬러 원 | 팀 엘 차로 AGS | 2 | 0 | 0 | 0 | 0 | 1 | 19위 | |
월드 투어링 카 챔피언십 | 슈니처 모터스포츠 | 1 | 0 | 0 | 0 | 0 | 0 | NC | |
1988 | 국제 포뮬러 3000 | 브롬리 모터스포츠 | 11 | 4 | 3 | 1 | 4 | 43 | 1위 |
1989 | 포뮬러 원 | 콜로니 | 4 | 0 | 0 | 0 | 0 | 0 | NC |
1990 | 포뮬러 원 | 유로브룬 레이싱 | 2 | 0 | 0 | 0 | 0 | 6 | 10위 |
베네통 포뮬러 | 2 | 0 | 0 | 0 | 1 | ||||
1991 | 포뮬러 원 | 베네통 | 11 | 0 | 0 | 1 | 0 | 8 | 10위 |
조던 | 2 | 0 | 0 | 0 | 0 | ||||
미나르디 | 1 | 0 | 0 | 0 | 0 | ||||
1992 | 이탈리아 수퍼투리스모 챔피언십 | 레페토 모터스 | 6 | 0 | 0 | 0 | 0 | 41 | 11위 |
포뮬러 원 | 안드레아 모다 | 1 | 0 | 0 | 0 | 0 | 0 | NC | |
1993 | 프랑스 수퍼투어링 챔피언십 | 팀 우진 알파 로메오 | 10 | 0 | 0 | 0 | 2 | 94 | 7위 |
1995 | 포뮬러 원 | 포르티 포드 | 16 | 0 | 0 | 0 | 0 | 0 | NC |
1996 | PPG 인디카 월드 시리즈 | 페이튼/코인 레이싱 | 15 | 0 | 0 | 0 | 1 | 25 | 21위 |
1997 | CART PPG 월드 시리즈 | 뉴먼/하스 레이싱 | 6 | 0 | 0 | 0 | 0 | 16 | 19위 |
베튼하우젠 레이싱 | 2 | 0 | 0 | 0 | 0 | ||||
페이튼/코인 레이싱 | 1 | 0 | 0 | 0 | 0 | ||||
1998 | CART PPG 월드 시리즈 | 프로젝트 인디 | 2 | 0 | 0 | 0 | 0 | 0 | 31위 |
뉴먼/하스 레이싱 | 1 | 0 | 0 | 0 | 0 | ||||
1999 | CART PPG 월드 시리즈 | 팩웨스트 레이싱 | 8 | 0 | 0 | 0 | 0 | 58 | 14위 |
뉴먼/하스 레이싱 | 5 | 0 | 0 | 1 | 1 | ||||
인디 레이싱 리그 | 트루스체리 팀 레이싱 | 2 | 0 | 0 | 0 | 0 | 38 | 29위 | |
2000 | CART PPG 월드 시리즈 | 패트릭 레이싱 | 20 | 1 | 1 | 0 | 6 | 147 | 3위 |
2001 | CART PPG 월드 시리즈 | 패트릭 레이싱 | 20 | 1 | 1 | 1 | 3 | 76 | 13위 |
2003 | CART PPG 월드 시리즈 | 허데즈 컴페티션 | 17 | 0 | 0 | 1 | 1 | 67 | 13위 |
2005 | 롤렉스 스포츠카 시리즈 | 스피릿 오브 데이토나 레이싱 | 6 | 0 | 0 | 0 | 0 | 80 | 39위 |
스톡카 브라질 | 카탈로그 레이싱 | 1 | 0 | 0 | 0 | 0 | 0 | NC | |
2006 | 롤렉스 스포츠카 시리즈 | 브루모스 레이싱 | 2 | 0 | 0 | 0 | 0 | 28 | 86위 |
인디카 시리즈 | 비전 레이싱 | 1 | 0 | 0 | 0 | 0 | 12 | 30위 | |
2007 | GT3 브라질 챔피언십 | CRT | 6 | 0 | 1 | 2 | 0 | 17 | 11위 |
챔프카 월드 시리즈 | 퍼시픽 코스트 모터스포츠 | 1 | 0 | 0 | 0 | 0 | 9 | 22위 | |
인디카 시리즈 | 채스테인 모터스포츠 | 1 | 0 | 0 | 0 | 0 | 10 | 36위 | |
롤렉스 스포츠카 시리즈 | 브루모스 포르쉐 | 1 | 0 | 0 | 0 | 0 | 28 | 58위 | |
2008 | 트로페오 마세라티 브라질 | 3 | 0 | 0 | 0 | 0 | 6 | 30위 | |
GT3 브라질 챔피언십 | 티게이스 | 2 | 0 | 0 | 0 | 0 | 0 | NC | |
인디카 시리즈 | 미나르디 팀 USA/HVM 레이싱 | 1 | 0 | 0 | 0 | 0 | 0 | 46위 | |
챔프카 월드 시리즈 | 미나르디 팀 USA | 1 | 0 | 0 | 0 | 0 | 0 | NC | |
롤렉스 스포츠카 시리즈 | 크론 레이싱 | 1 | 0 | 0 | 0 | 0 | 0 | NC | |
2012 | 유로컵 메간 트로피 | 오리건 팀 | 2 | 0 | 0 | 0 | 0 | 4 | 20위 |
2014 | 코파 카줄라 데 프네우스 데 마르카스 이 필로토스 | 마길라 모터스포츠 | 18 | 1 | 1 | 0 | 5 | 193 | 4위 |
2022 | 모나코 히스토릭 그랑프리 - 시리즈 E | 롤라 | 1 | 0 | 0 | 0 | 0 | N/A | 5위 |
10. 같이 보기
- 모터스포츠
- 레이싱 드라이버 목록
- 포뮬러 원 드라이버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