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레카의 초기 생애는 그녀의 출생과 가족 관계, 그리고 어린 시절의 교육 및 연기 경력의 시작으로 나눌 수 있다.
1.1. 출생과 가족

레카는 1954년 10월 10일 인도 마드라스 주 마드라스 (현재 첸나이)에서 바누레카 가네산(Bhanurekha Ganesan영어)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남아시아 배우인 제미니 가네산과 푸슈파발리로,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관계였다. 가네산은 이전에 T. R. "봅지마" 알라멜루와 결혼하여 레바티 스와미나탄, 카말라 셀바라지, 나라야니 가네산, 자야 시리다르 등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또한 배우 사비트리와도 결혼하여 비자야 차문데스와리, 사티쉬 쿠마르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푸슈파발리는 이전에 변호사 I. V. 랑가차리와의 결혼에서 바부지, 라마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가네산과 푸슈파발리는 1955년에 또 다른 딸 라다를 낳았다. 나가프라사드와 배우 슈바는 그녀의 사촌이며, 베단탐 라가바이야와 그의 아내 수리야프라바는 각각 그녀의 삼촌과 숙모이다.
타밀인 아버지와 텔루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레카의 모국어는 텔루구어이며 텔루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녀는 또한 타밀어와 힌디어에 유창하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서는 주로 영어로 대화했고, 텔루구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언급했으며, 영어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카는 1970년대 중반까지 자신의 가족 배경을 공개하지 않았다. 불안정한 어린 시절 동안 그녀는 아버지 가네산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가네산은 그녀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거나 생활비를 주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푸슈파발리와의 두 자녀를 거의 만나지 않았고, 푸슈파발리는 이후 마드라스의 영화 촬영 감독 K. 프라카시와 결혼하여 법적으로 이름을 K. 푸슈파발리로 변경했다. 그녀는 두 명의 자녀를 더 낳았는데, 배우 테지 사프루와 결혼한 다날락슈미와 댄서 세슈(1991년 5월 21일 사망)이다. 어머니의 바쁜 연기 일정 때문에 레카는 종종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시미 가레왈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레카는 그가 자신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종종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의 존재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년 푸슈파발리가 사망한 지 5년 후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는 시네 블리츠 인터뷰어에게 이에 대한 행복감을 표하며 "레카와 나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가깝다"고 말했다. 가네산은 2005년에 사망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레카는 한 살 때 텔루구어 드라마 인티 구투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베단탐 라가바이야가 감독한 이 영화는 1958년 후반에 개봉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그녀는 세 살 때 유치원에 입학했고, 청소년기에는 마드라스의 프레젠테이션 컨벤트 스쿨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네산과 알라멜루의 둘째 딸인 나라야니를 만났는데, 당시 나라야니는 아홉 살 또는 열 살이었다. 항상 서투르고 외로운 소녀였던 그녀는 소아 비만을 겪었다고 인정했다. 1990년 일러스트레이티드 위클리 오브 인도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을 "학교에서 가장 뚱뚱한 소녀"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춤과 스포츠에 대한 사랑을 키웠지만, 체중 때문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많은 학교 친구들에게 로타(lotta타밀어, "사생아"를 뜻하는 타밀어)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했다. 자신을 신과 운명을 "굳게 믿는 사람"이라고 묘사한 레카는 학교 예배당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1966년에는 푸슈파발리와 여동생 라다가 공동 주연한 정치 풍자 영화 랑굴라 라트남에 짧게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관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1.3. 연기 경력의 시작
전기 작가 야세르 우스만에 따르면, 1968년 레카의 가족이 재정난에 직면하자 푸슈파발리는 레카에게 연기 경력을 시작하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가족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연기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원래 승무원을 지망했던 레카는) 어머니의 바람에 순종하여 13세에서 14세 사이, 즉 9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전업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중에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동생 라다가 자신의 길을 걷지 못하게 막았는데, 라다가 학업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68년 말, 나이로비 기반의 사업가 쿨지트 팔은 제미니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자신의 새 프로젝트 안자나 사파르 (H. 라이더 해가드의 1885년 소설 솔로몬 왕의 보고 각색)에 출연할 신인을 물색했다. 그는 스튜디오에서 레카를 발견하고 바니스리에 이어 영화의 두 번째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팔은 레카에게 스크린 테스트를 주기 위해 푸슈파발리의 집을 방문하여 여러 문장을 힌디어로 받아쓰게 했고, 레카는 이를 라틴 문자로 다시 쓴 다음 암기하도록 지시받았다. 잠시 후 레카는 문장들을 완벽하게 말했고, 팔은 그녀의 원어민 같은 힌디어 발음에 감탄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과 그의 형제 샤트루지트 팔의 영화 네 편에 출연하는 5년 계약을 제안했다.
레카는 1969년 봄베이 (현재 뭄바이)로 이주하여 도시의 주후 지역에 있는 아잔타 호텔에 방을 빌렸고, 팔이 비용을 지불했다. 같은 해, 그녀는 대중과 언론에 데뷔를 발표했으며, 라지쿠마르 박사와 함께 주연을 맡은 성공적인 칸나다어 영화 오퍼레이션 잭팟 날리 C.I.D 999가 개봉되었다. 안자나 사파르에서 그녀는 숨겨진 보물을 찾아 아프리카로 여행하도록 아버지에게 강요당하는 여성 수니타 역을 맡았다. 그녀는 이 역할로 2.50 만 INR를 받았다.
당시 어머니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레카는 이모와 함께 촬영에 동행했으며, 촬영은 그 해 8월 메흐부브 스튜디오에서 시작되었다. 레카와 남자 주연 비스와지트 채터지의 키스 장면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는데, 감독 라자 나바테가 레카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훗날 레카는 그 장면에 속았다고 불평했다. 이 영화는 검열 문제에 부딪혀 1979년 두 시카리로 재개봉될 때까지 개봉되지 않았다. 이 키스 장면은 1970년 4월 라이프 잡지의 아시아판 표지를 장식했다. 이는 미국 언론인 제임스 셰퍼드가 레카를 인터뷰하기 위해 인도로 여행하게 만들었고, 레카는 이를 자신의 경력을 홍보하고 불만을 표출할 기회로 보았다. 두 시카리는 흥행에 실패했다.
1969년 봄베이로 이주한 직후, 레카는 제작자이자 감독인 모한 세갈의 영화 사완 바돈에 계약했고, 촬영은 10월 11일에 시작되었다. 그는 그녀를 연인 (나빈 니숄)과의 결혼을 부모에게 승인받지 못하는 시골 소녀 찬다 역으로 캐스팅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길고 숱이 많았지만, 세갈은 그녀에게 가발을 쓰도록 강요했다. 가발이 머리에 맞지 않아 헤어 스타일리스트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의 삭발해야 했다. 당시 그녀는 힌디어에 유창하지 않았고, 영화 제작진 대부분은 그녀의 남아시아 배경을 조롱했다. 힌디어 데뷔작인 사완 바돈은 1970년 9월에 개봉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영화 평론가들은 그녀의 외모를 비난했지만, 영화 속 자신감과 코믹 타이밍을 칭찬했다. 마노지 다스는 니숄의 얼굴에 레카와의 모든 장면에서 "당황스러움"이 보였다고 믿었으며, 필름 월드 잡지는 이 영화의 성공이 그녀의 경력에 돌파구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콜리 프라티아가트마 감독의 텔루구어 드라마 암마 코삼은 그 해 말에 개봉되었고, 그녀는 이 영화를 어머니에게 헌정했다.
2. 영화 경력
레카의 영화 경력은 초기 부침을 겪은 시기부터 스타덤에 오르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변화를 겪은 시기,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2.1. 초기 경력 및 부침 (1969-1977)
사완 바돈 이후 레카는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단순한 글래머 소녀 역할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매우 다작했으며, 연간 평균 10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대부분은 흥행을 위한 작품으로 평가되었고 역할이나 연기력 면에서 그녀의 경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람푸르 카 락슈만(1972), 카하니 키스마트 키(1973), 프란 자예 파르 바찬 나 자예(1974) 등 여러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에 출연했지만, 연기력으로는 인정받지 못했으며, 작가 테자스위니 간티에 따르면 "그녀의 어두운 피부색, 통통한 몸매, 화려한 옷차림이 영화 산업과 사회에 만연한 미의 기준과 모순되었기 때문에 업계는 그녀의 성공에 놀랐다." 1975년, 그녀는 전쟁 영화 아크라만에서 라케시 로샨의 아내 시탈 역으로 출연했는데, 쿠라툴라인 하이더는 이 역할을 진부하고 "옷걸이"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란디르 카푸르의 다람 카람은 불량배에 대한 드라마였는데, 링크 잡지는 레카의 역할이 전체 출연진 중 가장 한심하다고 지적했다. 마피아 영화 다르마트마는 그 해 그녀의 유일한 재정적 성공작이었다. 페로즈 칸이 감독하고 주연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칸의 어린 시절 연인 아누 역을 맡았다. 추가 영화로는 카빌라가 있는데, 비평가 가우탐 쿤두는 그녀의 출연에 대해 "대본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평범하게 연기했지만, 그 평범함이 너무 많았다"고 썼다.
레카는 당시 자신이 인식되던 방식이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역할 선택을 개선하려는 동기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나는 내 어두운 피부색과 남아시아 특징 때문에 힌디어 영화계의 [미운 오리 새끼]라고 불렸다. 사람들이 나를 당대의 주연 여배우들과 비교하며 내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때 깊은 상처를 받았다. 나는 순수한 실력으로 크게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1970년대 중반은 그녀의 신체적 변신의 시작을 알렸다. 그녀는 화장, 옷차림에 신경 쓰기 시작했고, 연기 기술을 향상시키고 힌디어 구사 능력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3개월 동안 노력했다. 체중 감량을 위해 영양가 있는 식단을 따르고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했으며 요가를 연습했고, 나중에는 신체 단련을 홍보하는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다. 칼리드 모하메드에 따르면, "그녀의 스크린 속 인물과 연기 스타일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자 관객들은 감탄했다." 레카는 영화 역할을 더욱 신중하게 선택하기 시작했다.
레카의 첫 연기 지향적인 역할은 1976년 두 안자네에서 아미타브 바찬의 야심 많고 탐욕스러운 아내 역을 맡으면서 찾아왔다. 이 영화는 그녀가 바찬과 함께 출연한 여러 작품 중 첫 번째였다. (그들은 1973년 나막 하람에도 함께 출연했지만, 레카는 라제시 칸나와 짝을 이루었다.) 그녀는 바찬 캐릭터의 아내인 레카 로이 역을 맡아 유명한 배우가 된다. 촬영은 콜카타에서 한 달 안에 끝났고, 레카와 다른 출연진, 제작진은 그랜드 호텔에 머물렀다. 니하르 란잔 굽타의 소설 라트리르 야트리를 각색한 이 영화는 둘랄 구하가 감독하고 나벤두 고시가 각본을 썼으며, 관객과 비평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필름 월드는 그녀가 힌디어 영화계의 주연 여배우로서 자신을 증명했으며, 영화 제작자들이 그녀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영화에 캐스팅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녀는 바찬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하며, 그가 영화에서 자신과 함께 출연한다는 것을 알고 편집증을 느꼈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성인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를 "이전에 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1977년은 레카가 3년 연속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해였다. 액션 범죄 영화 쿤 파시나는 그 해 인도 영화 중 여섯 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렸다. 같은 해, 그녀는 비노드 칸나와 나디라와 함께 코미디 드라마 아프 키 카티르에 출연했다. 가난한 소녀 역을 맡은 그녀는 여러 영화 기자 협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더 힌두의 회고적 평론에서 스포츠 기자이자 영화 평론가 비제이 로카팔리는 레카의 역할이 그녀에게 도전적이었으며 칸나와의 케미스트리를 높이 평가했다. 링크 평론가는 영화의 사회적 주제를 칭찬했다. 필름 월드는 혼합적인 비평을 받은 액션 영화 임만 다람에서의 연기로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타밀인 노동자 두르가 역을 맡아 도둑 모한 쿠마르-삭세나 (샤시 카푸르)와 사랑에 빠진다. 시네 블리츠는 레카가 연기 재능을 증명했다고 칭찬했다.
2.2. 전환점과 스타덤 (1978-1984)
레카의 전환점은 1978년 사회 드라마 가르에서 강간 피해자 역을 맡으면서 찾아왔다. 그녀는 갓 결혼한 여성 아르티 역을 맡아 집단 강간을 당한 후 심각한 외상을 입는다. 이 영화는 그녀의 캐릭터가 남편 (비노드 메라)의 도움을 받아 고통과 싸우는 과정을 다룬다. 이 영화는 그녀의 첫 번째 주목할 만한 이정표로 여겨졌으며, 그녀의 연기는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다. 디네시 라헤자는 "가르는 성숙한 레카의 등장을 알렸다. 그녀의 전형적인 활기참은 매우 현실적인 묘사로 대체되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필름페어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처음으로 올랐다. 같은 해, 그녀의 또 다른 개봉작인 무카다르 카 시칸다르는 그 해의 최대 히트작이자 10년 중 가장 큰 히트작 중 하나로 떠올랐고, 레카는 이 시기 가장 성공적인 여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영화는 긍정적인 비평을 받았고, 타와이프 (인도의 고급 매춘부) 조라바이 역을 맡은 레카의 짧은 출연은 그녀에게 필름페어상 여우조연상 후보 지명을 안겨주었다. 더 트리뷴의 M. L. 다완은 그녀의 "타오르는 듯한 강렬함"을 언급했다. 레카는 이 시기를 자기 발견의 시기라고 회상했다. 그 해의 다른 영화로는 카르마요기가 있다.
두 안자네 이후, 그녀의 공동 주연인 아미타브 바찬과의 염문설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 영화 제작자들은 이를 자신들의 영화를 홍보할 기회로 보았고, 미스터 나트와르랄과 수하그 (모두 1979년 개봉작으로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에서 그들의 alleged affair를 스크린에서 활용했다. 콜카타를 배경으로 한 액션 로맨스 미스터 나트와르랄에서 레카는 순박한 시골 여성 샤누 역을 맡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수하그는 무카다르 카 시칸다르처럼 그녀를 고급 매춘부로 등장시켰고, 그 해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이후 2년은 더욱 성공적이었다. 1980년, 레카는 흐리시케시 무케르지의 코미디 영화 쿱수라트에 출연했다. 특히 그녀를 위해 쓰여진 이 역할에서 그녀는 최근 결혼한 언니를 방문하여 엄격한 집안의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으려 노력하는 활기찬 젊은 여성 만주 다얄 역을 맡았다. 레카는 자신의 캐릭터의 활기찬 성격에 쉽게 공감하며, 그것이 "나와 꽤 비슷하다"고 말했다. 쿱수라트와 레카의 연기는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영화는 재정적으로 성공했다. 필름페어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필름페어상 최우수 영화상을 수상했고, 레카는 첫 필름페어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더 트리뷴은 레카의 "활기찬 연기"가 영화에 "자연스러운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칭찬했다. T. 라마 라오가 감독한 망 바로 사자나와 주다이, 그리고 사완 쿠마르 탁의 사잔 키 사헬리는 그 해 그녀에게 더 많은 비평적 관심을 가져다주었다.
레카와 아미타브 바찬의 alleged love affair는 야시 초프라의 로맨틱 드라마 실실라에서 함께 출연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의 가장 스캔들 많았던 공동 출연작으로, 언론의 소문을 반영했다. 레카는 바찬의 연인 역을 맡았고, 바찬의 실제 아내인 자야 바찬은 그의 아내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80년부터 1981년까지 비밀리에 촬영되었으며, 초프라는 언론의 촬영장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실실라는 많은 언론인들에게 "캐스팅의 묘미"로 여겨졌으며, 이는 레카와 바찬의 마지막 협업이었다. 이 영화는 1981년 7월에 개봉하여 비평적, 상업적으로 실패했으며, 초프라는 이를 캐스팅 탓으로 돌리며 관객의 관심이 줄거리가 아닌 소문에만 집중되었다고 느꼈다. 인디아 투데이의 수닐 세티는 레카가 "아미타브 바찬의 지루한 남성 우월주의만큼이나 인위적"이라고 평했다. 그 해 그녀가 출연한 다른 영화로는 라메시 탈와르의 바세라와 T. 라마 라오의 엑 히 불 (1981년 타밀 영화 모우나 기탄갈의 리메이크)이 있으며, 둘 다 흥행에 성공했다. 그녀는 1982년 지반 다라에서 대가족의 유일한 생계 유지자인 젊은 미혼 여성 역을 맡아 또 다른 필름페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시기 동안 레카는 주류 영화에서 주어진 역할의 범위를 넘어 자신의 연기 폭을 넓히고자 했고, 인도 신사실주의 예술 영화 운동인 평행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들 영화에는 칼리유그(1981), 움라오 잔(1981), 비제타(1982), 우차브(1984), 이자자트(1987)가 포함된다. 움라오 잔은 미르자 하디 루스와의 우르두어 소설 움라오 잔 아다(1905)를 영화로 각색한 작품으로, 1840년대 러크나우의 시인이자 고급 매춘부인 움라오 잔 역을 맡았다. 호화로운 제작비가 투입된 이 영화는 아미란이라는 소녀가 납치되어 매춘굴에 팔려간 어린 시절부터, 수년 후 사랑과 다른 시련 속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인기 있는 고급 매춘부로서의 삶을 다룬다. 역할을 준비하면서, 경력 초기에 힌디어를 구사하지 못했던 레카는 우르두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배우는 과제를 맡았다. 레카는 자신의 연기로 폭넓은 찬사를 받았으며, 이는 이후 그녀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일러스트레이티드 위클리 오브 인도의 발루 바라탄은 그녀의 "탐험되지 않은 연기력의 비축량"에 대해 썼다. 그녀는 내셔널 필름 어워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또 다른 필름페어상 후보에 올랐으며, 필름페어는 나중에 이를 볼리우드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연기 중 하나로 평가했다. 그녀는 나중에 이 영화가 전환점이었다고 주장했다.
예술 영화에서의 그녀의 작품 중 샴 베네갈의 칼리유그는 인도 신화 마하바라타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경쟁하는 기업 집단 간의 전형적인 갈등으로 묘사된다. 레카의 역할 수프리야는 드라우파디를 기반으로 한다. 베네갈은 쿱수라트에서 그녀의 연기를 본 후 그녀를 캐스팅했으며, 그녀가 "매우 열정적이고,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매우 진지하다"는 점을 주목했다. 비평가이자 작가 비제이 나이르는 그녀의 연기를 "현대 드라우파디에 대한 능숙한 해석"이라고 묘사했다. 마두 트레한은 그녀가 "지성, 강인함, 그리고 어린 시동생에 대한 간신히 억눌린 갈망을 가진 여성" 역을 "흠잡을 데 없이" 연기했다고 칭찬했다. 1982년 성장 영화 비제타에서 그녀는 결혼 문제로 고통받으며 미래 계획을 정하지 못한 채 결국 인도 공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한 사춘기 아들을 부양하려 애쓰는 닐리마 역을 맡았다. 그녀는 이후 이 역할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역할 중 하나로 꼽았다.
기리시 카르나드의 에로틱 드라마 우차브는 4세기 산스크리트어 연극 므리차카티카를 기반으로 하며, 그녀는 고급 매춘부 바산타세나 역을 맡았고, 이 연기로 벵골 영화 기자 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 (힌디어)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선정성과 레카의 친밀한 장면으로 인해 광범위한 보도를 끌어모았는데, 그녀는 이를 당시 신인 여배우들과 경쟁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우차브는 대본과 연출 면에서 관객과 영화 평론가 모두에게 극과 극의 반응을 얻었지만, 그녀의 연기와 의상은 호평을 받았다. 아시아위크의 한 평론에서는 레카가 "빛나는 보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2003년, 마이틸리 라오는 "레카는 고대 힌두 인도든 19세기 무슬림 러크나우든 고급 매춘부 역할에 항상 첫 번째 선택이었으며, 조각상 같은 관능미를 지녔다..."라고 썼다. 굴자르의 드라마 이자자트에서 레카와 나시루딘 샤는 이혼한 부부로 출연하며, 수년간의 별거 끝에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나 결혼 생활과 결국 이혼하게 된 갈등을 함께 회상한다.
2.3. 1980년대 중반: 부침과 재기 (1985-1989)
평행 영화 외에도 레카는 점점 더 도전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여주인공 중심의 복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초기 여배우 중 한 명이었으며, 그 첫 번째 작품은 1988년의 쿤 바리 망이었다. 라케시 로샨이 레카를 염두에 두고 특별히 제작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부유하고 소박한 과부 아르티 삭세나 역을 맡았는데, 그녀는 교활한 두 번째 남편의 살인 시도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죽은 것으로 위장한 후 숨겨진 신분으로 복수를 꾀한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두 번째 필름페어상을 수상했다. 레카는 쿤 바리 망을 "처음이자 유일하게 내가 완전히 집중하고 이해한 영화"라고 묘사했다. 더 트리뷴의 M. L. 다완은 1988년의 유명한 힌디어 영화를 기록하면서 쿤 바리 망이 "레카에게는 영광의 왕관과 같았으며, 그녀는 불사조처럼 솟아올라 대담함으로 관객을 매료시켰다"고 언급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힌디어 영화 백과사전은 이 영화에서의 그녀의 역할을 힌디어 영화의 기억에 남는 여성 캐릭터 중 하나로 꼽으며, "항상 용서하는 아내의 인식을 복수심에 불타는 천사로 바꾸었다"고 언급했다. 스크린 잡지의 유사한 목록에서 이 역할은 "힌디어 영화 여주인공을 자랑스럽게 만든 10가지 기억에 남는 역할" 중 하나로 포함되었다.
이후 인터뷰에서 레카는 이 역할로 필름페어상을 받은 것이 놀라움이자 작은 휴식을 취하고 젊은 스타들에게 가려진 후 자신에게 확신과 인정을 준 전환점이었다고 언급했다. "영화계의 모든 찬사는 나에게 영감을 주었고, 내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최선을 다할 준비가 더욱 되었고, 이것이 나의 소명이며, 내 연기를 통해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바로 그때 알았다."
2.4. 1990년대: 경력 변화와 부흥
1990년대에는 레카의 성공이 감소했다. 그녀의 영화 중 성공적인 작품은 거의 없었고, 많은 역할이 평론가들에게 비난받았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그녀가 헤마 말리니나 라키와 같은 동세대 여배우들과 달리 어머니나 이모와 같은 캐릭터 역할에 굴복하지 않고, 젊은 여배우들이 명성을 얻는 시기에도 여전히 주연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1990년대 첫 해에는 메라 파티 시르프 메라 하이와 아미리 가리비를 포함한 네 편의 레카 출연작이 개봉되었지만, 모두 주목받지 못했다. 남편의 최근 자살과 그로 인한 언론의 적대감에 여전히 시달리던 레카는 K. C. 보카디아의 풀 바네 앙가레이(1991)에서 남편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경찰에 입대하는 젊은 여성 남라타 싱 역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레카는 이 역할로 필름페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수바시 K. 자는 "카키색이 이렇게 섹시해 보인 적이 없었다"고 평했다. 인디언 익스프레스는 그녀가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풀 (꽃)이 되어 앙가레이 (불타는 석탄)가 되는 제목에 충실했다"고 썼다.
풀 바네 앙가레이와 쿤 바리 망에 대한 대중의 수용은 여러 영화 제작자들이 레카에게 유사한 제안을 하도록 이끌었고, 그녀는 이후 여러 프로젝트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천사"로 불리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 영향은 훨씬 덜했다. 여기에는 그녀의 다음 영화 인사프 키 데비(1992)와 이후 압 인사프 호가(1995), 우단(1997)과 같은 영화가 포함되는데, 이들 모두 크게 실패했다. 그녀는 샤크티 사만타의 기탄잘리에서 지텐드라와 함께 쌍둥이 자매의 이중 역할을 맡았고, 흥행에 실패한 마담 X에서는 경찰이 여성 지하 세계 보스를 사칭하도록 고용한 젊은 여성 역을 맡았다.
1990년대 중반, 레카는 카마수트라: 사랑 이야기와 킬라디욘 카 킬라디(1996)를 포함한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하락세를 멈출 수 있었다. 미라 나이르가 감독한 외국 제작 영화인 카마수트라는 에로틱 드라마였고, 많은 사람들은 영화에서 카마수트라 교사 역을 맡은 그녀의 역할이 경력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버라이어티의 토드 매카시는 그녀를 "정교하게 침착한" 연기를 선보였다고 묘사했다. 우메시 메라가 감독한 액션 영화 킬라디욘 카 킬라디는 큰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해 최고 흥행 인도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레카는 미국에서 불법 레슬링 경기를 운영하는 사악한 갱스터 여성 마담 마야 역으로 첫 악역을 맡았으며, 영화 진행 중 훨씬 어린 악샤이 쿠마르와 로맨스를 펼친다. 그녀의 연기는 필름페어상 여우조연상과 스타 스크린 어워드 최우수 악역상을 포함한 여러 상을 수상했다. 팬과 비평가 모두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연기가 개인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며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다.
당시 또 다른 논란의 영화는 1997년의 아스타: 봄의 감옥에서였다. 바수 바타차리야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로 제작한 이 영화에서 레카는 매춘부로 이중 생활을 하는 주부 역을 맡았다. 다시 한번 그녀는 역할의 성격과 영화 속 일부 노골적인 사랑 장면으로 인해 언론과 관객의 일부 비판을 받았다. 그녀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사람들은 내 역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나는 어떤 역할을 맡는 데도 문제가 없다. 나는 어떤 역할이든 소화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어머니 역할이든, 시누이 역할이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선정적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녀의 연기는 긍정적인 평가와 스타 스크린 어워드 후보 지명을 받았으며, 인디아 투데이는 그녀의 연기를 "수년 만에 최고의 연기"라고 언급했다. 그녀는 이어서 킬라(1998)와 마더(1999)에 출연했다.
2.5. 2000년대 이후: 캐릭터 역할과 특별 출연
2000년대에 레카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T. 라마 라오가 감독한 불란디로 2000년대를 시작했다. 또 다른 작품은 칼리드 무함마드의 주베이다로, 카리스마 카푸르와 마노지 바지파이가 공동 주연을 맡았으며, 레카는 왕의 첫 번째 아내인 만디라 데비 마하라니 역을 맡았다.

2001년, 레카는 라지쿠마르 산토시의 페미니스트 드라마 라자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2년 전 바와니푸르에서 발생한 여성 강간 사건을 바탕으로 한 앙상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도망친 아내 (마니샤 코이랄라)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녀가 머무는 세 곳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세 개의 주요 장으로 펼쳐낸다. 레카는 영화의 영감이 된 마지막 장의 주인공으로, 억압받는 달리트 마을 여성 사회 운동가인 람둘라리 역을 맡아 집단 강간의 피해자가 된다. 영화에 대해 레카는 "나는 라자이고 라자가 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연기는 높은 찬사를 받았으며, 필름페어상 여우조연상과 국제 인도 영화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포함한 여러 상 후보에 올랐다. 타란 아다르시는 "레카가 영광을 차지했으며, 최근 인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던 가장 뛰어난 연기 중 하나를 선보였다"고 썼다.
라케시 로샨의 공상 과학 영화 코이... 밀 가야에서 레카는 발달 장애를 가진 젊은 남자 (흐리티크 로샨)의 싱글 어머니인 소니아 메라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재정적, 비평적으로 성공했으며 그 해 가장 인기 있는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는 필름페어상 최우수 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레카는 자신의 연기로 또 다른 필름페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칼리드 모하메드는 그녀의 연기를 "능숙하게 절제되었다"고 평했다.
2005년, 레카는 프라딥 사르카르의 파리니타에서 "카이시 파헬리 진다기니"라는 노래와 관련된 아이템 넘버에 특별 출연했다. 바치케 레나 레 바바(2005)에서 레카는 조카와 함께 사기를 쳐 남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사기꾼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비평적으로 크게 실패했다. 미드데이는 "레카가 왜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선택했는지 의문"이라며, 그녀가 "나쁜 대사, 끔찍하게 두꺼운 화장, 저속한 스타일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2006년에는 네 명의 여성 친구들과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다룬 저평가된 섹스 코미디 쿠디욘 카 하이 자마나에 출연했다. 신랄한 평론에서 인두 미라니는 "레카는 마치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을 것처럼 과장된 연기를 펼쳤다"고 지적했다. 2007년 데일리 뉴스 앤 애널리시스의 기사에서 비평가 디파 갈로트는 레카에게 "바치케 레나 레 바바나 쿠디욘 카 하이 자마나 같은 영화를 한 편 더 찍으면 디바의 위상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으니 영화를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2006년, 그녀는 라케시 로샨의 코이... 밀 가야의 속편인 크리쉬에서 소니아 메라 역을 다시 맡았다. 이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이야기는 20년 후로 진행되며, 아들 로히트의 죽음 이후 홀로 키운 소니아의 손자 크리슈나 (흐리티크 로샨이 다시 연기)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진다. 크리쉬는 그 해 두 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가 되었고, 전편과 마찬가지로 블록버스터로 선언되었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레카의 연기는 조연 부문에서 또 다른 필름페어상 후보 지명을 받았다. 버라이어티의 로니 샤이브는 그녀가 "양육하는 할머니 역할에 깊이를 더했다"고 언급했다.

2007년, 그녀는 고탐 고세의 야트라에서 다시 한번 고급 매춘부 역을 맡았다. 경력 초기에 이러한 역할을 맡아 성공을 거두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영화가 잘 되지 않았다. 2010년, 레카는 인도 정부가 수여하는 네 번째로 높은 민간인 훈장인 파드마 시리를 수상했다.
레카는 2010년 영화 사디얀에 헤마 말리니와 리시 카푸르와 함께 출연했다. 이 영화는 샤트루간 신하의 아들 러브 신하의 데뷔작이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2014년, 레카는 아비셰크 카푸르의 피투르에 출연 중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영화를 떠났고 이후 타부가 그녀의 대역으로 계약되었다. 2014년 그녀는 디왈리 (10월 24일)에 개봉된 슈퍼 나니에도 출연했다. 슈퍼 나니는 가족 드라마로, 할머니 (레카)가 자녀와 남편 란디르 카푸르에게 인정받지 못하다가 손자 샤르만 조시가 그녀를 변화하도록 설득한다. 할머니는 '변신'하여 매력적인 모델이 된다.
2015년, 그녀는 R. 발키의 샤미타브에 출연하여 자신을 연기했다.
2.6. 주요 작품
레카의 경력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대표적인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 인티 구투 (1958): 한 살 때 출연한 텔루구어 드라마로, 그녀의 첫 스크린 데뷔작이다.
- 랑굴라 라트남 (1966): 정치 풍자 영화로, 아역 배우로서의 초기 활동을 보여준다.
- 오퍼레이션 잭팟 날리 C.I.D 999 (1969): 그녀가 주연을 맡은 첫 칸나다어 영화이다.
- 사완 바돈 (1970): 힌디어 데뷔작으로, 그녀를 떠오르는 스타로 만들었다.
- 두 안자네 (1976): 아미타브 바찬과 첫 공동 주연을 맡은 영화로, 그녀의 연기 지향적인 역할의 시작을 알렸다.
- 가르 (1978): 강간 피해자 역을 맡아 비평가와 관객의 찬사를 받았으며, 그녀의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무카다르 카 시칸다르 (1978): 그 해의 최대 히트작 중 하나로, 고급 매춘부 역으로 필름페어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 쿱수라트 (1980): 코미디 영화로, 활기찬 여성 만주 다얄 역을 맡아 첫 필름페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실실라 (1981): 아미타브 바찬, 자야 바찬과 함께 출연한 로맨틱 드라마로, 세 배우의 실제 염문설을 반영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 움라오 잔 (1981): 고급 매춘부 역을 맡아 내셔널 필름 어워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그녀의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꼽힌다.
- 칼리유그 (1981): 샴 베네갈 감독의 평행 영화로, 현대판 마하바라타를 각색한 작품이다.
- 비제타 (1982): 성장 영화로, 결혼 문제와 아들의 성장을 지지하는 어머니 역을 맡았다.
- 우차브 (1984): 에로틱 드라마로, 고급 매춘부 역을 맡아 선정적인 장면으로 논란이 되었지만 연기력은 호평받았다.
- 이자자트 (1987): 굴자르 감독의 드라마로, 이혼한 부부의 재회를 다룬다.
- 쿤 바리 망 (1988): 여성 중심의 복수 영화 트렌드를 이끈 작품으로, 두 번째 필름페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풀 바네 앙가레이 (1991): 경찰관 역을 맡아 흥행에 성공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 카마수트라: 사랑 이야기 (1996): 미라 나이르 감독의 국제적인 에로틱 드라마로, 논란이 되었지만 연기력은 찬사를 받았다.
- 킬라디욘 카 킬라디 (1996): 첫 악역을 맡아 필름페어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 아스타: 봄의 감옥에서 (1997): 주부이자 매춘부 역을 맡아 논란이 되었지만, 그녀의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 라자 (2001): 페미니스트 드라마로, 억압받는 여성의 역을 맡아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 코이... 밀 가야 (2003): 공상 과학 영화로, 발달 장애 아들을 둔 어머니 역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 크리쉬 (2006): 코이... 밀 가야의 속편으로, 그녀의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3. 개인 생활 및 영화 외 활동
레카의 개인적인 삶은 그녀의 결혼과 사생활, 대중적 이미지, 그리고 영화 외 활동으로 구성된다.
3.1. 결혼과 사생활
1990년, 레카는 델리 기반의 기업가인 무케시 아가르왈과 결혼했다. 아가르왈은 주방용품 브랜드 '핫라인'의 소유주이자 자수성가한 기업가였다. 그는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레카의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녀는 결혼 후에야 그의 정신 건강 문제를 알게 되었다. 그는 상호 친구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비나 라마니를 통해 레카에게 소개되었는데, 라마니는 그를 레카의 '열렬한 팬'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결혼은 1990년 3월 4일에 이루어졌고, 몇 달 후 레카가 런던에 있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자살로 사망했으며, "아무도 탓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 당시 그녀는 언론의 맹비난을 받았고, 한 언론인은 이 시기를 "그녀의 삶에서 가장 깊은 수렁"이라고 표현했다. 바와나 소마야는 "여배우에 대한 강한 반대 물결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고, 어떤 이들은 살인자라고 불렀다"고 언급했지만, 곧 "레카는 다시 한번 흠잡을 데 없이 그 그림자에서 벗어났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1973년 배우 비노드 메라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2004년 시미 가레왈과의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메라를 "친한 지인"이라고 언급하며 결혼 사실을 부인했다. 레카는 현재 뭄바이의 반드라에 있는 자택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아미타브 바찬과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유명했는데, 바찬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이 소문은 그들이 두 안자네에서 처음 함께 연기한 후 시작되었고, 나중에 실실라에서 절정에 달했다.
비평가들은 레카가 힌디어와 연기력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언급했으며, 언론은 종종 그녀가 1970년대 초 "통통한"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어떻게 변모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레카는 이러한 변모의 공로를 요가, 영양가 있는 식단, 그리고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에 돌렸다. 1983년, 그녀의 식단과 요가 연습은 "레카의 마음과 몸의 사원"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레카는 자녀가 없으며, 자녀가 없는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스스로 락토-오보 채식주의자라고 선언했다.
3.2. 대중적 이미지와 평판
레카는 대중의 시선을 피하는 경향으로 인해 신비롭고 은둔적인 이미지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는 그레타 가르보와 비교되기도 했다. 힌두스탄 타임스는 레카가 "자신의 삶을 흥미로운 가르보 같은 미스터리로 감싸고 있다"고 주장했다. 레디프닷컴에 따르면, "레카의 은둔적인 성격은 그녀 주변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레카는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으며, 파티나 행사를 대부분 피한다. 한때 자신의 신비로운 이미지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녀는 이를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러 차례 부인했다. "무슨 미스터리인가? 언론이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며 극도로 사적인 사람일 뿐이다." 2003년 레카를 방문했던 영화 저널리스트 아누파마 초프라는 타블로이드가 그녀를 "음탕한 남자들과 외로움에 의해 비틀린 은둔적인 여성"으로 묘사했지만, 실제 레카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니었고", 그녀를 "수다스럽고 호기심 많으며, 흥분하고 활기차며, 명랑하고 거의 불법적으로 낙천적"이라고 묘사했다.
3.3. 정치 활동
2012년, 레카는 인도 의회의 상원인 라자 사바의 인도 의회 의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녀는 인도 헌법 제80조에 따라 (대통령이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12명의 의원을 지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항) 예술 분야에 기여한 공로로 프라티바 파틸 인도 대통령에 의해 만모한 싱 인도 총리의 추천을 받아 임명되었다. 그녀의 임기는 2012년 4월 27일에 시작하여 2018년 같은 날에 종료되었다. 그녀는 소비자 문제, 식량 및 공공 분배 위원회에 참여했지만, 다른 지명된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낮은 출석률과 의회에서의 최소한의 참여 (법안 발의나 질문 제기 부족)로 인해 6년 임기가 비판 속에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이전에 레카와 다른 지명된 의원들의 재임 기간 동안 제기된 바 있지만, 여러 선출된 의원들은 지명된 의원들의 적극적인 출석이 의무적이지 않으며 그들이 자신의 직책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옹호했다.
4. 예술성과 이미지
레카의 영화 산업에서의 위상은 수년간의 변화, 스크린 속 페르소나, 그리고 연기력에 비추어 논의되어 왔다.
4.1. 외모 및 연기 변신

더 트리뷴에 글을 쓴 무케시 코슬라는 그녀가 사완 바돈의 "낄낄거리는 시골 아가씨"에서 "인도 최고의 여배우 중 한 명"으로 변모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힌두스탄 타임스는 그녀의 신체적 변화와 체중 감량을 "영화와 아마도 실제 삶에서 가장 극적인 변신 중 하나"라고 묘사하며, "레카는 과체중의 어둡고 평범한 소녀에서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변모했다"고 주장했다. 비평가 오마르 쿠레시는 "디바라는 용어(인도에서)는 레카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카마수트라(1997)를 연출한 미라 나이르는 그녀를 "자미니 로이의 그림"에 비유하며, "마릴린 먼로가 섹스의 대명사이듯, 레카는 카리스마의 대명사"라고 말한다. 영화 제작자 산자이 릴라 반살리는 그녀를 "위대한 스타들의 마지막"이라고 부른다.
4.2. 연기력과 카리스마

뛰어난 연기력으로 존경받는 레카는 비평가들에 의해 힌디어 영화계의 가장 뛰어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아 왔다. 필름페어는 그녀의 연기 스타일에 대해 "스타일, 섹시함, 또는 순수한 스크린 속 존재감 면에서 그녀는 비할 데가 없다"고 썼으며, 그녀가 "억제되지 않은 솔직함을 지닌 맹렬하고 날것의, 강렬한 연기자이다. 그녀의 연기는 기교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비평가 칼리드 모하메드는 그녀의 기술적 통제력을 칭찬한다. "그녀는 어떻게 주고 어느 정도까지 주어야 하는지 안다. 그녀는 감독이 되기 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그녀의 통제력에는 일종의 취약성이 있다. 그녀는 연기할 때 탐구한다." 두 편의 영화에서 그녀를 감독한 샴 베네갈은 그녀가 "감독의 배우"라고 믿는다. 더 트리뷴의 M. L. 다완은 "레카의 연기자로서의 개화는 가르와 쿱수라트 이후 절정에 달했으며, [...] 움라오 잔에서 비극적인 고급 매춘부로서 그녀는 훌륭한 예술적 연기를 선보이며, 매우 존경받는 허스키하고 절망적인 어조를 채택했다. 레카는 섬세하게 치켜든 눈썹으로 많은 것을 전달했다"고 썼다. 2010년, 필름페어는 그녀의 두 연기-쿱수라트(1980)와 움라오 잔(1981)-를 "80개의 상징적인 연기" 목록에 포함시켰다. 후자의 작품은 포브스 인도의 "인도 영화 25대 위대한 연기" 목록에도 포함되었다. 2011년, 레디프닷컴은 그녀를 역대 아홉 번째로 위대한 인도 여배우로 선정하며, "레카의 긴 경력이나 자신을 재창조하는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남성의 일을 맡아 놀랍도록 잘 해냈고, 모든 최고 배우들과 맞서 기억되었다"고 언급했다. 2023년, 라지브 마산드는 인디아 투데이의 유사한 목록에 그녀를 포함시켰다.
전문 경력에서의 성과에 대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레카의 대중적 이미지는 종종 그녀의 사생활과 관계에 대한 추측과 함께 언론에 얽혀 있었다. 대중의 시선을 피하는 경향으로 알려진 레카는 신비롭고 은둔적인 이미지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는 그레타 가르보와 비교되기도 했다. 힌두스탄 타임스는 레카가 "자신의 삶을 흥미로운 가르보 같은 미스터리로 감싸고 있다"고 주장한다. 레디프닷컴에 따르면, "레카의 은둔적인 성격은 그녀 주변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레카는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으며, 파티나 행사를 대부분 피한다. 한때 자신의 신비로운 이미지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녀는 이를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러 차례 부인했다. "무슨 미스터리인가? 언론이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며 극도로 사적인 사람일 뿐이다." 2003년 레카를 방문했던 영화 저널리스트 아누파마 초프라는 타블로이드가 그녀를 "음탕한 남자들과 외로움에 의해 비틀린 은둔적인 여성"으로 묘사했지만, 실제 레카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니었고", 그녀를 "수다스럽고 호기심 많으며, 흥분하고 활기차며, 명랑하고 거의 불법적으로 낙천적"이라고 묘사했다.
5. 유산과 평가
레카의 활동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녀의 업적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5.1. 수상 및 영예
레카는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 파드마 시리 (2010): 인도 정부가 수여하는 네 번째로 높은 민간인 훈장이다.
- 내셔널 필름 어워드 여우주연상: 움라오 잔 (1981)
- 필름페어상:
- 여우주연상: 쿱수라트 (1980), 쿤 바리 망 (1988)
- 여우조연상: 킬라디욘 카 킬라디 (1996)
- 평생 공로상 (2012년 국제 인도 영화 아카데미상에서 "인도 영화에 대한 뛰어난 공헌 (여성)" 상으로도 불림)
- 벵골 영화 기자 협회상 여우주연상: 우차브 (1984)
- 스타 스크린 어워드 최우수 악역상: 킬라디욘 카 킬라디 (1996)
- 그 외 후보 지명: 필름페어 여우주연상 (가르, 지반 다라), 필름페어 여우조연상 (무카다르 카 시칸다르, 무제 인사프 차히예, 라자, 코이... 밀 가야, 크리쉬), 국제 인도 영화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라자), 스타 스크린 어워드 (아스타: 봄의 감옥에서).
5.2. 비평적 평가
레카는 연기력의 다양성과 자신을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능력으로 전반적인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외모와 연기력 모두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은둔적인" 이미지는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그녀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신비롭고 매력적인 존재로 각인되었다. 전반적으로 레카는 인도 영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5.3. 영향력
레카는 힌디어 영화에서 여성의 묘사 개념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영화 제작자들이 그녀를 강한 여성 역할(예: "복수심에 불타는 천사")에 캐스팅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그녀의 스타일은 유행을 선도했으며 (예: 쿱수라트의 드레스, 쿤 바리 망의 의상), 이는 당시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요가와 피트니스에 관한 책을 출판하여 대중의 건강한 삶에도 기여했다. 그녀의 사생활과 대중적 이미지는 상당한 언론의 관심과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그녀의 전설적인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녀의 삶은 여러 전기 작가들의 주제가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모한 딥의 유레카!: 레카의 친밀한 삶 이야기(1999)와 야세르 우스만의 레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2016)가 있다.
6. 외부 링크
- [https://www.imdb.com/name/nm0004334/ 레카 (IMDb)]
- [https://www.bollywoodhungama.com/celebrity/rekha/ 레카 (볼리우드 훙가마)]