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의 초기 생애는 그의 가족 배경, 군 복무, 그리고 파리에서의 하인 생활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국왕 암살을 시도하게 된 복잡한 동기의 일부를 제공한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다미앵은 1715년 1월 9일 프랑스 북부 아라스 근처의 라 티외루아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남매 중 여덟째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이자 사형 집행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다미앵은 어린 시절 베튀네에 있는 삼촌 밑에서 성장했다.
1.2. 군 복무 및 직업
다미앵은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했으며, 1734년 필립스부르크 공성전에 무명의 병사로 참전하기도 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제대하였고, 파리의 예수회 소속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에서 하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금전을 훔쳐 달아나는 등 여러 차례의 비행으로 인해 해고되었고, 이로 인해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프랑스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3. 범행 동기
다미앵의 암살 시도 동기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고 보기도 한다. 심문 과정에서 다미앵의 답변을 종합해 보면, 그는 프랑스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이 얀세니즘 교파 신자들에게 성사를 거부하면서 발생한 소란에 크게 동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상황의 궁극적인 책임을 루이 15세 국왕에게 돌렸고, 이에 국왕을 처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의 종교적 관념 때문에 국왕을 찔러 피의 색깔을 확인하려 했다고도 전해진다.
2. 암살 시도
1757년 1월 5일,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5세 국왕을 대상으로 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2.1. 사건 경과

1757년 1월 5일 오후 4시, 루이 15세 국왕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마차에 오르려 할 때, 다미앵은 경호원들을 지나쳐 달려들어 주머니칼로 국왕을 찔렀다. 다미앵은 도주를 시도하지 않고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 국왕이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칼은 겨우 1 cm 깊이로 가슴에 경미한 상처만을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피를 흘리며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고해신부를 불렀고,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가 달려오자 자신의 수많은 불륜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2.2. 체포 및 초기 심문

다미앵은 사건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공범이나 배후를 밝히기 위해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공범이나 배후 없이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며, 고통 속에서 임의의 이름을 진술하기도 했다. 그는 곧바로 콩시에르주리 감옥으로 이감되었는데, 그곳에서 약 150년 전 앙리 4세 국왕을 암살한 프랑수아 라바이약이 수감되었던 독방에 갇혀 고문을 받았다.
3. 재판 및 처형
국왕 암살 미수범으로 기소된 다미앵은 잔혹한 재판 과정을 거쳐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가혹한 처형 방식인 거열형에 처해졌다.
3.1. 재판 및 사형 선고
다미앵은 파리 고등법원에 의해 시역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중한 형벌인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처형 장소는 그레브 광장(현재 파리 시청 앞 광장)으로 결정되었다.
3.2. 고문
1757년 3월 28일 아침, 감옥에서 끌려나온 다미앵은 "오늘 하루가 힘들겠군"(La journée sera rude프랑스어)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먼저 '부츠'(고문 부츠)라고 불리는 장치로 다리가 고통스럽게 압박당하는 고문을 받았다. 이어서 시뻘겋게 달궈진 집게로 살점을 찢는 고문을 당했으며, 암살 시도 당시 칼을 쥐었던 손은 유황으로 불태워졌다. 또한, 녹은 밀랍, 녹은 납, 끓는 기름이 그의 상처에 부어졌다.
3.3. 처형


다미앵은 왕실 사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훗날 루이 16세 국왕을 처형하게 되는 인물)에게 넘겨졌다. 상송은 다미앵을 거세한 후, 그의 팔과 다리에 말을 묶어 사지 절단을 시도했다. 그러나 다미앵의 사지는 쉽게 분리되지 않았고, 집행관들은 상송에게 다미앵의 힘줄을 자르라고 명령했다. 힘줄이 잘린 후에야 말들이 사지를 분리할 수 있었다. 군중의 박수갈채 속에서 다미앵의 몸이 사지 절단된 후, 여전히 살아있다고 전해지는 그의 몸통은 화형에 처해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남은 팔이 제거될 때 사망했다고 한다.
다미앵의 마지막 말은 불확실하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오 죽음이여, 어찌 그리 더디 오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하며,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주로 신의 자비를 구하는 다양한 탄식을 내뱉었다고 주장한다. 처형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를 잉글랜드에서 비슷한 죄로 처형된 가이 포크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4. 사건 이후
다미앵의 처형 이후, 그의 가족과 재산에는 가혹한 조치가 가해졌으며,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와 정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4.1. 가족 및 재산에 대한 영향
다미앵의 시신은 처형 후 재로 변해 바람에 흩뿌려졌다. 그의 집은 완전히 파괴되어 철거되었고, 그의 형제자매들은 강제로 성을 바꾸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 아내, 딸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4.2. 역사적 맥락과 평가
프랑스에서는 1610년 앙리 4세 국왕 암살 이후 국왕 암살 시도가 없었기에, 다미앵의 악명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의 사망 40년 후, 아라스 출신의 가장 악명 높은 시민이라는 다미앵의 기억은 같은 아라스 출신인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를 공격하는 데 이용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논란 많은 인물이었던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적들에 의해 종종 다미앵의 조카로 묘사되었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왕당파와 외국 동조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신빙성을 얻었다. 다른 한편으로, 다미앵의 처형은 구체제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사회적 논란거리(cause célèbre)가 되었다.
5. 유산 및 영향
다미앵 사건은 후대의 사상가, 철학자,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형벌과 국가 권력, 인권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1. 목격담

18세기 모험가이자 작가인 자코모 카사노바는 우연히 암살 시도 당일에 파리에 도착했으며, 그의 회고록에 다미앵의 처형 목격담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4시간 동안이나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볼 용기가 있었다... 다미앵은 선행을 하고 천상의 보상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루이 15세를 암살하려 했던 광신도였다. 비록 시도는 실패하여 국왕에게 경미한 상처만을 입혔을지라도, 그는 마치 자신의 죄가 완성된 것처럼 산산조각 찢겼다... 나는 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들을 때마다 여러 번 얼굴을 돌리고 귀를 막아야 했다. 그의 몸 절반이 찢겨나갔는데도, 람베르티니와 뚱뚱한 숙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일까? 그들은 내게, 그리고 나는 그들을 믿는 척했지만, 그 비참한 자의 사악함에 대한 공포가 그의 전례 없는 고통이 불러일으켰어야 할 연민을 막았다고 말했다."
5.2. 철학적, 정치적 반응
에드먼드 버크는 1775년 저서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위험이나 고통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어떤 즐거움도 줄 수 없고 단순히 끔찍할 뿐이지만, 일정한 거리에서는, 그리고 일정한 변형을 통해 즐거움을 줄 수 있고 실제로 즐겁다"라고 쓰면서, '압박(press)'이라는 단어를 다미앵의 고통스러운 시련에 대한 말장난으로 사용하여 그를 암시했다고 비평가 이언 헤이우드는 주장했다.
체사레 베카리아는 1764년 자신의 논문 『범죄와 형벌』에서 고문과 사형을 비난하며 다미앵의 운명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다미앵의 사례를 들어 잔혹한 형벌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강조했다. 토머스 페인은 1791년 저서 『인권론』에서 다미앵의 처형을 전제정치 정부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예시로 들었다. 페인은 이러한 잔혹한 방법들이 프랑스 혁명 당시 대중이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다룬 이유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다미앵의 처형은 미셸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도 상세히 묘사되고 논의된다. 푸코는 이 사건을 통해 다음 세기에 서구 문화에서 형벌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탐구하며, 알렉상드르 제바에스의 저서 『왕시해자 다미앵』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는 국가 권력의 행사, 형벌의 본질, 그리고 사회적 통제 방식의 변화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5.3. 문학 및 문화적 영향
볼테르는 1759년 자신의 소설 『캉디드』에서 다미앵의 처형에 대해 거의 노골적으로 언급한다. 찰스 디킨스는 1859년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2부 15장에서 다미앵의 처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한 노인이 분수대에서 말하길, 칼을 든 그의 오른손은 얼굴 앞에서 불태워질 것이고, 그의 팔, 가슴, 다리에 만들어질 상처에는 끓는 기름, 녹은 납, 뜨거운 송진, 밀랍, 그리고 유황이 부어질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는 네 마리의 강한 말에 의해 사지가 찢길 것이라고 했다. 그 노인은 이 모든 일이 루이 15세 국왕의 목숨을 노린 죄수에게 실제로 행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학자가 아니다."
"그럼 다시 한번 들어봐, 자크!" 불안한 손과 갈망하는 표정의 남자가 말했다. "그 죄수의 이름은 다미앵이었고, 이 모든 일은 파리 시의 탁 트인 거리에서 대낮에 벌어졌어.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엄청난 군중 속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마지막까지 열렬히 집중했던 상류층 숙녀들의 무리였어. 마지막까지, 자크,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지. 그때 그는 두 다리와 한 팔을 잃었지만,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어!"
마크 트웨인은 1889년 소설 『아서 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에서 다미앵의 공격과 처형, 그리고 카사노바의 목격담을 인용하여 귀족 권력의 잔혹성과 불의를 비판한다. 바로네스 오르치는 1940년 『맘젤 기요틴』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다미앵의 가상 딸인 가브리엘 다미앵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또한 페터 바이스의 1963년 연극 『마라/사드』에서도 다미앵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다.
6. 관련 항목
- 프랑수아 라바이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