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1.1. 어린 시절과 학업
로버트 로렌스 아이첼버거는 1886년 3월 9일 오하이오주 어배나에서 농부이자 변호사인 조지 말리 아이첼버거와 엠마 링 아이첼버거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조부가 세운 235 acre 규모의 가족 농장에서 자랐다. 1903년 어배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 입학하여 파이 감마 델타 친목회에 가입했다.
1904년, 아이첼버거는 아버지의 옛 법률 파트너이자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윌리엄 R. 워녹을 설득하여 자신을 웨스트포인트에 추천하도록 했다. 그는 1905년 6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 그의 1909년 졸업반은 제이콥 L. 데버스, 존 C. H. 리, 에드윈 F. 하딩, 조지 S. 패튼, 윌리엄 H. 심슨 등 28명의 장군을 배출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아이첼버거는 고등학교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사관생도 소위가 되었고 103명 중 68위로 졸업했다.
1.2. 초기 군 경력
아이첼버거는 1909년 6월 11일 제25보병연대의 소위로 임관했으나, 7월 22일 인디애나주 포트 벤자민 해리슨의 제10보병연대로 전보되었다. 1911년 3월, 제10보병연대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로 파견되어 멕시코 국경 전쟁 중 공격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편성된 기동사단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9월에는 파나마 운하 지대로 파견되었다. 파나마에서 아이첼버거는 파나마 운하 지대 대법원장이었던 헤제키아 A. 거저의 딸인 에멀린 거저(Em Gudger)를 만났다. 짧은 연애 끝에 1913년 4월 3일 결혼했다.
1915년 3월 미국으로 돌아온 아이첼버거는 뉴욕주 포트 포터의 제22보병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연대 또한 멕시코 국경으로 파견되어 애리조나주 더글러스에 주둔했고, 그곳에서 아이첼버거는 1916년 7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 9월에는 미주리주 분빌의 캠퍼 군사학교에서 군사 과학 및 전술 교수가 되었다.
2. 제1차 세계 대전 및 시베리아 참전

2.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7년 4월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아이첼버거는 5월 15일 대위로 진급했다. 6월에는 유타주 포트 더글러스의 제20보병연대에 배치되어 9월까지 대대를 지휘했으며, 이후 아칸소주 캠프 파이크에 새로 창설된 제43보병연대로 전보되었다. 그는 1918년 2월까지 캠프 파이크에서 제3장교 훈련소의 선임 보병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워싱턴 D.C.의 전쟁부 참모부에 배정되어 윌리엄 S. 그레이브스 준장의 보좌관이 되었고, 1918년 6월 3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2.2. 시베리아 원정
1918년 7월, 그레이브스는 당시 캘리포니아주 팔로 알토에 주둔하며 30일 이내에 프랑스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제8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레이브스는 아이첼버거를 작전 참모(G-3) 보좌관으로 데려갔다. 캘리포니아로 가는 도중 아이첼버거는 그레이브스로부터 제8사단의 목적지가 시베리아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 내전 연합군 개입을 지원하기로 동의했으며, 그레이브스는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AEFS)을 지휘하게 되었다. AEFS는 8월 15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으며, 아이첼버거는 정보 참모(G-2) 보좌관으로 참여했다.
그레이브스는 임무가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며, 따라서 "엄격한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아이첼버거는 복잡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도착 직후 그는 연합군 전략을 담당하는 10개국 연합군 군사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아이첼버거는 시베리아에서 미국의 목표가 프랑스와 영국 동맹국의 목표와 반드시 같지는 않다고 확신했지만, 특히 미국 국무부와 전쟁부가 항상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목표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했다. 미국의 정책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아이첼버거가 "살인자"이자 "폭력배"라고 여겼던 알렉산드르 콜차크 백군 세력의 통제하에 있었다.
아이첼버거는 원정군에 배정되어 반복된 용감한 행동으로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의 훈장 사유는 다음과 같다.
"1919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시베리아 미 원정군 G-2 부참모장으로 복무 중 탁월한 영웅적 행동을 보였다. 1919년 7월 2일, 미군이 노비츠카야를 점령한 후, 적의 순찰대를 지휘 능선에서 소탕하기 위해 파견된 미군 소대가 적의 측면 공격에 의해 저지되어 순찰대원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아이첼버거 대령은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소총으로 무장한 채 자발적으로 소대의 철수를 엄호했다. 6월 28일에는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파르티잔 진영에 들어가 러시아인 포로와의 교환을 통해 미군 장교 1명과 사병 3명을 석방시켰다. 7월 3일, 미군 종대가 산악 통로에서 발포를 당했을 때, 아이첼버거 대령은 자발적으로 사격선 구축을 도왔고, 혼란을 막았으며, 자신의 안전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동으로 미군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켰다."
시베리아에서의 공로로 아이첼버거는 육군 수훈장을 받았고, 1919년 3월 28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레이브스는 그가 다른 연합군 군사 위원회 위원들이 받았던 영국 수훈장과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아이첼버거는 일본의 대일본제국 훈장 메이지, 서보장, 욱일장을 받았다. 시베리아는 아이첼버거에게 일본군을 직접 관찰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는 일본군의 훈련과 규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일본군이 제대로 지휘된다면 미군과도 충분히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AEFS는 1920년 4월 철수했다.
3. 전쟁 간 시기 활동
3.1. 필리핀 및 미국 내 근무
시베리아 복무 후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이첼버거는 1920년 5월 4일 필리핀 사단의 정보 참모(G-2) 보좌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장교들이 그랬듯이, 그는 1920년 6월 30일 영구 계급인 대위로 강등되었으나, 다음 날 즉시 다시 소령으로 진급했다. 에멀린은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와 합류했으며, 두 사람은 필리핀으로 가기 전에 먼저 일본을 여행했다. 1921년 3월, 아이첼버거는 중국 정보 임무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베이징과 톈진에 정보 사무소를 설립했으며, 쑨원 중화민국 대총통을 만났다. 그는 마침내 1921년 5월 미국으로 돌아왔고, 전쟁부 참모부의 정보국(G-2) 극동 섹션에 배정되었다.
아이첼버거에게 큰 실망은 그가 참모부 적격자 명단(GSEL)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920년 국방법에 따르면, 이 명단에 있는 장교들만이 준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보병에서의 진급 전망이 좋지 않다고 결론 내린 그는 부관감 로버트 C. 데이비스 소장의 권유로 1925년 7월 14일 부관감 병과로 전과했다. 그는 계속해서 전쟁부 참모부와 일했지만, 이제는 부관감실에서 근무했다。1925년 4월, 그는 오하이오주 포트 헤이즈로 전보되어 제5군단 지역의 부관감 보좌관이 되었다.
3.2. 참모 대학 및 교육 과정 이수
데이비스는 아이첼버거에게 포트 리븐워스의 지휘참모대학에 입학할 것을 제안했다. 아이첼버거는 1924년 7월 그곳에서 247명의 다른 장교들과 함께 입학했다. 학생들은 알파벳 순서로 앉았기 때문에, 그는 학년 수석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령 옆에 앉았다. 다른 학생들 중에는 조지프 스틸웰, 레너드 제로우, 조지프 T. 맥나니 등이 있었다. 아이첼버거는 상위 4분의 1에 해당하는 우수 졸업생으로 졸업했으며, 대학에 남아 부관감으로 근무했다. 1929년, 그는 육군참모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졸업 후 그는 워싱턴 D.C.의 부관감실로 다시 배치되었다.
3.3.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관계
1931년, 아이첼버거는 웨스트포인트의 부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1934년 8월 1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1935년 4월, 그는 육군참모총장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밑에서 전쟁부 참모부의 비서가 되었다. 아이첼버거는 1937년 7월 보병으로 다시 전과했지만, 1938년 10월까지 전쟁부 참모부 비서직을 유지했으며, 8월 1일부터는 대령 계급을 가졌다.
새로운 참모총장 말린 크레이그 장군은 아이첼버거에게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주둔한 시범 연대인 제29보병연대의 지휘권을 제안했다. 아이첼버거는 보병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고 일부 보병 장교들이 질투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대신 그는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에 주둔한 덜 명망 있는 부대인 제30보병연대의 지휘권을 수락했지만, 52세의 나이에 연대 지휘권을 얻은 것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있었다. 출발 전에 그는 보병에 다시 익숙해지기 위해 포트 베닝의 보병 학교에서 짧은 과정을 이수했다. 제3보병사단의 일부로서, 제30보병연대는 다음 2년 동안 일련의 주요 훈련에 참여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
4.1. 미국 내 사령관직 및 훈련
아이첼버거는 194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다음 달에는 스틸웰 휘하의 제7보병사단 부사단장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 명령은 변경되었다. 에드윈 왓슨 소장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개입하여 아이첼버거를 웨스트포인트의 교장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직책을 맡기 전, 아이첼버거는 크레이그의 후임 참모총장인 조지 C. 마셜 장군을 만났는데, 마셜은 확장되는 육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휘참모대학과 육군참모대학의 과정이 대폭 단축되었으며, 아이첼버거가 웨스트포인트의 과정을 육군의 즉각적인 필요에 더 적합하게 만들지 못하면 웨스트포인트도 비슷한 운명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교장으로서 아이첼버거는 "웨스트포인트를 20세기로 가져오려" 노력했다. 그는 승마와 제식 훈련과 같은 활동을 줄이고, 사관생도들이 육군 방위군 부대와 함께 군사 훈련에 참여하는 현대 전투 훈련으로 대체했다. 그는 스튜어트 비행장을 훈련 시설로 확보하고, 사관생도들에게 기초 비행 훈련을 받도록 요구했다. 이는 사관생도들에게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동안 조종사 자격을 취득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웨스트포인트 풋볼팀의 참담한 상황에도 관심을 가졌다. 왓슨을 통해 그는 미국 육군 군의감에게 체중 제한을 완화하여 더 무거운 선수들을 모집할 수 있도록 설득했고, 얼 블레이크를 팀 코치로 고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셜은 아이첼버거의 재능이 웨스트포인트에서 낭비되고 있다고 믿게 되었지만, 왓슨은 아이첼버거가 사관학교에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반대했다. 마셜이 왓슨에게 아이첼버거가 사단 지휘 기회를 박탈당함으로써 소장으로 진급할 기회가 불리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하자, 왓슨은 아이첼버거의 이름을 진급 명단 맨 위에 추가하고 대통령의 서명을 받았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첼버거는 1941년 7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1년 12월 미국의 일본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선언 이후, 아이첼버거는 현역 지휘관으로의 전보를 신청했다. 그는 세 개의 신설 사단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고, 1942년 3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포트 잭슨에서 창설된 제77보병사단을 선택했다. 나머지 두 사단은 오마 브래들리 소장과 헨리 테럴 주니어 소장에게 주어졌다. 세 장군과 그들의 참모진은 포트 리븐워스에서 훈련 과정을 이수했다. 아이첼버거는 참모장으로 클로비스 바이어스를 선택했는데, 바이어스는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와 웨스트포인트도 졸업했으며, 파이 감마 델타 친목회의 동료 회원이었다.
아이첼버거의 제77보병사단 지휘 기간은 짧았는데, 1942년 6월 18일 그는 바이어스를 참모장으로 하여 제1군단의 사령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77보병사단에서의 공로로 공로 훈장을 받았다. 제1군단은 제8보병사단, 제30보병사단, 제77보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아이첼버거는 처음에는 윈스턴 처칠, 마셜, 헨리 스팀슨, 존 딜, 앨런 브룩 경을 포함한 고위 인사들을 위한 시범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시범은 성공적이라고 평가되었지만, 브룩과 레슬리 맥네어의 훈련된 눈은 결함을 발견했다. 며칠 내로 두 명의 사단장이 지휘권에서 해임되었다. 아이첼버거는 횃불 작전에서 미군을 지휘하도록 지명되었고, 켄트 휴이트 해군 소장과 협력하여 체서피크만에서 제3보병사단, 제9보병사단, 제30보병사단을 대상으로 상륙전 훈련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2. 뉴기니 전역
1942년 8월 9일, 그의 명령은 갑자기 변경되었다. 당시 남서태평양 전구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군단 사령부를 자신의 지휘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원래는 로버트 C. 리처드슨 주니어 소장이 이 임무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마셜은 맥아더에게 "리처드슨이 호주군 지휘 아래 복무하는 것에 대한 강한 감정 때문에 그의 배치가 현명하지 않다고 보였다"고 통보했다. 아이첼버거의 제1군단 사령부는 해외 복무 준비가 되어 있었고 상륙전 훈련을 받았으며, 아이첼버거는 맥아더와 함께 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셜은 그를 대신 선택했다. 아이첼버거는 이 임무에 만족하지 않았는데, 특히 리처드슨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더욱 그랬고, "맥아더 장군과 잘 지내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이첼버거는 8월 20일 22명의 참모진과 함께 B-24 리버레이터를 타고 호주로 출발했다. 제1군단은 호주에 주둔한 두 개의 미군 사단을 통제했다. 브리즈번 근처 캠프 케이블에 주둔한 포레스트 하딩 소장의 제32보병사단과 퀸즐랜드주 록햄프턴에 주둔한 호러스 풀러 소장의 제41보병사단이었다. 아이첼버거는 10월 21일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크리테리온 호텔 안에 제1군단 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제1군단은 존 라바락 중장의 호주 제1군의 지휘를 받았다. 호주 지휘관들을 만났을 때, 아이첼버거는 그들 중 많은 수가 "이미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치렀고, 비록 그들이 보통 너무 예의 바르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인들을 기껏해야 경험 없는 이론가로 여겼다"고 언급했다. 그는 두 미군 사단이 받은 훈련 수준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들은 정글전 훈련 대신 미국에서 사용되는 동일한 교육 과정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맥아더와 맥아더의 참모장 리처드 K. 서덜랜드 소장에게 이 사단들이 노련한 일본군과 대등하게 맞설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9월에 제32보병사단이 록햄프턴의 제41보병사단 캠프보다 캠프 케이블이 열악했기 때문에 먼저 뉴기니로 가야 한다고 결정했다.
아이첼버거의 우려는 부나-고나 전투에서 과신했던 제32보병사단이 심각한 역전을 겪으면서 현실이 되었다. 하딩은 부나를 "큰 어려움 없이"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부실한 참모 업무, 부정확한 정보, 부적절한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군의 저항이 미군의 노력을 좌절시켰다. 미군은 늪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잘 배치되고 능숙하게 준비된 일본군 진지망에 직면했다. 미군의 실패는 호주군과의 관계를 손상시켰고 맥아더의 전체 작전을 위태롭게 했다. 11월 30일, 아이첼버거와 제1군단 사령부의 소규모 일행은 두 대의 C-47 스카이트레인을 타고 급히 포트 모스비로 날아갔다. 맥아더는 아이첼버거에게 부나 전투의 지휘권을 맡으라고 명령했다. 바이어스와 아이첼버거에 따르면, 맥아더는 그에게 "음침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나의 지휘권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하딩을 해임하게. 자네를 보내는 것이네, 밥, 그리고 나는 싸우지 않는 모든 장교들을 해임하기를 원하네. 연대장과 대대장을 해임하게. 필요하다면, 하사관을 대대장으로, 상병을 중대장으로 임명하게. 싸울 의지가 있는 누구라도 좋네. 시간이 중요하네. 일본군이 언제든지 증원 병력을 상륙시킬 수 있네."
맥아더 장군은 다시 바람 부는 베란다를 따라 걸었다. 그는 미군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적에게서 도망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멈춰 서서 강조하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원했다.
"밥," 그가 말했다. "자네는 부나를 점령해야 하네, 아니면 살아서 돌아오지 말게." 그는 잠시 멈췄다가, 바이어스를 보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 말은 자네 참모장에게도 해당되네."
다음 날, 아이첼버거 일행은 도보두라로 날아가 부나 지역 미군 지휘권을 인수했다. 그는 하딩을 해임하고, 사단 포병 지휘관인 앨버트 W. 월드런 준장으로 교체했다. 그는 다른 장교들도 해임했으며, 26세의 대위를 대대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제32보병사단의 일부 장교들은 아이첼버거를 무자비하고 "프로이센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전선에서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고난과 위험을 함께 나누는 모범을 보였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군 저격수들이 장교를 표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전선에서 세 개의 은색 별을 달고 다녔는데, 이는 병사들에게 지휘관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격수들이 월드런을 어깨에 심각한 부상을 입힌 후, 아이첼버거는 바이어스를 제32보병사단 지휘관으로 임명했지만, 바이어스 또한 12월 16일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아이첼버거는 전방 지역에 남은 유일한 미군 장군이 되었고, 그는 사단의 개인 지휘권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있던 가장 선임 장군은 아니었다. 그는 호주 육군 에드먼드 헤링 중장의 지휘 아래 복무했으며, 에멀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를 "나의 훌륭한 동료"라고 언급했다.

부나가 함락된 후, 아이첼버거는 프랭크 베리먼 소장을 참모장으로 하여 사나난다 주변의 남은 일본군 진지를 축소하기 위해 집결된 연합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전투는 1943년 1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부나에서의 승리 대가는 컸다. 제32사단은 전사자 707명, 부상자 1,680명을 잃었으며, 8,286명은 주로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성 질병으로 입원했다. 병사들은 사단 묘지를 "아이첼버거 광장"이라고 불렀다. 1월 24일, 아이첼버거는 포트 모스비로 돌아왔고, 헤링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다음 날 그는 록햄프턴으로 돌아갔다. 이 전투로 아이첼버거는 다른 10명의 장군들과 함께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는데, 이들 모두 동일한 훈장 사유를 받았다. 헤링처럼 전선에서 복무한 이들도 있었고, 서덜랜드처럼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아이첼버거는 또한 명예 대영 제국 훈장 기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바이어스는 아이첼버거를 명예 훈장에 추천했지만, 맥아더는 이 추천을 승인하지 않았다. 아이첼버거의 참모 중 한 명인 고든 바이롬 로저스 대령은 이 추천을 전쟁부에 직접 제출했다. 맥아더는 전쟁부에 "이 장교의 직속 참모 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작전 수행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이는 그의 개인적인 용맹을 깎아내리지는 않지만 한때 그의 지휘 해임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만들었다"고 통보했다.
4.3. 태평양 전역에서의 주요 작전
1943년 2월, 월터 크루거 중장의 제6군 사령부가 호주에 도착했다. 제6군이 모든 계획을 담당하게 되었고, 아직 군단 규모의 작전 범위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이첼버거는 하와이에서 도착한 제24보병사단과 파푸아에서 돌아온 제32보병사단 및 제41보병사단을 미래 임무를 위해 훈련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43년 5월, 전쟁부는 아이첼버거가 제1군을 지휘하도록 해임될 수 있는지 물었지만, 맥아더는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제9군을 지휘하도록 해임될 수 있는지 물었지만, 이 또한 거부되었고, 이 임무는 아이첼버거의 웨스트포인트 동기인 윌리엄 H. 심슨에게 돌아갔다. 대신 그는 1943년 9월 엘리너 루스벨트의 호주 방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시드니, 멜버른, 록햄프턴을 방문했으며, 캔버라에서 호주 총독 고리 경과 호주 총리 존 커틴과 저녁 식사를 했다.

1944년 1월, 아이첼버거는 제24보병사단과 제41보병사단을 이끌고 한자만에 상륙하는 다음 작전을 지휘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3월에 이 계획은 취소되었고, 대신 동일한 병력으로 홀랜디아에 상륙하는 무모한 작전이 결정되었다. 이 작전은 한자만에 있는 일본군 방어선을 건너뛰는 것을 의미했지만, 육상 기반 항공 지원 범위 밖에 있어 위험했다. 대신 미국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들이 지원을 제공했지만, 이는 작전이 엄격한 시간표를 준수해야 함을 의미했다. 부나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아이첼버거는 작전을 세심하게 계획하고, 체력, 개인 주도권, 소규모 부대 전술, 상륙전을 강조하는 철저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작전은 잘 진행되었는데, 주로 기습이 성공하여 해당 지역에 일본군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실한 지형 정보로 인해 일부 해변이 늪지대에 막혀 확보되지 못했다. 보급품이 해변에 쌓였고, 연료와 탄약이 일부 경우 함께 보관되었다. 4월 23일, 단 한 대의 일본군 항공기가 연료 저장고에 불을 붙여 화재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124명의 사상자와 탄약 비축량의 60% 손실이 발생했다. 경악한 크루거는 아이첼버거가 그의 참모진에게 실망했다고 느꼈고, 바이어스를 부사단장 직책으로 전보시키겠다고 제안했지만, 아이첼버거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1944년 6월, 아이첼버거는 크루거에 의해 제6군 사령부로 소환되었다. 5월에 제41보병사단이 상륙했던 비아크 전투가 좋지 않게 진행되고 있었고, 맥아더가 사이판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확보될 것이라고 약속했던 비행장들은 미군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첼버거는 원래 보고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일본군이 비행장 부지를 내려다보는 동굴에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미군이 부나 때보다 더 잘 훈련되고 장비가 갖춰져 있었지만, 일본군 또한 그러했고, 그들은 값비싼 반격을 피하고 점령된 지역에 대해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새로운 전술을 사용했다. 상황을 직접 본 후, 아이첼버거는 풀러의 제41보병사단이 그리 나쁘지 않게 싸웠다고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나에서처럼 아이첼버거는 전투가 진행되면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느낀 여러 장교들을 해임했다. 그의 명령은 풀러를 사단장에서 해임하는 것이 아니라 태스크포스 사령관으로서 그를 대체하는 것이었지만, 풀러는 스스로 해임을 요청했고, 크루거는 이를 수락했다. 아이첼버거의 추천으로 풀러는 옌스 A. 도 준장으로 교체되었다. 크루거는 비아크에서의 아이첼버거의 성과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아이첼버거의 전술이 상상력이 부족하고 풀러의 전술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섬 점령을 지연시켰을 수도 있다고 결론 내렸다. 반면에 맥아더는 아이첼버거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은성 훈장을 수여했다.
4.4. 제8군 사령관으로서의 역할
아직 비아크에 있는 동안, 아이첼버거는 맥아더가 자신을 새로 창설될 제8군의 지휘관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8군은 1944년 8월 홀랜디아에 도착했다. 아이첼버거는 제1군단에서 바이어스와 그의 G-3인 프랭크 S. 보웬 대령 두 명의 장교를 데려갔다. 제8군은 12월 26일, 맥아더와 크루거가 레이테섬의 조직적 저항이 끝났다고 발표한 다음 날, 제6군으로부터 레이테섬 작전 통제권을 인수했다. 그곳의 병력에는 아이첼버거의 옛 지휘부인 제77보병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달 동안 제6군은 레이테에서 55,0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며, 섬에 5,00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추정했다. 1945년 5월 8일까지 제8군은 추가로 24,000명 이상을 사살했다.
1월, 제8군은 루손섬에서 전투에 돌입하여 1월 29일 찰스 P. 홀 소장의 제11군단을 삼발레스주 산안토니오 근처에 상륙시켰고, 이틀 후 조지프 M. 스윙 소장의 제11공수사단을 바탕가스주 나수그부에 상륙시켰다. 제6군과 합류하여 제8군은 거대한 협공 작전으로 마닐라를 포위했다. 아이첼버거는 마닐라에 대한 경무장 제11공수사단의 진격을 포함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대담한 진격은 마닐라 외곽의 잘 준비된 진지에 의해 저지될 때까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맥아더는 아이첼버거에게 두 번째 은성 훈장을 수여했다.
제8군의 전쟁 마지막 작전은 민다나오섬을 포함한 남부 필리핀을 소탕하는 것이었는데, 이 노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8군 병사들을 계속 바쁘게 했다. 6주 동안 제8군은 14개의 주요 상륙 작전과 24개의 소규모 상륙 작전을 수행하여 민도로섬, 마린두케섬, 파나이섬, 네그로스섬, 세부섬, 보홀섬을 확보했다. 1945년 8월, 아이첼버거의 제8군은 일본 점령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비번 미군 병사들의 여성 강간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한 유일한 사례에서, 제8군은 전투 대형의 장갑차를 거리에 투입하여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이 지도자들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기록의 유일한 출처는 아이첼버거의 일기인데, 여기에는 성범죄에 대한 언급은 없고 몇몇 미군 병사들에 대한 구타만 언급되어 있다.
그는 제1군단 사령관으로서의 공로로 육군 수훈장에 떡갈나무 잎장을 추가로 받았고, 필리핀에서의 제8군 지휘에 대해 두 번째, 일본 점령에 대해 세 번째 떡갈나무 잎장을 받았다. 그는 또한 해군 수훈장, 은성 훈장에 두 개의 떡갈나무 잎장, 동성 훈장, 항공 훈장을 받았다. 그는 또한 다수의 외국 훈장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네덜란드의 오라녜 나사우 훈장 대장(검 포함),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 벨기에의 왕관 훈장 대장 및 무공 십자 훈장 (야자잎 포함), 에콰도르의 압돈 칼데론 훈장, 필리핀의 수훈성 훈장, 필리핀 해방 메달, 필리핀 공로 훈장,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군사 훈장 대장 등이 포함된다.
5. 일본 점령 및 전후 활동
5.1. 일본 점령 임무 수행
1945년 8월 30일, 아이첼버거는 최고 선임자로서 아쓰기 비행장에 도착하여 더글러스 맥아더를 맞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일본 점령군 내에서 맥아더 다음가는 2인자였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맥아더와의 협상이 난항을 겪을 때 아이첼버거가 중재에 나서면서 '아이첼버거 루트'가 기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 점령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 정부와 긴밀히 협력했으며, 특히 해상보안청 창설에 기여하는 등 일본의 전후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점령기 동안 미군 병사들의 성범죄로부터 일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경단을 조직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제8군은 전투 대형의 장갑차를 거리에 투입하여 자경단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이 지도자들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아이첼버거의 일기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미군 병사들에 대한 구타는 언급되어 있지만, 성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어 당시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5.2. 일본의 재무장 및 안보 정책 관련 활동
아이첼버거는 일본의 재무장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점령 초기 일본의 비무장을 강조했던 민정국이나 극동위원회의 입장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의 재임 중에는 일본의 재무장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전후 일본의 안보 정책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가타야마 내각의 아시다 히토시 외상이 스즈키 규만 종전 연락 요코하마 사무국장을 통해 아이첼버거에게 전달한 '아시다 메모'는 일본의 안보를 미국에 위임하겠다는 의사를 담고 있었으며, 이는 오늘날 미일 안보 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메모는 미국 본토의 고위 인사들에게 전달되었음을 시사하는 증언 기록이 발견되면서 기존의 정설을 뒤집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5.3.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관계 및 개인적 평가
아이첼버거는 직속 상사인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공개적으로 대립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일기에는 맥아더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시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맥아더를 "신화"로 간주하며 이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휘관에서 해임했던 에드윈 F. 하딩과 호러스 H. 풀러가 여전히 자신에게 상처받고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으며, 이는 사실 맥아더의 잘못이라고 느꼈다. 반대로 아이첼버거는 월터 크루거나 리처드 K. 서덜랜드에게서 받은 실제 또는 상상의 경멸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서덜랜드가 대화를 시도했을 때도 아이첼버거는 그와 말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아이첼버거는 "맥아더 신화를 영원히 파괴할" 폭로성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서류를 듀크 대학교에 기증했다. 제이 루바스는 1972년 그의 편지를 모아 『디어 미스 엠: 아이첼버거 장군의 태평양 전쟁 1942-1945』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아이첼버거는 전시 동안 에드먼드 헤링과 유지했던 따뜻한 관계를 계속 이어갔다. 헤링과 그의 아내 메리 헤링은 1953년 애슈빌에 있는 아이첼버거 부부의 집에 머물렀으며, 그들은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6. 퇴역 및 사망
거의 40년간의 복무 끝에 아이첼버거는 1948년 12월 31일 중장 계급으로 퇴역했다. 1950년,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로 이주하여 아내 에멀린과 함께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는 고혈압과 당뇨병을 포함한 여러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고,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의 남서태평양 전역에 대한 일련의 기사들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렸는데, 실제로는 밀턴 맥케이라는 대필 작가가 썼다. 이 기사들은 나중에 『도쿄로 가는 우리 정글 길』(Our Jungle Road to Tokyo)이라는 책으로 확장되었고, 한 서평가는 이 책을 "부나 작전부터 필리핀과 승리까지 육군 지상군의 전역에 대한 솔직하고 겸손한 기록"이라고 평했다. 이 책은 상당히 잘 팔렸고, 해리 S. 트루먼과 오마 브래들리는 친필 서명본을 요청하기도 했다. 1951년 그는 할리우드로 가서 영화 『프랜시스, 웨스트포인트에 가다』(Francis Goes to West Point, 1952)와 『밴드가 연주한 날』(The Day the Band Played, 1952)의 기술 고문으로 활동했지만, 결과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했다. 그는 뉴스위크에 극동에 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지만, 1954년에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강연 활동을 시작하여 자신의 경험에 대해 연설했지만, 1955년에 이 또한 중단했다. 1960년에는 리처드 닉슨의 선거 운동에 참여했다.
미국 의회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54년 그를 포함한 여러 육군 또는 그 이상의 편제를 지휘했던 장교들을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는 하딩과 풀러가 자신에게 지휘 해임에 대해 여전히 상처받고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는데, 그는 이것이 실제로는 맥아더의 잘못이라고 느꼈다. 아이첼버거는 1961년 9월 25일 애슈빌에서 전립선 탐색 수술을 받았다. 합병증이 발생하여 다음 날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전례에 따라 안장되었다.
7. 군 경력 요약 및 훈장
7.1. 주요 훈장 및 표창
로버트 L. 아이첼버거가 복무 기간 동안 받은 주요 훈장과 표창은 다음과 같다.
- 미국 훈장
- 수훈 십자 훈장 (떡갈나무 잎장 1개 포함)
- 육군 수훈장 (떡갈나무 잎장 3개 포함)
- 해군 수훈장
- 은성 훈장 (떡갈나무 잎장 2개 포함)
- 공로 훈장
- 동성 훈장
- 항공 훈장
- 멕시코 국경 복무 메달
- 제1차 세계 대전 승리 메달
- 미국 방어 복무 메달
- 아시아-태평양 전역 메달
-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메달
- 점령군 메달
- 외국 훈장
- 대영 제국 훈장 기사 사령관 (호주)
- 수훈장 동료 (영국)
- 오라녜 나사우 훈장 대장 (검 포함, 네덜란드)
-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 (프랑스)
- 대일본제국 훈장 메이지 (일본)
- 서보장 (일본)
- 욱일장 (일본)
- 왕관 훈장 대장 (벨기에)
- 무공 십자 훈장 (야자잎 포함, 벨기에)
- 압돈 칼데론 훈장 1등급 (에콰도르)
- 수훈성 훈장 (필리핀)
- 필리핀 해방 메달 (필리핀)
- 필리핀 공로 훈장 (필리핀)
- 이탈리아 군사 훈장 대장 (이탈리아)
7.2. 계급별 복무 기간
계급 | 구성군 | 진급일 |
---|---|---|
소위 | 정규군 | 1909년 6월 11일 |
중위 | 정규군 | 1916년 7월 1일 |
대위 | 정규군 | 1917년 5월 15일 |
소령 | (임시) | 1918년 6월 3일 |
중령 | (임시) | 1919년 3월 28일 |
대위 | 정규군 (영구 계급 복귀) | 1920년 6월 30일 |
소령 | 정규군 | 1920년 7월 1일 |
중령 | 정규군 | 1934년 8월 1일 |
대령 | 정규군 | 1938년 8월 1일 |
준장 | 미국 육군 | 1940년 10월 1일 |
소장 | 미국 육군 | 1941년 7월 10일 |
중장 | 미국 육군 | 1942년 10월 21일 |
준장 | 정규군 | 1943년 9월 1일 |
소장 | 정규군 | 1944년 10월 4일 |
중장 | 정규군, 퇴역 | 1948년 12월 31일 |
대장 | 정규군, 퇴역 | 1954년 7월 19일 |
8. 영향 및 평가
8.1. 일본과의 독특한 일화
아이첼버거는 일본 점령기 동안 더글러스 맥아더에 이어 점령군의 2인자였다. 그는 온화한 인품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었으며, 맥아더와의 협상이 난항을 겪을 때 아이첼버거가 중재에 나서면서 일본 정부가 점령군 최고사령부와 소통하는 '아이첼버거 루트'가 기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일본 점령기 동안의 독특한 일화로는 국철에서 아이첼버거 장군 전용 객차가 지정되었던 사례가 있다. 여기에는 어료차 10호차, 어료차 11호차, 마이네38 1, 스이로네프38 1, 마이로네38 1, 스하니33 13 등이 포함되었다.
1947년, 지방 순행 중이던 쇼와 천황을 태운 어료열차와 아이첼버거 중장을 태운 연합군 전용열차가 우스이 고개에서 교행하게 되었다. 이때 RTO(Railway Transportation Office)의 명령에 따라 천황 전용 열차 측이 5분간 물러나 피해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가루이자와에 머무는 동안 서양화가 아라이 리쿠오를 방문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8.2. 역사적 평가 및 비판
아이첼버거의 군사적 리더십은 부나-고나 전투와 비아크 전투 등 태평양 전역의 주요 전투에서 드러났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단호하게 지휘관을 해임하는 등 과감한 결정을 내렸으며, 이는 일부 병사들로부터 "무자비하고 프로이센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맥아더는 아이첼버거의 명예 훈장 추천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그의 작전 수행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 아래 제8군은 필리핀 해방 작전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일본 점령기 동안 그는 일본의 재무장을 주장하며 일본의 안보 정책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당시 점령 정책의 기조와는 다른 시각이었으며, 아시다 메모와 같은 사례는 그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점령군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미군 병사들의 행동으로부터 일본 여성을 보호하려는 자경단을 제압하고 지도자들을 투옥한 사건은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비판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아이첼버거의 일기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미군 병사들에 대한 구타만 언급되어 있어, 당시 점령군 내부의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이첼버거는 직속 상사인 맥아더에 대해 공개적으로는 충성스러웠으나, 개인 일기에는 맥아더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그의 내면적인 갈등과 맥아더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맥아더의 "신화"를 깨뜨리려 했다는 점에서, 전후 군사 지도자들의 관계와 역사적 평가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또한 자신에게 해임된 장교들의 원한과 자신을 실망시킨 동료들에 대한 불만을 평생 간직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